<주님, 일어나소서>
主
[라]Exsurge, Do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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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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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파문 칙서를 불태우는 루터.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1513~1521)가 루터 (M.Luther, 1483~1546)를 이단자로 파문한 칙서(bulla) . 이 칙서에는 루터의 설교와 토론 그리고 저서에서 뽑 아 낸 41개 항목의 단죄 명제를 담고 있다. 라틴어로 작 성된 이 칙서의 제목이자 첫 구절인 '엑수르제 도미네' (Exsurge, Domine)는 시편의 "일어나소서, 하느님, 당신 송사를 판결하소서" (74, 22)에서 인용한 것이다. [배 경] 교황청은 루터의 <95개조 명제>로 일어난 독 일 교회의 내분이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와 대사 설교가인 테철(J. Tetzel, 1465~1519)의 도미니코회 사이의 논쟁으로 간주하여 1518년 3월 3일 아우구스티 노 은수자회의 차기 총장으로 지명된 볼타(Gabriel della Volta)에게 루터가 더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지시하 였다. 그러나 독일 관구장인 슈타우피츠(J. von Staupitz, 1468/1469~1524)의 자부적(慈父的) 충고는 결실을 거두 지 못하였고, 오히려 같은 해 4월과 5월에 소집된 독일 관구 총회에서 루터는 신학 토론을 통해 개혁 신학자로 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6월 중순에 교황 레오 10세는 교황청 신학 자문이며 검열관인 프리 에라스(S. Prieras, 1456~1523)에게 루터의 주장에 대한 의 견서를 작성하도록 하였고, 교황궁무처의 청취관인 지누 치(G. Ginucci)에게 루터의 로마 청문회 준비를 지시하였 다. 그리고 독일 제국 의회에 교황 특사로 파견된 가예타 노(Thomas del Vio Cajetanus, 1468/1469~1534) 추기경에게 두 차례(8월 23일, 9월 11일)에 걸쳐 교서를 보내어 루터 를 심문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청문회(10월 12~14일)에서 가예타노는 그동안 루터가 제시한 대사(大赦) 교황권, 공의회, 속죄에 관한 견해를 분석하여 오류로 판단한 내용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주관적 성서관에 따라 거부하였다. 11월 9일 가예타노가 초안한 대사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하는 교황 칙서 <쿰 포스트괌>(Cum postquam)이 발표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루터는 공의회 소집을 호소하였다. 1519년 1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 누스 1세(1493~1519)가 사망하자 교황청은 차기 황제 선출에 개입하여 루터 소송은 거의 1년 동안 중지되었고, 이는 루터의 운동이 독일에서 뿌리를 내리는 기회가 되었다. 6월에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을 거부하는 논문 <교 황권에 관한 제13 명제에 대한 해설>을 통해서 교황청에 첫 도전장을 냈다.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공개 토론 (6월 27일~7월 16일)에서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교의 신학 교수인 에크(J. Eck, 1486~1543)에게 이단자로 몰리면서도 교황의 수위권(首位權)과 공의회의 무류성(無 謬性)을 부인하고,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원천으로 주장하며 성서 해석의 교회 최고 교도권을 더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토론 이후인 8월 30일에 쾰른 대학교의 교수들 은 루터의 견해를 비판하는 문서를 교황청에 전달하였고, 11월 7일에는 루뱅 대학교의 교수들이 루터를 단죄 하는 의견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교황에게 적대적인 독일의 분위기에서 '반(反)그리스 도' 와 싸우는 소명을 받은 독일의 영웅이며 대변자로 처신하였다. 그리고 설교와 저술을 통해서 전통적인 교회론, 성사론, 구원론을 공격하였고, 1518년부터 마음에 품어 왔던 '반그리스도' 를 교황에게 적용하면서 교회에서 이탈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1520년 2월 교황청은 황제 선출이라는 정치 일정으로 지연되었던 루터 소송 절차를 재개하였다. 로마에서 신 학자인 가예타노 추기경과 교회법학자이며 교황 문서 작 성 담당자인 아콜티(P. Accolti, 1454~1532) 추기경의 사회 로 세 차례에 걸친 위원회가 구성되어, 쾰른 대학교와 루 뱅 대학교에서 보내 온 단죄 문서를 참고하여 루터의 주 장에 대한 심사에 착수하였다. 2월 1일에 첫 위원회가 두 추기경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로 구성되어 루터의 주장을 조사하려고 하였으나,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들 이 심사 능력을 갖추지 못해 가예타노 추기경의 제의로 2월 11일 수도자들 대신에 루터의 견해를 반박하였던 프리에라스와 엠세르(H. Emser, 1478~1527)가 참가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가예타노의 주도로 위원회는 루터 의 견해를 분별 없이 철저하게 단죄하기보다는 합리적이 며 온건한 자세로 검토하였다. 따라서 일방적 단죄에 앞 서 위원회는 슈타우피츠에게 루터를 설득하여 교회의 가 르침에 어긋나는 견해를 취소하도록 요청하였다. 3월 중 순 에크가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에게 루터 사건이 심각 하다고 보고하고 난 뒤 4월 말에 세 번째 위원회가 구성 되었다. 에크가 중요한 역할을 한 위원회는 루터의 주장 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41개 항목의 이단 교리가 담긴 단 죄 칙서 초안을 작성하여 추기경 회의에 제출하였다. 추 기경 회의는 네 차례(5월 21일, 23일, 25일, 6월 1일)에 걸쳐 칙서의 초안을 검토한 후 통과시켜 6월 15일에 반포 하였다. [내 용] 칙서는 첫 부분에서 멧돼지가 숲에서 나와(시 편 80, 13)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와 그 후계자(교 황)들에게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돌보고 다스리라고 맡 긴 포도발(교회)을 파괴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하느님께 교회의 보호를 탄원하였다. 이어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 로에게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이며 신앙의 스승인 거룩한 로마 교회를 보살펴 주시기를 호소하였다. 마지막으로 칙서는 교회 공동체들에게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유지하 기 위해서는 교회의 참된 성서 해석을 제쳐 놓고 성서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곡해하며 내놓는 오류들을 모두 신앙 인의 땅에서 일소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칙서는 이러 한 오류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긋나며, 이미 공의회 와 역대 교황들의 교령(敎令)을 통해서 이단과 거짓으로 단죄된 내용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들이 역대 교황들이 애정을 지녀 왔던 독일에서, 이단과 격렬 하게 싸우며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였던 독일인들 사이에 서 일어나 확산되고 있음에 슬픔을 표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하느님이 맡긴 사목 직무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교와 정통 신앙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더 이상의 오류들을 묵과할 수 없다고 밝혔 다. 이어 칙서는 단죄된 오류들을 41개 항목으로 작성하여 나열하였다. 단죄된 오류들은 루터의 설교, 토론, 저서 등 17편의 글에서 뽑은 내용들이다. 첫째, 칙서는 성사 은총의 사효 성을 거부하고 인효성을 강조하는 견해를 단죄하였다(1 항). 구체적으로 단죄된 내용은 세례를 받은 유아에게 죄 가 남아 있으며(2항), 고해성사에서 통회, 죄의 고백, 보 속의 구성 요소를 거부하고 죄인의 통회와 사제의 사죄 경보다 사죄경에 담긴 예수의 사죄에 대한 말씀을 믿음 으로써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며(5~14항), 성찬례에 참 석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생 각보다는 성찬례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15항) 주장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에서 오는 교회의 보고를 거부하고, 대사는 죄벌을 탕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에 유익하다고 믿는 신앙인들은 영적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17~21항) 견해 를 단죄하였다. 셋째,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지 만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아니며, 그리스도는 사도 베드 로에게만 맺고 푸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교황은 무류성 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공의회의 결정이 거부될 수 있다 는(25~30항) 주장을 단죄하였다. 넷째, 연옥은 성서, 적 어도 정경(正經)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으며 연옥 영혼은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37~40항) 주장을 단죄하였 다. 그 외에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공의회의 결정으로 보고(18항), 파문을 영적 영역보다 외적 영역으로 간주 하며(23~24항),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선행의 효과를 부인 하는(31~32항) 견해를 단죄하였다. 칙서는 이러한 오류들이 신앙인의 마음을 해치고 잘못 이끌며 교회 규율을 파괴하고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교 리와 성서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신앙의 스승이며 모든 신 앙인의 어머니인 거룩한 로마 교회에 대한 사랑과 존경 이 결여되어 있다고 천명하였다. 칙서는 이러한 오류들 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나 공공연 하게 옹호하거나 설교하고 출간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더 나아가 주교들이 이러한 오류들을 담고 있는 저서들 을 용의주도하게 찾아내어 성직자와 신도들 앞에서 공개 적으로 성대하게 소각하라고 명령하였다. 칙서는 루터가 맹렬하게 그리고 무례하게 비난하였던 교황청과 역대 교 황들의 결정에 잘못이 없었음을 발견하고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완강하게 불복하면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행위는 이단으로 처 벌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이 지체 없이 루터를 교회 벌을 받을 만한 이단 용의자 또는 이단자로 단죄할 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죄인이 죽기보다는 회개 하여 살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본받아 그동안 교황청에 입힌 손해를 잊고 루터를 애정을 갖고 다루기 로 결정하였음을 밝혔다. 따라서 교황청이 루터와 그 추 종자들과 후원자들이 오류들을 취하하기를 권고하면서 자부적 사랑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칙서는 선언하였다. 그러나 칙서는 루터에게 당분간 설교 직무를 정지시키고, 루터의 거주지인 작센에서 교황 칙서가 공포된 이후 60일 안에 그의 오류들을 취하할 것을 명령하였다. 〔결 과] 1520년 6월 17일에 교황레오 10세는 에크와 바티칸 도서관장인 알레안드로(G. Aleandro, 1480~1542) 추기경을 독일 지역에 교황 칙서를 공포하는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칙서 공포가 독일 전역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독일 남부 지역에서는 주교들이 관할 지역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회칙의 공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중부 지역 에서 에크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교황청에 대한 반감이 일반화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9월에 마이센, 브란덴부르크 등에서 칙서를 공포하였으나 라이프치히 에서는 대학의 공포 거부와 학생 소요가 일어났으며, 에 르푸르트에서는 학생들이 인쇄소로 몰려가 칙서를 강탈 하여 강에 던져 버렸다. 에크는 10월 3일 라이프치히에 서 비텐베르크 대학에 회칙을 발송하였으나, 작센의 선 제후인 프리드리히(1463-1525)가 부재중이어서 공포가 보류되었다. 서부 지역에서는 알레안드로가 칙서를 무난 하게 공포하였다. 1520년 10월 8일 루뱅에서, 10월 15 일에는 리에주에서 루터의 저서들이 성대하게 소각되었 다. 알레안드로는 11월 4일 쾰른에서 루터의 영주인 프 리드리히 선제후에게 루터를 교황청에 인도하고 그의 저 서들을 소각하도록 요구하였으며, 11월 12일 쾰른에서 루터의 저서들을 소각하였다. 한편 독일에서 루터는 저술을 통해서 개혁 운동을 계 속 진행하였다. 그는 6월 26일에 <로마 교황직>(Von dem Papstum zu Rom)을 발표하여 그리스도의 열쇠권에 관한 말씀(마태 16, 18-19)을 사목에 관한 말씀(요한 21, 15-17)과 연결시켜 교황권의 사목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교황들이 통치권을 뜻하는 열쇠권을 장악하기 위해 하느 님의 뜻을 곡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열쇠권은 교회 공동체에 부여되었으며, 사목 직무는 하느님을 사 랑하는 모든 이들이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 럼 루터는 교회를 교황직에서 독립시키려고 하였다. 이 어서 이른바 개혁 저서인 《독일 국가의 귀족들에게 고 함》(An der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r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 8월), 《교회의 바빌론 유배》(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10월), 《그리스도인의 자유》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1월)를 통해 교회 의 교리와 규율을 배척하였다. 10월 3일에 교황 칙서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자, 루터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라 틴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반그리스도의 저주받을 칙서에 대한 반박>(Wider die Bulle des Endchrists)을 발표하였다. 11월 17일 루터는 공의회의 소집을 정식으로 청원하였 고, 12월 2일(또는 3일)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측 근인 스팔라틴(G. Spalatin, 1484~1545)이 비텐베르크에 오 자 쾰른과 리에주에서처럼 라이프치히에서도 자신의 저 서들이 소각된다면 교황 칙서와 교회법전을 소각하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알렸다. 12월 10일에 루터의 제자인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이 작성한 광고가 비 텐베르크 본당의 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게시되었다. "복 음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헌신하는 사람은 모두 엘스 터 성문 앞에 있는 성가(聖架) 경당에 오전 9시에 모여 야 합니다. 교황의 교령들과 스콜라 저서들이 소각될 것 입니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도살장이던 곳에서 루터와 추종자들은 교회 법전들과 카를레티 안젤로 디 치바소 (Carletti Angelo di Chivasso, 1411?~1495)의 《신학 대전》, 에크와 엠세르의 저서들과 교황 회칙을 불에 던져 넣었다. 이는 교황청에 대한 공식 도전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개막식이었다. 12월 27일에 루터는 <왜 교 황과 그의 제자들의 저서들을 소각하였는가>를 발표하였고, 29일에는 <교황 칙서에 담긴 오류에 대한 설명>을 발표하였다. 결국 1521년 1월 3일에 루터를 파문하는 칙서 <로마 교황>(Decet Romanum Pontificem)이 공포되었다. (⇦ <엑수르제 도미네> ; → 루터 ; 종교 개혁) ※ 참고문헌 H. Denzinger · A. Schonmetzer eds., Enchidirion Symbolorum Def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35th ed., Barcione . Friburgi Brisgoviae · Romae · Neo-Eboraci, 1973/ B.J. Kidd ed.,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Continental Reformation, rep.,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11/ E.G. Rupp, Luther's Progress to the Diet of Worms 1521, London, SCM Press LTD, 1951/ E.G. Rupp · B. Drewery eds., Documents of Modern History : Martin Luther, London, Edward Arnold, 1970/ J. Atkinson, The Trial of Luther, London, B.T. Batsford LTD, 1971/ Ian D. Kingston Siggins ed., Luther, Edinburgh, Oliver & Boyd, 1972/ S.H. Hendrix, Luther and the Papacy. Stages in a Reformation Conflict, Philadelphia, Fortress, 1981/ D.R. Janz ed., A Reformation Reader. Primary Texts with Introduction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9/ D. Oliver, Le Progres Luther 1471~1521, Paris, Librairie Artheme Fayard, 1971/ H. Daniel-Rops, The Protestant Reformation, trans. by Audrey Butler from Une Revolution Religeuse : la Reforme Protestante, Librairle Artheme Fayard, 1958/ H. Jedin ed., The Medieval and Reformation Church, English Translation edited by John Dolan, Abridged by D. Larrimore Holland from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vols. IV~VII, Hubert Jedined, 2nd ed., Freiburg im Breisgau, Verlag Herder KG, 1967, New York, Crossroad, 1993/ J.M. Todd, Luther. A Life, London, Hamish Hamilton, 1982/ 김성태,<마르틴 루터, 1518-大赦論争>, 《가톨릭大 學 論文集》 13輯, 1987, pp. 67~101. [金聖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