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 (1752~1801)

周文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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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 순교자. 중국인으로 세례 명은 야고보. 포르투갈 이름은 벨로조(Vellozo). 1752년 중국 강남 소주(蘇州)의 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소주 지역은 17세기 초 이래 천주교가 융성하던 곳으로, 주문모가 태어날 당시에는 신자수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인 배경과 주문모가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집안 사람들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주문모는 7세에 모친을 잃고 8세 에는 부친마저 사망하면서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 다. 그의 고모는 낮에는 수를 놓아 생활비를 벌었고 밤에 는 주문모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되어 결혼을 하였으나 3년 만에 상처(喪妻)하고 다시는 결혼 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기에 글을 읽으며 과거 준비를 하 였는데 여러 번 낙방하자 폐기하였고, 장년(長年)이 되어 서는 북경으로 가 북경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 ~ 1794년 사이에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선교사 임명과 조선 입국] 한편 이승훈(李承薰, 베드 로)을 비롯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6년 평신도를 사제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케 하는 가성직자단(假聖職 者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의 부당성을 깨 달은 지도급 신자들은 성사의 집전과 교회의 유지를 위 하여 북경 교회에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윤 유일(尹有一, 바오로)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에 파견되었고, 당시 북경교구장이던 구베아 주교로부터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중국인 오(吳) 요 한 신부(포르투갈 이름 도스 레메디오스)였다. 구베아 주교 가 오 신부를 선택한 이유는 북경에 서양인 선교사가 부 족한 현실과 또 박해의 위험을 감안하여 외모가 조선인 과 비슷한 중국인 신부의 파견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오 신부는 1791년 북경을 떠나 국경으로 갔으나 조선 신 자들을 만나지 못하였고, 결국 1793년에 북경에서 사망 하였다. 그 사이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진산 사건(珍 山事件)을 겪은 조선 신자들은 1793년에 다시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지황(池璜, 사바)과 박 요한(혹은 백 요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오 신부의 후임 으로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제반 권한을 받은 주문모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20여 일 후 책문(柵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얼음이 풀려 조선에 잠입하기 어렵게 되자, 겨울이 되기를 기다 리기로 하고 10개월 동안 만주 교회를 순회하였다. 그러 다가 1794년 12월 24일 드디어 지황 등의 안내를 받아 의주(義州)로 입국하였고, 1795년 1월 4일경에는 서울 에 도착하여 계동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집에 머물렀다. [사목 활동과 순교] 주문모 신부는 우선 가능한 한 빨 리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 말 공부에 전념하였고, 여 러 지도급 신자들을 접촉하며 조선 교회의 사정도 파악 해 갔다. 그런 가운데 성주간이 되자 신자들에게 세례와 보례(補禮)를 주었고,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이어 부활절에는 조선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렇듯 입국 후 몇 개월 동안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직 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5년 4월(음)에는 이존 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과 유관검(柳觀儉)의 안내 로 양근의 윤유일 집을 거쳐 고산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 관검 집을 방문한 뒤 상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5년 4월(음) 신입 교우인 진사 한영익(韓 永益)이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처 그리고 인상 등을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의 동생인 이석(李晳)에게 밀고하였다. 이석은 이 내용을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알렸고, 채제공은 다시 정조(正祖)에게 보고함으로써 주문 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이 사실은 신자들에게 탐지되어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지만, 대신 최인길 · 윤유일 · 지황이 체포되어 1795년 6월 28일(음 5 월 12일) 포도청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최인길의 집을 떠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姜完淑, 골 롬바) 등 몇몇 교우 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 지방으로 피 신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근의 권가 집에서 3일을 머물렀고, 충청도 연산(連山)의 이보현(李步玄, 프란치 스코) 집에서 2개월 가량 머무는 등 1년 정도 지방에서 생활하며 전교 활동을 하다가 1796년 5월(음)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주로 강완숙의 집에서 거처하였지 만,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지방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즉 1798년에는 반년간 피신하였다가 이듬해에 상경하였고, 1799년 겨울에 다시 지방으로 내 려갔다가 1800년 4월(음)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처럼 주문모 신부는 박해로 인해 여러 가지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입국 후 그가 행한 활동은 조선 교회의 교세를 급속히 증가시켰다. 즉 그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푸는 등 직접적인 선교 활동 외에 문서 선교의 방편으로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는데, 그가 지은 <사 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는 교회의 조직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최창현(崔昌顯, 요한)을 총회장에,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하는 등 회장제(會長制)를 설정하여 교회 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으 며, 특히 여회장을 임명한 것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1797년경에는 교리 교육과 전교를 목적으로 명도회(明 道會)를 설립하고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을 회장 에 임명하였다. 명도회는 북경에 있던 단체를 모범으로 조직된 일종의 비밀 결사로, 박해 시대 조선 교회의 발전 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1796년 황심(黃沁, 토 마스)을 북경에 파견한 이래 거의 매년 북경교구와의 연 락을 유지하였으며, 서양 선교사의 영입에도 관여하였 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직전 4천 명 이었던 신자수는 1801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는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편 1800년 4월(음)에 상경하여 여러 사람의 집을 전전하던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2 월(음)에 박동(磚洞)의 양제궁(良娣宮)에 3일간 머물다 가 황해도 황주(黃州)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체 포하려는 과정에서 무고한 신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다시 돌아와 4월 24일(음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 으며,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5월 31일(음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 하였다. 1996년 '하느님의 종' 으로 선정된 이래 현재까 지 시복 · 시성 작업이 추진 중에 있으며, 수원교구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 명도회 ; 신유박해 ; 윤유일 ; 을묘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상/ 赤木仁兵衛, 〈神父周文謨の入 鮮〉 《加藤博士 還曆記念 東洋史集說》, 1941(《교회사 연구》 10집 ,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번역 수록)/ 鈴木信昭, 〈朝鮮においける 周 文謨神父 :0天主教布款il 〉,東洋史研究報告》Ⅳ, 東京 : 東 洋大學 史學科, 1987(《교회사 연구》 大學院 10집,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5. 번역 수록)/ 최석우,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초기 천주교회>, 《교회사 연구》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조광, <周文謨의 朝鮮 入國과 그 活動〉, 《교회사 연구》 1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방 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 연 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차기진 역주, 《윤유일 바오로 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1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 성 추진위원회, 1996/ 윤민구 역주,《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들의 시복 자료집》 4 · 5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 회, 1999 · 2000.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