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1동 본당

朱安一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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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소속 본당. 인천시 남구 주안1동 180-18 소 재. 1963년 9월 13일에 도화동(道禾洞) 본당에서 분 리 · 설립되었다. 설정 당시 본당의 명칭은 '주안동' 이었으나, 1975년 주안2동(현 주안3동) 본당을 분가시키면서 '주안1동' 으로 변경되었다. 주보는 예수 성명. 관할 구 역은 주안1동, 주안2동 전 지역과 주안4동, 주안6동, 도 화동 일부 지역. 〔교 세〕 1963년 1,618명, 1967년 2,366명, 1971년 3,934명, 1976년 3,681명, 1981년 4,587명, 1988년 6,742명, 1994년 9,702명, 2001년 7 ,307명. 〔역대 신부〕 초대 덴팅거(D. Dentinger, 신대건) 도날도(1963. 9~1965. 5), 임시 머피(J. Murphy, 闕) 예로 니모(1965. 5~1966. 2), 2대 포춘(J. Fortune, 성민호) 야고 보(1966. 12~1967. 3), 임시 켈러허(E. Kelleher, 게) 에드 원(1967. 3~1967. 4), 3대 콕센(G.J. Coxen, 곽신) 제르바 시오(1967. 4~1974. 11), 4대 강의선(美義善) 힐라리오 (1974. 11~1977. 4) , 5대 뢰트거링(J. Röttgering, 오명환) 요셉(1977. 4~1982. 2), 6대 강용운(姜龍雲) 시몬(1982. 2~1986. 2), 7대 박성규(朴成圭) 베네딕도(1986. 2~1987. 1), 8대 김병상(金秉相) 필립보(1987. 1~1993. 1), 9대 강 성욱(姜聖旭) 마태오(1993. 1~1998. 1), 10대 송주석(宋 周錫) 안셀모(1998. 1~ 2003. 1 ) , 11대 이덕상(李德相) 비 오(2003. 1~현재). 주안 지역에 공소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26년 10월이 었다. 답동(沓洞) 본당의 관할하에 있던 주안 공소는 1955년 송림동(松林洞) 본당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 다. 이어 도화동 본당이 1960년 7월 답동 본당과 송림동 본당에서 분리 설정되자 주안 공소는 도화동 본당으 로 편입되었다. 도화동 본당이 설립된 이후 신자수는 급 격한 증가세를 보였고 따라서 본당의 분할이 시급히 요 구되었다. 이에 주안 공소 회장 정정희(프란치스코)와 태 요한 등은 주안 지역 본당 설정을 교구에 건의하였고, 교구장 맥노튼(W.J. McNaugton, 羅吉模) 주교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구에서는 1963년 3월 주 안 본당의 신설을 발표하였고, 성당 부지 1,437평을 구 입하였다. 주안 지역의 신자들은 성당(102.22평) · 사제관(45평) · 수녀원(36.66평)을 완공하여 9월에 맥노튼 주 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초대 주임 덴팅거 신부는 본당의 원활한 운영과 전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한국 순 교 복자 수녀회 분원을 1963년 9월 마련하였다. 또한 덴팅거 신부는 본당 설립 직후부터 관할 구역 내 빈민촌 의 열악한 주거 환경과 식생활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 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실시하였고, 이듬해에는 사회 복지 활동의 일환으로 '예수성명의원' 을 개원하였다. 1964년 발족된 빈천시오회는 관할 구역 극빈자촌에 대한 빈민 구호 사업을 전개하였고, '주안 본당 신협' 이 1964년 11월에 창립되었다. 1965년 2월에는 고잔동 공소가 고잔(古棧) 본당으로 승격 · 분리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이 같은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던 덴팅거 신부가 1965년 갑자기 환속하여 본 국으로 돌아가고, 뒤이어 부임한 세 명의 외국인 신부들도 잇달아 환속하자 본당 사목은 침체되고 신자수도 감소하였다. 3대 주임 콕센 신부는 청빈과 희생의 모범은 보였지만 단체 활동에 대한 소극적 지원으로 단체들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예수성명의원' 도 운영 부실로 인하 여 폐쇄되었다. 하지만 1972년 6월 본당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최기복(崔基福, 마티아) 신부가 2대 보좌 신부로 부임하며 본당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최 신부는 특히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에 주력하였고, 주일학교 활성화와 사목회 운영 정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3년 '주안 천주교회 주보' 라는 자체 주보를 발행하 였으며, 1973년 4월에는 대대적인 성당 보수 공사를 실 시하였다. 4대 주임 강의선 신부는 1975년 1월 주안2동 (현 주안3동) 본당을 분리시켰고, 10월에는 신자들의 모 금으로 교리실(32평)을 신축하였다. 주안 본당은 1975 년 자립 본당으로 성장하였으며, 1976년 2월 제물포 본 당이 설립되자 본당 관할 구역 일부(33세대 93명)를 이관 하였다. 강 신부는 냉담자와 행방 불명자가 360세대 1,260명이나 되자 1976년 대대적인 찾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자 재교육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1977년 3월 신협을 재발족하였다. 5대 주임 뢰트거링 신부는 소방 도로가 본당 부지를 통과하게 되자 본당 경계 확정 공사를 실시하였다. 1978년 1월부터는 신자들의 재교육에 주력하여 매주 금 요일 성서 연구를 실시하였고, 10월부터 성서 공부 문제 지를 배포하기도 하였다. 뢰트거링 신부의 재임기인 1978년 5월 주원 본당이, 1979년 7월 석암(현 주안8동) 본당이, 1980년 4월 염전(현 주안5동) 본당이 분리되었 다. 6대 주임 강용운 신부는 뢰트거링 신부가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성당 신축 사업에 매진하여, 1983년 10월 기공식을 갖고 1985년 6월 성당을 완공하여 맥노튼 주 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7대 주임 박성규 신부는 1986년 4월부터 본당 내 환경 정리를 시작하였다. 한편 1986년 5 · 3 인천 항쟁으로 인해, 경찰은 시위 계획이 주안 1동 본당에서 이루어졌고 상당수의 화염병이 성당 에서 제작되었다며 박 신부와 사무실 직원을 소환하여 참고인 조사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8대 주 임 김병상 신부의 재임기에는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하여 주안1동 본당에서 교구 내 정의 평화위원회와 청년 단체 들이 주관하는 민주화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1987년 12월 대선 때에는 신자들이 공정 선거 감시단을 구성하여 본당 관할 구역에 있는 투표소에서 참관인과 선거 관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김 신부는 1988년 3월 본당 평협을 사목회와 구역장들로 구성된 '본당 사목 협의회' 로 재구성하였고, 사목회의 한 분과였던 연령회를 하나의 독립 단체로 분리하였다. 본당 창설 25주년 기념 행사를 그해 9월에 가졌고, 1989년 9월에는 《주안1동 본 당 25년사》를 발간하였다. 김 신부는 신자와 비신자들에 게 다양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며 성장하던 교육관을 1991년 6월 문화원으로 승격시켜, 신자 재교육 및 각종 교양 강좌 등 지역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화 사업을 벌여 나갔다. 10대 주임 송주석 신부는 2002년 12월 15개 소공동 체 전체가 참여하는 '구역 총회' 를 열어 소공동체 활성 화 및 아래로부터의 의견 수렴을 통한 본당 일체감 조성의 기반을 마련하며 신자들이 본당 운영에 능동적 · 주체 적 의식을 갖도록 고취하였다. 11대 주임 이덕상 신부는 친교를 이루는 공동체 · 선교하는 공동체 · 그리스도 안 에서 일치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 인천교구 ; 고잔 본당 ; 도화동 본당) ※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인천교구, 1991/ 주안1동 본 당 25년사 편찬위원회, 《주안1동 본당 25년사》, 천주교 인천교구 주안1동 교회 , 1989.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