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사 · 천진암 강학 走魚寺 · 天真菴講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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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자봉에서 내려다본 강학회가 열린 주어사 인근 지역.

앵자봉에서 내려다본 강학회가 열린 주어사 인근 지역.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배경이자 기원이 된 강학. 권철 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이 이끄는 성호학파(星湖學派) 의 신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 연구 모임으로, 주 어사(현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와 그 너머에 있는 천진암(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소재)을 중심으로 이루 어져 왔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그중에서도 1779년 겨울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이 참석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포함한 서학(西學)이 본격적으로 연구 토론된 '주어사 강학' 이 교회 창설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강학 장소와 참석자〕 성호 이익(李瀷)의 제자인 녹암 (鹿菴) 권철신이 이끄는 신진 학자군, 즉 녹암계는 1776 년(영조 52)을 전후로 형성되었다. 가장 먼저 기록에 나 타나는 김원성(金源星),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총억 (李寵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홍낙민(洪 樂敏, 루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 · 약용(若鏞, 요한) 형제, 이익의 외손인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윤유일(尹有- 바오로), 이벽, 권철신의 조카 권상학(權相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강학 을 통해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였는데, 이러한 강학은 그 이전부터 성호학파 안에서 널리 애용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특히 이벽과 정약용은 일찍이 천 진암을 자주 찾아 함께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으며, 이 천진암은 주어사와 함께 녹암계의 강학 장소로도 이용되었 다. 두 절이 모두 권철신의 집이 있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나 이벽이 살았던 광주, 정약 용이 살았던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학 연구' 와 관련해서는 이들 강학 중에서도 1779년(己亥年, 정조 3) 겨울에 열린 주어사 강학을 주목 해야 한다. 아마도 이 해의 강학이 천진암이 아니라 주어 사에서 개최된 이유는 눈이 많이 내린 탓에 권철신이 산 너머에 있는 천진암까지 가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성 다블뤼(A.Daveluy, 安敦伊) 주교는 "이벽이 강학 소식을 듣고 산 속의 한 외딴 절을 찾아갔으나, 강학 장 소가 아닌 것을 알고는 발길을 옮겨 '그 산 뒤쪽의 산허 리에 있는 절' 을 찾아가야만 했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이벽은 자신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천 진암(한 외딴 절)을 찾아갔다가 산(즉 앵자봉)을 넘어 강학 장소인 주어사(산 뒤에 있는 절)를 찾은 것으로 이해된다. 또 정약용은 당시의 강학 장소를 '주어사' 혹은 '천진 암 · 주어사' 로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 주어사를 가리키 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강학 시기를 다블뤼 주교는 '1777년(丁酉年) 으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정약용은 '기해년(1779) 겨울 로 기 록하였고, 현존하는 《만천유고》(蔓川遺槁) 안의 <십계명 가>와 <천주공경가>의 제목 협주에는 '기해년 납월(12 월)' 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정약용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약용의 기록에 따르면, 1779년의 주어사 강학에는 녹암계의 스승인 권철신을 비롯하여 정약전 · 김원성 · 권상학 · 이총억 등 여러 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나 정약용 모두 뒤늦게 강학 소문을 듣고 달려온 이벽이 이 강학에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들 외에 이승훈이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 노) · 약용 형제가 강학에 참석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주어사 강학의 성격과 의의〕 녹암계의 인물들은 일찍 이 사행원들을 통해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서(西學書)를 널리 접하고 있었다. 또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기양 · 정약용 등 일부 학자들은 한때 양명학(陽明學)에도 심취하 였다. 따라서 주어사 강학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을 비롯하여 원시 유학(原始儒學)의 내용, 양명학이나 서학 내 용이 함께 연구 토론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만 이 강학을 성리학 · 유학의 강학으로 보거나 양명학 강학으 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서학 강학을 더 중시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와 정약용의 기록으로 본다면, 주어사 강학에서 토론된 문제 가운데 서학 내지는 천 주 신앙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약용 이이 강학 사실을 두 번이나 거론하여 강조한 이유도 주어사 강학이 이전의 강학과는 분명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주어사 강학에서, 첫째 하늘 · 세상 · 인생 등에 대한 문제, 둘째 기존 학자들의 모든 의견, 셋째 성현들의 윤리서 그리고 끝으로 철학 · 수학 · 종교와 관 련된 서학서 등이 연구 토론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서양의 과학 서적에 들어 있는 천주 교리의 초보적 이론, 즉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 멸성,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는 칠극(七克)의 내용 등 이 연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이후 천주 교리의 이치를 어렴풋이 느끼고 기도 행위와 하느님 공경, 묵상 행위와 재(齋)를 실천해 나간 것처럼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정약용이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 史)를 별도로 저술한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아직 확인할 수는 없다. 주어사 강학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녹암계의 형성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에 앞서 권철신을 위시한 녹암계의 인물들은 이미 기존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원시 유학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양명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이 러한 사실은 그들의 탈주자학적(脫朱子學的) 성향과 혁 신적인 학문 태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다가 중국 에서 서학서가 전래되고 이를 접하게 되면서 녹암계의 관심은 원시 유학 · 양명학을 벗어나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에 기울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주어사 강학이 개최된 것이다. 이처럼 녹암계의 형성과 주어사 강학은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 결과 녹암계의 신진 학자들은 1782~1783년 무렵에 이 미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에 심취하게 되었고, 1783년 말 이벽의 권유에 따라 북경 선교사들을 만나고 돌아온 이승훈과 동료들에 의해 다음해 겨울 마침내 한국 천주 교회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주어사 강학은 바로 교회 창설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학문 연구 모임이었다. (→ 권철신 ; 남인과 천주교 ; 이벽 ; 정약용 ; 천진암 ; 한국)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4,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달레 교회사》 상1 丁若鏞, 《與猶堂全書》/ <이벽전>(필사본)/《蔓川遺稿》/ 金玉姬, 《曠菴 李蘗의 西學思想》, 가톨릭출판사, 1975/ 변기영, 《이벽 성조와 천진 암》, 진 명 출판사, 1980/ 河聲來, 《天主歌辭 研究》, 聖黃錫斗루가書院, 1985/ 車基眞, 《조선 후기 의 西學과 斥邪論 연 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李元淳, 〈天真菴 · 走魚寺講學會論辨〉 , 《金哲埃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4/ 朴錫武, <정 약용, 그의 시대와 사상>, 《한국사회연구》 2집, 1984/ 李佑成, <鹿菴 權哲身의 思想과 그 經典 批判一 近畿學派에 있어서의 退溪學의 繼承과 展開>, 《韓國의 歷史 像》, 창작과 비평사, 1986/ 李東煥, <茶山思想에서의 上帝 도입 경로 에 대한 序說的 고찰>, 《碧史李佑成教授停年退職紀念論叢 民族史 의 展開와 그 文化》, 창작과 비평사, 1990/ 崔奭祐 · 卞基榮, <한국 천 주교회의 起源 문제>, 《司牧》 144호, 1991/ 조광,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 가설에 관한 역사성 문제 《그리 스도교와 겨레 문화》, 기독 교문사, 1991/ 徐鍾泰, <天真庵 走魚寺 講學과 陽明學> , 《李基白教授 停年退任紀念 韓國 史論叢》, 1994/ 윤민구,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