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주의 主意主義 〔라〕Voluntarisimus 〔영〕Volunt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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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혹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성(理性, ratio) 혹은 지성(知性, intellectus)보다 의지(意志, voluntas)를 강조하거나 의지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주장. 주의설 (主意說)이라고도 부른다. 〔성 립〕 '주의주의' 라는 명칭은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onnies, 1855~1936)에 의해서 소개되었고, 파울젠 (F. Paulsen, 1846~1903)과 분트(W. Wundt, 1832~1920)에 의 해서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us)나 자연주의(自 然主義, naturalismus)와 구분되어 사용되는 철학의 한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그 이후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이 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특히 신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의지' 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지성과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이성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의지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플라톤주의자인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 300~362)와 아우 구스티노(354~430), , 캔터베리의 안셀모(1033~1109)와 보 나벤투라(1217?~1274), 오컴(W. of Ockham, 1285?~1349) 그리고 스코투스(J.D. Scotus, 1265/1266~1308)의 사상에서 잘 나타난다. 둘째는, 근대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으 로, 우주(세계)는 의지 자체로부터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궁극적인 원인을 의지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파스칼(B. Pascal, 1623~1662)과 칸트(I. Kant, 1724~ 1804) 그리고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에 의해서 대표된다. 〔신학적 주의주의〕 이는 인간의 이성보다 하느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즉 참된 행위 혹은 진리 자체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요인은 하느님의 의지 에 달려 있지, 결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 지성이나 이성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점에 대해 서는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우선, 보나벤투라는 인간과 하느 님에 대한 유비(類比, analogia)의 문제는 순전히 하느님 의 의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하였다. 즉 모든 참된 존재나 선한 존재는 지성과 의지에 의해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근본적으로 참된 존재나 선한 존재를 인식하고자 원하는 의지가 지성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보나벤투라와는 달리 주지주의적인 경향을 가졌다. 신학적 주의주의적 입장은 일반적으로 중세 대다수의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 : 신학적 주의주의는 우선 신플 라톤주의자인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의 의지론에서 큰 영 향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의지는 신적인 힘이며 성부 (聖父)의 힘이다. 의지를 존재론적으로 규정하자면, 하 느님의 실체(substanta)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존재(esse) 가 곧 의지가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하느님에게 있어서 의지는 자신의 정신적인 존재의 기능이나 비춤이 아니 라, 그 자신의 존재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 지는 어떠한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의 원인이 된다. 아우구스티노 : 그는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위와 삶의 본질에 있어서 의지를 강조하였다. 주지주의자들은 인간의 도덕적인 판단 기준이 인간 이성에 있다고 생각 하지만, 아우구스티노는 인간 이성 대신에 의지와 사랑 (amor)을 윤리적 행위와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고자 하였 다.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적 스승인 플로티노스(Ploinos, 204/205~270)는 인간을 '영혼' (ψυχή)으로 보았다. 즉 인 간은 영혼적이기에 생각하고 사유하는 존재이며, 사유에 의해서 올바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윤리적인 판단 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역 시 플로티노스처럼 인간을 영혼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혼이 단지 사유하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없고, 의지(意志)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따 라서 그는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의지는 항상 있다. 실제로 영혼의 움직임이란 의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 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인간의 윤리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의지이며, 더 나아가서 인간은 의지에 의 해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이 것은 지성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고, 의지가 총체 적인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에는 기쁨이나 무서움 등과 같은 인간의 격정(激情) 도 포함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욕심 등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의지와 사랑이다. 그리고 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의지에는 선하고 참된 것으로 나아가는 성향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의지가 본성적으 로 행하고자 하는 것을 행하면 사랑을 하는 것이요, 곧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우구스티노가 했던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시오" 라는 말로 정의된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 그는 《조화론》(De concordia)에서 의지를 인식의 원동력으로 파악하면서 세 가지의 관점 혹은 단계에서 의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즉 의지는 도구(mstuumentum)로서의 의지' 와 '의지의 경향(affectio)' 그리고 '의지의 사용(usus)' 이라는 세 가지의 의미를 갖 는다. '도구로서의 의지' 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능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안셀모는 "육신이 다섯 가지 의 감관(感官)을 가지고 있듯이, 영혼도 자신을 실행하 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능력들을 지닌다. 즉 영혼이 사유 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속에 있는 이성이라는 일종의 도구 에 의해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무엇인가를 원 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속에 있는 의지라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다" 라고 하였다. 결국 의지는 영혼의 능력이고, 영혼의 도구로서 무엇인가를 원하고 또한 실행하고자 하 는 것이다. 그러나 안셀모는 이러한 영혼의 도구로서의 의지, 즉 도구적 의지는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의지는 무엇인 가를 원하기 위해서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한다. 필요한 그 것이 바로 일종의 순수하고 가능적인 상태인 도구로서의 의지에서 능동적이며 실행의 상태로 넘어가는 의지의 경 향이다. '의지의 경향' 은 의지에 내용적인 규정과 원하 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단계의 의지는 사유와 무관하다. 즉 원하는 것을 사유 하지 않고서도 이 의저의 경향은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의지의 사용은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였을 때에만 가능하다. 안셀모는 비록 도구로서의 의지와 의지의 경향을 구분 하지만 실제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 면 도구로서의 의지가 단독으로는 자신의 행위를 실행하 거나 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의지의 경향에 의해서 의지는 무엇을 원할 수 있고, 동시에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도구로서의 의지와 의지의 경향은 서로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단계의 의지는 스 스로 움직이기 위해서, 즉 원하기 위해서 다른 외부적인 규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의지가 원하는 것을 실 행하면 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의지가 갖는 두 가지 근본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즉 의지는 통속 적인 원의인 '행복' 으로 나아가려 하거나, 아니면 고유 한 원의인 '올바름' 을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행복 혹은 좋은 것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지니는 의지 는,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이라서 결코 인간이 버릴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 는, 인간의 본성적인 면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잃어버 릴 수도 있다. 이러한 의지의 두 근본 경향은 인간이 노 력하기에 따라서 의지가 행복이나 좋은 것으로 나아가거 나, 아니면 올바름으로 나아간다. 올바름으로 나아가는 경향의 의지는 결코 악으로 나아가지 않고 악의 원인이 되지 않으며, 항상 선한 것으로만 향한다. 왜냐하면 올바 름을 향한 의지는 올바름을 이미 지니고 있고, 올바름을 지닌 의지는 결코 거짓됨이나 악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올바름을 향한 의지' 와 '올바름' (rectitudo)은 동일하다. 그러나 행복이나 좋은 것으로 나아 가려는 경향을 지닌 의지는 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왜 냐하면 이 경향의 의지는 행복이나 좋은 것을 이미 지니 고 있는 의지가 아니고, 그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올바름의 의지와 더불어서 행복이나 좋은 것을 원해야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올바름을 잃어버린다면 올바름에 대한 의지도 잃 어버리게 될 것이고, 선을 지향하는 대신 악을 지향할 수 도 있게 될 것이다. 즉 의지가 악으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결국 인간이 올바름을 소유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올바름은 행복이나 좋은 것, 즉 통상적인 원의에 도달할 수 있는 척도 혹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안셀모는 인간이 올바름을 향한 의지를 갖고자 노력하는 한에 있어서는 결코 악을 원하지 않고, 더불어 서 행복이나 좋은 것을 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지론》에서 인간은 올바름을 향한 의지를 소유하고자 혹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항상 참되고 올바른 것, 즉 최고의 진리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올바름에 대한 의지는 인간에게 머 무르고 있는 하느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사용' 은 생각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다. 즉 행위와 원함(의지)이 종합된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를 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고, 나는 보려고 원한다. 그리고 나는 본다." 이것은 결국 내적인 사유 혹은 원함이 행위로써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 국 안셀모가 말하려는 의지는 단순히 그저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해야 할 바를 분명히 생각하고 난 이후에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행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고 안셀모가 강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의 지에 의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근원이자 창조주 인 하느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자 원하고 또한 도달하기 위해 서 올바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행한다면, 인 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에 의해서-혹은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 의지, 즉 올바름의 의지인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서-하느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스코투스 : 안셀모의 의지에 대한 사상은 통상 주의주 의의 대표자로 인정받는 스코투스의 의지에 대한 사상에 도 영향을 미쳤다. 스코투스 역시 인간의 이성보다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의지를 두 가지, 즉 어떤 것을 단순히 선택하기를 원하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의지' (affectio commodi)와 항상 올바른 것만을 원하는 '고유한 의미 에서의 의지' (affectio iustitiae)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단순한 의미의 의지를 움직이게 한 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의 의지는 인간 이성의 범위 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이미 항상 올바르고 선한 본성인 하느님에게로만 향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의지는 이성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형 태〕 주의주의는 의지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인식론적 주의주의 :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이론적이 거나 혹은 실천적인 것을 규정하는 주된 요소가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다시 '선험적 주의주의' 와 '실용주의적 주의주의' 로 구분 된다. 선험적 주의주의는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은 신적인 당위성으로서의 실천 이성이고, 또한 그것을 따르고 실천함에 의해서 참다운 인식에 다가설 수 있다 는 칸트의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독일의 빈 델반트(W. Windelband, 1848~1915)와 리케르트(H. Rickert, 1863~1936)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들은 인식 작용의 가 장 중요한 요소는 이론적인 이성의 작용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당위적인 실천적 가치의 평가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용주의적 주의주의는 미국 실용주의의 대표자 들인 제임스(W.James, 1842~1910)와 듀이(J.Dewey, 1859~ 1952) 그리고 실러(F.C.S. Schiller, 1864~1937)에 의해서 주 장되는 이론이다. 여기서는 모든 이론적인 것은 인식론 적으로 무의미하고 거짓된 것이며, 단지 실생활에 있어 서 실용성이나 유용성을 가져다주는 것만이 참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이 이론은 지식보다는 실생활에 있어서의 의지를 일체의 것에 대한 가치 규정의 표준으로 삼는다. 심리학적 주의주의 : 이 견해는 인간의 생활과 의식에 있어서 의지나 욕구 · 갈망 · 본능 등을 가장 근본적인 요 소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분트(W. Wundt, 1832~ 1920)의 주장과 같이, 모든 심적 과정은 욕구 작용과 의 지 작용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지가 분명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반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의지에 의해서만 인간이 설명되는 것 은 아니며, 정신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과의 종합에 의해 서 진정한 인간의 실재가 이해된다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 주의주의 : 쇼펜하우어와 니체(F.Nietzsche, 1844~1900), 피히테(J.G.Fichte, 1762~1814) 그리고 베르그 송(H. Bergson, 1859~1941) 등에 의해서 주장되는 입장이 다. 이 주장의 중심 사상은 비이성적이고 맹목적 · 본능 적인 의지를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원리로 생각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간을 이해하는 원리이며 또한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는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있는 의지이다. 이 내 면 속의 의지는 유일하게 항구 불변하는 것이며, 또한 지 성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나 훌륭한 마 음이나 머리 등과 같은 것도 우수한 지능에 의해서 발생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서 생성된다. 쇼펜하우어 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주의주의자들은 정신적이고 이성 적인 것에 의해서 세계와 인간을 파악하고자 했던 전통 적인 형이상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였다. 그리고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새로운 원리로서 비이성적인 의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서 의지는 '힘의 의지' 로서 일종의 초이성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피히 테에게는 의지가 이성과 결합 또는 이성에 내재하여 목 적을 설정하며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윤리적 주의주의 : 도덕을 이성적인 통찰이나 신적인 당위성으로서의 의무 등에 의해 규정하지 않고, 의지를 도덕성을 규정하는 기본 원칙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도덕은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처럼 선의 이데아 (Idea)의 통찰에 의해서 규정되지도 않고, 칸트처럼 의무 로부터 행위되는 이성적인 운동 근거에 의해서 발생되지 도 않는다. 단지 의지의 제한된 자유에 의해서 규정된 자 기 보존에 대한 인간적인 열정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따 라서 도덕의 목적들은 의지에 의해서 발생된 생산물들이 기에, 더이상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으로 좋다거나 나쁘 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평 가〕 근대의 주의주의 입장에선 철학자들은 주지주의 철학자들의 결정론에 반대하여 인간 자유의 실재를 과도하게 강조하였고, 나아가 인간 존재를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자유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인간은 자유를 바탕으로 스스로 초월해 가고, 또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 안에서 당당히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는 최고의 위치를 유 지해 나간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도덕 체계를 넘어서려는 인간 사고의 역사를 통해 주의주의의 함정이 드러난다. 즉 절대적인 자유에 바탕을 둔 거침없는 인간 의지의 숭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현대 세계의 질서와 소유와 쾌락을 추구하려는 정신 문화 형성에 이 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주의주의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성급한 시도는 경계되어야 하겠고, 보다 나은 의지의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신학적 주의주의가 취하는 입장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즉 인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의지에 바탕을 둔 의지와 사랑을 윤리적 행위와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스코투스 ; 주지주의) ※ 참고문헌  H.J. 슈퇴릭히, 임석진 역,《세계 철학사》 下, 분도출 판사, 1983/ 오토프리트 회페, 이강서 외 역, 《철학의 거장들》, 한길 사, 2001/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역,《서양 철학사》 上, 이문 출판사, 1983/ L. Allers, Anselm von Canterbury, Wien, 1938/ Anselm von Canterbury, iibers. v. H. Verweyen, Freiheitschriffen, Freiburg im Breisgau, 1994/ J. Auer, Kleine Katholische Dogmatik, Band II, Regensburg, 1978/ E. Benz, Marius Victorimus und die Entwicklung der abendliindischen Willersmetapupysisir, Stuttgart, 1967/ W. Hoeres, Der Wille als reine Vollkommenheit nach Duns Scotus, Miinchen, 1963/ L. Honnefelder, Scientia transcendens Dieformale Bestimmumg der Seiendheit und Realitat in der Metaphysik des Mittelalters und der Neuzeit(Drs Scotus - Suares - Wolf- Kant -Peirce), Hamburg, 1990/ E. Lohmeyer, Die Lehre vom Willen bei Anselm von Canterbury, Erlangen, 1914/ J. Kreuzer, Augustimus, Frankfurt am Main, 1995/ A.B. Wolter, Duns Scotus on the Will and Morality, Washington, 1986. 〔金永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