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동 주교좌 본당
竹林洞主教座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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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춘천교구 주교좌 본당.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 38 소재. 1920년 9월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창설시 명칭은 곰실이었는데 이후 춘천 약사리 (藥司里), 춘천 등의 명칭을 거쳐 1960년 무렵부터 지금 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죽림동, 약사동, 중앙로 1 · 2 · 3가, 소양로 4가, 효자1 동, 낙원동, 근화동 전 지역. 〔교 세〕 1922년 151명, 1955년 1,500명, 1962년 4,824명, 1975년 3,677명, 1983년 3,289명, 1990년 2,998명, 1996년 3,802명, 2002년 1,728명. 〔역대 신부〕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 립보(1920. 9~1930. 6), 2대 이기준(李起俊) 토마스(1930. 6~1931.5), 3대 서병익(徐丙翼) 바오로(1931.5~1935), 4 대 조인원(趙仁元) 빈천시오(1935~1936. 5), 5대 유영근 (俞榮根) 요한(1936. 5~1938. 10), 6대 퀸란(Quinlan, 贴 蘭) 토마스(1938. 10~1940), 7대 마리난(Marinan, 梅) 제 라르도(1940~1941.10) 8대 도일(Doyle, 도) 야고보(1941.10~1942. 2), 9대 신성우(申聖雨) 마르코(1942. 2~1945.12), 10대 조응환(曹應煥) 타대오(1945. 12~1947,11), 11 대 갤라거(Gallagher, 갈) 프란치스코(1947. 11~1948. 3), 12대 헤이워드(Hayward, 吳) 후베르토(1948. 3~1951.8) 13대 코머포드(Comerfond, 공) 토마스(1951. 8~1953. 4) 14대 조응환(1953. 4~1954. 9) , 15대 코머포드(1954.9~1958. 9), 16대 맥마흔(McMahon, 안) 아르도(1958.9~1965.4), 17대 코머포드(1965.4~1969.2), 18대 방영구 (方永求) 실베스테르(1969 2~1975.2), 19대 이응현(李應 鉉) 테오도로(1975. 2~1982. 10), 20대 전세권(全世權) 바 오로(1982. 10~1989. 3), 21대 김택신(金澤信) 요셉(1989.3~1996. 8), 22대 이정행(李正行) 요한(1996. 8~2003. 1), 23대 김현준(金鉉俊) 율리오(2003. 1~현재). 〔전사 및 공소 설립〕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신유박해(1801) 등 연이은 박해를 피해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신자들은 충청도와 강원도의 산간 벽지로 숨어 들었다. 이들 가운데 경기도의 申太甫, 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 으로 피난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이들 초기 신자들 가운데는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 요한과 강원도 회양 지방 의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처럼 1815년에 투옥된 사람 들도 있었는데, 조신철은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5일 서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후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9명이 투옥되어 그중 2명이 옥사하기도 하였다. 전교 활동이 자유로워진 1880년을 전후하여 강원도 지방은 상주하는 신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증가하여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1888년에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 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를 파견하여 강원도 지방에서 최초로 정식 교회의 출범을 보게 되었다. 당시 풍수원 본당은 춘 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2,000여 명의 교우를 관할하였 다. 그 가운데 곰실 공소는 고은리 윗너부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정착하고 있던 엄주언(嚴柱彥, 말딩) 에 의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윗너 부랭이에서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너부랭이로 옮겼다 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였 다. 이로써 이 지역에 공소 예절이 가능하게 되자, 물구 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풍수원 본당 2대 주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곰 실에서 해마다 40~50명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의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더 불어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 생활에 전념하여 마침 내 신자가 3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 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 으로 나누어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본당 설립과 발전〕 엄주언은 풍수원과 서울의 명동을 수년간 왕복하면서 상주 사제 파견을 간청하여, 마침내 1920년 9월 곰실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김유룡 신부가 부임하였다. 김유룡 신부 부임 후 교세는 눈에 띄게 신장하여 본당 신자들은 보다 활발한 전 교를 위해 본당의 춘천 시내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 었다. 이에 신자들은 애련회 활동과 더불어 계 조직, 가 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 고개(현 죽림동 성당 아 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김영식의 대자의 집 (약사리 148번지)을 매입하여 개조한 후, 1928년 5월에 이곳으로 성당을 이전하였다. 2대 주임 이기준 신부는 당시 강원도 지사의 협조 아 래 1930년에 강당을 신축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 본당 부설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다. 3대 주임 서병익 신부에 이어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조인원 신부는 본당에 부인 회, 소년회, 소녀회를 결성하고, 외교인 전교를 위해 1935년 파스카 축하 대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5대 주임 유영근 신부는 전임 신부가 시작한 부인 회, 소년회, 소녀회의 구일기도를 장려하였고, 소화유치 원도 더욱 활성화시켰다. 1938년에는 강원도 지역의 사 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6대 주임으로 퀸란 신부가 부임하였다. 퀸란 신부는 부임 직후 약 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도토리 밭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 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39년 4월 25일 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분할됨과 동시에 본당은 춘천 지목구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고, 퀸란 신부는 춘천 감목 대리로 임명되었다. 마리난 신부와 도일 신부 뒤를 이어 9대 주임으로 부 임한 신성우 신부는 본당 사목을 하는 외에, 당시 일제에 의해 연금된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을 돌보는 일에 노력하였다. 조응환 신부와 갤라거 신부에 이어 12 대 주임으로 부임한 헤이워드 신부는 해방 이후 본당의 신자수가 꾸준히 늘어나자 1949년 1월에 소양로(昭陽 路) 본당을 분리 · 설립시켰으며, 이때 본당 관할의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를 새 본당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이전 에 매입하였던 부지에 성당을 신축하려 하였으나,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으로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 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 4월 5일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착공하게 되었다. 성당 건립 공사는 공사 시작 후 1년의 기간 동안 돌로 외벽을 훌 륭하게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은 후 내부 공사에 들어가는 등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으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 중단되고 말았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얼마 안 된 7월 2일 에 퀸란 주교가 본당 미사를 보던 중 인민군에 의해 20 여명의 교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캐나반(Canavan, 孫) 신부와 함께 체포 연행되었다. 그리고 1951년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이때의 공습으로 인해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파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51년 8월에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머포드 신부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 작업을 하였다. 복구 작업은 한창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행되어 1953년에 대부분 완료되었다. 또한 코머포드 신부는 교회 재건과 아울러 한국 전쟁 직후 소 실된 교적을 직접 가정 방문을 하여 재작성하였고, 공소 를 자주 방문하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14대 주임 조응환 신부에 이어 15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한 코 머포드 신부는 1954년에 매괴회와 중 고등부 학생회 를, 1955년에는 교사회를 창립하였다. 한편 1955년 9 월 20일에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1956년 6월 8일에는 그동안 미루어 오던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6대 주임 맥마흔 신부는 재임 시에 공소 개발에 노력 하여 강촌 · 후동 · 추동 공소를 설립한 후 축복식을 거행 하였다. 한편 1962년 3월 10일에 한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춘천도 정식 교구가 되었고, 7월 26일에는 본 당에서 춘천교구 설정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맥마흔 신부는 1963년 8월 15일에 성모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듬 해에는 성모회를 안나회와 샛별회로 분리시켜 운영하였다. 18대 주임 방영구 신부는 부임 후 지역 사회 전반에 걸친 전교에 힘을 쏟아 1968년 9월 5일 일반인의 가입을 허용한 횃불회를 발족하였고, 1971년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춘천교구 제1차 꾸르실료를 여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71년 10월 24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창 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본당 강당에서 거행하였으며, 1972년에는 성모상의 축성식과 함께 교리실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본당에는 1972년 2월 15일에 사랑하올 어머니 쁘레시디움이 발족되었고, 12월 8일에는 샛별회가 재조직되었다. 19대 주임 이응현 신부는 1976년 1월 16일과 2월 15일 교구 차원의 평신도 재교육을 실시하 였다. 그리고 교육 사목에 뜻을 두어 1944년부터 문을 닫아 방치되었던 유치원의 건립에 힘을 쏟아 1978년에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구역반의 활 성화를 도모하여 구역반을 재정비하고, 구역 단위로 미 사 봉헌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본당 신자들의 활성화로 본당에는 1981년 9월 30일에 창조주의 어머니 쁘레시 디움이, 12월 10일에는 천사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발족 되었다. 20대 주임 전세권 신부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특히 각종 신심 단체의 설립이 많았다. 원죄 없으신 성모 쁘레시 디움을 시작으로 많은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나갔고, 1988 년 10월 1일에는 그리스도 어머니 꾸리아가 창단되었다. 그 밖에 행복한 가정 운동회(1984.5), 상투스 성가대 (1985), 성심회(1985. 8), 성체 성혈회(1986. 12), 연령회 (1986. 4) 등을 설립하였다. 1986년 12월 8일에는 교육 관 축복식을 거행하고 1층은 강당, 2층은 각종 회의실, 3층은 수녀원으로 사용하였다. 21대 주임 김택신 신부 는 부임 후 기도하는 본당 공동체, 배움으로 쇄신하는 본당 공동체, 선교하는 본당 공동체라는 사목 방침 아래 먼 저 사목회의 조직과 각종 단체의 재정비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성체 성령 기도회(1990.5)를 설립하였고, 각 신심 단체를 연령을 기준으로 남성 단체는 대건회, 성심회, 요셉회로, 여성 단체는 베로니카회, 성모회, 안나회로 조 정하였다. 또한 구역을 12개로 크게 나누고, 약 15세대 를 한 단위로 하여 60개 반을 편성하는 등 구역 반장 모임을 재정비하였다. 한편 4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성당이 매우 노후 되어 견고한 돌 벽채를 제외하고는 개 · 보수를 넘어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한 형편이 되었다. 더구나 2000년 대희년과 교구 설정 60주년이라는 성숙과 도약의 뜻깊은 해를 아울러 맞게 된 춘천 교구는 그 상징이자 중심인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모습을 일신하여 새 천년기에 들 어서기를 소망하였다. 이에 22대 주임 이정행 신부는 춘 천교구장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주교의 후원과 가 톨릭 미술가회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여에 힘입어, 1998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다섯 달에 걸친 공사 끝에 성당의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순전히 우리 나라 사람들만의 기량과 성의와 노력으로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성당을 완성하여 1998년 9월 14일 중창식을 거행하였 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4일에는 말딩 회관 및 사제관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본당 신자들은 주변 환경을 정리 하고 주교좌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고루 갖추기 위해서 1997년 9월부터 2000년도까지 잔디밭 가꾸기, 나무 심기 등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정행 신부는 2001년 6월부 터 1년간 더 좋은 본당 만들기 운동' 을 전개하여 신자 들의 신앙 생활의 내실화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주임 신 부와 본당 신자들의 노력으로 재탄생한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현재 주임 김현준 신부 재임기인 2003년 6월 25일에 근대 건축 유산 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는 기쁨을 맞게 되었다. (→ 춘천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신문>/ 춘천교구 50년사 편 찬 위 원 회 편, 《춘 천 교 구 50년 사》, 천주교 춘천교구, 1989/ http://juklim.diocc.or.kr 《죽림동 본당 70년사》, 천주교 죽림동 교회, 1990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