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라〕Mors 〔영〕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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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지상 순례의 끝이며 궁극적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다 .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 생활을 하느님의 뜻 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 느님이 주는 은총과 자비의 시간의 끝.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상 생활이 끝난 다음 인간은 또 다른 생활을 위해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 이다"(히브 9, 27). 죽음 뒤에 환생이란 없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죽음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 되어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이다. I. 가톨릭에서의 죽음 인간의 죽음은 임상적으로나 체험에 의해 단순히 정의 내릴 수 없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사목 18항)라고 전제 하고, 죽음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서의 이해에 따라, 육체의 죽음은 자연적인 것 이지만 창조주의 뜻과는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죄의 결 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죽 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 게 되었다고 가르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110항). 〔죽음의 문제〕 죽음과 인간 : 인간에게 죽음은 이별 · 비탄 · 공포 · 불안 · 무력함과 같은 실존 위기로 체험된 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살아 있는 사람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갖는 간접 체험이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은 아 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과 삶이 서로 분리된 이 원론적 이해 안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죽음은 인간 삶의 전체 안에서 발생하는 전인격적인 죽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354~430)는 《고백 록》(Confessiones, 397~401)에서 "인간은 출산에서부터 죽 어 가고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을 출발하여 각자 는 이승의 종결점인 죽음을 향해 매일 한 발짝씩 다가가 는 과정에 있고, 이것이 끝나는 순간이 죽음" 이라고 말 하였다.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인 간 존재에 대해 설명하면서, 현존재(現存在)인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 (Sein Zum Tode)로서 죽음을 떠나서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인간 현 실존 의 삶 안에 이미 죽음이 내재해 있고, 죽음의 상황이 실 존 안에서 계속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 상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만나야 하는 존재이며, 매순간 죽음의 숙명적 사건으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에 의해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건이며, 인간 최고의 결 정적인 행동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결국, 죽음은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의 불합리성 : 현대에 들어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 에 있어서 최고의 불합리성이 드러나는 마지막 사건이라 고 부른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J.-P. Sartre, 1905~1980)는 죽음을 "갑작스러운 멈춤, 돌아감, 한계, 허무로의 추락" 이라고 하였다. 죽음은 탄생처럼 예상치 못하는 불합리 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 존재의 자유를 박탈 하고, 충만된 모든 가능성에 종말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잡아먹으며 공포의 심판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또한 프랑스 작가 카뮈(A. Camus, 1913~1960)는 죽 음이 인간을 총체적 고통과 불합리하고 의미 없는 실존 적 삶의 중심으로 내몬다고 하였다. 분명한 것은 삶이란 충만을 지향하지만, 죽음은 불합리성을 만든다는 것이 다.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모든 대중 매체들은 지속적으 로 죽음의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준다. 따라서 우리 는 전쟁 · 테러 · 학살 · 교통 사고 등 죽음의 공포들이 왜 매순간 인간 존재를 감싸고 발생하는가?라는 의문을 갖 게 된다. 만일 죽음이 삶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희망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피할 수 없는 총체적 육체의 파괴와 점령으로만 끝이 난다면, 삶 그 자체에서 인간은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불가피성 :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 이고 역사적인 구조를 가지고 제한된 환경 안에 살고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한계는 생명이 결코 인간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드러내며, 또한 인간이 모든 실재의 자율적 지배자일 수 없음을 드러낸다. 나아 가 죽음은 생명을 끝없이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 함과 수동성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죽음 은 삶의 일부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구 별하여 생각하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으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자 신의 삶 속에서 죽음의 요소를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삶 안에는 죽음이 이미 깃들어 있다. 이렇게 인간은 살아가 는 세상 안에서 죽음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라 너(K. Rahner, 1904~1984)는 "죽음이 진화론적 세계관 안 에서는 다른 생명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 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죽 음은 삶에 깊이를 더욱 부여한다. 의학이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킨다고 해도 과연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질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만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 의 삶은 피상적이 되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책임 의식이 없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 삶과 더 불어 있기에 삶은 더욱 풍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이해〕 일반적 이해 : 죽음으로써 육체의 삶이 끝난다고 통속적으로 죽음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동물들과 같이 원소로 구성된 인간은 원소로 환원되고, 의식이나 정신 작용은 물질의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여 육체의 분해와 함께 스스로 사라지고 만다고 인간의 죽 음을 설명한다. 이는 유물론자와 무신론자들의 생각으로 죽음은 단지 생명이 사라져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 일 뿐이고, 이들에게 죽음의 형이상학적 이해는 무의미 한 것이다. 한편 범신론자와 윤회론자 그리고 심령주의 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어떤 모양 으로든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이해한다. 구체적으 로 범신론자들은 죽음과 함께 영혼은 개별적 생명을 상 실한다고 보며, 윤회론자는 윤회를 통해 영혼이 정화되 어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심령주의자들은 죽음을 유체 (流體)와 육체의 결합이 이탈된 상태로 본다. 따라서 그 들은 죽음으로 육체만 분해되고 영혼은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여겨, 죽은 사람의 혼을 현상 계에 불러내어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죽은 자를 위 해 제사를 지내는 한국 민간 신앙도 죽음을 이렇게 이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령학적으로 죽음은 귀향이며, 이 세상에서 탄생은 고향을 떠나 옴을 뜻한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 죽는다는 것은 '돌아감' 이다. 즉 저 세상으로 건너감(depature)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는 '환원'(return)이다. 철학적 이해 : 죽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연구는 수세기 동안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되어 왔다. 죽음에 대한 초기 철학적 인식은, 죽음이 몰고 오는 공포를 사람들이 어떻 게 완화 내지 극복하느냐 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었 다.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사후 세계를 무 (無)라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생활에만 충실하려고 하였 다. 플라톤(기원전 428/427~ 348/347)은 죽음을 신체로부 터 불사의 세계로 영혼을 옮기는 일로 보았다. 한편 아리 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는 '소멸' 에 대해 언 급하면서, 소멸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넘어가는 운동 또는 변화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그는 운동과 변화에 대 해서 말했을 뿐이지 생성과 소멸의 문제, 즉 죽음의 문제 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헤겔(G.W.F Hegel, 1770~1831)은 '무' 로부터 존재로 건너가는 생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무' 는 순수 한 무가 아니라 어떤 것(Ewas)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존 재로부터 '무' 로 넘어가는 소멸을 다루면서도 존재가 사 라지는 '무' 를 순수한 무로 보지 않고 다만 다른 어떤 존 재로 보고 있다. 19~20세기에 실존 철학은 죽음의 의미를 가장 절실 하게 다루었다. 실존 철학은 전통 철학의 관점에서 벗어 나 죽음의 공포를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룬다. 하이데 거는 죽음이 미래에 언젠가 닥쳐올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현존재의 구성 요소라 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죽음을 시간적으로 하나의 '아직 아니' 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 로서 현존재를 규정한 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죽음을 존재의 가능성으로 보고, 현존재로서 인간은 스스로 이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되며, 죽음 속에서 존재의 출발점을 찾게 된다고 하였 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의 죽음〕 고대 셈족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넓게 일반화되어 있는 그리스 사상의 이분법적인 인간의 이해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육체와 정신의 단순한 분리로 성서적 죽음을 이해하려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성서 안에서 일관된 죽음의 견해 를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입장 들을 대하게 될 뿐이다. 구약성서 : '죽다' 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는 '무트' (מוּת)이고, '죽음' 이란 단어는 '마베트' (מָוֶת)이다. 구약성서는 죽음의 기원을 아담의 범죄에서 연유한 것으 로, 죄의 대가로 이해하고 있다(창세 2. 17 ; 예레 31, 30 : 전도 9, 3) . 구약에서 죽음은 인간이 생활하던 자리를 떠 나 '셔올() , 어둠, 죽은 자가 가는 우울한 나라로 옮겨감' 이라고 나타난다. 그곳에는 행복도 없고 하느님 의 찬미와 찬양도 없다(시편 6, 5 ; 이사 38, 18). 구약의 후기 문헌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음으로써 죽음은 정신의 불멸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로 이해되지만(다니 12, 2), 죽 음이 정신과 육체의 분리(지혜 3, 1-5, 4. 15)라는 그리 스 철학의 죽음 개념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때로 죽음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기도 하는 등, 인간이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죽음을 신앙과 연관 짓고 있다. 우선 구약의 족보와 초기 전승에서 나타나듯이, 죽음은 오랫동안 살 아간 다음 다가오는 보통 사건으로 나타난다(창세 5 : 25, 7-11 ; 2사무 14, 14). 즉 구약성서는 '죽음의 보편성' 에 대해 말한다. 성서의 계시는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 고, 죽음의 사실을 뚜렷이 직면함으로써 죽음에 대해 말 한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내리신 주님의 선 고" (집회 41, 4)이며, 모든 사람이 "보게 될 죽음"(시편 89, 49)이요, 인류의 공통된 숙명으로서 "온 세상이 가야 할 길"(1열왕 2. 2 : 집회 8, 7)이기에 모든 사람은 이에 대 처해야 한다. 또한 구약성서는 인간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인생의 허무함' 을 살아간다고 전한다. 즉 인간은 "땅에 엎질러져서 다시는 담을 수 없는 물같이 죽은 몸" (2사무 14, 14)이며, 사라질 존재요 입김(시편 38, 6. 12 : 49, 13. 21 ; 82, 7 ; 89, 43)이고, 인생은 한낱 숨결이요 허무에 지나지 않는 것(욥기 14, 1-12 : 지혜 2. 2)이라고 한다. 한편 구약성서에 나타난 생명의 의미를 살펴보면, 기 본적으로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고 있다. 즉 생명은 단순히 생존(生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 람들과의 공동체 관계 속에서, 안전과 건강과 재산과 행 복이 실현되는 곳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생명은 어떤 독립적이고 신비스러운 힘 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는 것이며, 그 충만함은 오직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흙에 입김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 님이 언제라도 당신의 원의에 따라 생명의 입김을 자유 로이 앗아 가실 수도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 럼 그들에게는 죽음도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었다 (신명 32, 39). 따라서 구약성서는 죽음을 일반적으로 '생명의 자연적인 경계선' 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하느 님의 명령으로 여겨 순순히 받아들였고, 죽음이라는 것 속에서 전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았다(여호 23, 14 : 1 열왕 2, 2). 오히려 인간에게 닥치는 죽음을 자연적 현상 이라고 말한다(전도 3, 2 ; 12, 7). 구약성서는 죽음을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벌' 로 이해한다(창세 2, 17 : 지혜 1, 12).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았으며(지혜 1, 13), 인간을 죽음을 모르는 존재로 창조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 때문이며,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로마 5, 12 : 1고린 15, 26).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 라 산 자들의 하느님이다(지혜 1, 13-14 : 이사 25, 8). 따 라서 죄는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악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길' 이 다. 구약성서는 죄를 짓는 악한 인간이 맞는 죽음은 정당 하다고 표현한다(욥기 18, 5-21 : 시편 37, 20-28. 36 ; 23, 27 : 에제 18, 20). 죽음의 특징은 인간이 자신의 명대 로 살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때가 차 지 않은 죽음은 언제나 생명의 원수인 죄의 대가로 나타 난다(2사무 12, 16). 반면 구약성서는 죽음을 '하느님의 축복' 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느님 안에서 맞는 이상적인 죽음은 노년 기의 죽음이다. 즉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에 따르는 사람 에게 복으로 장수를 허락하였다. 아브라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창세 25, 8). 그의 죽음은 "곡식이 영글어 타작 마당에 이름" (욥기 5, 26)과 같이 생애의 풍성한 결실로 서, 우울한 결말이 아니라 평화로운 성취인 것이다. 그러 므로 이러한 죽음은 인생 목적 성취의 마무리로서 인간이 만나야 할 죽음이지, 어쩔 수 없이 처해야 하는 죽음 이 아닌 것이다. '장수' 와 '고령' 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 은 이들이 맞게 되는 죽는 순간의 모습이다(창세 35, 92 판관 8, 32 욥기 42, 17 ; 1역대 24, 15). 신약성서 : 신약성서에서 '죽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트네스코' (θνήσκω)이고, '죽음' 이란 의미의 명 사는 '타나토스' (θάνατος)이다. 신약에 나타난 '타나토 스 는 단순한 신체적인 죽음(1데살 4, 15-16)과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죽음(요한 5, 24 ; 로마 5, 12)으로 구분된 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서(로마 5, 12), 모 든 육체적 요소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로마 8, 13). 죽음 은 사건인 동시에 상태이다(필립 1, 20 ; 히브 7, 23). 이 죽음을 종결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고, 이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지금' 시작되었다. 하지만 완성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1디모 1, 10 : 히브 2, 14). 신약은 구약성서의 전승을 수용하면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구원론적 의미에서 반성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위한 참 증거자인 예수는 죽음 후 부활로써 그 정당함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의 죽음관도 구약의 전 승을 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바오로는 죽음이 은총과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과 더불어, 타락한 인간 조건에 대비하여 죄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로마 5, 12-21 ; 6, 23). 인류의 시조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로마 5, 12. 17; 1고린 15, 21).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죽게 되었고(로마 15, 22),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기에 (5, 14) 죄는 죽음의 독침이며(1고린 15, 56), 죽음은 죄 의 열매이다(로마 6, 16. 21. 23). 그리고 하느님의 피조 물인 인간의 몸은 죄에 의해 죽을 몸이 되었다(7, 24). 이처럼 죄로 인한 죽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상실하고, 거 룩한 성령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약성서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하지 않고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죽음은 늘 인간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그리스도 없이 인간은 죽음의 그늘에 잠겨 있게 되고(마태 4, 16 : 루가 1, 79), 하느님이 죄스런 세상에 내리는 환난 가운데 남아 있게 된다(묵시 6, 8 ; 8, 9 : 18, 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물리쳤다(히브 2, 14 ; 2디모 1, 10). 그의 부활로 인류는 최후의 암흑에서 해방되었고, 인간은 희망 없는 이기적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 삶의 완결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 옮아 감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구원의 도구로 사 용하여 죽음의 의미를 바꾸었다. 즉 스스로 "나는 부활 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 한 11, 25 ; 필립 3, 10-11)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인간에게 죽음의 저주는 축복으로 변화되었다(로마 5, 19-21).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인 동 시에, 하느님이 지상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 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주는 은총과 자비 의 시간의 끝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13항). 또한 그 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왔다가 하느 님에게로 돌아감(요한 16, 28), 곧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 기 위하여 자비롭고 의로운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는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은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서 영원한 삶의 관문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 음 그리고 부활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죽음의 모델이다. 〔교회의 가르침〕 전통적 교리에 나타난 죽음은 죽음 후의 부활 · 심판 · 지옥 · 하느님 나라와 함께 다루어졌 다. 그리고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D. 788, 793), 원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였다(DS. 222, 372, 1511, 1521). "물질적 궁핍, 부당한 억압, 육체적 · 정신 적 질병, 끝으로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비참은 원죄 이후 인간이 놓이게 된, 타고난 나약한 처지 와 구원의 필요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표지이다." 또한 죽음이란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위한 하나의 전초 적인 단계이자 동시에 지나가는 과정이며, 신앙으로 이 끄는 하나의 요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죽음으로 세례로 시작된 새 생명이 완성되며(《가톨릭 교회 교리서》 1682항), 예수께 돌아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1020항). 죽음은 지상 생활의 마침이지만(1007항), 그리 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죽 음에 대한 교회와 신앙인의 시각을 전례는 탁월하게 표 현하고 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 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위령 감사송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천명하면 서 죽음에 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였다. 공의회는 "죽 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사목 18항)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믿음이 부족하면 죽음의 수 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21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갈망할 것"(41항)이라고 함 으로써 인간이 지닌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의문을 인정 하고 있다. 죽음에 관한 최근 교회의 입장은 신앙 교리성 의 <종말론의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한 서한>(Recentiores episcoporum synodi, 1979. 5. 17)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는 가? 라는 질문에, 영성적이고 인격적인 측면에서 해답을 제공하였다. 즉 죽음은 인격적이며 영성적 위격인 인간에 관한 사건이며, 인간 전체에 관한 사건으로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인간 행위의 문제라고 하였다. 〔신학적인 견해〕 죽음에 관한 신학적 이해의 원리는, '죄의 신비' 와 '예수의 구원적 죽음의 신비' 에 모든 인간이 노출되어 있는 현상에 죽음을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의 신학은 육체와 정신의 분 리라는 죽음에 관한 교과서적 정의를 점차 뛰어넘고 있다. 따라서 비록 성서와 교도권의 가르침에 죄와 죽음 사이의 연관성이 받아들여지지만, 단지 죄에 의한 벌로 죽 음을 바라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죽음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발생하는 그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독특한 본질과 관련된 특별한 인간 활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자유로운 인간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인 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음으 로써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 마지막 봉인을 놓는 자유의 결정적 행위이다. 보로스(L. Boros, 1927~1981)는 죽음을 인간적 정신과 영혼의 해방이라 하였다. 그는, 인간은 죽음에서 자기 전 존재의 존립을 일시에 구현한다고 보고, 죽음의 순간에 최종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에 이른다고 하였다. 라너는 최종 결단성으로서 죽음을 자유의 근본적 본질에서 전개하며,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 라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점유할 수 있 는 주체의 기본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이 자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유일회적으로 스스로 취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펼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 리고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단순히 드 러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어둠과 위협의 신비로서 체험하는 현 존의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 면, 만일 죄가 우리의 모든 생활 경험 을 왜곡하고 어둡게 한다면, 죄는 우리 마지막 경험을 죽음 안에서 왜곡하고 어둡게 하는 것이다. 또한 라너와 더불 어 라칭거(J. Razinger, 1927~ )는 인간은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손길로 다가 가려는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데, 이것 이 죽음의 신학을 드러내는 중심의 신 비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바로 믿는 자 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충만하게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기본 신비는 이미 작은 죽음, 즉 우리가 스스 로를 이웃과 하느님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예상 된다. 인간 자유의 행동으로서 죽음의 순간은 역시 정화 와 심판의 순간으로 나타난다. 어떤 신학자들은 정화는 죽음의 순간에 충만히 발생한다고 하였고, 인간 존재의 모든 단계로 점차 파고들어오는 과정 안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서 성사들은 구원을 적용시키는 기본 행위들을 가시적인 형태로 표상하는 것 이며, 이 기본 행위들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적용시키는 일이다. 즉 성사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능력과 효과를 얻고, 매순간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 음과 접하게 만든다. 우선, 세례성사는 그리스도의 죽음 에 성사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이다. 즉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게 된 다(로마 6, 1-11). 왜냐하면 세례성사는 은총 생활에 들어가는 입문이며, 은총만이 죽음을 그리스도다운 죽음으 로 만들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고 재현함으로써 그분의 죽음이 우리 안에 실제로 효력을 내게 한다. 즉 이 성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십자가상 죽으심의 신비를 포함하며, 십자가 죽음의 구 원론적 의미를 우리에게 소통시키고 있다. 병자성사는 육체적 병고라는 상태에서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맺 는 관련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병자성사의 은총으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자다운 태도로 아픔을 견딜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이며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사건이고, 나아가 인격적 사건이며 희망의 사건이다. 인 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부활의 희망을 죽음 속에서 발견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희망 할 수 있다. 결국 죽음은 인간에게 절망과 좌절이 아니라 희망의 사건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은혜의 때 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이 삶의 끝을 직감하고, 인 간이 누구인가를 거짓 없이 바라보게 하며, 인간 실존의 깊이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따라서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며, 삶을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죽음 안에 서 삶의 전체가 궁극적인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 을 체험하는 것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이다. (↔ 생명 ; → 부활 ; 사말 ; 심판) ※ 참고문헌 김정우,<삶과 죽음에 관한 이해>, 인간 본질에 관한 심층적 이해 모색 Ⅲ, 인간학연구소 제3회 심포지엄(2001. 10), pp. 12~29/ 이인복,<한국 문학에 나타난 죽음 의식 연구>, 숙명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78/ 정달용,<철학적으로 본 죽음>, <사목> 70 호(1980. 7) p. 14/ M. Bordoni, Dimensioni antropologiche della morte, Roma, 1969/ L. Boros, The Mystery ofDeath, Herder and Herder, 1965/ ㅡ ㅡ, Last Things in Recent Theology, Herder Correspondence 4, 1965, p.119/ P. Grelot . E. Borne, 《DS》, pp. 1747~1769/ G. Greshake, Stärker als der Tod, Mainz, 1976/ M. Heidegger, Sein und Zeit, Tubingen, 1972/ M.Hellwig, What are They Saying about Death and Christian Hope?, Paulist Press, 1978/ R. Moody, Life after Life, Bantam, 1975/ K. Rahner, On the Theology of Death, Herder and Herder, 1961/ ㅡ, 《SM》 2, New York, 1968. 〔郭承龍〕
Ⅱ. 한국 무교에서의 죽음 무교적으로 표현되더라도 그 안에는 죽음에 대한 보편 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인 관심 영역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보편적 주제를 지니고 있으므로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무교적 관점, 죽음 이후 저승으로 가는 자들과 그들에 대한 심판, 어떤 사람이 죽음 이후에 행복한 생을 영위하는지에 대한 관 점, 저승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죽을 수밖에 없 는 인간이 저승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모든 주제들이 무 교에도 모두 망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이 세 상에서 눈에 보이는 육체를 지니고 살다가 생물학적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고, 다른 차원의 영원한 생명으 로 차원을 달리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 저승으로 가거 나 동일한 생명인데, 다만 그 동일한 생명이 차원을 달리 하는 것뿐이라고 믿고 있다. 즉 생명 그 자체는 영원하다고 보고 있다. 죽음에 대한 한국 무교의 특징을 지적하기 위해 저승보다는 이승, 죽음과 한의 문제 등에 국한해서 생각해 본다. 〔저승의 모습〕 한국 무교에서 그려지고 있는 저승의 모습은 매우 음침하고 고통스러운 곳이어서 갈 곳이 못 된다. 그것은 '저승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이승만 하겠는 가 라는 일반적 정서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이승으로 환생하는 것도 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주도 시 왕맞이에서 이런 관점들이 종합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 다. 시왕맞이는 명부(冥府)의 시왕〔十王〕을 맞아들여 기 원하는 의례이다. 시왕은 명부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생 명과 죽은 사령(死靈)들을 동시에 관장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의 정명(定命)이 다하면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차사(差使)들을 시켜 잡아오도록 하여 심판 을 통해 지옥과 극락으로 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바로 시왕이다. 시왕은 사령을 생시의 업보에 따라 심판 하는 존재이므로 무섭게 투영되었고, 한국인의 지옥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생사의 문제를 관장하는 이 신에 대한 의례를 '시왕맞이' 라고 하는데, 한국의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시왕맞이는 집 안에 중환자가 있을 때 시왕에게 질병을 거두고 정해진 수명을 늘려 줄 것을 기원하는 경우와 죽은 뒤 사령이 살 아 있을 때의 죄보(罪報)를 용서하여 극락으로 보내 줄 것을 기원하는 경우에 거행한다. 사령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헤매게 되면 잡귀가 되어 인간계에 해 를 줄 수 있으므로, 이 시왕맞이는 아주 중요한 의례이 다. 제주도의 시왕맞이는 다른 지역보다 복잡한 감이 있으나 한국의 대표적인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간단 명료한 관점을 지니고 있 다. 즉 누구나 이미 정해져 있 는 명수(命數)에 대한 관념이 다. 그것을 시왕맞이에서는 '정명' (定命)이라고 한다. 또 한 사람 각자의 수명을 기록해 둔 명부(名簿)가 저승에 있고 그것을 관장하는 직책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 그것을 "열시 왕〔十王〕 장적 (帳籍) 보니 검 은 낙점(落點)이 절로 찍혀져 정명이 매겨져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론적인 입장이다. 즉 인간이 아무리 발버등을 쳐 보아도 자신의 정해진 명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둘째, 인간의 정명을 예외 없이 집행하는 저승에서 파견한 차사는 인정사정없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 있는 것 은 이렇게 무서운 차사이지만, 차사의 방문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신(家神)들이 잠들지 않고 지키고 있으면 아무리 저승 차사라도 죽어 가는 사람을 쉽게 데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정명이라는 천도 (天道)를 집행하는 저승 사자라도 견제할 수 있는 장치 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저승 사자는 비록 차가운 명계(冥界)의 법을 집행하는 자이지만 때로 는 인정에 약하기도 하다. 아무리 천도라 할지라도 사람의 인정으로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관점이 반 영되고 있다. 셋째, 주목되는 대목은 저승 차사가 죽어 가는 영혼을 데려가는 모습이 마치 죄지은 사람을 심판대로 끌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저승 차사는 죽은 영혼의 팔을 오랏줄로 묶고 발에 족쇄를 채워서 끌고 간다. 이것은 주어진 삶 동안에는 너의 자유 의지대로 살도록 하였지만, 그 삶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의 대상이라는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저승은 참으로 갈 곳이 못 된다. 또한 저승길은 험하다고 한다. 가는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저승 자체가 너무도 엄한 곳이어서 한 점의 잘못도 용서가 되지 않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산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렇기 때문에 누구나 저승에서는 떨 수밖에 없다. 저승은 마치 구중 궁궐과 같이 묘사되어 명왕(冥王)이 거처하는 곳까지 가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망인(亡人) 은 5개의 군문(軍門)을 거치는데, 각각 문을 지키는 무 서운 문지기들을 달랠 수 있는 인정(財貨)을 내라는 호 령을 듣기도 한다. 인정은 망인을 저승으로 보내 주는 굿 에서 저승에 가는 노자(路資)로 받아내는 돈으로, 각 단 계마다 인정을 내야 통과할 수 있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넷째, 이렇게 해서 지옥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제주도 '해심곡' 에서는 15개의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 그 지옥에는 담당하는 대왕들이 따로 있고, 각각 죄의 성격에 따라 심문하는 내용이 다르며, 누구나 그중 어떤 죄에 해당하든지 죄를 짓게 되면 그 해당 지옥으로 가게 되 어 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어 급식 공덕을 하였느냐?" 라고 심문할 때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칼날이 위로 솟은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되는 도산지옥(刀山地獄)을 가게 된다. "너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어 급수 공덕을 하였느냐?" "벗은 사람 에게 옷을 주어 착복 공덕 하였느냐?" 라고 심문할 때 그 런 적이 없다고 하면 끓는 물에 몸을 담그는 화탕지옥 (火湯地獄)을 가게 된다. "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와 화목하였느냐?" 라고 심문할 때 그런 적이 없다고 하 면 얼음 속에 몸을 묻어 놓는 한빙지옥(寒水地獄)에 가 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삶은 심판을 위해 주어진 인생의 학교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삶 전체는 죽어서 반드 시 심판을 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종합 시험을 쳐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15개의 지옥 이름, 지옥의 담당자, 심문 내용, 징벌의 내용들은 각각 다르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을 베풀고 살면 그런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죽음과 한〕 무교에서는 명을 다하고 만족스럽게 죽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덜하고, 불의에 죽음을 당하는 등 만족스럽지 못하고 한을 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유교, 불교 등과 특히 대 조적인 면이다. 무교에서는 대개 정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은 한이 남게 마련이라고 전제한다. 불의의 사 고로 죽은 사람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바다에 빠져 죽은 이를 위한 동해안 오구굿과 같은 것은 그 가운데 대표적이다. 더욱 이 죽은 망자가 과부의 외동아들일 경우 한의 깊이는 측 량할 수 없이 깊다고 여겨졌다. 이 경우 바닷가에서 굿이 벌어지는데, 일단 죽은 영을 불러오는 것으로부터 시작 한다. 모든 신령들의 보살펌으로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 록 간절히 빈다. 이런 의식의 밑바탕에는 죽은 영이 저승 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것과 그 영은 자기가 죽은 바다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머물고 있다는 관점이 전제되고 있다. 즉 원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 를 떠돌고 있으며, 굿을 통해서 가족들과의 화해를 이룩 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원혼이 자기 정화를 해야 한다. 자기 정화의 구체적 내용은 확실치 않지만, 망자에게 "너는 죽은 존재로서 네 현실을 받아들여라"라는 메시지 를 전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굿에서는 무당이 망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왜냐하면 가족들과 망자가 슬픔과 한 을 공유하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당은 이 경우 망자의 영매(靈媒)로서 망자의 슬픈 한을 이승에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남김없이 전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 로 생각하면 외아들과 갑자기 사별한 과부의 한이 더욱 클 수 있다. 무당이 영매가 되어 "어머니, 이렇게 죽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 과부는 찢어지는 슬픔 과 함께 좀 더 잘해 주지 못했던 죄책감이 되살아나 슬픔 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비록 외아들의 육신을 만지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자가 부등켜안고 한을 달래는 동 안,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죽음의 신비로 가득 찬 무당 의 춤과 노래가 장내에 잔잔하고 엄숙하게 울려 퍼지게 된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임과 함께 슬픈 마음으로 가족은 망자를 위해 무엇을 해 주고 해 주지 못했는지, 또한 망 자는 가족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고 못해 주었는지를 회 상하게 된다. 거기에는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망자에게 이제 제삿밥을 받아 먹는 조상이 되어서 이후 로 섬김을 받을 것이니 마음놓고 저승으로 가라고 말해 준다. 이와 같은 방식은 단지 죽은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절차만이 아니라, 한으로 맺어진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난 해방과 죽음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즉 해방과 완성이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동해 안 굿에서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령은 바리 공주이다. 바리 공주로 분장한 무당이 아름답게 모든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춤을 춘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관념 없이 대중들의 삶과 죽음에 눈높이를 맞추어 경이 로운 인간의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된다. 해 방은 망자만이 아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마음 속에 도 생겨나는 것이다. 망자가 된 자식과 과부는 가족 공동 체 안에서 하나의 화합을 이룬다. 가족의 화합과 대를 잇 고자 하는 한국인의 소망을 이런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세의 삶이 파괴되지 않고 영속되고, 그냥 영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부터 풍요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의 무교에서는 죽으면 주로 신령들이 아니라 조상 들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죽음은 육신의 틀을 벗어던짐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한으로 부터 해방되어 올바로 죽고 올바로 인도되는 영혼은 마치 고치가 나비가 되어 새로 태어나듯이 저승에서 거듭 날 수 있다. 영혼은 결코 죽음이 없다. 이런 무교적 관점 에서 곧잘 삶과 죽음을 하나의 해학으로 그리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해학이란 죽음을 넘어선 관점에서 삶과 죽음 을 되돌아보면서 생기는 모순과 통일의 복잡한 감정이 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에 집착하는 관점에서 어찌 해학이 나올 수 있을까? 죽어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 큰 집착을 하게 되면 저승으로 쉽게 갈 수 없다는 관념도 있다. "부모 초상에 막내가 울면 부모가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 라는 말이 그 런 생각을 반영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제 욕심만 채우고 남을 돕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가서 온갖 고초 를 겪게 되지만, 못된 짐승으로 환생한다고 믿기도 한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민(饑民)도 안 하고 혹독한 착취만 하다 죽으면 저승에 가서 구렁이가 되어 철망을 쓰게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민간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망자를 위해 경을 읽 는다거나 선행을 하면 망자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은 영혼을 위한 경문을 읽어 주면 죽은 사람의 영 혼이 잡귀들의 시달림을 받지 않고 저승까지 잘 가게 되 며, 집안에도 우환이 끓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민간 풍습의 언어가 그것을 잘 반영한다. 이런 면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하나의 공동체로서 일정한 끈이 연결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불사불멸, 종교학에서의)
※ 참고문헌 玄容駿, 《濟州道巫俗資料事典》, 新丘文化社, 1980/ 김태곤, 《韓國巫俗研究》, 집문당, 1981/ 이은봉, 《한국인의 죽음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李恩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