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中國 〔영〕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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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선교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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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선교사 활동.


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면적이 큰 인민 공화제 국가. 공식 명칭은 중화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인구는 1,284,211,000명 (2002), 면적은 9,572,900K㎡이다. 남쪽으로는 베트 남 · 라오스 · 미얀마, 남서쪽으로는 네팔 · 파키스탄 · 아 프카니스탄, 북쪽으로는 타지키스탄 · 키르기스스탄 · 카 자흐스탄 및 러시아 · 몽골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수도는 북경(北京, 베이징) 이며, 공식어는 표준 중국어이고, 국교는 없다. 중국 내 의 다양한 민족 중 한족(漢族)이 전체 인구의 93%를 차 지하며, 22개의 성(省), 5개의 소수 민족 자치구, 3개의 직할시로 행정 구역이 나뉜다. 중국은 세계 4대 문명권 중 유일하게 자생(自生) 종교 가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자생 종교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은 오히려 종교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가져 한(漢) 시대(기원전 206~서기 220)인 서기 1세기경 불교 가 전래되었고, 당(唐) 시대(618~907)인 7세기경 이슬람 및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다. 이들 종교는 비록 외래 종교였으나 중국의 고유 문화와 쉽게 결합하여 중국 전통 문화의 한 부분으로 성립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I. 가톨릭의 전래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전래〕 중국에 처음 전래된 그리 스도교는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us)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의 주장을 믿던 이들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로마에서 추방되 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리아를 거 쳐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고, 그 뒤 페르시아, 소아시아 그리고 중앙 아시아 및 중국 등지로 전파되어 16세기 이 후 정통 그리스도교가 동양에 전래될 때까지 교세를 유 지하였다. 중국에는 635년 당(唐) 태종(太宗, 626~649) 정관(貞觀) 9년에 시리아 출신 수도자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하는 21명의 선교사 일행이 수도 장 안(長安, 현재의 西安)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경교' (景敎), 또는 로마 제국을 뜻하 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 경교 라고 불렸는데, 전래 이후 200여 년간 중국에서 상당한 교세를 유지하며 번 창하였다. 638년에는 당 태종의 승인을 받아 장안에 대 진사(大秦寺)를 세우고, 《서청미시소경》(字廳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 《삼위몽도찬》(三威蒙度讚) 등의 한문 서적을 만들어 경전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781년 덕종 (德宗, 780~805)의 허락을 받아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는 석비를 세워 약 150년간의 역사 및 선교 활동을 새길 정도로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 작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845년 무종(武宗, 840~846) 회창(會昌) 5년에 실시된 회창 금교(會昌禁敎)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다. 그리고 경 교의 수도자들은 강제로 환속되었고, 신자들은 경교를 떠나야 했다. 이 탄압으로 경교는 크게 타격을 입었는데, 그 후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외래 종교인을 학살함 으로써 다시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뒤 남 은 신자들은 몽골, 중앙 아시아 등지로 피신하거나 신앙 을 버리고 불교나 도교로 개종하여 약 20만 명으로 추산 되는 경교 신자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경교는 정통 그리 스도교의 전래에 앞서 중국에 그리스도교 사상을 소개하 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활동〕 원(元) 제국 시대(1279~ 1368)에는 몽골족의 세력 내에 있는 중앙 아시아, 인도, 중국 각지에 경교가 다시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최초로 가톨릭의 프란치스코회가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황 니콜 라오 4세(1288~1292)는 1289년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Johannes de Monte Corvino, 1247~1328)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1292년 칸발 리크(Khanbaliq, 현재의 北京)에 도착하여 원 성종(成宗, 1294~1307)의 허락을 받아 두 개의 교회를 세우고, 이어 천주(泉州, 취안저우)를 비롯한 기타 도시에도 선교하여 1306년까지 중국에서 5,000여 명의 신자를 얻었다. 1305년과 1306년에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성공적 인 선교를 보고 받은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는 1307년 요한을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그를 보좌할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원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들며 정치적 · 사회적 동요와 혼란은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 교황이 원에 파견한 마지 막 선교사 마리뇰리(Giovanni dei Marignoli, 1290?~1357?) 는 1342년에 북경에 부임하였다가 1347년 본국으로 귀 환하였다. 원 제국이 멸망하면서 선교 활동은 더이상 이 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에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 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 1610)가 중국에 입국하였 을 때에는, 경교는 물론 프란치스코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Ⅱ. 예수회의 선교와 중국 선교의 성공 명나라(1368~164) 말기에 가톨릭이 전래되었는데, 이 시기에 교회는 중국 교회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 고, 동 · 서양의 문화 교류에도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 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 의 항해로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가 개척된 후, 탐험가의 뒤를 이어 상인들이 향료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으려고 동양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가톨릭 선교사들도 선교를 목적으로 이들의 항해에 참여하였는데, 그 주역은 예수 회 선교사들이었다. 1517년 루터(M. Luther, 1483~1546) 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에 많은 지역과 신자들을 잃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회 는 1534년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 1556)에 의해 창설되어 1540년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이들은 유럽에서 상실한 가톨릭 신앙 영역의 회복과 동 양에 대한 선교를 목적으로 하여, 1530년 이래 포르투 갈의 지배 아래 있던 인도의 고아(Goa)를 거점으로 적극 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예수회 창립 회원으로 일 본에 복음을 전하였던 사베리오(F. Xaverius, 1506~1552) 는 중국 선교를 위해 1552년 광동(廣東, 광둥) 근처의 상천도(上川島, 상치안 섬)에 상륙하여 내지로의 진출을 모색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중국 선교는 이로부터 30 년 후 마테오 리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이것이 17세기 이후 수많은 박해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존속하는 중국 교회의 시작이다. 〔예수회의 선교〕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 착하여 당시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巡察使, visitator)인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8~1606)의 지시에 따 라 중국어와 풍습 및 문화를 익힌 후, 1583년 루지에리 (M. Ruggieri, 羅明堅, 1543~1607)와 함께 광동성 조경(肇 慶, 자오칭)에 입국하였다. 그 후 소주(詔州, 현재의 韶 關) · 남창(南昌, 난창) · 남경(南京, 난징)를 거쳐 드디어 1601년 북경에 정착할 수 있었다. 적응주의와 한역 서학서 : 16세기 말의 중국은 명의 건국(1368) 이후 강력한 절대 군주 체제를 통해 대외 정 책에 폐쇄적이었으며 외국인의 입국과 체류가 어려웠다. 그러나 발리냐노와 마테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깊이 영 합하는 '적응주의' 노선의 선교 방법으로 중국 교회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선교 방법은 그 리스도교 문화의 중국 전수라는 관점에서 서양 과학과 기술을 전해 주면서, 아울러 중국 황실의 묵인하에 선교 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배우 고,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고, 유학자의 복식을 입었으며, 유학 경전을 능숙하게 인용하여 천주교 교의를 해석하였 다. 사상적으로는 유학을 중국의 전통 윤리 사상으로 수 용하였는데, 특히 원시 유교 사상의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와 상통한다고 여겨 그리스도교의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 정책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 아울러 수학, 천 문학, 지리학 등 서양의 과학 지식을 소개하고 세계 지 도, 시계(自鳴鐘), 천구의(天球儀), , 프리즘, 망원경 등 서양의 기기(器機)를 선물함으로써 중국 사대부 지식층 과의 교유에도 성공하였다. 그들 중 세례를 받은 대표적 학자로는 중국 교회의 세 기둥〔三柱石〕인 서광계(徐光 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5~1630), 양정균(楊廷 筠, 1577~1627)과 구태소(瞿太素) , 풍응경(馮應京, 1555~ 1626), 이천경(李天經), 왕징(王徵) 등이 있다. 예수회의 주목할 만한 선교 수단은 서양의 종교, 윤리, 과학, 기술 등에 관한 책을 한문으로 저술하거나 번역한 이른바 한 역 서학서(漢譯西學書)인데,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 한 1583년부터 18세기 말까지 약 2세기 동안 대략 400 여 종이 출간되었다. 선교 지역에 비해 교회와 선교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 한역 서학서는 많은 사 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선교할 수 있게 하 였고, 더구나 한문 서적이므로 조선과 일본에서도 번역 없이 지식층에게 읽힐 수 있다는 부차적인 이점도 있었 다. 그중 대표적인 서적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 主實義)로서, 조선에 전해져 조선의 지식인에게 서학과 천주교의 본질을 알려 자생적 천주교 형성의 기초가 되 었다. 이로써 선교지의 문화에 대한 적응주의 선교 방법 은 서양 문물의 소개와 전달, 재생과 응용을 통해 여러 분야에 걸쳐 동양에 서양의 정신, 물질 문명을 능동적,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예수회는 중국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해 : 명나라 시기에는 두 차례의 박해가 일어났다. 이전에도 이미 사적으로 선교사들을 구금, 구타하거나 교회를 습격하고 파괴하는 사건들은 많이 있었다. 그러 나 최초의 공적 박해는 남경박해로서 1616년(신종, 만력 44년) 남경의 예부시랑 심각(沈淮)의 3차에 걸친 상소로 시작되었다. 상소문의 요지는 천주교가 사교(邪敎)라는 것, 선교사가 중국에 허가 없이 잠입하였다는 것, 서양 역법이 선교사들을 통해 정통 중국 역법에 간여하고 있 다는 것, 중국의 사대부들도 천주교에 빠져 있다는 것 등 으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천주교를 금하고 선교사를 축 출하라는 것이었다. 심각은 상소가 윤허되기도 전에 천 주교 신자들을 체포, 고문하였는데, 조정에서 공식적으 로 선교사 추방령이 내리자 특히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 하던 바뇨니(A. Vagnoni, 高一志, 1566~1640), 세메도(A. de Semedo, 曾德昭, 1585~1658) 등의 선교사들을 체포, 구 금하여 형벌을 내리고 마카오로 추방하였다. 이때 북경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로 재직 중이던 서광계는 <변학 장소>(辨學章疏)를 올려 천주교는 백성을 바르게 이끌며 호국하려는 종교이고, 선교사들은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으니 선교사들과 서양 학술을 나라에서 유용하게 쓰자 는 호교론적(護敎論的) 내용을 상소하였다. 제2차 박해는 1622년(희종, 천계 2년) 산동성(山東省, 산둥성)에서 백련교(白蓮敎)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빌미 로, 심각이 다시 천주교와 백련교를 동일한 사교라고 주 장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때 약 30명의 신자들이 구금되 고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심각이 정치적 탄핵을 받아 관 직에서 곧 사퇴함으로써 박해는 종식되었고, 이후 명 조 정에 의한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는 없었다. 역법의 제작 : 예수회 신부들인 판토하(D.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우르시스(S. de Ursis, 熊三拔, 1575~ 1620) 등은 1610년경부터 서광계, 이지조 등과 함께 서양 역서를 번역하는 등 수력(修曆)에 참여하였다. 그 후 예부좌시랑 서광계의 건의와 숭정제(崇禎帝, 1627~1644) 의 결단으로 1629년 '역국' (曆局)을 신설하여 본격적으 로 서양 역법에 의한 수력이 시작되자, 롱고바르디(N. Longobardi, 龍華民, 1559~1654), 테렌츠(J. Terrenz, 鄧玉 函數 1576~1630) , 샬 폰 벨(J.A.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을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참 여하였다. 또한 살 폰 벨은 명 왕조를 위해 만주족의 침 입에 대비한 북경 방어용 대포를 주조하였는데,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조정에 대한 봉사를 필요 불가결 한 선교 수단으로 여겼다. 선교는 순조로워 명 왕조 멸망 무렵 예수회 관할 신자만 15만 명이 넘었다. 1644년 이 자성(李自成, 1605~1645)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1644~191)가 건국되었다. 명 · 청의 왕 조 교체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특히 살 폰 벨은 청 왕조로 하여금 천주교를 묵인토록 하 여 중국에 존속시켰을 뿐 아니라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여 순치제(順治帝, 1643~1661)와 강희제(康熙帝, 1661~ 1722)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리치를 이은 중국 그리스도교 제2의 창설자로 여겨진다. 천문 역법의 측정은 중국의 종교 · 사상 또는 국가 통치에 특별한 의미를 지녀서 한 왕조나 통치자에게 있어 서 중요한 기본 국정의 하나이다. 따라서 오류가 있으면 안 되었으므로 명 왕조의 말엽 이후 수력에 서양 선교사 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새로 건립된 청 왕조는 무엇보 다 정확한 역법이 필요하였으나, 기존의 대통력(大統曆) 이나 회회력(回回曆)은 오류가 심하였다. 그에 반해 살 폰 벨의 측정은 정확하여 천체의 운행과 일치함으로, 청 조는 서양 역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1644년(순치 원 년) 살 폰 벨을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으로 임명하 였다. 특히 순치제는 살 폰 벨과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가져서, 1650년 북경 선무문(宣武門) 내에 교회 부지를 하사하여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남당(南堂)을 건축하도 록 하였다. 또한 황제가 신하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통상 적인 일이 아님에도 순치제는 1656년과 1657년 두 해 동안 살 폰 벨의 집을 24차례나 방문하였다. 이 시기 살 폰 벨의 명성은 전 중국에 퍼져 교세 확장에도 영향을 미 쳤고, 이로써 1650~1664년 사이 중국 전역의 개종자 가 10만여 명에 이르러, 중국 내 신자수는 254,800명에 달하였다. 1661년까지 운남(雲南, 윈난)과 귀주(貴州, 구이저우)를 제외한 13개 성(省)에 대목구가 설립되었으며, 160여 개의 성당이 있었다. 1670년의 중국 총 신자수는 273,780명에 이르렀다. 강희제 시기의 발전 : 1664년 8월~1665년 4월까지 양광선(楊光先, 1595~1669)의 반(反)천주교 사건인 '역 국대옥' (曆局大獄)이 일어났다. 양광선은 강희제가 미성 년이던 이 시기에 오베(鰲拜) 등 보수적인 네 명의 대신 이 섭정하는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청주사교장>(請誅邪 敎狀, 사교의 주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역옥(曆獄)을 일 으켰다. 양광선은 상소문에서 천주교가 중국의 신앙이나 학문의 전통을 파괴한 이단 사설임을 주장하고, 서양 선 교사들의 추방을 요구하였다. 그는 천주교와 선교사들의 죄목을 요망한 책〔妖書〕의 작성, 역법을 빙자한 사교 확 장, 중국의 달력인 시헌력(時憲曆)의 표지에 감히 "서양 의 새로운 법에 의거함" 〔依西洋新法〕이라는 글자를 넣어 정통 권력을 차지하려고 한 것 등으로 열거하였으며, 그 주모자로 살 폰 벨을 지목하였다. 그래서 살 폰 벨, 페르 비스트(F. Verbiest, 南懷仁, 1623~1688) 등 예수회 선교사 들과 이조백(李祖白) 등 천주교 신자인 중국 역관(曆官) 다섯 명이 투옥되고, 살 폰 벨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강희 4년(1665) 3월 북경에 기상 이변과 대지진이 일어나자 하늘이 선교사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 겨 살 폰 벨은 사형을 면제받았으나, 역관 다섯 명은 참 형을 받았다. 그러나 양광선의 흠천감 감정 취임 후 역법 측정에 많은 오류가 발생하여, 이에 대해 페르비스트가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결국 1669년 양광선은 파 직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되고, 페르비스트는 흠천감 감부(監副)를 거쳐 감정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미 사망한 살 폰 벨과 처형당한 다섯 명의 역관들이 복권되었다. 강희제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의 학술과 종교를 전파하는 데 대해 매우 관대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 특히 예 수회 선교사들이 조정에 봉사하는 천문학자, 수학자, 대 포 제작자, 의약사, 예술가, 통역관으로서 인정을 받고 중용되었는데, 강희제는 누구보다 페르비스트를 신임하 였다. 강희제 자신도 늘 선교사들에게서 천문, 수학, 지 리, 기계, 의약 지식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고, 그들을 통 해 유럽 각국의 역사, 정치 상황, 문화, 풍속 등을 배웠 다. 강희제는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으나 천주교의 교리 와 교회에 대해서는 각별한 존경을 드러냈다. 1671년 친 필로 '경천' (敬天)이라고 쓴 편액을 하사하였고, 1693 년 강희제가 학질(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제르비용(J.-F. Gerbillon, 張誠, 1654~1707), 부베(J. Bouvet, 白晉, 1656~1730) 등이 만든 약을 먹고 병이 낫자, 서안문(西安 門) 내 가옥을 천주교회에 하사하고 신축을 허가하였다. 1703년 성당이 완공되자 강희제는 '만유진원'(萬有真 原)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이 성당이 구세주 성당 이라고 불린 북당(北堂)이다. 이같이 서학을 이해한 강 희제 치하에서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조정에 봉사한 결 과, 천주교를 공허(公許)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강희 제는 1691년 3월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할 것과 천주교 가 사교가 아님을 강조하는 두 차례의 칙서를 내렸고, 이 에 관해 예부(禮部)가 상주(上奏)하였으며 3월 22일 황 제가 결재하였다. 이러한 칙서들은 천주교를 관용하는 정식 승인서로서, 아편 전쟁(1839~1842, 1856~1860) 이전 그리스도교가 중국 조정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승인 문서이다. 〔중국 의례 논쟁〕 이때를 전후하여 예수회와 뒤이어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사이에 100여 년(1634~1742)에 걸친 중국 의례 논쟁(儀禮論爭) 이 일어났다. 의례 논쟁은 1634년 도미니코회의 선교사 인 모랄레스(J.B. de Morales, 黎玉范)가 예수회의 선교 방 법을 비판하는 17개 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함으 로써 비롯되었다. 중국에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문 화적 적응주의 입장을 취하며 중국 선교에 있어서 중국 의례, 즉 조상 숭배와 공자 공경을 중국 문화와 관련된 의식(儀式)으로 파악하고 이를 허용하였다. 선조와 공자 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에 대해서도 그 본래 의미를 후손 이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표 현이라고 해석하여 허용하였다. 또한 하느님의 칭호도 중국의 전통적 절대자 개념인 '천' (天) 또는 '상제' (上 帝)로 호칭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 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1631)와 프란 치스코 수도회(1633) 선교사들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고,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은 미 신적 우상 숭배 행위로서 근본적으로 천주교 교리와 어 긋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중국 의례에 대한 양측의 찬 · 반 논쟁 및 그에 관한 오랜 연구와 검토 끝에 1715 년 3월 19일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는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 1715. 3. 19)를 통해 중국 의 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즉 하느님의 명칭으로 '천 주 (天主) 이외에 '천' 이나 '상제' 등의 다른 용어를 사 용할 수 없으며, 조상 숭배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을 금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상의 위패도 금지하며, 다만 신위 (神位)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한 다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교황의 이 칙령에 대해 교황이 중국 황제의 권위를 대신하고,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황제권을 침 범하는 것이라고 여겨 크게 노하였다. 그리고 중국 내 천 주교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 이전인 1705년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교황 사절로 투르농(M. Tournon, 鐸 蔘)이 특파되었으나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 후 교황 베 네딕도 14세(1740~1758)는 칙서 <엑스 귀 싱굴라리>(Ex quo singulari, 1742. 7. 11)를 통해 교황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며, 이 문제에 대한 일체의 논란을 금함 으로써 1세기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칙서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중국의 의례를 행하는 것을 금하도록 한다는 서약을 요구하였고, 이는 1938년까지 유효한 내용이었다. 또 1720년 교황 특사 로 온 메차바르바(C.A. Mezzabarba, 嘉樂)에게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를 제외한 모든 선교사는 중국을 떠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1773년 예수회가 교황청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의례 논쟁은 중국 교회에 심각한 고통을 주었으 나,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공헌을 인정하여 자신 의 치세 중에 금교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중국의 금교 조치〕 강희제에 이어 즉위한 옹정제(雍 正帝, 1722~1735)는, 선교사들에 대해 특별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황위 계승 과정에서 옹정의 강력한 경쟁 자이던 아홉째 황태자 윤당의 지지자 중 예수회 선교사 누라오(J.Nourao, 穆敬遠, 1681~1726)와 종친 중 천주교회 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던 소노(蘇努)와 그의 아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정제는 즉위 후 누라오를 유배 보내 어 독살하고, 소노 일가에게도 죄를 물어 거의 멸문시켰 다. 즉 황제 계승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을 천주교에 돌린 것이 옹정제가 금교령을 실시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1723년 외국인 선교사의 추방에 관한 상소문을 계기로 복건성(福建省, 푸젠 성) 선교사 전원이 추방되었고, 이 듬해인 1724년 금교의 조서가 내려졌다. 옹정제는 1724년 1월 파래낭(D. Parrenin, 巴多明, 1665~1741), 부 베, 쾨글러(I. Kögler, 戴進賢, 1680~1746) 등 예수회 선교 사들을 접견하였는데, 그들과 나눈 대담에는 천주교에 대한 황제의 강경한 반대 입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옹정제는 중국 천주교회의 발전 역사와 천주교가 사교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유가 사상과 천 주교 교의의 대립이라는 사상 · 윤리적 측면에서 반대 입 장을 표명한 것은 아니었고, 천주교를 국가 안위를 위협 하는 잠재 세력으로 간주하여 강희제와 구별되는 정책을 집행할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1724년 7월 11일 옹정제는 예부가 각 성(省)에 반포 하는 금교 명령서에 서명하였다. 그 요지는 천주교를 믿 는 자들은 반드시 신앙을 버려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형벌을 받을 것이며, 북경의 조정에서 근무하는 서양 선 교사를 제외하고 각 성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반년 이내에 마카오로 옮기라는 명령이었다. 후에 파래낭, 부 베 등의 간곡한 요청으로 옹정제는 "각 성의 서양인들은 잠시 광동성 천주당에 거주할 수 있으나 선교는 금지하 며, 백성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도 엄금한다. 각자는 본국 의 선박이 광주(廣州, 광저우)에 오면 그것을 타고 귀국 하라" 고 명령을 완화하였다. 1701년 당시 통계에 의하 면, 중국에는 예수회원 59명, 프란치스코회원 29명, 도 미니코회원 18명, 파리 외방전교회원 15명, 아우구스티 노회원 6명이 있었다. 그중 예수회가 208개의 성당 및 공소를 갖고 있었고, 전국의 신자는 30여만 명이었다. 1724년 옹정제의 금교령으로 북경의 선교사 약 20명을 제외한 다른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쫓겨 나고, 30만 명의 신자 중 상당수가 교회를 떠났다. 당시 300여 개에 달하 던 성당과 공소는 모두 몰수당한 후 양식 창고, 관제묘 (關帝廟), 서원(書院)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722 년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 고빌(A. Gaubil, 宋君榮, 1689~ 1759)은 당시 천주교회의 상황을 "내가 중국에 온 지 오 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교 활동은 생기로 넘쳤으나 오늘은 더없이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당 은 거의 폐허로 변하였고, 선교사들은 쫓겨나 중국 유일 의 개항장인 광주에 와서 내지로 진출할 수 없다. 천주교 자체가 거의 단절 상태에 이르렀다" 라고 절망적으로 기 록하고 있다. 1727년 7월 21일 옹정제는 예수회 선교사 들을 접견하면서 다시 한 번 천주교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옹정제의 치세 기간 동안 금교를 당한 천주교는 건륭 제(乾隆帝, 1735~1795) 치하에서도 계속 금지의 대상이 었다. 즉위 이듬해인 1736년의 선교 금지령은 만주인 중 천주교를 믿는 이가 많다는 상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륭제는 한족이나 만주족을 막론하고 천주교를 믿는 자 를 중형에 처하며, 선교사는 천문학 등 과학만을 교수하 되 사람들을 천주교로 유도하는 것은 금지한다고 발표하 였다. 그러나 이 금령에 대해 궁정 화가로 봉직하던 카스 틸리오네(J. Castiglione, 郎世寧, 1688~1766)가 선처를 상 소하자, 건륭제는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만 주인이 이교를 신봉하는 것을 금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 러나 1737년 예수회 선교사 유인(劉仁)이 고아원에서 어린이에게 세례를 준 것에 대한 처벌을 계기로, 건륭제 는 금교령을 그대로 준수할 것 그러나 선교사들은 정상 적으로 전문 직무를 수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1746년 건륭제 치하의 박해는 복건성에서 도미니코회의 선교에 대한 지방관의 탄압에서 비롯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 는데, 이때 황제는 다시 한 번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엄금 하였다. 이 같은 금교령은 1750년대 이후에도 유효해서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7~18세기 중국에서 일어났던 박해 중 규모와 범위가 가장 컸던 것 은, 1784년 섬서성(陝西省, 산시 성) 천주교 신자들로부 터 비밀리에 초청을 받은 사사리(P. Sassri) 등 4명의 프 란치스코회 선교사가 호북성(湖北省, 후베이 성)에서 체 포됨으로써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은 북경으로 압송되어 영구 감금을 선고받았는데, 그들 중 옥중 사망자를 제외 한 나머지는 후일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섬서 성 서안(西安, 시안) 신자들이 선교사를 초청하여 교회 재건을 시도하였던 것인데, 문제가 확산된 것은 여러 지 방 지방관들이 천주교가 섬서성과 감숙성(甘肅省, 간쑤 성)의 무슬림과 백련교 등 비합법적인 종교와 연결되어 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 은 프란치스코회, 파리 외방전교회 및 라자로회 (선교 수 도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1780년대에도 천주교가 명 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교세는 급격 히 쇠퇴하였다. 북경의 한 예수회 신부는 1793년 무역 통상 교섭을 위해 중국에 온 영국 사절 매카트니(G. Macartney, 1737~1806)에게 북경 밖의 선교사들은 계속 탄압 을 받고 있으며, 신자수는 격감하여 북부 지역에 5,000 명, 전국적으로 15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 국 각지의 서양 선교사는 1707년의 107명에서, 1810 년에는 31명으로 줄었다. 중국인 신부는 1810년에 80 명이었다. 그러나 오랜 동안의 금교와 탄압에도 불구하 고 서양인 선교사들은 중국에 유용하고 필요불가결한 분 야에서 조정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1773년 예수회가 해체된 이후 프랑스의 라자로회 신부들이 북경 에서 예수회의 역할을 대신하였고, 1785년에는 프란치 스코회 소속 북경교구장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가 건륭제에 의해 흠천감 감정 및 국자 감(國子監) 산학관장(算學館長)에 임명되었다. 즉 1724 년에서 1844년까지는 중국에 선교가 금지되었던 시기 로, 강희제 시기까지의 보유론적 교리 해석, 중국 의례의 인정, 선교 수단으로 한역 서학서의 출판 등 소위 '리치 스타일' (Ricci Style)의 적응주의적 전교는 종지부를 찍고, 선교사들은 다만 중국 조정에 봉사하는 관리, 예술 가, 전문인으로만 체류를 인정받게 되었다.
Ⅲ. 19세기 이후의 중국 교회 〔19세기의 중국 교회〕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의 본격 적인 중국 진출이 이루어지면서 선교사들의 활동이 개항 장과 내륙 지역에서 재개되었다.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근대 천주교 선교 활동의 후원자인 프 랑스가 1844년 황포 조약(黃浦條約)을 맺으며 천주교 금교령이 해제되었다. 그 후 1858년 천진 조약(天津條 約)으로 중국 내지에 교회와 학교 설립이 가능해지고, 2 차 아편 전쟁 후 맺은 1860년 북경 조약으로 선교사들 에게 완전한 신앙의 자유와 재산의 반환이 약속되었다. 이 조약으로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땅을 빌리거나 매입하 고 교회 및 건물을 세워 학교, 신학교, 고아원, 병원 등 사회 복지 사업을 운영하며 중국 사회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814년에 재건된 예수회는 상해(上海, 상하이) 서가회(徐家匯)에 본부를 설립하였고, 프란치스 코회, 라자로회, 도미니코회 및 기타 수도회의 선교사 약 250명과 중국인 성직자 및 신자들이 활발한 선교 활동 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1800년경 21만 5,000여 명을 유지하던 신자수는 1870년 37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 수구적 중국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반(反)그리스도교 구교 운동(仇敎運動)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서구 열강은 국가 권력과 종교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침탈을 강행하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 인임을 공언하였다. 여기에 근대 정치 · 사회적 요인으로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의 반란군 또한 그리스 도인임을 자칭하였다. 중국 신사층(紳士層)의 지적 기반 인 유교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달랐고, 무엇보다도 선교 사들은 전통적으로 신사층이 행해 오던 사회적 역할을 대신하며 그들과 경쟁하였다. 따라서 중국 신사층의 그 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의 배후 조종과 지도로 1860~1899년 일어난 반그리스도교 사 건은 수천 건이었으며, 폭동과 습격은 약 240건에 달하 였다. 이 구교 운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70년의 천진 교난(天津敎難)이다. 일명 '천진 대학살' 이라고도 불리 는데, 군중들에 의해 천진 주재 외교관 및 수녀를 포함하 여 서양인 20명이 살해되고 교회와 외국인 소유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신자 5만 명이 살해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7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이 사건으로 구교 운동 의 지도 세력은 쇠퇴하였으나, 이후에도 민중의 크고 작 은 구교 운동은 중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그 중 1900년 북경에서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사건은 청 나라 정부의 사주에 의한 적극적 외세 배척 운동이며, 동 시에 반그리스도교 운동이었다. 이때 천주교 주교 5명, 신부 48명,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188명이 피살되었고, 천주교 신자 2만 3,000명, 프로테스탄트 신자 1만 8,000명이 살육당하였다. 1900년에 중국의 공식 신자 수는 74만 1,562명이었다. 〔20세기의 중국 교회〕 20세기를 반(反)외세, 반그리 스도교의 의화단 사건으로 시작하였으나, 사건 평정 후, 특히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 중국의 천주교는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교회는 제도화된 교육 사업을 비롯하여 의료, 출판, 양로나 고아 구제 등 사회 복지 제 도의 소개와 도입에 사심 없이 앞장서 중국의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편 교황청도 200여 년 이상 금지 하였던 의례를 허용하였다. 교황 비오 11세(1922~1939) 는 1935년 공자 공경 의례를 허용하였고,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허용하면서 금지되었던 동양의 전통적 혼인, 장례 및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 해서 폭넓은 허용 조치를 취하였다. 나아가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1939년 12월 8일 발표한 <중국 의 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를 승상하고 조상께 제사 함은 시대의 변천과 인간의 풍속 정신이 바닌 현 세대에 와서는 한갓 선조에게 효성을 표시함에 지나지 않는 것 이므로 허용한다" 라고 하여 전면적 적응주의 원칙이 교 회의 확고한 선교 정책임을 선포하였다. 1937년에 중국 의 천주교 신자는 301만 8,338명에 달하였다. 1945년 에는 청도(靑島, 칭다오)의 전경신(田耕莘, 텐경신) 주교 가 12월 24일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추기경으로 임명 되었다. 1946년 중국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는데, 그 로 인해 중국은 20개의 대교구, 79개의 교구, 38개의 감목구로 나누어졌다. 공산 치하에서의 중국 교회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의 기존 종교는 공산주의에 따른 개혁 내용 에 포함되어 큰 변화를 겪었다. 1949년에 천주교는 5,000명의 성직자들과 3,200만 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 으로 추산되는데, 새 정부는 종교의 자유는 허락하지만 외국인 선교사의 중국 내 선교 활동은 금지하여 1950년 2,274명의 선교사가 중국을 떠났다. 1951년 초부터는 당의 종교 정책 수행을 위해 조직된 '삼자 운동' (三自運 動)이 개시되었다. 삼자 운동이란 중국 교회를 교황청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다스리자는 자치(自 治), 경제적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자 는 자양(自養), 복음을 외세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 로만 전파하자는 자전(自傳) 운동이다. 중국 교회를 행 정, 재정, 선교 면에서 종래의 교회 관계 및 외국과의 관 계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이 해 6월에 북경 주재 교황청 대사인 리베리(A. Riberi)가 체포되었다가 9월에 추방당하였고, 당 재판소 는 수녀들을 고아원의 유아 살해자로, 신부들을 외세의 첩자로 단죄하고 북경 주교좌 성당(北堂)을 폐쇄하였다. 또한 신자들은 자신을 제국주의 연루자로 공개 석상에서 자아 비판하며 자체 숙청을 행하였다. 이에 외국인 선교 사가 완전 철수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뿐 만 아니라 1955년에는 중국인 교회 지도자와 신자들이 대거 검거되어 적어도 중국인 신부 100명, 신학생 50 명, 수녀 20명, 수사 10명, 평신도 약 4,000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1957년 관변 조직인 '중국 천주 교 애국회' (中國天主教愛國會) 의 결성을 강요함으로써 사실상 중국 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중 국 공산당은 이 조치가 중국 천주교회의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고 주체적 방안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 였으나, 교황청은 신자들에게 중국 공산당의 계획에 동 참하지 말 것을 지시함으로써 양측은 첨예한 대립 상태 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이 추진한 1958년 대약진 운동 후 종교에 대한 규제 강화 및 숙청으로 천주교는 탄압의 대상이 되어 명맥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로 위축되었 다. 1958년 4월 13일에는 중국 최초의 독자적 주교 수 품식이 이루어지고, 소위 '비애국적' 사제나 수녀는 감 옥이나 수용소에 갇히거나 집단 농장이나 공장에서 노동 에 종사하였으며, 1960년까지 모든 신학교가 폐교되었 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의 문화 대혁명 기간은 모든 종교의 말살 시기였다. 이때 시행된 낡은 문화 · 사상 · 풍속 · 습관의 '4구 타파 운동' (四舊打破運動)으로 교회 및 사찰은 파괴되고, 신부와 승려는 농촌의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외적으로는 중국의 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천주교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모택동(毛澤東, 마 오쩌둥, 1893~1976) 사후 새로운 사회주의를 위한 근대화 개방 정책을 지향하는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 1904~ 1997)이 집권하면서 종교 활동의 재개를 허용하면서부터 이다. 이러한 조처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지하로 잠입한 종교가 그 속성상 오히려 부정적 반응을 불러오며, 당시 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1978년부터 '애국 교회' 가 다시 활성화되고, 구금되었 던 성직자들이 석방되어 교회로 돌아왔다. 중국 공산당 및 중국 천주교 애국회는 교황청의 관계 정상화 의사를 받아들여 관계 회복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중국 천주교 회의 독립 인정, 1959년 교황청이 규정한 중국 공산당 정권에 대한 적대적 입장의 수정 및 교황청과 대만(臺 灣, 타이완)과의 외교 관계 단절이 전제 조건으로 제시되 어 관계 정상화는 쉽게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도 1983년부터 북경, 상해, 사천성(四川省, 쓰환 성), 하북 성(河北省, 허베이 성), 심양(瀋陽, 선양), 섬서성 등 중국 각지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천주교 신학교가 다시 개교 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 천주교회는 비교적 순탄하게 회복되었다. 등소평 정권 이후 현재까지 중국 정부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정권의 종교 정책은 종교 활동이 국가의 필요에 적극 협조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반드시 공산당과 국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외국 종교 단체에 의한 중국 종교의 예속 및 간섭을 금지하여 실제로 중국 종교계의 국제 교류를 전면 저지하고 있는데 그리 스도교, 특히 천주교회에 대하여 엄격히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 정책은 중국 당국이 종래의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 규정 방침에 의한 '천주교회의 민주화' 를 공식화함으로써 중국 천주교회가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애국 교회의 통제 아래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1648~1930년에 순교하여 1889~1956년 사이에 시복된 120명의 중국 순교자들이 2000년 10월 1일 로 마의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성되었다. 이 성인들은 중국 인 사제 4명, 평신도 83명이다. 외국 선교회 소속은 프 란치스코회 9명,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7 명, 도미니코회 6명, 예수회 4명, 파리 외방전교회 3명, 살레시오회 3명, 기타 선교회 2명 등이다. 중국 천주교 애국회의 발표에 의하면, 2003년 9월 현 재 중국에는 97개의 교구에 73명의 주교, 약 6,000개의 성당에 500만 명의 신자가 있으며, 교회는 중국의 주교 와 신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또한 해마다 수만 권의 성 서를 출판하고, 대신학교인 북경의 '중국 천주교 신학 원' 을 위시하여 각지에 30여 개의 신학교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신학생과 수녀, 신부들이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 파견되어 연수하고, 귀국 후 중국 천주교 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중국 소식통은 2003년 현재 중국의 신도를 약 1,200만 명 정도로 추정 한다. 주교는 모두 117명으로, 그중 70명이 정부의 인 정을 받은 주교이다. 정부는 2,600명의 사제를 공식적 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적어도 1,000명의 공인받지 못 한 사제가 더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애국 교회는 지난 20년 동안 모두 1,500명의 사제를 서품하였다. 수녀는 모두 5,000명으로, 그중 3분의 2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프로테스탄트는 영국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가 모리슨(R. Morrison, 馬禮遜, 1782~1834)을 1807년 중국에 파견하면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모리슨은 광동에 거주하며 광주, 말 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 고, 1818년 말라카에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 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웠다. 또한 인쇄소를 설립 하여 한역 성서인 《신천 성서》(神天聖書)와 중국어 사 전, 중국어판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는 등 1834년 사망 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선교하였다. 1826년에는 네덜란 드 선교사 귀츨라프(Karl Gützlaff, 郭實獵, 1803~1851)가 동양에 파견되어 싱가포르, 타이 등지에서 선교하였으 며, 1831년에는 중국 천진(天津, 텐진)을 거쳐 마카오에 가서 한역 성서를 출간하였는데, 그가 번역한 성서나 종 교서는 태평천국의 정책 수립에 이론을 제공하였다. 1842년 남경 조약의 체결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입국하였는데, 그중 영국 선교사 테일러(J.H. Taylor, 戴 德生 및 戴雅各, 1832~1905)는 1854년 '중국 복음 전도 협회' 에 의해 파견되어 상해, 강소성(江蘇省, 장쑤 성), 절강성(浙江省, 저장 성), 광동성 등지에서 선교하였다. 영국으로 돌아가 국제적 입장을 주장하는 '중국 내지 선 교회' (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하고, 다시 절강성, 강 서성(江西省, 장시 성)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선교회는 의화단 운동 때 타격을 입었으나, 곧 회복하여 만년에는 중국 최대 전도 단체가 되었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대외 전도국' (對外傳道局), 즉 '조합 교회' 에서 파견, 1830년 광동에 도착하였다. 그 후 조합 교회 와 감리교회는 복건성, 미국 장로회와 침례회는 산동성 에서 선교하였다. 선교사들은 주로 종교서의 배포, 학교 의 설립, 의료 사업을 통해 선교에 진력하였으나, 천주교 에 비해 중국의 주변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1850년경 중국 내 선교사는 20여 선교회를 대표하는 80여 명에 불과하였고, 그 활동 무대도 5개의 개항장과 마카오 및 홍콩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1870년에 이르러 35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있었으나, 개종자들은 통틀어 6,000명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자 선교사들의 노력이 효과를 드러내어 1900년 28개 단 체의 1,000여 명이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30년에는 60개 단체 3,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민족 주의 사상의 발달로 교회를 중국적인 것으로 토착화하려 는 '본색 교회 운동' (本色敎會運動)을 전개하였다. 또한 Y.M.C.A. 활동을 통해 사회 봉사,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갖 게 되면서 1922년에는 국제 프로테스탄트 회의에서 '중 화 기독교 협진회' (中華基督教協進會)를 조직하였고, 협 진회는 특히 농촌 개발 계획을 세워 '농촌 부흥' 이라는 문제에 접근하였다. 이에 1935년에 51만 명의 신자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1949년에는 30개 교파, 약 8,000명의 선교사 및 75만 명의 신자들이 있게 될 정도 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공산 정권은 천주교와 마 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도 외세와의 결탁을 우 려하여 견제를 강화하였고, 1951년 초 삼자 운동에 의한 자체 숙청과 1958년 이후 대약진 운동 및 문화 혁명을 거치며 그 세력이 극히 위축되었다. 1979년 신앙의 자유 가 회복되고, 중국 공산당이 마련한 1982년의 새로운 종 교 정책하에 종교인들은 정부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점 차 공개적 집회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프 로테스탄트의 신학교인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 및 중국 12개소에 신학교가 복교됨으로써 신학 교육 이 재개되어, 신자수가 1982년에 300여만 명, 1987년 에 400여만 명에 이르렀다. 2003년 현재, 1만 2,000여 개의 교회와 2만 5,000개의 예배소가 있으며, 신도는 1,000만 명에 달한다. 중국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1980년 이래 2,000만 부의 성서를 발행, 배포하였다. 〔의의와 전망〕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종교로 서의 의미가 아닌 서구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지 주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 을 통해 서양과 중국 문화의 본격적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지식인에 의해 서양 문화가 논의되고 수용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선교사들은 넓은 의미의 문 화 전달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종교, 사상, 학술, 예술의 형태로 개인과 사회에 기여하였다. 한역 서 학서를 통하여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였고, 중국 에 서양식 교육 제도를 도입시켰으며, 병원이나 고아원 등 사회 사업을 펼쳤다. 나아가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희 생과 박애 정신, 우상 숭배와 미신의 타파, 남녀 평등과 혼인의 자유, 일부 일처제의 개념 등 중국에는 생소한 윤 리관을 소개하였다. 특히 근대 서양식 교육 및 여성의 지 위 향상을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 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사회적 변화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불교, 도교, 이슬람 등 다섯 종교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 정되어 있다. 다만 이들 공인 종교도 '공인 종교 단체' 밖에서 종교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적 내지 반중국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국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자유는 없으 며, 따라서 중국 교회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교 황청과 중국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 고 있으며, 접촉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지하 교 회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비록 강제 노동소로 붙잡혀 가 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정확한 수가 밝혀지 지는 않았지만, 지하 교회의 주교와 신자들은 진정한 신 앙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변화되지 않 는 한 쉽지만은 않은 일로 여겨진다. (⇦ 중국 교회사 ; ← 경교 ; 구베아 ;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 레브 ; 리치 ; 몽골 ; 바뇨니 ; 북경대교구 ; 북당 ; 불리오 ; 사베리오 ; 삼비아시 ; 살 폰 벨 ; 선교의 역사 ; 알레니 ; 애국 교회 ; 요한, 몬테 코르비노의 ; 페르비스트 ; → 조상 제사 ; 중국 의례 논쟁) ※ 참고문헌  德禮賢, 《中國天主敎傳敎史》, 商務印書館, 壹北, 1972/ 蕭若瑟, 《天主教傳行中國考》, 上海書店 1990/ 黃伯祿, 《正敎 奉褒》 上 · 下, 上海 慈母堂, 1884/ 徐宗澤, 《中 國天主教傳教史概 論》, 上海書店, 1990/ G.S.J. Dunne, Generation ofGiamt, Notre Dame U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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