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의례 논쟁 中國儀禮論爭 〔라〕Controversia de ritibus 〔영〕Chinese rites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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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 라는 용어가 사용된 알레니 신부의 《천주 강생 출상 경해》의 일부(왼쪽)와 강희제가 중국 의례에 대해 밝힌 비 답(1700. 11. 30)의 번역본.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그 후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 사이에 1634~1742년까지 약 100년에 걸친 중국 의례에 관한 논쟁. 이 논쟁의 기본 쟁점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Dcus)에 해당되는 중국어 호칭을 '천' (天)과 '상제' (上帝)로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제공사조(祭孔祀祖), 즉 공자 (孔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허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종교사에서뿐만 아니라 동서 교류의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사건이다. 〔배경 및 논쟁점〕 가톨릭의 중국 선교는 종교 개혁에 대한 반종교개혁의 젊은 기수로 불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에 의해 시작되었다. 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 1610)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당시 예수회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8~1606)의 지 시에 따라 중국어와 풍습 및 문화를 익힌 후 1583년 루 지에리(M. Ruggieri, 羅明堅, 1543~1607)와 함께 광동성 조경(肇慶)에서부터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소 주(詔州, 사오저우) · 남창(南昌, 난창) · 남경(南京, 난징) 를 거쳐 1601년 수도 북경(北京, 베이징)에 정착할 수 있 었다. 16세기 말의 중국은 명(明) 왕조의 건국(1368) 이 후 강력한 절대 군주 체제로서 대외 정책에도 폐쇄적이 어서 외국인의 입국과 체류가 어려웠다. 그러나 리치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리 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 중국의 고유한 정신 문 명을 수용하려는 문화적 적응주의(適應主義) 선교 방법 을 택하였다. 또한 주로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도하여 중국 천주교회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즉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국 전수라는 관점에서 서양 과학과 기술을 전해 주면서 종교를 중국 황실의 묵 인하에 선교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회 선교사 들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고, 유학자 의 복식을 입었으며, 유학 경전을 공부하여 능숙하게 인 용하며 천주교 교리를 해석하였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유학을 중국의 전통 윤리 사상으로 수용하였는데, 특히 원시 유교 사상의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와 상통한다고 여 겨 보유론적(補儒論的) 선교 정책을 확고히 견지하였다. 그래서 예수회는 의례 논쟁의 첫번째 쟁점이 되는, 하느 님의 명칭으로 '천주' (天主) 외에 '천' 과 '상제' 를 사용 하였다. 그 이유는 상제가 중국의 고전인 《시경》(詩 經) · 《서경》(書經) · 《역경》(易經) · 《예기》(禮記) 등에 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째 쟁점이 되는 중국 의례, 즉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례 (祭禮)도 중국 문화와 관련된 의식으로 여겨 허용하였 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교의 충(忠), 효(孝) 등의 덕목 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제 사의 본래 의미를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존경과 효도 의 표현으로 종교적 행위가 아니며 계속 보존해야 할 풍 습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 게 중국에 진출한 도미니코회(1632), 프란치스코회 (1633), 파리 외방전교회(1684)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을 비난하며 조상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은 미신적 우상 숭배 행위로서 근본적으 로 천주교 교리와 어긋나는 것이며, 하느님을 '천' 과 '상 제' 로 부를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전 통적 관행을 갖고 선교회 간의 다른 견해로 의례 논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교회 간의 다른 견해는 일차적으로 선교 방법의 차이에 원인이 있었으나 또한 선교의 대상이 달 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예수회의 선교 대상은 도시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상류 계층이었다. 중국 사회의 상 류 계층은 대체로 중국 고유의 유교 사상이나 전통적인 종교 의식의 본질을 잘 알고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으므 로 신의 호칭을 중국 전통대로 '천' 또는 '상제' 로 하여 도 문제될 것이 없고, 조상제사 문제도 공자의 예(禮)와 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본질적 충 돌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로 농촌 지역과 일반 서민 들을 대상으로 선교한 기타 수도회 선교사들은 일반 서 민의 조상숭배 제사나 공자 공경 의식에 민간 신앙의 영 향으로 미신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을 접할 수 있었 으므로 중국 의례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것이다. 〔전개 과정〕 의례 논쟁은 1643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모랄레스(J.B. de Morales, 黎玉範)가 예수회의 선교 방법 을 비판하는 17개 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모랄레스는 자신이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에게 제공 사조를 위시하여 예 수회 선교사들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에 대한 지침을 요청하였다. 이미 전해인 1642년에 도미니코회 신부들 은 항주(杭州, 항저우)에 모여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 죽 은 자에게 비는 것, 죽은 자의 영혼이 위패(位牌)에 있다 는 것, 제사에 음식을 올리고 종이돈〔紙錢〕을 태우는 것 을 금지하며, 분향은 조상에 한정해 허락하기로 결의하 였다. 교황은 중국 의례의 문제를 일곱 명의 교의신학자 에게 맡겨 연구토록 하였는데, 그 사이 교황이 급서하고 후임 교황 인노천시오 10세(1644~1655)는 이 문제를 추 기경 회의에 회부하였다. 중국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추기경들은 문서로 심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를 갖고 교황은 1645년 9월 12일에 '중국 천주교 신자들 은 조상이나 공자에 대한 제사에 참여해서는 안 되고, 어 떠한 형식으로든지 조상의 제단을 만들거나 신위를 모셔 서는 안 된다' 는 훈령을 내려 도미니코회가 제기한 문제 의 견해를 옳다고 비준하였다. 이에 당황한 예수회는 1651년 마르티니(Marin Martini, 衛匡國)를 교황청에 파 견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즉 제공사조에 종 교적 · 미신적 요소는 없으며, 이는 중국의 오랜 전통적 관습이므로 이를 금지한다면 중국 선교는 불가능하므로 금령을 해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알렉산델 7 세(1655~1667)는 검토 끝에 1656년 3월 23일 예수회의 선교 방침을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즉 '중국의 신자 들은 조상을 기념하는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 공자에게 올리는 제사도, 중국 신자들이 신앙을 확실하게 표명하 기만 하면 참여하여도 무방하다' 고 하였다. 이어서 1659년 포교성성은 모든 선교사를 위한 훈시를 통해 신 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선교지의 문화 전통을 존중하고, 혹시라도 그것을 바꾸려고 생각하지 말고, 비록 비난받 을 관습이라도 자제하여 좋은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불만을 품 은 도미니코회는 다시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이에 1669 년 11월 13일 교황 글레멘스 9세(1667~1669)는 먼저의 훈령이 나중의 관용 훈령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실행에 있어 둘 다 각각 제시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24년 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복건대목구(福建代代牧區)의 메그로(C. Maigrot, 顏璫)주 교에 의해 재연되었다. 메그로는 1693년 3월 26일 자신 의 관할 구역 사제들에게 '천주' 의 명칭 이외에 '천' 과 '상제' 는 사용하지 말 것이며,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금하고, 죽은 자를 위한 위패를 세우지 말고, 교 회 학교 교과서에 무신론 사상과 이단 학설을 삽입하지 말라 는 등 일곱 항목의 금령을 내리 고,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결정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한 편 1700년에 예수회 선교사 제 르비용(J.F. Gerbillon, 張誠)과 비델루(C. de Visdelou, 劉應)는 강희제(康熙帝 1661~ 1722)에 게 의례 문제에 대한 내용을 묻는 상소를 올려 동년 11월 30일에 경천(敬天) 및 제공사 조는 모두 옳은 행위라는 비답 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그리 스도교의 신앙 문제를 중국 황제가 간여한다는 점에서 교황 청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의례 논쟁은 예수회와 다 른 선교회가 아닌 강희제와 교 황과의 문제로 발전되었다. 1704년 교황 글레멘스 11세 (1700~1721)는 추기경 회의를 거쳐 중국에서는 '천주' 의 호칭만을 쓸 수 있으며, 제공사조의 의례는 금지할 것을 선 포하였다. 아울러 강희제를 설득하기 위해 1705년 교황 사절 투르농(M. Tournon, 多羅)을 특파하였다. 투르농은 두 차례 강희제를 접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자 1707년 1월 남경(南京)에서 교황청의 금지령을 선포하 였다. 투르농의 이 같은 행위는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광 동(廣東, 광등)에서 체포되어 마카오로 압송, 구금되었다가 1710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중국 의례에 대한 찬 · 반 논쟁은 오랜 연구와 검토 끝에 1715년 3월 19일 교황 글레멘스 11세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 중국 의례에 대한 7개 조 항의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첫째, 서양에서 천지 만물의 창조주를 데우스(Deus)로 호칭하나 중국에서는 오래 전 부터 '천주' 를 사용하였다. 이후부터는 '천' 과 '상제' 의 호칭은 허용하지 않으며, 다만 천지 만물의 주님, 즉 '천 주 로만 칭한다. '경천' 의 편액은 달 필요가 없고 이미 천주당 내에 걸려 있다면 마땅히 떼어 내야 한다. 둘째, 봄 · 가을의 두 차례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천주교인이 주관하거나〔主祭〕 돕는 것〔助祭〕도 허용하 지 않는다. 셋째, 천주교 신자인 관원(官員), 진사(進 士), 거인(擧人), 생원(生員)은 매월 초하루와 15일에 공자의 묘에 예를 드리는 것을 금한다. 넷째, 천주교 신 자는 조상의 사당에서 예를 행하는 것을 금한다. 다섯째, 천주교 신자는 집안이나 묘지, 장례에서 예를 행하는 것 을 금한다. 여섯째, 천주교 신자가 우연히 다른 사람들의 의례에 있게 되거나 시비가 두려우면 곁에 조용히 있을 수는 있다. 일곱째, 천주교 신자는 중국의 예에 따라 집 안에 위패를 두는 것을 금한다. 다만 이름만 적으면 허가 하는데 그 위에 반드시 '천주교효경보지도리' 天天主教 孝敬父母之道理)라고 새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즉 교 회의 하느님 명칭으로는 '천주' 이외에 '천' 이나 '상제' 등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상 숭배 제사와 공 자 공경 의식을 금하고, 또한 조상의 위패도 둘 수 없으 나 다만 신주(神主)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교황의 이 칙령이 중국 황제의 권위를 대신 하고, 내정에 간섭하여 황제권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여겨 크게 노하였다. 1720년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다시 특사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 嘉樂)를 파견하여 화 해를 모색하였다. 강희제는 동년 12월부터 여러 차례 특 사를 접견하며 후대하였으나, 의례 문제에는 강경한 입 장을 고수하였다. 곤경에 처한 메차바르바는 1721년 11 월 예수회 선교사들과 의논하여 8개 조의 타협안을 만들 어 강희제를 설득하려 하였다. 8개 조의 대강은 절기에 따른 제공사조 거행, 집안에 조상의 이름만을 기록한 위 패를 모시고 향과 제물을 진열하는 것, 장례 시 향과 제 물의 진열 등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강희제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교사들을 더욱 혼 란에 빠뜨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1705년 교황 칙서를 폐기하였고, 반대파는 이 수정안에 대한 교황청의 심사 와 비준을 주장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강 희제는 1721년 3월 귀국 길에 오르는 메차바르바에게 중국 체류 중 특사와 황제가 만난 전 과정을 기록한 《가락내조일기》(嘉樂來朝日記)를 교황에게 보내며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와 동시에 천주교의 중국 선교 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예수회원 이외의 선교사는 모두 해외로 추방하였다.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는 칙서 <엑스 궈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를 선포하여 메 차바르바의 8개 조 준행령이 1705년의 금령과 모순됨을 지적하면서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였다. 교 황 베네딕도 14세는 모든 중국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에 게 1705년의 금령을 준수할 것과 더이상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1세기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이는 1939년까지 200여 년간 유효한 조치였다. 그리고 1773년에는 예수회가 교황청에 의해 해산되기에 이른다. 〔중국측의 대응〕 중국 천주교회는 강희제 통치 전반기에 희망적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이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전파하는 데 대해 관대하고 개방 적인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많은 선교사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정에 봉사하는 천문학자 · 수학자 · 대포 제작자 · 의약사 · 예술가 · 통역관 등으로 중용되었으며, 강희제 자신도 늘 선교사들에게서 천문 · 수학 · 지리 · 기계 · 의약 지식 등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그들을 통해 유럽 각국의 역사 · 정치 상황 · 문화 · 풍습 등을 알아보 았다. 강희제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으나 천주교의 교리 와 교회에 대하여서는 각별한 존경을 나타냈다. 이 같은 강희제 치하에서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조정에 봉사한 결과, 천주교 공허(公許)의 칙령이 내렸다. 강희제는 1691년 3월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할 것과, 천주교가 사 교가 아님을 강조하는 두 차례의 칙서를 내렸는데, 이는 천주교를 관용하는 정식 승인서로서 아편 전쟁 이전에 교회가 중국 조정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관방 승인 문서 였다. 반면 이때를 전후하여 일어난 의례 논쟁은 교회 내부 로부터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중국 선교회들 사이의 의례를 둘러싼 반목과 갈등은 강희제와 중국 조 정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 점 점 사라지게 하였다. 강희제는 말년에 금교에 대한 의지 를 품게 되었는데, 이는 메차바르바에게 내린 두 개의 칙 지에 뚜렷이 드러난다. 즉 1720년 12월 26일에 "교황의 요구 조건이 중국의 도리와 너무나 어긋나므로 천주교는 중국에서 선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금하여야 한 다.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는 필요없다. 다만 기술이 있는 자와 나이 많거나 병들어 돌아갈 수 없는 자는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한다. 나머지 선교사들은 당신이 모두 데리고 서양으로 돌아가라" 고 하였다. 그리고 1721년 1월 17 일에는 "향후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할 필요 가 없다. 금지하여야 한다. 굳이 시끄러운 일을 만들 필 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희제는 예 수회 선교사들의 공헌에 대하여 잊지 않아 그의 치세 중 금교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의례 논쟁의 처리에 있어 군주로서의 넓은 도량을 보여 주었고 선교 사 문제도 여전히 신중하게 대처하여 천주교에 대한 대 규모 박해나 선교사를 추방하는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강희제에 이어 즉위한 옹정제(雍正帝 1722~1735)는 1723년 외국인 선교사 추방에 관한 상소문을 계기로 복 건성 선교사 전원을 추방하였고 1724년 금교령을 내렸 다. 그 후 건륭제(乾隆帝, 1735~1795) 치하에서 천주교 는 계속 금지의 대상이 되어 중국 의례 논쟁 이후 19세 기 서양 제국주의 침탈 시기까지 중국 선교는 완전히 중지되었다. 〔중국 의례 금지령의 해제〕 약 200년 이상 엄격한 규 제하에 금지되었던 중국 의례는 20세기 전반부터 해빙 을 맞게 되었다. 20세기는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서구 사회의 인식, 토착화에 대한 의식의 개화, 비그리스 도교 민족 안에 내재한 영적 요소와 그리스도교를 조화 시키려는 신학 사상의 대두, 시대 변천에 따라 과거에는 미신적이던 의식이 민간 의식으로 자리매김 하는 등 커 다란 변화가 일었다. 가톨릭도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여 교황청에서 중국 의례 문제에 대한 정책 변화를 시행하였다. 중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첫 도전은 일본 군국주의 침 탈 계획의 일환으로 1932년 건국된 만주국(滿洲國)에서 시도되었다. 이 신생 만주국은 국민의 단결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공자 숭배를 의무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천주 교 신자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황한 교회 당 국은 공자 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하였는데, 만주 정 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 적 · 국민적 예식일 따름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1935년 공자 공경 의식을 허용 하였다. 또한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 참배 (神社參拜)를 허용하면서 당시까지 금지되었던 동양의 전통적 혼인, 장례 및 그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도 폭넓은 허용 조치를 취하였다. 더 나아가 교황 비오 12 세(1939~1958)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선포하였다. 즉 첫째, 공자를 숭상하는 예식은 종교 의식이 아니고 위대한 성현에 대한 존경이며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므로 천주교 신자들도 그 예를 행 할 수 있다. 둘째, 교회 학교 내에 공자 상과 비석을 세 우고 경례할 수 있다. 셋째, 교회 학교의 직원과 학생은 정부의 명령에 의한 공개적 의례 행사에 참가할 수 있다. 넷째, 죽은 사람의 시신과 초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 된 위패 앞에 경례하는 것과 기타 민간에서 행하는 의식 에 예의를 표시함은 가하고 타당한 일이다. 이렇게 중국 의 의례를 인정하는 전면적 적응주의 원칙이 확고한 선 교 정책임을 선포함으로써 오랜 기간 묶여 있던 중국 의례 논쟁의 매듭이 풀리게 되었다. 〔의 의〕 중국 의례 논쟁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배타적 독선주의에 기초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어 타문화를 이교적 우상 숭배로 속단하는 경솔함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이 문제를 다른 교황청의 미숙한 대응은 중국 내 천 주교 선교회의 선교 현장에 분열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 라, 중국 조정과 교황청과의 무익한 대립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모욕적이고 자의적 인 해석은 중화주의적 자존심을 건드려 결국 중국에서 선 교사 추방과 선교 금지령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 였다. 더욱이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이와 같은 선교 정책은 중국에서 의례 논쟁 후 교세가 쇠퇴해 가던 시기에 도리 어 그 싹을 키우던 초기 조선의 천주교에 말할 수 없는 정 신적 혼란과 박해의 비극을 가져다 주었다. 조선에서의 신해박해(1791)나 신유박해(1801)의 실질적 빌미는 바로 이 조상 제사 문제였던 것이다. 즉 조상 제사를 폐지하라 는 교황청의 지침을 성실하게 따르려고 했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전통적 의례를 이교적 종교 행위라고 규정 하였던 의례 논쟁은 동아시아 유교 문화 전통과 서양 그 리스도교 문화 전통 사이에 끊임없는 문화 갈등 관계의 일차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만약 의례 논쟁이 좀 더 신중 하고 지혜롭게 해결되어, 그리스도교가 그 본질을 지키 며 중국의 전통 문화에 접목하려는 문화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도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의례 논쟁은 앞으로의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교훈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 의례 논쟁 ; → 제사, 유교 의 ; 조상 제사 문제 ; 중국) ※ 참고문헌 A. Huonder, Der chinesische Ritenstreit, Aachen, 1921/ H. Havret, T'ien-chou, Changhai, 1901/ 顧保鵠, 《中國天主教史大 事年表》, 光啓出版社, 1970/ 方豪, 《中西交通史》 , 中華文化出版事 業委員會, 1953/ -, 《中國天主史人物列傳》, 香港公教真理學會 出版社, 1970/ 徐宗澤, 《中國天主教傳教史概論》, 上海書店, 1990/ K.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on Missions in China, Taipei 1973/ G.H. Dunne, Generation of Giants, Indiana, Notre Dame, 1962/ 이관숙, 《기 독교와 중국 문화의 충돌》, 쿰란출판사, 1997/ 崔基福, 〈朝鮮朝 에 있어서 天主教의 廢祭毁主와 儒教祭祀의 根本意味〉, 《崔奭 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矢澤利 彥, 《中國と キ リ ㅈ 卜 敎》, 近藤, 1972/ R.R. Noll ed., 100 Roman Documents Concerning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1645~1941), University of San Francisco. 〔張貞 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