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 본당 中林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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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설립 당시 '약현' (藥峴) 본당
이라 명명되었다가 이후에 중림동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서울시 중구 중림동 149-2 소재. 1887년 약현 공소에 서 시작하여 1892년 11월 9일 약현 준본당에서 본당으 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중림동, 만리동, 서계동, 순화동 전 지역, 충정로 일부 지역. 〔교 세〕 1897년 650명, 1902년 320명, 1909년 1,187명, 1915년 1,289명, 1921년 2,117명, 1954년 4,031명, 1964년 4,360명, 1968년 4,159명, 1976년 3,915명, 1981년 4,218명, 1988년 4,298명, 1994년 3,042명, 2001년 3,750명. 〔역대 신부〕 초대 두세(Doucet, 丁加 彌) 가밀로(1892. 5~1917. 4), 2대 비에모(Villemot, 禹一 模) 바오로(1917. 5~1926. 3), 3대 김윤근(金允根) 요셉 (1926. 3~1942. 9) 4대 이선용(李善用) 바오로(1942. 9~1946. 4), 5대 신인식(申仁植) 바오로(1946. 4~1954. 10), 6대 김철규(金哲圭) 바르나바(1954. 10~1961. ) 7 대 신인식(1961. 1~1963. 9), 8대 신인균(申麟均) 요셉 (1963. 9~1966. 12), 9대 박병윤(朴炳閏) 토마스(1966. 12~1971.5), 10대 김영일(金永一) 발타살(1971.5~1972. 9), 11대 최광연(崔光淵) 모세(1972. 9~1973. 11), 12대 김창석(金昌錫) 타대오(1973. 11~1978. 8), 13대 김정수 (金晶秀) 레오(1978. 8~1983. 8), 14대 여형구(呂瑩九) 미카엘(1983. 8~1986. 8) , 15대 차인현(車仁鉉) 알로이시 오(1986. 8~1994. 2), 16대 최동진(崔東珍) 베르나르도 (1994. 2~1995. 3), 17대 임상무(林尙茂) 베네딕도(1995. 3~2000.9), 18대 김주영(金柱榮) 루가(2000. 9~2002. 2) 19대 원종현(元鍾賢) 야고보(2002. 2~현재)
〔공소 시기와 본당 설립〕 1887년에 블랑(Blanc, 白圭 三) 주교는 남대문 밖 수렛골(현 중구 순화동)에 집 한 채 를 매입하여 교리 강습소로 이용하였는데, 이후 이 강습 소는 신자들이 모임에 따라 약현 공소로 변모하였다. 그 런데 공소 설립 직후부터 그 교세가 종현(鍾峴, 현 명동) 본당을 능가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새로운 성당을 건설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당시 종현 본당의 주 임이었던 두세 신부는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의 동 의를 얻어 사대문 밖 약현 언덕과 합동(蛤洞) 인근의 토 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성 당의 건설이 진행된 끝에 1891년 10월에 성당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같은 해 11월 9일에 두세 신부가 정식으로
본당에 부임하였다. 이로써 약현 본당(중림동 본당의 별칭) 은 1882년 설정된 종현 본당에 이어 서울대교구에서는 두 번째 본당이며, 전국적으로는 열 번째로 설정된 본당 이 되었다. 이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1892년 9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건물로 성당이 완성되었고, 1893 년 4월 23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된 후 약현 본당의 사목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약현 본당이 설립된 당시에는 서울에 두 개의 본당만 이 있었기 때문에 그 관할 구역은 아주 광범위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현 본당은 도성 안을, 약현 본당은 사대문 밖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고, 약현 본당은 가깝게는 도성 주변의 서울 지 역과 경기도 일대, 멀게는 송도(松都, 현 개성)를 지나 황 해도 배천(白川)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발전과 활동〕 약현 본당은 본당 설립 직후인 1897년 한 해에만 영세자가 257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를 확장 하였고, 1901년에는 송도 공소를, 1905년에는 행주(幸 州)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분리하였다. 교육열이 높 은 두세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여 1895년에 약현 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을 교육하였고, 1901년에는 성당 구내에 여학교를 세웠다. 1906년에 남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이를 약명학교(藥明學校)라고 명명하였고, 이전에 설립된 여학교를 가명학교(加明學 校)라 명명하였는데 '가명' 이라는 명칭은 학교 설립자 두세 신부의 세례명인 가밀로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었다. 두세 신부는 1909년 다시 교사를 증축하였고, 남 · 여학교를 가명학교로 통합하였다.
약현 본당을 건립하고 활발한 사목 활동을 벌이던 두세 신부가 병사함에 따라 1917년에 그 후임으로 비에모 신 부가 본당을 맡게 되었다. 비에모 신부는 우선 노후된 성 당 건물들을 신축 · 보수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11년 에 이미 1,800명에 이른 신자들을 좁은 성당 건물에 다 수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낙후된 교육 환경에서 학 생들을 교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비에모 신부는 1918년과 1919년에 각각 여학교와 남학교를 신축하였 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933년 신자들은 '약현 성당 증축위원회' 를 결성하고 성당을 증축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3대 주임이었던 김윤근 신부는 이 모금액으 로 우선 사제관 이전에 착수하여 1934년 성당 정후면인 지금의 자리에 사제관을, 그 옆에는 청년 회관을 신축하 였다. 이와 함께 성당의 증축도 계획하였지만 백동(柏洞, 현 혜화동) 본당의 신설로 증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34년에는 정식 인가를 받아 가명유치원을 운영하기 시 작하였고, 1936년에는 영등포(현 도림동) 본당을 분리하 였으며, 1938년에는 언구비(彥九碑, 현 논현동)에 있던 약 현 교회 묘지에 순교비를 제막하였다. 5대 주임 신인식 신부는 1947년에 잠실 · 반포 · 양재 · 방배 · 서초 등의 공소를 묶어 잠실(현 잠원동) 본당을, 1949년에는 후암동 (厚岩洞), 홍제동(弘濟洞) 본당 등을 분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가명학교가 폐교되
었고, 인민군에 의해 본당 학교와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 으며 주임 신부와 보좌 신부, 수녀들이 추방당하였다. 또 한 가명학교 선생들이 납치되었고, 포탄에 성당 종각이 일부 파손되기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종전 직 후인 1954년 3월에 서울교구와 미국 원조 기관인 가톨 릭 자선회(Catholic Charities)의 지원을 받아 본당 구내의 가명국민학교에 성 요셉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전쟁 당 시의 피난민들을 위해 설립된 이 병원은 1974년 8월 폐 원될 때까지 자선 진료를 계속 담당하였다. 병원과 함께 1954년 5월에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지 만, 1963년에 가톨릭대학 간호과로 병합되면서 이듬해 에 중림동에서 철수하였다. 이러한 의료 활동과 함께 본 당의 사목 활동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54년 9 월에는 전쟁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수녀원 분원을 마련하 였다(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서울 성가 소비녀회로 교 체). 6대 주임 김철규 신부의 재임기인 1957년에 북아현 동 본당을 분리하였고, 레지오 마리애를 설립하였다 1958년에는 송월동(松月洞, 현 서대문) 본당을, 1963년 에는 청파동(青坡洞) 준본당을, 1969년에는 공덕동(孔 德洞) 본당을 분리하였다. 9대 주임 박병윤 신부 재임기 인 1968년에는 십자 부녀단(현 성모회)이 결성되어 활발 한 활동을 벌여 나갔고, 1969년에는 교리 공부와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위해 남성 신자들의 십자 장년단(현 요셉 회)이 결성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성당 건립 77주 년 기념 회경축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러한 내부 적인 발전과 함께 본당의 주위 환경을 개선하려는 활동 들이 전개되어 1972년 성당 정문과 도로를 개설하는 한 편 1974년에는 구 수녀원을 철거한 후 새 수녀원을 건립 하였다. 또한 12대 주임 김창석 신부 재임기인 1974년 부터 본당을 해체 · 복원하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시작 하여 2년 후인 1976년 4월에 복원식을 거행하였다. 13 대 주임 김정수 신부는 1979년에 야간 학교인 성 이냐 시오 학교를 개설하여 환경이 어려워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14대 주임 여형 구 신부 재임기인 1984년 12월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사업으로 본당 구내에 서소문 순교자 현 양탑을 건립하였다. 15대 주임 차인현 신부의 재임기인 1986년에는 전례 음악을 역사적으로 수집하고 보호, 발 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가톨릭 종교 음악 연구소를 본 당 구내로 이전하였다.
1991년은 본당 설립 100주년이 되던 해로 1월에는 본당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신앙 운동 및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였고, 5월에는 교리서와 성서, 각종 신 심 서적 및 전례, 예식서 등의 교회 출판물과 13위 성인 들의 유해 및 유품들이 전시된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축 복식을 거행하였다. 11월에는 본당 100년사 기념 자료 집인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약현 본당 의 공소와 교세 통계표》를, 12월에는 《약현 본당 백년사 (1891~1991)》를 발간하였다.
1998년 2월 11일 불의의 사고로 성당에 화재가 발생 하였다. 중림동 성당은 1892년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설계 감리를 맡고 중국인 벽돌공과 한국인 인부 를 동원하여 건설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건물로, 한국 천 주교회사뿐만 아니라 근대 건축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성당이 설립된 지 110여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기초적인 보수 공사만 시행되었을 뿐 성당의 원 형은 그대로 보존되었는데, 뜻밖의 화재로 인해 첨탑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성당 내부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하 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닫고 본당을 재건하려는 여러 노 력들을 경주하여, 1998년 3월 성당 재건을 위한 다양한 의견 수렴을 위해 설명회가 개최되는 한편 복원 기금을 보조하기 위해 알뜰 장터를 마련하였다. 또한 2000년에 는 본당 신자인 이효주(아나스타시아)가 화재로 소실된 건축 자재를 소품으로 만들어 성당 복원 기금을 마련하 기도 하였다. 17대 주임 임상무 신부와 중림동 신자들의 노력 끝에 화재 발생 2년 후인 2000년 9월 17일 정진석 (鄭鎮奭, 니콜라오) 대주교의 집전하에 본당 봉헌식이 있었다. 그리고 18대 주임 김주영 신부의 재임기인 2000년 10월에 '정하상 심포지엄' 을 개최하였다. 현재 19대 주임 원종현 신부는 활발한 사목 활동과 함께 본당 이 지역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 이고 있다. (⇦ 가명학교 ; → 서울대교구 ; 강주희 ; 김 윤근 ; 김창석 ; 비에모 ; 삼각지 본당 ; 서대문 본당 ; 아현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대사전》/ 최석우,《약현 본당사》, 약현 천 주교회, 1976/ 천주교 중림동 교회 편, 《약현 본당 백년사(1891~ 1991)》, 1992.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