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 中世哲學 〔라〕Philosophia Medii Aevi 〔영〕Mediev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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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세기에 걸쳐 발전한 서양 철학. I. 학문적 배경과 내용 〔정의 및 배경〕 중세 철학을 스콜라 철학과 동일시하여 대략 9~15세기 동안 발전한 철학이라고 보는 이들 이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476)을 고대의 종말로 여긴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정복(1453)이나 종교 개혁(1517)의 발단과 더불어 근대 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이 사이 시기를 중세로 보는 경 향이 강하다. 이러한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5세기 말 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 동안 발전한 서 양 철학을 중세 철학이라고 분류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 들은 역사적 사건에만 집착하고 그 사상적인 연관성을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사실 중세 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철학이 아 니라 계시된 종교요 구원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는 철학에서 제기되는 많은 질문에 대해 답변하기 때 문에, 이 두 가지 형태의 지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 나 투쟁은 그리스도교가 태동되던 때부터 불가피한 것이 었다. 이런 사태는 교부 시대인 초창기에나, 스콜라 철학 기라고 불리는 시대에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중세 철 학이란 용어 아래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유래한 교 부 철학의 시기와 스콜라 철학의 시기, 즉 2~15세기에 걸쳐 발달한 서양 철학 전체를 포괄한다. 〔내 용〕 중세 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이 주류를 이룬 중세 서유럽의 철학이다. 물론 중세 철학이 모두 그리스도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신플라 톤주의(Neoplatonismus) 철학, 유대 철학, 아라비아 철학 등이 그리스도교와 독립적으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중세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근대 유럽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철학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중세 철학의 참된 모습을 규정 하기 어렵다. 중세 철학은 그리스에서 발달한 고대 철학과는 다른 관심과 사명을 갖고 출발하였다. 이 철학은 예수 그리스 도와 관련된 일련의 종교적 사건뿐만 아니라, 그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하느님은 유일한 절대자로서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 (creatio ex nihilo)하고, 인간 에게 '하느님의 모상' (imago Dei)으로서의 특별한 지위 를 주었다. 교부 철학에서 스콜라 철학에 이르는 중세 철 학은 '이 세상의 지혜' 인 그리스 철학의 방법을 수용하여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독특한 신앙적 세 계관으로 발달하였다. 따라서 중세 철학은 중세 그리스도 교가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이루어 낸 학문적 성과 전 부를 포함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무척 다양하다. 그렇지 만 다양한 중세 철학의 경향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에 바탕 을 둔 철학적 진리와 계시에 바탕을 둔 신앙의 진리가 하 나의 근원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 고, 둘 사이의 필연적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공통된 근본 전제로 삼고 있다. 이런 입장은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정신에 따라 캔터베리의 안셀모(1033~1109)가 정식화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와 '이해 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표현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중세 시대의 일부 학자들은 신앙에 관련된 문제 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 나 이들은 이성의 오용을 경계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 이었고, 중세 철학의 역사 속에서는 비주류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세 철학 시대에는 세계 · 인간 및 하느님을 에워싼 커다란 문제들을 이성의 힘으로 다 루는 철학은 종교적인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고, 또 신앙 은 철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체계화하는 한편 철 학적 사고를 더욱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중세 철학 전체를 포괄하는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어떤 시기에도 볼 수 없었던 '통일과 질서' 에 대한 확신이다. 중세의 학자들은 하느님의 존재 · 지혜 · 권능 및 선에 관 해서, 세계의 근원 · 질서 · 통치에 관해서, 더 나아가 인 간의 본질 · 우주 안에서의 위치 · 삶의 의미 · 정신의 다 양한 능력 · 자유 등에 관해서, 또한 법률의 근거 · 국가 권력의 질서 · 역사의 의미 등에 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질서 자체는 자명한 것이었으며, 이 질서를 인식 하는 것만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통일 을 가능케 해 준 것은 창조주의 선한 의도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였다.
그러나 이런 통일성에 대한 추구가 곧 획일화를 위한 압력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교적 사고 방식이나 신앙이 모든 학자들의 정신적 배후 에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상호 간에 뚜렷 이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철학들을 전개하였다. 중세 철학의 발전과 분화의 다양한 계보를 연구하였던 중세사가들은 중세 사람들이 어떤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도 뒤지지 않는 독특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Ⅱ. 교부 철학 〔성 립〕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체계화되는 단계에 서 교리 확립에 공헌한 교회의 학자들을 '교부' (敎父)라 고 부른다. 특히 2~8세기까지 활동하였던 그리스 교부 와 라틴 교부들이 이룬 학문적인 성과를 '교부 철학' 이 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와 철학 사이의 첫 만남은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행한 설교(사도 17, 1734)에서 이루어졌다. 바오로는 상호 간에 대화를 시도하 였지만, 이 새로운 지혜가 철학자들에 의해 어리석음(1 고린 1, 23)이라고 조소당함으로써 첫 시도는 실패로 끝 났다. 이후 많은 세속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천박하 고 저급한 이론이라고 계속 폄하하였고, 몇몇 철학자들 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반박하거나 공격했다. 또한 마니교와 그노시스주의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 단들은 신앙을 무분별하게 철학화하려는 시도에서 나타 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자기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 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철학과 관계 맺는 것 자체를 거부하였다. 어떤 이들에게 철학이란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마가 발명한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노(1607-2220) 는 철학을 오류와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러면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노시스주의의 신성 모독적인 오류들이 철학에 대한 지 나친 신뢰에서 등장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진리를 가르칠 능력이 없는 순전히 인간 적인 지혜만을 대변할 뿐이기 때문에, 신앙과 그리스도 의 지혜만으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교부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철학자들과 수 사학자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인 방식으로 취득한 지혜를 전적으로 포기하려 하지 않고, 이를 그리스도교를 위해 사용하려 하였다. 초기에 이런 새로운 태도를 보인 예는 2~3세기의 그리스 호교론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한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 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수사학과 법학 그리고 철학의 기술들을 사용하였 다. 그들은 유스티노(100/110?~165?)와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가 했던 것처럼, 철학자들에게서 발 견되는 모든 진리는 부분적으로 신적인 지혜를 나누어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였다. 더 나아가 글레 멘스와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260/265?-339)와 같은 이 는 그리스 철학을 복음에 대한 준비와 그리스도로 향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들은 이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철학을 적절하게 변형해야 한다고 생각하 였다. 세속적인 교육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도입되고 난 후,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이에 더욱 큰 조화와 협력을 위 한 길이 열렸다. 교회 역사상 가장 예민하고, 대담한 정 신의 소유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오리제네스(0igenes, 185~ 253)는 철학을 신학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 리스도교 교리를 철학자들에게 철학자인 자신의 용어와 당시의 철학적인 문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그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심화시키려 하였다. 오리제네스 는 지나치게 사변적이었기 때문에 자주 정통 신앙과 일 치되지 않는 점을 주장하였고,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될 논쟁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그는 많은 제자들 과 적대자들이 그의 이상을 토대로 좀 더 정통적인 형태 로 그리스도교를 선포할 수 있도록 신학의 학문적 체계 를 처음으로 수립하였다. 4세기에 들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더 나아가 로마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더욱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헬레니즘에 기반을 둔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 교화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헬레니즘화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한편 많은 이단들, 특히 아리우스주의와 아폴 리나리우스주의 등은 그리스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단을 통하여 다시 재발된 철학의 수용 문제에 대한 해결은 가바도기아의 세 교부에게서 발견되었다. 이성과 신앙 사이에 균형을 잡은 이들은 공통적으로 오 리제네스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 오(329/330~389/390) , 바실리오(329?~379) , 니사의 그레고 리오(335?~395?) 등은 당대의 학문적 지식들을 종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교양 교육 그리고 그리스도교 인간론 등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세기 후인 500~528년에 시리아의 익명의 저자가 쓴 책들이 사도 교부의 작품으로 오인되어 오랫동안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위(僞) 디오니시오(Pyeudo Dionysius, Dionysius Areopagita) 문헌' 이라고 불리는 이 작 품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기 묘하게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 저자는 명백하게 신플라 톤주의자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철학을 그리스도교적 인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이 작품들은 막시모 콘 페소르(Maximus Confessor, 580~662)의 주해서들과 함께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교인들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역사에 나타난 마지막 그리스 교부인 다마스커스 의 요한(650?~754)은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Expositio fidei, De fide orthodoxa)에서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을 요약하였고, 위 디오니시오의 이론들을 서방에 전해 주었다. 〔라틴 교부들〕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라틴 교부들은 하 나의 체계로 모으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경향을 나타 냈다. 미누치오 펠릭스(M. Minucius Felix, ?~ 250?)는 치체 로(M.T. Cicero, 기원전 106~43)를 모방하고,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서기 65)의 영향을 일부 받아서 《옥타 비우스》(Ocavius)를 저술하였다. 철학과 신학의 연결을 반대하였던 테르툴리아노는 스토아 학파의 이론에 의존 해서 영혼의 본성을 설명하였고, 이로써 물질주의(유물 론)에 빠지고 말았다. 마리오 빅토리노(Marius Victorinus, 300~362)는 개종 후에도 신플라톤주의자로 남았고, 삼위 일체를 설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이 철학을 사용하였다. 반면 예로니모(347~419)는 그리스도인들이 철학자들과 시인의 글을 읽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아우구스티노 : 철학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긴장 관계 를 이루었던 라틴 교부들에게도 4~5세기에 교리 논쟁 이 지속되면서 점차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리 확립에 이 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 교리 확립을 완성한 사 람이 최대의 라틴 교부인 아우구스티노이다. 그는 내적 경험의 성찰에서 출발하여 신플라톤주의의 용어와 사상 을 수용한 그리스도교 신학을 만들어 냈다. 신플라톤주 의 때문에 아우구스티노는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 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 정신의 대상 이고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추구할 목표라고 확신 하게 되었다. 그는 이 영원한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하느 님과 동일시하였다. 아우구스티노가 밀라노에서 극적으로 회심한 후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철학에서 발견했던 좋은 것들은 아 무것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철학자들이 발견 하였던 지혜는 무엇이든지 그리스도교 지혜의 구성을 위 해 사용하려고 받아들여야만 하였다(《그리스도교 교양》 Ⅱ, 40). 그래서 철학은 아우구스티노에게 그리스도교 지혜 라는 구조의 한 단계가 되었다. 그것은 독립된 학문이 아 니라 신앙의 진리들을 관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철학 은 하느님을 탐색하려는 그의 노력의 일부였다. 그는 철 학의 모든 분야가 하느님을 향한 탐색에 기여하도록 만 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고백록》 10, 6-7 ; 《시편주해》 41, 6-8). 또한 그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인간 본 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의 부활은 그 리스도교 신앙이 보증한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Confesiones)과 《삼위 일체론》(De Triniate)에는 인식 · 지각 · 기억 · 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그는 신학적 세계관에 의하여 인류 역사를 일관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 입장에서 창조 이후의 인류 역사를 해석하여 역사 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보에시우스 : 아우구스티노 이후, 게르만 민족들이 이 동하면서 서구 문화는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로마 최후의 철학자라고 불렸던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 이후에는 아우구스티노의 뛰어난 종합에 견줄 만한 철학 사상이 스콜라 철학이 부흥할 때 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보에시우스는 전체 그리스 철학 을 라틴어로 번역할 계획을 세웠으나, 반역죄로 몰려 갑 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이 계획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러나 그가 남겨 놓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 322/321)의 논리학 저서들의 일부(《범주론》, 《해석론》)와 포르피리오스(Puphyinos, 234?~305?)의 《이사고게》(lasgoge, 범주론 입문)에 대한 번역과 주해서들은 중세 사상가 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기초를 전해 주었다. 또 이 책들은 보편자의 성격 등 중요한 철학 문제를 제기 하였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 저술한 《철학의 위 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서 인식과 실재에 관한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9)의 견해를 따랐으며, 섭 리 · 신의 예지 · 우연 · 운명 · 인간의 행복 등도 생생하 게 논의하였다. 보에시우스는 독창적인 사상가라기보다 도 고대 문화와 중세 시대 사이의 탁월한 중개자로서 평 가받고 있다. 보에시우스 이후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기까지의 문화 적 침체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로 이전의 학문적 발전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예를 들어 《영혼론》(De anima)의 저자인 카시오도로(Casiodorus, 490?~585?)는 수도원 생활에 교육과 지성 문화를 도입하였고, 스페인의 이시도로(isidous Hispalensis, 560?~ 636)와 베다 존자(Beda Venerabilis, 672/673~735)는 백과사 전적 저술을 통하여 이전의 학문들을 종합하였다. 또한 베다의 수도원 전통으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에서 교육이 재탄생할 수 있도록 해 준 학자들이 등장하 였다.
Ⅲ. 스콜라 철학 이 시대의 학문 연구는 주로 수도원이나 주교좌 성당 의 부속 학교(schola cathedralis)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콜라에서 활동한 학자들은 대부분 교부들에 의해 확립된 교리를 인정하고, 그 교리의 학문적 조직화에 전념하였다. 연대 적으로는 대개 9~15세기인데, 이 시기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12세기까지의 초기 스콜라 철학은 본격적 인 발전을 위한 예비적 단계이고, 13세기에 도달한 융성 기에는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사상의 체계적인 종합이 이루어졌으며, 14세기에 이러한 종합이 차츰 붕괴되는 후기 스콜라 철학 시기를 맞게 된다. 〔초 기〕 스콜라 철학의 태동기인 초기에는 플라톤 · 아 우구스티노주의가 그 주된 경향으로 나타났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고자 하였던 교부 철학자들은 철학을 신앙 으로부터 분리시키거나, 그 자체만을 위해서 추구하지 않았다. 이 전통은 정치적 안정을 통해 스콜라 철학을 태 동시킨 카알 대제(742~814)의 교육 부흥 운동을 거치면 서도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스콜라 철학 시기에 들어서 면 전통적인 고전 연구 이외에도 보에시우스가 번역하여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 성화되었다. 이로써 성서와 교부의 권위와 더불어 논리 학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신학의 내용을 합리 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신학 연구 경향이 등장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태동기에 카알 대제의 궁정 학교를 정 비한 알쿠이노(Alcuinus, 732/735?~804)와 그의 제자 마오 로(Rabanus Maurus, 780~856)는 아우구스티노의 이상을 계 승하였고, 철학과 세속 지식은 신앙을 위하여 사용되어 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논리학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철학적 경향은 영혼의 본성이 나 인간의 자유와 예정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의 논쟁사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학자는 에리우제나(Johannes Scotus Eriugena, 800/ 815?~ 877?)이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그리스어 실력을 이용하 여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의 몇 작품들을 라틴어로 옮겼으며, 신플라톤주의 노선에 따라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한 방대한 저서 《자 연의 구분론》(De divisione naturae)을 썼다. 그는 이 작품 에서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막시모 콘페소르, 니 사의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오(339~397)와 아우구스티노 의 작품들에서 읽은 내용을 토대로 철학과 신학의 과감 하고 힘 있는 종합을 이루었다. 그는 사물들의 다양성이 어떻게 하느님의 단일성으로부터 나왔고, 다시 하느님에 게로 돌아가게 되는가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 기에서조차 철학은 성서와 신앙에 대한 중개였을 뿐, 순 수 이성이 그 자체 목적을 위해 작업한 결과는 아니었다. 에리우제나를 거치면서 서방의 사상가들은, 논리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더이상 신학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 라 그 자체를 위해서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로 써 철학과 계시된 학문 사이의 실제적인 구별은 점차 뚜 렷해졌다. 에리우제나가 '학예들의 어머니' 라고 불렀던 변증론(논리학)은 11세기와 12세기에 새로운 관심을 끌 게 되었고, 이전에는 다루어진 바 없었던 영역에까지 침 투해 들어갔다. 그래서 13세기에 융성기에 도달하게 되 는 스콜라학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변증론 에 호감을 가졌던 많은 학자들은 보편자의 본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논리학에 적합한 이론과 방법으 로 대답하거나, 신앙의 신비들을 순수한 변증법을 통하 여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세 속의 학식과 철학은 신앙에 해로운 것이라며 불신한 베 드로 다미아노(Petus Damiani, 1007~1072) 같은 반(反)변 증론자들은 세속 지식의 도움 없이 신앙만으로 침체된 그리스도교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변증론자와 반 변증론자 사이의 격렬한 논쟁에 새로운 화해의 길을 열 어 준 것이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캔터베 리의 안셀모(Anelmus Cantuariensis, 1033~1109)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 안셀모는 아우구스티노와 마찬가 지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사용하 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이 우선적이지만 반드시 이성이 뒤따르면서 사람들이 믿는 내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동료 수사들이 성서의 권위에 조금 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느님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 달라고 요청함에 따 라 그는 《독어록》(偶錄, Monologion)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한 신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증명이 들어 있다. 그는 다수의 선한 것은 최고 로 선한 것 또는 유일한 존재의 근원인 신에게서 생겨나 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저술된 《대어록》(對語 錄, Proslogion)에서 안셀모는 더이상 경험적인 사실에 의 존하지 않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하였다. '그 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 로 신을 정의할 경우,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순수 이성적인 신 존재 증명을 향한 길을 열었다. 이처럼 안셀모는 논증하는 신학을 발전시 켰고, 이성을 건전하게 사용하는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그 이후의 신학과 철학이 건강하게 꽃피울 수 있는 기초 를 마련하였다. 그의 노력을 통해 '신앙과 이성의 조화' 라는 스콜라 철학의 좌우명은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지 만, 구체적으로 그 목표를 실행하는 방법에서는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안셀모의 종합 이후에도 이성의 사용에 대해 여전히 거부감을 지닌 전통적인 입장이 남아 있었다. 즉 시토 수도회의 수도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 1153)는 신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속의 학식과 철 학을 사용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당시의 몇몇 사 람들이 변증법에 지나치게 빠진다고 불평하였다. 그는 신비주의적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전개하였는데, 이 교리 의 영향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파리 생빅토르 (Saint-Victor) 수도원의 수사들도 신비주의적 명상을 육성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은 베르나르도 와 대조적으로 자유 학예와 철학을 명상의 보조 수단으로 장려했다. 이 수도원의 후고(Hugo de Saint-Victor, 1096~ 1141)나 리카르도(Richard de Saint-Victor, ?~1173)와 같은 교수들은 철학과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서는 전서(Summe)와 명제집(Sententiae) 형태로 신학을 조직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은 캔터 베리의 안셀모의 제자인 안셀름(Anselm de Laon, ?~1117) 이 이끌던 학교에서도 나타났다. 명제집 형태의 저서들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abardus, 1095~1160)의 《명제집》 (SementianummLili)었다. 보수적인 경향을 지닌 파리의 학교들과는 달리 이와 경쟁 관계이던 샤르트르의 학교는 철학, 특히 고전 인문 학에 대해서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샤르트르의 학교는 대학의 설립 시기 이전에 유럽의 주교좌 성당 학교 중에 서 마지막의 가장 위대한 학교로서, 샤르트르의 베르나 르도(Bemardus Cartonensis, ?~1124/1130?)와 포레의 질베르 (Gilbert de la Porrée, 1080?~1154) 등의 학자들이 가르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고대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유명하게 되었다. 아벨라르 : 신학에 철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는 데 가 장 열정적이었던 스콜라 철학자는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였다. 열렬한 논리학자인 그는 신앙의 가르침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하여 철학에서 발달 한 방법들, 즉 논리학적인 도구와 개념 분석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주저인 《그렇다와 아니다》(Sic et Non) 에서 그는 신학 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서로 반대하는 양쪽의 가장 권위 있는 견해들을 대비시 키고 있다. 이렇게 대비된 권위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욱 타당한 근거를 지니는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진 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방법은 대학 설립 이후에도 정규 토론과 자유 토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사 용됨으로써 스콜라 철학의 '고유한 방법' 으로 자리잡았 다. 그는 또한 여러 세기에 걸쳐서 지속되었던 '보편 논 쟁' 을 해결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보편 논쟁 : 스콜라 철학 초기에는 보편이 개체에 앞 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플라톤적 보편 실재론 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셸리노(Roscelinus Compendiensis, 1050?~1125) 등이 개체가 실재이며, 보편은 단 지 음성 또는 이름(nomina)으로서 인간 이성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反)실재론 내지 유명론(唯名論)을 주장함으로써 오랫동안 지속될 논쟁이 촉발되었다. 아벨 라르는 일차적으로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보 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種)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이 개체들을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 과라는 것이다. 이 보편자가 정신적인 추상 작용을 통하 여 정신적 개념으로 인간 지성 안에 존재하게 되고, 이 보편자는 개체를 지시한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 다고 설명하였다. 그가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온건 실재론은 오컴(W.of Ocham, 1285?~1349)의 변형된 유명 론이 다시 제기될 때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견이 되었다. 〔융성기〕 원인 : 13세기에 들어 스콜라 철학이 가장 발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중 심으로 한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저술들이 번역을 통하여 대거 소개되었고, 학문을 체계화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대학들이 설립되었으며, 신흥 수도회를 통하여 능 력있는 학자들과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 이 원인들 중에서 '아 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이라고 불리는 그리스와 아라비 아 학문들의 번역 소개는 자유 학예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던 교육 방식을 논리학 · 윤리학 · 과학 분야 등을 포괄 한 새로운 교육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내용면에서도 이 제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플라톤주의는 쇠퇴하고, 그 이 후 '철학자' 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게 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학계를 주도하였다. 이런 수용 과정에서 아라비 아 철학자들과 유대 철학자들의 주해서와 서적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아비첸나(Avicenna, 980~1037)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 철학자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 학을 '존재로서의 존재' (ens qua ens)에 관한 학문으로 보 았다는 해석, '존재' (esse) · '본질' (essentia) . '실체' (exsistentia) 등 많은 형이상학 용어에 대한 분석, 신 존재 에 대한 증명 등을 제시하였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찬성하건 반대하건 간에 자주 인용되었다. 한 편 당대 가장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해자' 로 인정받았던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Averoës, 1126~ 1198)의 책들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많이 소개되었다. 그 의 주해는 학문적 치밀함과 명확성 때문에,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과 같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열광적인 환 호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 대학의 신학부 교수들 과 종교 지도자들은 아베로에스를 그리스도교를 위협하 는 적으로 여기고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가 영원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창조 사 상에 의문을 갖게 하였고,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성을 공 유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인의 불멸과 심판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② 외부 사상의 도입 : 중세 유대교 사상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계 유대인 아비체브론(Avicebron, 1022?~ 1070?)은 《생명의 샘》(Fons vitae)에서 신의 단일성과 단 순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물질적 질료와 형상으 로 합성된 감각적 사물들뿐만 아니라 천사와 인간 영혼 도 정신적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어 있다. 마이모니데 스(Moses Maimonides, 1135~1204)도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에서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에게서 나오므 로 아무런 갈등도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모순은 성서나 철학자들 중 어느 한쪽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부정 신학' (否定神學, theologia negativa) 에 대한 강조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③ 대학의 등장 :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다고 하더라 도 대학과 같은 체계적인 연구 및 교육 기관이 없었더라 면 학문 발전은 훨씬 둔화되었을 것이다. 12세기까지 우 후죽순처럼 설립된 다양한 학교들은 1200년경부터 점차 길드와 유사한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합체'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로 조직화되었고, 13세기에 스 콜라 철학의 융성기를 맞는 틀을 마련하였다. 이미 초창 기에 파리, 옥스퍼드, 볼로냐, 파도바, 나폴리, 툴루즈 등에 유명한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전반 기에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형이상학 저서들에 대한 강의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13 세기 중반기 이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 서적 들이 대학에서 자유롭게 강의되었다. ④ 자연학의 발전 : 중세 초기에는 자연을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실재와 능력에 대한 표징으로 보는 경향이 강 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됨에 따라 자연에 서 나타나는 개별 현상이 탐구의 대상이 되고, 이를 그 원인들에 대한 관계에서 관찰하게 됨에 따라 물리학, 동 력학, 천문학과 같은 자연학 분야의 탐구도 함께 발달되 었다. 그렇지만 중세 자연학 분야에서의 독창적인 발전 은 영국의 대학들에서 중점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옥 스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주교인 그로스테스테(R. Grosseteste, 1175?~1253)는 과학적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개별 사건들을 관 찰함으로써 일반 법칙을 발견한 후, 이것을 실험 작업을 통해 검증하거나 반증하는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제자 베이컨(R. Bacon, 1214~1294)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권위에 대한 맹종을 비판하고, 자연의 직접적 인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둔 학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영국 대학의 여러 교수들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가르침을 넘어서 '실험 과학' 의 방법을 사용함 으로써 자연 과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분야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 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분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다양한 스콜라 철학 융성기 의 학자들과 학파들을 분류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주의 : 아우구스티노 전통에 따라 교육받 았던 학자들이 이성적 사고의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 아 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직면하였을 때 보인 반응은 비판적 인 망설임이었다. 13세기 초의 대표적 학자인 오베르뉴 의 기욤(Guillaume d'Auvergne, 1180?~1249)은 세계가 영원 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나, 신이 세계를 영원히 필연적으로 창조한다는 아비첸나의 학설이 세계를 무 (無)로부터 자유롭게 창조하였다는 그리스도교의 전통 적인 가르침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런 위 협에 공감하였던 프란치스코회 중심의 학자들은 정통적 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고 믿는 아우구스티 노의 학설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이 경향의 대표자로 프란치스코회의 스콜라 철학자인 보나벤투라(1217?~ 1274)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 과학자로서 존경하였지 만, 형이상학자로서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Ploinos, 205~270)를 더 존경하였고, 특히 그리스도교 학자인 아 우구스티노를 가장 존경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이데아를 알지 못하였고 이를 부인 하였던 점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안내를 받지 못한 그를 참된 형이상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나벤투라는 저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Itninerarium mentis in Deum)을 통해, 외부 세계에서 정신의 내부 세계를 거쳐 영원한 것에 이르는 여행을 설명하면서 플라톤 · 아우구 스티노적 색채를 지닌 신학의 종합적 체계화를 시도하였 고, 이를 신비 사상으로까지 심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아우구스티노주의와는 반대로 브라방의 시제(Siger de Brabant, 1235~1281/ 1284?)로 대표되는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는 신학에서 독 립적인 순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하였다. 이에 속하는 학자들은 신앙과 일치하거나 말거나 관계 없이 철학자들 의 의견들을 '재인용' 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또한 이들 은 세계의 영원성, 인간 지성의 단일성 등을 철학적으로 타당한 의견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철학과 신학의 관 계에 대한 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두 학문에서 상 반된 진리를 인정하는 이중 진리설을 주장한 것으로 간 주되었다. 이런 입장이 파리 대학의 인문학부를 중심으 로 퍼져 나가면서 서방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도 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1270년과 1277년 두 차례에 걸쳐 여러 명제들을 단죄하였으나, 이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현명하거나 적절한 대처 방안은 되지 못하였다.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 심정적인 거부감과 무비 판적 수용의 태도를 넘어 오류로부터 진리를 가려내고, 새롭게 발견한 보물들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에 결합 하고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교황 권의 지도하에 특히 도미니코 수도회의 학자들이 주도적 인 역할을 하였다. 매우 박식하고 개방적인 사상가인 도 미니코회의 알베르토(1200-1280)는 아리스토텔레스 사 상과 아랍 해석가들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이 문 헌들을 파리 대학에서 공적으로 강의되지 못하던 시기에 이미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연구와 주해를 통하여 이 새로운 철학을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1245-1274)는 이 새로운 철학들과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를 성공적으로 종합 해 내는 데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전통적 인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자리잡은 플라톤-아우구스티노 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등 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 방법론을 통해서 표 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이 종합 작업을 단순히 상 이한 의견들을 나열하거나 절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근 원에까지 들어가 비교하고 필요할 경우 변형시키는 작업 을 통하여 이루어 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새롭게 도입된 철학들과 조화시키고 혼합함으로써 그 교리의 핵 심을 변화시키려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리스도교의 믿음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다른 철학 사 상이 충돌할 때마다 그 철학적 입장들을 수정하고, 그리 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교정하려 하였다. 토마스 아퀴 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인 사상을 심도 있게 파 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말년에 저술한 여러 권의 아리 스토텔레스 주해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사 상적 독창성과 신학을 위한 변형의 성과는 다양한 신학 저작들, 특히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과 《대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ales) 속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론과 가능태 · 현실 태 이론을 더 깊은 근원까지 질문해 감으로써 존재와 본 질의 구분에 도달하였다. 이 구분을 통하여 존재와 본질 이 일치하는 필연적 존재인 하느님과 존재와 본질의 합 성으로 이루어진 우연적 존재인 피조물을 구분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섰다. 그 자체로 자립하 는 존재 자체' (ipsum esse per se subsistens)인 하느님이야말 로 각 피조물에게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서 존재 를 부여한 분이다. 이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인식과 작용의 최종 목적으로서, 그에 대한 최종적인 지식, 즉 지복직관을 얻을 때에만 인간의 최고 행복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 고 완성한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신학과 철학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 정하였다. 교부 철학 이래 철학을 신학의 기초 학문 또는 신학의 일부로 수용하려던 경향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을 토대로 한 신학과는 구별되는 순수 이성 만으로 세계와 그 원인들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의 역할 이 새롭게 확보된 것이다. 이런 구분은 이후 철학의 독자적인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토마스주의의 비판가들 :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로 인 정받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문적 종합은 위대한 것이었 지만, 모든 이가 그의 작업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스코투스(1265/1266~1308)와 같은 이들은 토마 스의 입장을 비판하고 관련된 문제들을 재검토한 후에 새롭고 더 강력한 종합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아 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존재 개념의 유비적 성격을 거부하고, 존재 개념은 근본적으로 '일의 성' (一義性)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제1 원동자' 혹은 '존재 자체' 라는 개념보다는 '무한한 존재' 라는 개념이 하느님에게 더욱 적합한 개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토마스의 신 존재 증명도 변형시키려 하였다. 보편 문제 에서도 온건 실재론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보편성의 우 위에 대항하여 개체성(haecceitas)을 부각시켰다. 또한 그 는 자유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토마스와 대조적으 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이런 일련의 주장들은 전통적인 중세 철학이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계 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스코투스 이외에도 베이 컨과 룰루스(R. Lullus, 1232/1235?~1315/1316) 그리고 일부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은 철학과 신학을 구분한 알베르 토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도를 비판하며, 이 학문 분야들을 다시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후 기〕 14세기에 들어 백년 전쟁(1337~1453)과 아비 뇽 교황들(1309~1376) 그리고 페스트(흑사병)의 창궐 등 수많은 종교적 · 정치적 변화와 대혼란을 겪으면서, 스콜 라 사상은 점차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전체 사회 는 형이상학과 이를 그리스도교 신학에 수용하는 일에 더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토 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 등과 같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계승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많은 철학자들 은 전(前) 시대의 학문적 작업을 계승하기보다 회의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철학자들은 이런 경향 속에 서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해 열망하였다. 이런 열 망은 특히 철학에서는 오컴에게서, 과학에서는 오컴주의 자들에게서, 그리고 종교에서는 에크하르트(J. Eckhart, 1260?~1327/1328)에게서 꽃을 피웠다. 오컴 : 스코투스의 개체성에 대한 강조와 비판 정신을 더욱 발전시킨 오컴은 온건 실재론에 의해 이미 해결된 것으로 보였던 보편 논쟁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그는 보편적 실재를 면도날로 잘라내듯 제거해 냄으로 써, 개체들은 '절대적인 사물' 로서 보편에 대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부활시킨 '유명론' (唯名論, nominalismus)은 신학과 철학에서 전수된 문장들에 대하여 철 저하게 언어학적이고 의미론적인 분석을 가함으로써 이 문장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런 분석적인 태도는 과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과학 탐구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옥스퍼드 대학은 오컴의 이론을 열광 적으로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철학 탐구의 중심이었던 파 리에서도 점차 주도적인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지지자인 오컴주의자들은 소위 '근대파' (modemi)를 형성 하고, 전통적인 토마스주의 및 스코투스주의의 실재론을 따르는 '고대파' (antiqui)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오컴은 자신이 제시한 '경제성 원리' 에 따라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런 경향에 따라 오컴은 신앙과 관련된 진리를 얻기 위 해서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처럼 필연적 이 아니라 개연적인 논증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종종 있 다. 이런 입장 안에서는 신앙의 내용 내지 신학적인 주장 들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단적으로 제한되었다. 오컴은 또한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 · 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하였다. 그는 모든 도덕 률을 신의 순수 의지에 종속시키며 필연적 계율은 존재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오컴에게서 시작된 신앙과 지식의 철저한 분리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더욱 강 화되었다. 신학과 철학 그리고 자연 과학을 망라하여 여 러 학파들의 극단적인 대립은 실제에 대한 궁극적인 탐 구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다듬 는 데만 치중하였다. 파리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은 논쟁 과 혼란의 중심이 되었고, 스콜라 철학 융성기에 이룬 위 대한 종합들은 맹목적인 주해가들과 도발적인 비판가들 을 통해 점차 와해되고 더이상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신비주의 : 강력한 이론적인 종합과 해체의 소용돌이에 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독 일 도미니코회 수사인 에크하르트는 그리스도교와 신플 라톤주의 양쪽에서 영감을 받은 사변적 신비주의를 발달 시켰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벗 어나 영혼이 하느님에게 상승하는 과정을 전통적인 신플 라톤주의의 용어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합일 은 단순한 황홀경이 아니라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내적인 관상의 결과이다. 학문의 교사이기보다 삶의 교사 이기를 원한 에크하르트는 이런 체험이 고통 받는 이웃들 에 대한 실천적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가르침은 뒤에 종교 개혁의 사상이나 독일 관념론에 영향을 준 독일 신비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신플라톤주의의 부흥 : 중세 말기에 이르면서 스콜라 철학 융성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였지만, 그 생명력과 창조력을 잃어버렸다. 창조적인 정신을 가 진 쿠사의 니콜라오(1401~1464)와 같은 학자들은 모순율 에 기반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은 '대립물의 일치' 이며 무 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통일하여 포괄한다. 이런 유형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신플라 톤주의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에 이루어진 플라톤 철학의 부흥과 직접 연결되었다.
IV. 현대의 연구 동향 및 의의 〔연구 동향〕 중세 철학은 진지하게 연구될 만한 가치 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시대가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중세란, 교회의 권위가 인간 이성을 속박하고 쓸모 없는 신학 연구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이렇게 생각한 이들에게는 참된 철학 연구를 위해 플라 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철학에서 사변 이 성이 다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이후의 근대 철학으로 건너뛰는 것이 자연스 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중세 시대처럼 이성과 신앙, 철학 과 종교 사이의 밀접한 연결 상태에서 '진정한 철학이 가능한가' 하는 비판을 자주 제기하였다. 베드로 다미아 노의 '철학은 신학의 하녀' (ancilla theologiae)라는 명제가 전체 중세 철학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오인되며, 이런 비판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세에 관한 편견의 직접적인 원인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 (Humanist)들에게 있었다. 스콜라 철학 쇠퇴기의 왜곡된 교육 형태와 성과들을 체험하였던 그들은 중세와 중세 문화를 전면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 대 사상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자처하였다. 종교 개혁 과 근대 과학의 발전 등은 중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이런 경향은 19세기 초엽까지 지속 되었다. 예를 들어 헤겔(G.W.F.Heel, 1770~1831)과 같은 철학자는, 중세 철학이란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을 철 학적인 용어를 빌려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므 로 실제로 신학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세 철학은 철학 자 체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상을 고찰하지만, 이 를 전제로 인정하고 있는 신학의 범주를 따라서 취급할 뿐이라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세에 대한 지식도 전 혀 갖추지 못한 채 중세 철학 전체를 불모의 체계, 심지 어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D. Diderot, 1713~1784)는 "인 간 정신의 가장 큰 재앙 중의 하나" 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근대의 소위 '새로운 철학 체 계' 의 모순과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중세에 대 한 평가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19세기 말 부터 가톨릭 학자들은 오랜 침체기를 극복하고 교황 레 오 13세(1878~1903)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mi Patris, 1879.8.4)를 도화선으로 중세 철학, 그중에서도 특 히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부흥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 였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훌륭한 중세 학자들이 알려 지지 않았던 중세의 다양한 수사본들을 발굴하여 소개함 으로써 중세 철학이 지닌 풍부함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학계에서는 중세 철학 전체를 재조명하여 복원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19세기까지 팽 배해 있던 중세 철학에 대한 폄하는 결정적으로 사라졌 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중 세의 학자들도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순수한 철학적 인 관점과 방법에 따라 다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 게 되었다. 이들의 연구 성과와 현대 철학과의 끊임없는 토론을 통하여 중세 철학이 신앙의 내용을 전제하기 때 문에 참된 철학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은 그 근거가 희박하 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비판하던 철학자 자신들 도 그러한 전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중세 철학자들이 '천편일률적' 이며 한결같이 수준이 낮고 업적이 빈약한 사람들이라든가, 중세 철학에는 풍요성과 다양성이 없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스콜라 철학의 약 점과 후기에 나타난 역사적인 쇠퇴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자들은 중세 철학을 새롭게 평가하고 집중적으로 연구 하고 있는 추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서구 학계보다 수십 년 늦게 나타나기 시작하였 지만, 최근 들어 중세 철학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 지고 있으며 점차 많은 연구 결과물들이 출간되고 있다. 〔의 의〕 고대와 근대를 연결지워 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중세 철학은 서구 정신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이다. 실체 · 인과 관계 · 현실성 · 목적성 · 보편성과 개체성 · 감성과 현상계 · 오성과 이 성 · 영혼과 정신 · 세계와 신 같은 매우 근본적인 주제들 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근대 철학자들이 고대 사상 안에서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 중세 철학을 통해서 전수 된 것이다. 더욱이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에 생겨나기 시 작한 파리 대학과 다른 많은 대학들은 서방 교육을 변화 시킬 모델을 제시했고, 그 이후 서방 문화를 주도할 지성 적인 지도자 집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유럽 문화 는 논리적 사고들의 엄격한 적용이라는 특징을 지닌 대 학들로부터, 르네상스보다 훨씬 더 많이 비판적인 지성 과 끊임없는 과학적 탐구 정신을 전수받았다. 일부 철학사가는 철학의 주제 면에서 중세 철학 시대 가 다양한 관점에서 현대를 훨씬 능가하였다고 판단하기 도 한다. 특히 그들이 학문과 관련해서 보여 준 성실성과 진실성은 신앙과 결부된 놀랄 만한 것이었다. 내용적으 로도 중세 철학은 건전한 상식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근 대 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 측면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못하도록 한 점에서 모범적이다. 신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질서 및, 인간의 자유 · 존엄의 확 실한 근거(자연법 이론 · 진리 · 인권 · 국가의 본질 등)를 탐구 해 온 점은 중세 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래서 사람 들은 자주 중세 철학의 근본 내용을 '영원한 철학' (Philosophia perennis)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명칭은 현대인 이 중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요청이 아니라, 중세 철학 안에 담겨 있는 진리를 새로운 형식으로 그리고 변화된 환경에 맞게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최근에 들어서 '아직 다 파헤쳐지지 않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보고 로부터, 현대 철학과 신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교부 ; 교부학 ; 글레 멘스, 안티오키아의 ; 니콜라오, 쿠사의 ; 독일 관념론 ; 미누치오 펠릭스 ; 베드로 다미아노 ; 베드로 롬바르두 스 ; 보에시우스 ; 보편 논쟁 ; 스코투스 ; 스콜라학 ; 신 플라톤주의 ; 아베로에스 ; 아벨라르 ; 아우구스티노, 히 포의 ; 안셀모, 캔터베리의 ; 에리우제나 ; 에크하르트 ; <영원하신 아버지> ; 오리제네스 ; 오컴 ; 유스티노 ; 자 유 학예 ; 테르툴리아노 ;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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