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본당 中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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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 초현리 소재. 1927년 창설되었다가 1950년에 폐쇄되었 다. 주보는 성 바오로. 관할 구역은 중화군 전 지역과 대 동군, 용연면 일부 지역. 〔교세〕 1950년 660명. 〔역대 신 부〕 초대 치셤(Chishom, 池) 도날드(1927~1932), 2대 콜 먼(Coleman, 高) 왈터(1932~1935.3), 3대 기본스(Gibbons, 盧) 요셉(1935. 3~1935. 7), 4대 강영걸(康永杰) 바오로 (1935. 7~1939. 1), 5대 치셤 (1939. 1~1940), 6대 부드(W. Booth, 夫文化) 굴리엘모(1940~1941. 12), 7대 박용옥(朴 瓏玉) 디모테오(1942. 6~1943. 6), 8대 심재덕(沈載德) 마 르코(1943. 6~1944. 4), 9대 이우철(李宇哲) 시몬(1944. 4~11), 10대 강현홍(姜賢洪) 요한(1944. 11~1949.8). 중화 지방에는 1864년경 전교회장 김기호(金起浩, 요 한)와 베르뇌(Bemeux, 張敬一) 주교의 전교로 목재리(睦 齋里)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교우들이 모두 흩어지면서 공소가 폐쇄되었다. 그러 다가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후 다시 목재리, 서가 리, 갈매리, 매미 등에 공소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중화 지방의 공소들은 1914년 사리원(沙里院) 본당 공소로 소속이 바뀌었다가 진남포 본당의 사목권이 확대됨에 따 라 1919년 진남포 본당의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중화 지방이 오랫동안 공소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미국의 메리놀회가 1923 년부터 평안도 전역을 관할하며 평양교구의 설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메리놀회의 치셤 신부가 이 지방에 본당을 창설하기 위해 1926년 가을에 중화 읍내로 파견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임시 성당을 마련하고 성사를 집 전함으로써 본당으로 창설되어 이후 중화군 전역과 대동 군(大同郡) 일원을 관할하게 되었다. 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콜먼 신부는 1932년 읍내 중심부에 대지를 마련 하여 성당을 건립한 후, 1934년 11월 29일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교구장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 다. 1934년 평양교구 내 각 본당이 가톨릭 운동 연맹 지 회(支會)를 조직하고 가톨릭 운동을 전개하자, 중화 본 당도 지회를 만들고 특히 유아의 문맹 퇴치 사업과 신자 자녀의 주일학교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어 4대 강 영걸 신부는 본당 내에 성심학원(聖心學院)과 성심유치 원을 개설하였는데, 이것들은 신자들과 읍민들의 지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성심학원은 빈민 아동 교육 에 전력함으로써 지방민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아 전교 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 였던 윤창혁(尹昌赫, 비오) 회장을 기념하는 예수 성심 상과 루르드의 성모상이 1936년 성당 내에 건립되었다. 6대 주임으로 부드 신부가 1940년 부임하였으나 이듬 해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동료 메리 놀 회원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자, 중화 본당은 잠시 대 신리(大新里) 본당 관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박용옥 신부가 1942년 6월 7대 주임 신부로 부임함으로써 본당 은 재출발하게 되었다. 8대 주임으로 심재덕 신부가 1943년 부임하였는데, 당시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일본 에게 불리해짐에 따라 일본 관헌들의 종교에 대한 탄압 과 감시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따라서 심 신부는 이를 타 개하기 위해 신자들의
신심 강화에 주력하며 교회 운영에 최선을 다하였다. 광복 후 성심학원은 4년제 국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로 인해 교회와 학교는 새로운 활기를 찾아 가기 시작 하였으나, 1947년 12월 원인 불명의 화재로 교사(校舍) 가 전소되어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교회에 대한 북한 정 권의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0대 주임 강현홍 신부가 1949년 9월 월남하자, 강 신부를 대신하여 평양 주교관 에서 휴양 중이던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신부가 매 월 2~3차례 본당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였으나 그 해 12월 12일 장 신부마저 북한 정권에 체포되었다. 이 후 덕원 신학교의 폐쇄로 귀가한 신학생 지학순(池學淳, 다니엘)이 혼자 성당을 지키다가 1950년 1월 월남하여, 중화 본당은 6 · 25 전쟁과 함께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침묵의 교회 ; ← 강영걸)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天主敎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天 主教 平壤教區史》, 1981. 〔金善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