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자 證據者 〔라 · 영〕Con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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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인 아우구스티노(왼쪽)와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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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자인 아우구스티노(왼쪽)와 안토니오.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있음을 증거한 사람. 〔의 미〕 증거자(ὁμολογητής)는 오늘날 순교자가 아닌 성인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초기 교회에서 증거자는 순 교자(μάρτυς)와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 '순교' 라는 말 자체가 '증거' 라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동의어로 여겨 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를 "많은 증인들(μαρτύρων)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한(ὁμολογίαν)"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1디모 6, 12). 루가 복음사가 는 21장 13절에서 복음을 증언할(μαρτύριον) 기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렇게 성서에서 두 가지 용어는 같은 뜻 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증거 한 사람들과 신앙을 증거하되 목숨을 부지하여 유배되는 사람들이 생겨남에 따라 두 용어는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즉 그리스도처럼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은 순교자라 불리고, 고문 가운데 신앙을 증거하였으나 죽 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은 증거자라 불렸다. 〔의미의 변천〕 1세기경 신자들은 감옥에서 고문, 유 배, 강제 노역에 처해져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과 그리스 도처럼 피를 흘려 순교한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순교자' 라 불렀다. 예를 들어 예수의 친척인 유다의 후 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 시기에 박해를 받고 방면되었으나 '순교자' 로 불렸다(에우세비오, 《교회사》 Ⅲ, 20). 2세기 중엽부터 순교자와 증거자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2세기의 사도 교부인 헤르마스(Hermas)는 신앙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별하였다. (《목자》 VIII, 3, 6-7). 이러한 구별은 빈(Wien)과 리용(Lyon) 교회에서도 나타났다. 박해의 상황을 전하는 신자들 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이들을 '순교자들' (μάρτνρες)로, 목숨을 보존한 이들을 '증거자들' (ὁμὁλογί)로 기술하고 있다(《교회사》 V, 2). 오리제네스(185~25 역시 역시 말과 행동으로 진리를 증거한 사람들과 피로써 신 앙의 신비를 증거한 사람들을 구별하였다(《요한 복음 주 석》 Ⅱ, 28). 또한 테르툴리아노(160?~ 220?)는 감옥에서 병들어 있는 신앙인을 "복된 순교자가 될 사람들" 이라고 불렀다(《순교자들), 1). 카르타고의 주교인 치프리아노 (200?~258)는 더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는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순교자들의 대열에 들지 않 는 증거자들에 대해 언급하였다(《서한》 6, 1 : 13, 2 : 14, 3 : 40, 1). 또한 그는 감옥에 갇혀서 기꺼이 신앙을 고백 하고 죽은 이들도 순교자의 영광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서한》 12, 2). 하지만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순교자' 로 부르지 않았다(《서한》 36, 2). 그러나 두 용어가 같은 뜻으로 쓰인 흔적은 있다. 〔의미의 확대〕 '순교자' 의 반열에 들지 않는 '증거자' 개념은 박해가 끝난 후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알렉산 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는 영적인 순교로 그리스 도를 증거하는 신앙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양탄자) IV, 15, 3). 치프리아노도 매일 매일 신앙의 실천을 통해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삶과 그 영광에 대해 말하였다(《서한》 15, 1). 이러한 의미가 점점 확대되어 수덕 생활로 신앙 을 실천한 성인들이 '증거자' 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동 방 교회에서 '증거자' 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은 은수자들 의 아버지라고 불린 안토니오(251~356) , 푸아티에의 힐 라리오(315?~367?)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 373)이며, 서방 교회에서는 밀라노의 주교였던 에우스토 르지오(Eustorgius),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 335), 히 포의 아우구스티노(354-430) 등이다. 4세기의 주교들은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순교의 고통을 겪지는 않았지만 잦은 박해로 커다란 역경과 시 련을 겪어야 했다. 신자들은 이런 이들의 선종일을 천상 탄일로 기억하였고, 그들의 유해를 제대 밑에 모셨다. 투 르의 그레고리오(538~594)는 이러한 주교, 수도자, 동정 녀들의 증거의 삶을 전하면서 그들의 모범을 따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증거자〕 한국 교회의 역사는 아직 짧아 '순교의 역사' 가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근래에 '증거 자' 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달레(Ch. Dallet) 신부는 역관인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1751~1787) 를 첫 순교자로 볼 수 있다고 시사하였다. 김범우는 1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 지만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여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증거자요 순교자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김범우는 '증거자' 의 범주에 속한다. 단양 으로 유배된 후 약 1년 동안 신앙을 증거하며 살다가 선 종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초기 교우들 중에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지만, 유배 가서 신앙을 지킨 '증거자' 들도 상당수 있다. 조동섬(趙東暹, 1738~1830)과 정약용 (丁若鏞, 1762~1836)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랜 유배 생활 동안 나름대로 신앙을 지켰고 교회 재건 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전한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요 '땀의 순교자' 로 불리는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도 '증거자' 이다. 그는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박해 시대의 교회를 재건하며 길 위에서 살다 길에서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보이지 않는 '증거자' 들이 많이 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언급한 것처럼, 일상의 신앙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웅적으로 증거한 분들이다. 박해 시대의 증인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 일 제 시대의 안중근(安重根, 1879~1910), 한국인 수도회의 창설자 등을 '증거자'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느님께 불림을 받았다. 신앙생활은 성인이 되는 것, 즉 '그리스도의 증거자' 가 되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E. Day, 《NCE》 IV, pp. 141~142/ H. Leclercq, Dictionnaire d'archéologie chrétienne et de liturgie III-II, pp. 2508~2515/ A. Bugnini, 《EC》 IV, pp. 250~255 ; W. Diirig, 《LThK》 II, p. 1421/ Cyprianus, Epistolae, 41 Tertullianus, Ad Martyres, (PL》 1/ 샤를르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柳漢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