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직관 至福直觀 〔라〕Visio beatifica 〔영〕Vision of God, Beatific 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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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직관은 의인이 누리는 행복이다.

지복직관은 의인이 누리는 행복이다.

천상의 영광 안에 있는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복된 상태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결과로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사후에하느님을 직접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상태' 이고 인격적 실재인데,직관은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표현하는 말이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은 인간의 단순한 능력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상호 인격적 결
합을 나타낸다. 서로 보고 아는 인격적 친교는 매개체를필요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최고 행복이므로 '지복직관' 이라 한다.〔성서에서의 언급〕 하느님과의 직접적 대면은 충만하고 완전한 친교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리하여 사랑을 누리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에게 보여지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완전히 자신의 인격을 실현하게 된다. '본다' 는 시각적 은유는 직접적 인식과 사랑의 절대적이며 직접적 특성을 강조한다. 하느님 "그분만이 불사불멸하시고 가까이할 수 없는빛 속에서 사시는도다. 어느 인간도 그분을 보지 못했고
볼 수도 없도다"(1디모 6, 16 요한 1, 18 ; 마태 11, 27 ; 1고린 11, 11).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므로 당신의 신비를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고 또 인간에게 그 같은 능력을 줄 때에만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을 볼 수 있으려면 이른바 '영광의 빛' (lumen gloriae)을 받아야 한다(DS 475 : 비엔 공의회의 결의문). 지상에 있을 때 신앙의 은총이 필요였듯이, 영광의 차원에서는 영광의 빛 즉 하느님을 빌수 있는 능력을 순수한 선물로 받아야 한다. "복되어라,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 8).직관은 불완전하고 희미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현세 생활 중에도 가능하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어풋이 보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인식한다 해도 단편적이지만그때가 되면, 내가 이미 (하느님에게) 온전히 알려진 것처럼, 나도 온전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 12)."사실 우리는 그분을 실제 모습 그대로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 2). 성서에서 '보는 것' 은 피조물들을 통해 하느님을 간접적으로 아는 것, 즉 논증을 통한하느님 인식도 아니고, 모든 지적 인식의 전제가 될 수있는 천부적 인식도 아니며, 신앙을 통한 불명료한 인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직접적 만남 안에서 누리게 될 복락, 즉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마련하신 복된 처지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품고 있던 열망이다(창세 33, 18. 23). 왕을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왕과 친밀하게 지내고, 식탁에도 함께 앉으며,왕과 친숙한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였다. '본다' 라는 성서적 개념은 생명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현존 안에서 살아감을 뜻한다. 그것은 이론적 지식 혹은 수동적 관상이기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친교를 가리킨다.하느님의 생명을 누리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것이인간의 최종 목표라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이미 드러난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편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 (시편 16, 11).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 (시편 17,15). 예수도 당신이 성부께 귀환할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구원의 근본 내용이라고 밝혔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겠습니까?···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요한 14, 2-3).하느님과의 일치는 의인들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상급이다.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 와서 네 주인의기쁨을 함께 누려라" (마태 25, 21. 23). 예수의 이 약속은인식과 사랑의 영적 친교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과 더불어 나누는 생명의 교류임을지적한 것이다.직관의 개념은 이처럼 성서와 성전 안에서 점차 발전해 왔다. "올바른 이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 (시편11, 7 ; 24, 6).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으리이까?"(시편 42, 3).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창세 32, 31)라고 말한 반면, 요한 복음사가는 "일찍이 아무도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요한 1, 18)라고 단언하였다. 야곱이 하느님을 뵈온 것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불명료하고 간접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을보는 것이 영원한 생명 중에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명백히 단언하였다.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께 대한 직관을 열렬히 바란다(1요한 3, 2) . 〔교회의 가르침〕 교회의 교도권도 장차 실현될 세상의 생명이 하느님을 보는 데 있다고 선언하였다. 의인은"하느님의 본성을 직접 맞대고 본다. 그 결과 하느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을 통해 간접적이 아니라 직접, 있는그대로, 명확히 숨김없이 알려진다" (DS 1000~1002 : 교황 베네딕도 12세의 칙서 ). 성인들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똑똑히 본다" (DS 1303~1306 : 피렌체 공의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결의문>)직관의 교리는 은총과 본성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직
결되어 발전하였다. 신학계에서는 두 가지 질문, 즉 직관은 자연적 열망의 결과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연적 방편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의 논증에 따르면,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소유하고 싶은 자연적 욕구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 열망을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만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그 같은하느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신학 대전》 II-I, 5. 5). 그같은 자연적 욕구가 있다고 해서 하느님에 의해 자연히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직관은 하느님이 당신과의 결합에 은총으로 이끌어 주어야만 인간이 누릴 수있는 복락이다. 직관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친교 및 접촉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뵈옴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스런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하느님을 온전히 향유하게 된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 님을 완전히 향유함으로써 더이상 하느님을 매개체를 통해서나 믿음으로써만 보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사는 삶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의인들은 하느님을 직접 보기 때문에 매개 역할을 하는 피조물 없이 하느님이 그들에게 당신을 명백하고 밝게 보일 것이다. 하느님의 실체를 직접 파악하고 즐기므로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린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 충만한 삶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하느님이 현존해 있으며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과 사랑 및 행복이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의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집니다"(1요한 4, 12). 영원하고 참된 생명, 즉 하느님이 약속하고 우리가 열렬히 바라는 행복은 하느님을 뽑는 것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아는 것이며, 하느님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개방 · 사랑 · 참여 · 친교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의인과의 완전한 일치를 드러낼 것이다. 직관은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완전한 일치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완전한 사랑을 나누고 또 성령 안에서 의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시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됨을 뜻한다. "그날 여러분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은 내 안에 있으며 나도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4, 20). 직관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의인을 당신과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 안으로 이끌어 들인 상태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토록 하느님을 알고 그분에게 알려지고 또 사랑하고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삶이다.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도다"(1고린 2, 9). 결국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 순례의 목적인 완전한 지복직관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느님이 이끄는 섭리의 길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악과 죄의 비극을 통해서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결정적인 안식으로 이끄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14항)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영복 ; 하느님의 나라)
※ 참고문헌  M.J. Redle, pp. 168~177/ A. Michel, 《DTC》 7- 2, pp. 2351~2394/ R. Schnackenburg · K. Forster, 《LThK》 1, pp. 583~591/ H. Cazelles et al., 《Cath》 1 pp. 1342~1354/ 주교 회의 교리 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崔榮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