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敎會史

〔라〕historia ecclesiae · 〔영〕history of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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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은 교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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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은 교회의 시작.


I . 고대 교회(30~450년) 교회의 역사는 사도들이 30년경, 예수 부활 후 50일 이 되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가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는 두 개의 공동체 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대부분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 갈릴래아 교회, 사마리아 교회,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교회와 같은 유대계 그리스도 교 공동체이다. 다른 하나는 37년경에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일부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지방으로 옮기 면서 형성한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 베드 로 사도가 창설한 로마 교회와 같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헬레니즘 문화권의 외교인에서 개종한 신자 들로 구성되었다. 사도 시대 초기에는 예수의 친척들이 이끌던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주도 하였으나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이 교회 안에서 배척받음으로써 유대교 색채는 약화 되었다. 반면에 바오로 사도의 선교 노력으로 이방계 그 리스도교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특히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향력은 크게 약 화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방계 그리스도 인의 율법 준수에 대한 논쟁으로 49년에 발생한 예루살 렘 사도 회의 및 안티오 키아 사건과 그리스도 의 신성(神性)을 거부 하고 세속적 메시아 사 상을 전파하던 유대계 그리스도교 이단 운동 (에비온파, 엘케사이파, 니 콜라오파) 때문에 내분 을 겪었다. 아울러 바리 사이파 및 사두가이파 와 같은 유대인 지도자 들로부터 탄압을 받았 고 클라우디우스(41~ 54), 네로(54~68), 도미 시아누스(81~96)와 같 은 로마 제국 황제들의 박해도 받았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사도 시 대의 공동체는 베드로 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 밑에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 동체를 담당하는 야고보 중심의 장로단, 그리고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보살피는 스데파노 중심의 부제단 으로 교계 체제를 갖추었다. 2세기에 이르러 열두 사도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사 도 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다음 시대에 전승하는 사도 후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제 그리 스도교의 복음은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제국 밖으로까지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선교사들의 열성적 활동 외에 그리스도교가 제시한 결혼관, 가정 윤리, 만민 평등 사상과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형제적 사랑, 영웅 적 순교 용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리스 철학과 다신교 가 해결하지 못한 인생 문제를 그리스도교 교리가 명확 하게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 교부, 호교 교부, 초대 교부들은 반(反)그리스도교 사상과 그노시스 (靈知主義) 이단을 논박하면서 계시 신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사도 후 시대의 신학과 전례는 유대계 그 리스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삼위 일체론, 그리스도 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과 같은 교리는 유대교의 천 사론, 묵시 사상, 종말론, 상징주의를 통해서 설명되었고 주요 전례로는 그리스도교 입교 예식과 주일 집회의 성 찬례가 있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이 강조되어 순교 에 대한 열망은 신심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가페라고 불리는 애찬(愛餐)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두텁게 하고 재난을 겪는 외교인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간 사랑을 실천하였다. 교계 체제는 감독 (주교), 장로(신부), 부제의 순서로 확립되었고 지역 교회 들은 전체 교회(가톨릭 교회) 안에서 서로 유대를 맺고 로 마 교회와 그 주교(교황)는 지역 교회와 그 주교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수위권을 행사하였다. 교회는 안에서 일어난 이단과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단으로는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그리 스도교 교리를 이원론, 유출설(流出說), 정령설(精靈說) 을 갖고 터무니없는 논리로 설명한 그노시스주의가 등장 하였고 로마에서는 양자설(養子說)과 양태설(樣態說)과 같은 신격 유일설(神格唯一說)이 나타났으며 윤리 도덕 의 엄수를 지나치게 강조하던 몬타누스와 같은 광신주의 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주창하면서 교 회와 사회를 혼란시켰다. 또한 교회는 로마 제국 황제들 의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교회 박해는 그리스도교의 일 신교와 로마인의 다신교의 충돌이었고 로마인들이 그리 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오해와 증오에 기인했으며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의 교세 확장으로 정치적 위기 의식 을 갖는 데에서 발생하였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콘스탄틴 황제(306~337)의 등장 으로 교회 박해는 끝났고 313년의 밀라노 관용 칙령은 그리스도교에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였으며, 392년에 황 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교회(국교) 로 선포하였다. 로마 황제들의 친(親)그리스도교 정책으 로 교회는 여러 가지 물질적 특혜와 법 적 특권을 받게 되면서 박해받던 소수 집단의 교회에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 였다. 특히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의 베 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무덤 성당, 베 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 건립에 후원 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예술의 기원을 이 루었다. 이렇게 교회가 외적으로는 발 전하였으나 반면에 황제의 교회 내정 간섭으로 교회 세속화를 이끈 황제 교 황주의(皇帝教皇主義)는 교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박해가 끝나면서 더 이상 순교 로써 신앙을 표현할 기회가 없어지자 박해 시대의 순교 신심은 이제 동정 생 활과 속세 이탈과 같은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바뀌었다. 경건한 그리스도교인 들이 제도 교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포기의 복음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수도원을 설립 하였다.성 안토니오(251~356) 이후로 이집트에서 은수 수도회와 공주(共住) 수도회가 창설되었고 동로마 제국 의 여러 곳에서 수도원들이 나타나면서 신자들의 영성 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도 생활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금욕 생활을 구원의 첫째 요 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성사를 경시하는 메쌀리안스 (에우티케스)라는 이단 수도자들도 등장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이 도입되었고 밀라노 의 주교 암브로시오(339~397)와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 노(354 ~430)는 교구 수도회를 세웠다. 교회는 교세가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내부 조직과 법 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교회 조직은 공의회의 등장과 내주교구(總大主教區) 설정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공의회는 교회 주교들이 참석하는 세계 공의회와 지방에 한정되어 열리는 지역 공의회가 있는데 정통 교리를 선 포하고 교회의 규율을 제정하며 열교(裂敎)와 이단의 문 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세계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총대주교구를 설 정하여 로마 교구 밑에 두었다. 전례에 라틴어가 사용되 었고 예수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전례력이 다양 하게 나타났다. 신앙 생활은 기도, 극기, 자선으로 특정 짓는 개인 신심과 순교자의 성해(聖骸)를 공경하고 순교 자 전기를 간행하며 순교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는 순교 자 공경과 성지 순례가 대중 신심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교회는 정통과 이단 사이의 교리 논쟁으로 분열 되었다. 이 논쟁은 교회뿐만 아니라 정교(政敎)가 일치 되어 있던 로마 제국의 사회 질서를 파괴할 위험이 있었 기 때문에 황제들이 개입하여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여 쟁점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교회에서는 삼위 일체 문제를 니체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하나의 신성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 해결하였고, 에페소 공의회(431)와 칼체돈 공의회(451) 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구분될 뿐이며 한 위격 안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그리스 도론을 정립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교회에서는 암브로시 오와 아우구스티노가 성사의 인효성(人效性)을 주장하 는 도나투스 이단과 하느님의 은총을 경시하고 인간의 선업만을 강조하는 펠라지우스 이단을 논박하면서 구원 론을 정립하였다. II . 고대 · 중세 과도기(450~750년) 5세기 중반기에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던 게 르만 민족이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 이동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게르만 왕국들이 건설되었으며, 특히 아리우스 이단을 받아들인 동게르만 민족이 점령한 지역 에서는 교회가 붕괴의 위험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회 지 도자들은 서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 민족들 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서게르만 민족의 프랑크족 국 왕 클로비스(481~511)의 개종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고 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게르만 민족이 융합되어 서구의 그리스도교 중세를 탄생시키는 데에 기초가 되었다. 이 메로빙가 프랑크 왕국의 교회는 국가 교회의 성격을 지 니고 있었고 유능한 주교들의 등장으로 발전하였다. 영국 제도(諸島)에서는 시대순으로 고대 브리튼 교회 와 아일랜드 교회, 그리고 앵글로-색슨 교회가 탄생하였 다. 고대 브리튼 교회는 고유한 전례 관습을 갖춘 수도원 체제의 교회였으며 아일랜드 교회도 고유한 켈트 전례의 전통을 따르고 있던 수도원 중심의 교회였다. 이러한 특 성 때문에 이 두 교회가 로마 교회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독립 교회로 이해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주교구도 존재 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가 선교사를 파견하여 설립한 앵글로-색슨 교회도 수도원 중심의 교 계 체제의 교회였지만 로마 교회와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골롬바노(543~615)와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빌리브로드(659~739)와 보니파시오(672~754)와 같은 앵 글로-색슨 선교사들은 유럽 대륙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중세 서구의 그리스도교화에 이바지했다. 6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가는 왕 권이 약화되어 국왕들은 이름뿐인 국가 원수였고 지방의 제후인 궁재(宮宰)들이 실제 통치자였다. 특히 피핀가의 칼 마르텔(690~741)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서 에스 파니아에 침공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무관(無冠)의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 피핀 3세(741~768)는 교황 자카 리아 1세(741~752)의 도움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카롤링 왕가의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752년 롬바르디족이 로 마를 침공하였을 때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는 피핀 의 초청을 받고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여 754년 1월 7일 에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이 우호 동맹을 맺었다. 교황은 피핀에게 로마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였고 피핀은 이탈리아로 출정하여 롬바르디족을 격퇴시키고 빼앗은 영토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Ⅲ . 중세 교회(750~1300년) 피핀 3세의 아들 카알 대제(768~814)는 주위의 게르만 민족을 정복하면서 세력 팽창과 영토 확장을 종교적 입 장에서 해석하고 점령 지역의 주민을 집단으로 개종시켜 중세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 형성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795)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 진군하여 롬바르디족을 격퇴하고 781년에는 일부 영토 를 로마 교회에 기증함으로써 교황령 또는 교회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의 아들 루드비히 1세(814~840)는 817년 에 루드비히 특전을 반포하여 로마 교회에 교황 선출권 과 교황령의 자치권을 승인했다. 또한 법령들을 반포하 여 지역 교회의 주교 권한을 강화했고 성직자 생활 쇄신 과 수도회 개혁을 시행하여 교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루드비히 1세 이후 왕족의 영토 분쟁으로 국력 이 쇠미한 카롤링 왕가의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의 보 호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로마 교회는 속권의 지 배를 받는 암흑기(880~1046)를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이 탈리아의 귀족들이 로마 교회의 주교들을 마음대로 임면 (任免)하였다. 962년에 오토 1세(936~973)가 독일의 신 성 로마 제국을 창설하면서 제국의 황제들이 직접 그들 의 측근을 로마 주교에 선임하였다. 이는 교회와 제국의 충돌을 일으켰고 정통 교황과 대립 교황이 등장하여 로 마 교회는 내분에 휩싸였다. 이러한 내분은 하인리히 3 세(1039~1056)가 1046년에 수트리 교회 회의에서 교황 선출권을 로마인들에게 이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성화상 파괴 논쟁이 발생하여 100 여 년 동안 제국과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일부 교회 지도자와 황제들은 성화상이 우상 숭배와 그리스도의 신 성(神性)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들은 성당에서 성화상을 철거하고 파괴하 도록 명령하였지만 결국 이 논쟁은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843)의 성화상 공경 승인으로 끝났다. 황제가 정치 적 이유로 당시의 총대주교 이냐시오를 파면하고 선임한 포시우스를 863년에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가 불 법 총대주교로 단죄함으로써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사이에 일어났던 포시우스 분규는 877년에 이냐시오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879~880) 가 포시우스의 선임을 승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이탈리아의 남부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에 대항하여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8~1058)와 군사 동맹을 맺었을 때 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룰라리오(1043~ 1058)는 교황의 세력 팽창을 두려워하여 그의 관할 지역 에서 라틴 전례를 금지하고 포시우스와 같이 니체아 신 경에 '성자에게서' (filioque)라는 문구 삽입을 금지하였 다. 두 교회의 긴장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황 특사로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홈베르토(1000-1061)가 파견되었 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그는 1054년 7월 16일에 총대주 교를 파문하고 로마로 돌아갔고 황제는 교회 회의를 소 집하여 특사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여 그리스 도교는 양분되었다. 수트리 교회 회의에서 로마 주교의 선출권이 교회로 돌아왔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 주교와 수도원장의 서임 권은 속권(俗權)에 달려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1073~1085)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 재확인과 함께 성직 매매에 대한 투쟁과 교회의 성직 서임권(聖職敘任權)의 쟁취를 목적으로 한 그레고리오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들도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와 대립 교황들을 파문하면서 투쟁 하였다. 교황청 분규와 성직 서임권 논쟁은 1122년에 보름스 교회 회의에서 교황 갈리스도 2세(1119~1124)와 하인리히 5세(1106~1125)가 종교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이 협약에서 황제는 성직 서임권을 포기하 고 교회법에 의한 주교 선출권을 보장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수도회의 개혁과 성직자의 생활 쇄 신에서도 나타났다. 수도자들은 엄격한 수도 생활 속에 서 고행자로서 또는 속죄 설교가로서 대중의 신앙 생활 향상에 이바지했다. 시토회 같은 개혁 수도회는 기도와 침묵, 규칙적 노동 생활을 강조하였고 청빈을 중요시함 으로써 과거 수도원의 봉건적 구조 질서를 거부했다. 재 속 성직자들의 모임인 수도 참사회는 사유 재산을 포기 하고 아우구스티노 규칙을 엄수하면서 새로운 성직자상 으로 사도적 청빈, 독신 생활, 교회 지도자에 대한 복종 을 제시했다. 대표적 수도 참사회인 프레몽트레회는 시 토회처럼 독일 북부 지방에서 회원의 개인 성화와 함께 지역 사회의 발전, 선교 활동, 문화 발전에도 공헌했다. 평신도들도 개혁의 움직임에 동참하였고 십자군 운동 (1096~1270)에서도 많은 결실을 맺었다. 기사 계층(騎士 階層)은 교회의 적대 세력에 대한 투쟁을 성전(聖戰)으 로 확신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전사(戰死)를 순교와 동 일시하였으며 교회는 참전 신자들에게 전대사를 반포하 였다. 1095년에 이슬람의 셀주크 투르크가 동로마 제국 을 침공하여 황제 알렉시오 1세(1081~1118)가 서구에 군 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때 교황 우르바노 2세(1088~ 1099)는 성지(聖地) 회복과 함께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 룩하려는 염원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고 이는 국가 들을 단결시켜 원정에 참여케 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기 사 수도회를 탄생시켰고 교황권을 강화했으며 이슬람교 의 서구 진출을 저지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십자군 운동 에 참여한 평신도들은 성지에서 참배한 장소를 성서에서 찾아보려고 성서를 읽 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가난한 삶을 따 르는 신심 단체를 조직하거나 순회 설 교를 통해서 복음적 청빈 운동을 전개 했다. 그러나 일부 청빈 운동은 봉건 체 제의 교회에 반발하여 과격한 모습을 보이면서 교계 체제를 공격하며 성사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이단 운동에 대해 교회는 방어적 대응 으로 이단 심문(종교 재판)을 설치하는 한편 탁발 수도회의 탄생으로 더욱 적 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탁발 수도 회는 사도적 청빈 생활을 실천하면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발달 그리고 이 단의 정통 교회 복귀와 아시아와 아프 리카의 선교 발판 마련에도 공헌했다. 그리스도교 계시 신앙에 대해 인간의 철학적 사고 방식을 활용하여 체계적 지식을 얻고자 했던 스콜라 학문은 십 자군 운동을 통해서 접촉된 비잔틴 문화로 발달했다.스 콜라 신학의 주제는 세상 창조, 인간의 자유 의지, 원죄, 육화, 성사, 삼위 일체였고 《신학 명제집》(Sententiae) 또 는 《신학 대전》(Summa)을 통하여 통합 정리되었다. 《그 라시아노 법령집》을 중심으로 교회 법령집의 편찬 활동 도 활발해졌다. 스콜라 학문과 교회법학은 대학을 중심 으로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1217~1274)와 도미니 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같은 학자들에 의 해서 발전했다. 대학은 주교좌 대성당의 도시 학교에서 시작되어 교권, 제권과는 별도의 함께 독립된 세력(studium)으로 자유로운 학문 연구에 대한 보장을 받았다. 12~13세기에 교회는 엘베 강 하류 지방과 발트해 동 반부 연안 지역 슬라브 민족의 개종과 핀란드의 복음화 를 추진하여 유럽 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되었다. 선교 활 동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확대라는 이념의 실천을 전제로 정치권 동기와 종교적 목적이 서로 밀착된 시대 상황에 서 전개되었다. 선교 자세에도 변화가 일어나 이전과는 달리 이교도를 공격의 대상보다는 선교의 대상으로 파악 함으로써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슬람 선교에도 나 섰다. 1240년에 이르러 몽골〔元〕 제국이 중국 여행의 안 전을 서구 세계에 보장하자 서구의 국왕들과 교황들은 외교 교섭과 복음 전파를 위해 수도자들과 상인들을 외 교 사절 또는 선교사로 파견하여 1300년대 초에는 중국 에 교계 체제가 설정되었다. 교황청은 비잔틴 교회와의 재일치를 시도하였으나 결 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 이후로 교 황들은 십자군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치의 염원은 성취 되지 못하였다. 인노천시오 3세(1198~1216)는 비잔틴 교 회가 교회 일치를 위해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자 오히려 교황에 대한 순명 선서를 내세워 성공하지 못하였고, 인 노천시오 4세(1243~1254)도 공의회를 통한 일치를 계획 하였으나 사망으로 성취되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10 세(1271~1276)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1261 ~1282)는 제2차 리용 공의회(1274)와 페라라 피렌체 공 의회(1438~1439)에서 일치 협정에 합의하였으나 비잔틴 교회의 반대와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일치 합의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Ⅳ. 중세 · 종교 개혁 과도기(1300~1500년) 십자군 원정에 나선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서부 유럽에서는 중앙 집권 체제의 전제 군주 국가가 등 장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제국 의 보편 정신은 점차로 지역 국가의 자국 위주로 전환하 였다. 국왕들은 자국 교회를 교황청의 관할에서 벗어나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국가 교회(국교회)에 관심을 두게 하 였다. 중부 유럽의 경우에 군소 국가로 분할된 이탈리아 에는 교황청이 의지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없어 교황 권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독일 지방에서도 확고한 단일 국가 형태가 형성되지 못하여 황제권 수행에 제약을 받 게 되었다. 이러한 분권화 현상은 제후들이 개인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 황제와 교황에게 도전한 루터를 지지하게 하였다. 도시의 등장과 함께 상공업이 발달하여 화폐 사 용이 점증하면서 서구 사회에서는 새로운 금융업과 자본 주의의 정신이 등장하였다. 고리 대금으로 재산을 증식 하는 부유한 도시인들은 전통적 윤리관을 무시하고 황금 만능주의에 젖어 있어 인간 모든 행위의 동기는 돈에 있 으며 돈의 위력은 영혼을 천국에 이끌 수 있을 만큼 위대 하다고 보았다. 도시인들의 배금(拜金) 사상은 대사(大 赦)의 시행에 있어서 오해를 일으켰고 교회 직책을 재정 적 수익의 도구로 생각함으로써 성직 매매의 위험을 안 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지대(地代)의 인상으로 농민들의 빈곤은 증대되어 있었다. 이러한 도시와 지방 빈부의 격 차는 어떠한 혁명적 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유럽의 서북부 지방 에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를 발생케 하였다. 인문주의는 객관적 스콜라 사상보다는 주관적이고, 인간의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여 이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사적 교회를 통한 구원보다는 인간의 개인적 하느님 체험을 역설하는 신앙 우위 사상을 내세우는 프로테스탄트의 구원관에 길 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는 고대 그리스-로 마 문학에 심취된 인문주의에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가미 하여 그리스도교의 고전 문학인 그리스어 신약성서와 교 부 저서를 중요시하였고 교회 생활에 있어서 초대 교회 의 제도와 규율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창함으로써 교회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학문 연구의 자유를 만깍하던 대학이 학문의 중심이 되면서 신학적 자유주의가 만연하여 교의신학의 불확실 성 시대를 초래하였고 출중한 신학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쇠퇴하였다. 대사, 구원, 은총, 미사 성제, 성사, 교회, 교황권과 같은 핵심적 신학 문제들이 교회에서 확실하게 정의되었다면 루터의 신학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다. 새로운 학문 방법으로 등장한 유명론(唯名論)은 루 터의 삼유일론(三唯一論)에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사변 적 신비주의는 신앙의 우위성과 개인의 신앙 체험을 강 조하면서 교회의 성사와 교계 체제를 거부하였고 네덜란 드의 실천적 신비주의에서 일어난 새로운 신심 운동이 교회 개혁을 주창하였다. 이 두 신비 사상은 종교 개혁의 길을 열어 주었다. 14세기부터 교회는 교황권이 약화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는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 이후로 교황들이 프랑스 아비농에 머물 렀던 아비뇽 시대(1304/1307~1377)는 교황권의 보편성을 잃게 하였다. 서구의 대이교라고 불리는 교황청 대분규 (1378~1415)는 정통 교황에 반대하는 대립 교황들의 등 장으로 교회가 혼란과 분열에 휩싸였으나 콘스탄츠 공의 회(1414~1418)에서 마르티노 5세(1417~1431)가 교황으 로 선출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공의회 우위 운동(公議會優位運動)이 전개되었고 영국의 위클 리프(1330경~1384)와 보헤미아의 후스(1372경~1415)가 이단 운동을 일으켰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은 영신 지도자보다는 세속 군주 로서 묵인되었고 일부는 교회 개혁이라는 시대 사명을 잊었으며 인문주의자로 취미 생활에 전념하여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종교적 임무에는 소홀하였다. 고위 성직자들 중에 경건한 주교들도 있었지만 귀족 출 신의 교황들 대부분은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고 세속 생 활에 물들어 있었다. 신부들은 성직자 교육을 받지 못하 고 사제가 되어 사목적(司牧的) 책임감이 없었고 수도회 는 개혁 과정 속에서 수도 규칙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논 쟁으로 분열되었다. 평신도들은 구원을 위해 신심 향상 에 충실하였으나 성인 공경 중심의 개인적이며 미신적 신심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하는 개혁의 대상이었다. V . 종교 개혁 시대(1500~ 1650년) 독일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수사 신부인 마르틴 루 터(1483~1546)는 독일 주교에게 신자들이 성 베드로 대 성전 건립을 위해 반포된 대사(大赦)를 오용(誤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학 토론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는 데 그 안에 대사에 관한 명제도 동봉하였다. 그러나 루터 가 제안한 신학 토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 러 차례 열린 대사 논쟁 속에서 그의 견해는 교회와 교황 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였다. 루터가 파문을 받은 이후 로 루터 문제는 정치 쟁점으로 이어져 제국 의회에서 논 의되었고 한때 화해에 대한 잠정적 합의도 있었지만 끝 내 루터파는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였다(이때부터 저항의 의미를 지닌 '프로테스탄트' 라는 용어가 나타났다). 그리고 루 터 사상은 점차 독일 북부 지방에 확산되어 나중에 스칸 디나비아 지방은 루터 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군종 사목 및 본당 사목 그리고 영 신 지도와 강론을 담당했던 츠빙글리(1484~1531)는 교황 권 거부와 성서 유일의 견해를 내세운 루터에 관심을 갖 기 시작하면서 사제직을 포기하고 시의회의 도움을 받아 교회 개혁에 나섰다. 그는 시의회에서 가톨릭 대표와의 신학 토론에서 성서 유일 사상을 내세우면서 성화상 공 경과 미사 성제를 거부하였고 개혁서를 출간하여 수도원 의 폐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파도 재세례(再 洗禮) 문제로 분열되었고 성체 현존 문제로 루터와도 결 별하였으며 가톨릭 대표들이 참석한 토론에서 패배하였 다. 결국 츠빙글리는 스위스를 신교화(新敎化)하기 위해 서 신교 동맹을 결성하고 가톨릭 동맹에 대항한 카펠리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일부 츠빙글리파는 신앙 유 일 사상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세례는 사고력이 있을 때 에만 유효하며 신앙을 갖지 못한 유아 세례는 무효하다 고 주장하면서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 개혁 운동을 전 개하였다. 이에 대해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 세례를 인정 하고 재세례파의 집회를 금지하였으나 이러한 금령은 오 히려 재세례파를 광신주의로 전환케 하였다. 스위스에서 추방된 재세례파는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예루살렘의 천 년 왕국이 임박하였다고 예언하면서 이 왕국이 도래하면 재세례파는 구원된다고 주창하였다. 농민 전쟁에서 패배 한 농민들이 이에 참가하면서 이들은 국가 정부에 적개 심을 갖고 국법과 교회법을 거부하는 반국가적 혁명 조 직으로 의혹을 받아 독일에서도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소수 집단으로 남았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칼뱅(1509~1564)이 시의회의 지 원으로 신앙 고백서(1536)를 출간하여 시민들에게 신앙 고백 선서를 강요하였고 교회 법령(1541)을 반포하여 목 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 교계 체제를 설정하였다. 칼뱅 사상은 프랑스에도 도입되어 갈리아 신앙 고백서가 발간되고 칼뱅 추종자인 위그노들은 국왕의 박해를 받아 가며 위그노 전쟁(1490~1598)을 치렀고 마침내 낭트 칙 령(1598)으로 제한되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에스파니아와 전쟁 중에 있던 네덜란드의 북부 지방은 가톨릭에서 이탈하면서 칼뱅파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영 국에서도 칼뱅파가 전래되어 두 나라의 해외 진출을 통 해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1509~1547)가 교황청으로부터 그의 관면 결혼에 대한 무효를 얻어 내려는 계획이 실패 함으로써 영국 교회와 교황청의 관계를 단절하고 국왕의 교회 수장권(敎會首長權)에 대한 선서를 교회 신자들에 게 요구하였다. 그런데 그가 반포한 '6개 항의 법' 은 종 교 개혁가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가톨릭 교리와 규율을 담고 있었다. 에드워드 6세(1547~1553)에 이르러 프로테 스탄트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한때 가톨릭 신자인 메 리 1세(1553~1558) 여왕의 등장으로 가톨릭 교회로 복귀 될 수 있었으나 여왕의 실정(失政)으로 희망은 좌절되고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즉 위하면서 영국 성공회의 교계 체제가 수립되어 주교도 영국 교회의 예식서로 서품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있기 전에 공의회를 통해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쇄신의 움직임이 시도되었으나 르 네상스 교황들에게는 개혁을 시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하 여 성취되지 못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칼 5세 (1519~1559)는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에게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였으나 교황은 공의회 우위 사상의 재발을 염려하여 공의회 개최를 주저하였 다. 마침내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혁 의지를 지닌 추기경들로 개혁위원 회를 구성하고 공의회 소집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개혁 공의회는 서구 세계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꾀하던 프랑 스 국왕 프랑스와 1세(1515~1547)의 방해로 두 차례 연 기되었다가 1545년 트리엔트에서 소집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25회 기에 걸쳐 가톨릭의 반성과 쇄신을 목 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552년 황제 칼 5세의 중재로 공의회에 참석한 프로 테스탄트 대표들이 이미 결의된 신앙 조항들의 재론을 요구하고 공의회 우 위 사상을 내세움으로써 가톨릭과 프 로테스탄트 간의 대화는 지속될 수 없 었다. 사실 독일 가톨릭의 주교들과 신 학자들은 뒤늦게 1555년에야 참석하 였고 공의회의 교부들도 종교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때문 에 공의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위한 종교 회담이라기보다는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가 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재확인하는 집회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의회 이후 교황청, 지방 교회, 수도회에서 공의회 결정을 실천하려는 개혁 운동이 전개 되었다. 개혁은 고질화된 옛 폐단에 대 한 힘겨운 투쟁이었으나 훌륭한 인물 들이 나타나 완수될 수 있었다. 15세기 말부터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계 탐험 시작과 함께 교회도 세계 선교에 나섰다. 교황 청은 탐험 국가의 국왕들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세우고 선교사들의 신변 안전과 생계 유지를 보장하는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 다. 이로써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교회들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선교 후원 제도(파드로아도)는 교회가 처 음 의도한 대로 선교의 수단이기보다는 군사 정복을 정 당화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황청은 선교 업무를 관장하는 포교성성을 설립하 였고 국가의 선교 후원 체제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 교황 대리 감목 제도를 신설하여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와 같은 재속 성직자들도 선교에 참여하였으 며 예수회 선교사들은 토착화(土着化) 선교 방법을 채택 하였다. Ⅵ. 종교 개혁 · 근세 과도기(1650~ 1800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 시대를 맞이하였다. 교황청은 교회 개 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황 대사를 통해서 지역 교회 를 감독하였는데 서구 일부 국가와 지역 교회 주교들이 이러한 정책을 내정 간섭으로 받아들여 교황청에 도전하 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갈리아주의가 등장하여 교황 권에서 벗어난 프랑스 교회의 자율권을 주창하였고, 오 스트리아에서 일어난 국교회 사상은 가톨릭 교회를 국가 에 예속시켰다. 독일의 주교들도 천국 열쇠권은 교황이 아니라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에 있으며 주교권은 하느 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주교단 우 위설(主教團優位說)를 내세운 페브로니우스 사상이 등 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교황 대사의 권한을 제한함 으로써 교황권을 약화시키고 국교회 사상과 공의회 우위 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나타난 얀센주의 사상은 교황청에 대한 종 교적 도전의 한 형태로서 외형으로는 경건주의를 내세우 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죄설과 은총론을 과장하였고 루 터와 칼뱅의 의화론을 첨부하였다. 개연주의(蓋然主義) 를 배척하고 예수회의 윤리신학을 해이하다고 비난하면 서 잦은 영성체를 배격하고 교회 규율의 준수와 엄격한 공복재를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의 영성체를 어렵게 하였 다. 이러한 얀세니즘 사상은 국교회 사상과 주교단 우위 설을 내세우면서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결국 이들 은 교황청과 오랜 논쟁 속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단으 로 단죄되었고 정치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프랑스에서 추 방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우트레히트 교구를 설 립하여 교계 제도를 수립하였다. 계몽 사상은 합리주의적 사고 방식의 특성을 지니고 종교 문제에 적용되어 신학에 합리주의를 끌어들였고 이 로써 등장한 자연 종교 체제는 하느님의 계시를 거부하 였다. 신학에 큰 위기를 불러일으킨 또 다른 사상은 이신 론으로서 '프리메이슨' 이라는 비밀 단체를 통해서 확산 되었고 프랑스에서 반 (反)성직자주의와 함께 반(反)가톨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신론은 종교 상대주의를 내세워 국가 헌법에 종교 자유 를 삽입시켜 가톨릭 국 가에서는 교세가 위축되 었다. 한편 교회 내에서 도 계몽 사상을 지닌 지 도자들은 과감히 미신적 요소가 담겨 있는 신심 과 불필요한 관습을 비 판하고, 성인과 성화상의 공경보다 복음 설교를 강조하 며 새로운 교회 모습 건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Ⅶ. 근세 교회(1800년~현재)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 교회에 대해 서도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는데 특히 프랑스 교회와 독 일 교회의 세속화를 몰고 왔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봉건 체제의 붕괴에 따라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었고 반(反)성 직자주의의 만연으로 성직자의 특권이 상실되었으며 성 직자 공민 헌장 선서에 대한 문제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독일 교회도 제국 교회의 붕괴와 함께 물질적 기반과 국 가적 뒷받침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결과 인 정교 분리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국가에 대해 교회의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고 교회의 정화와 함께 신심 생활이 활성화되었으며 주교단은 교황청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지닐 수 있었다. 19세기 가톨릭 교회는 계 몽 사상과 프랑스 혁명 이념에 근거한 자유주의와 절대 군주 체제(정통 왕조주의)의 복귀로 생긴 보수주의의 대립 으로 혼란을 겪었다. 교회의 공식 태도는 혁명에 대한 혐 오 때문에 자유주의를 경계하고 전제 군주들과 제휴하여 상실된 교회 특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교회와 보수주의의 제휴에서 이탈하려는 가톨릭 자유주의 운동 이 프랑스에서 라므네(1782~1854)를 중심으로 전개되었 으나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되었다. 독일에서도 지성의 자 유를 부르짖는 운동이 될링거(1799~1890)를 중심으로 일 어났으나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신앙 오류표 (Syllabus)를 공표하여 자유주의 운동을 저지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학설들로 위협받는 전 통 가톨릭 신학을 정리하고 이탈리아 민족주의적 통일 운동으로 위기를 맞은 교황권 회복을 위하여 소집되었 다. 공의회에서 다수의 보수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 권에 대한 정의를 주장한 반면에 소수의 자유주의파는 정의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시기 상조라고 반대했 다. 마침내 공의회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 으로 중단되었지만 계시 신앙 에 관한 교령인 <하느님의 아 들>과 교황의 무류권을 정의한 <영원한 목자>를 반포함으로써 국교회 사상을 종식시켰고 근 대주의의 교회 침입을 예방할 수 있었으나 무류권을 거부하 는 구(舊)가톨릭 교회의 등장으 로 교회 분열의 결과도 내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탈리아 통 일 국가를 추구하던 민족주의 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1861년 에 창설된 이탈리아 왕국은 교 황령을 침공하였고 1870년에 로마 시를 보호하던 프랑스 군 대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 로 철수하자 교황령은 붕괴되었다.독일에서는 비스마르 크(1815~1898)가 창건한 문화 투쟁으로 가톨릭 교회는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중앙당 이 모든 선거에서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던 국민 자유당을 패배시켰고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성장은 비스마르 크의 반(反)가톨릭 정책을 전환케 하였다. 또한 자유주 의적 성향을 지닌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등장으 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 법 률들도 폐기되었다. 산업 혁명은 자유 체제의 자본주의에 의해 착취와 억 압을 받는 근로 대중이 현안 문제로 일으켰고 가톨릭 자 유주의자들은 가난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의 구조 적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들은 교회가 마르크스(1818~ 1883)의 반(反)가톨릭적 사회주의에 근로 청소년들을 빼 앗길 위기에 놓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응책으 로 가톨릭 사회 운동을 일으켰다. 1891년 5월 15일에 레오 13세는 <노동 헌 장>(Rerum Novarum)을 반포하여 사회 정책을 제시하면서 사회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헌장은 마르크스 사회 주의의 확산을 완전히 저지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리스도교 노동 조합 의 결성과 그리스도교 민주 정당의 탄생에 영 향을 주었고 노동 사제 가 등장하기 시작하였 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제1 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단으로 실현되지 못한 개혁들을 실천에 옮겼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포함한 교회 음악 개 혁, 성무 일도서 개정, 교황청 기구 근대화, 교회법 개정 에 착수하였다. 반면에 비오 10세는 보수적인 권위주의 자로서 교회를 시대 사조에 융합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 었다. 국가들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정교 협약들의 파기, 회칙과 교령을 통한 근대주의 배격, 교회 서적 검열의 강 화, 신학생들에 대한 토마스 사상 교육 강조, 성직자들에 게 반(反)근대주의 선서 요구, 근대주의자의 색출 등으 로 교회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베네딕도 15세(1914~ 1922)는 평화의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근대주의자 색출 운동을 금지시킴으로써 분열된 교회 안에 평화를 회복하였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전 쟁 당사국의 통치자들에게 평화 통첩을 보내 적대감의 불식, 무장 해제, 조정위원회의 설립을 제의함으로써 국 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상적 제 의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1913~1921)이 발표한 '평화 14 개항' 의 내용과 가까웠다. 교황은 전임 교황이 파기한 국교를 재개하였고 많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 로써 정교 평화를 이룩하였다. 비오 9세가 협상을 거부 함으로써 남아 있던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탈 리아 정부와 대화를 시작하였다. 비오 11세(1922~1939)는 평신도의 위상을 새롭게 정 립하여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가 연대 책임을 지는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혼란한 사회 질서 안정을 위한 강력한 지도 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무솔리니를 지원하였고 그 대가 로 1929년에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여 로마 문제를 해 결하였다. 또한 1933년에는 독일 교회의 자유로운 가 톨릭 운동을 보장받기 위해 히틀러와 종교 협약을 맺 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리적 대외 정책은 유럽에서 독 재자들을 출현케 하였으나 그들이 협약을 이행하지 않 았을 때에는 교황도 강경하게 대처하였고 서거하기 직 전에는 놀라운 회칙을 준비하였다. 비오 12세(1939~ 1958)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전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5개 항의 평화 원칙을 제시하였으 며, 많은 회칙을 통해서 신비체인 교회의 내적 일치를 강조하고, 부분적 전례 개혁을 실시하였다. 또한 비 (非)이탈리아인 추기경을 선임하였으나 교황청 중심 의 교회 행정을 펴나감으로써 지방 교회 주교들의 권 한은 축소되었다. 비오 12세는 보수적 정책으로 교회 현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교황은 반 공주의자인 동시에 반(反)나치주의자였으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은 일치되지 않고 있으나 일반적 견해로는 외교적 중립을 견지한 처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도기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23세(1958~1963)는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에 근거한 교회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사에 있어서 새 시대를 시작한 교황이었다. 교회 밖의 세계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교황은 갈라진 그 리스도교인들에게 우호적 태도를 보였고 공산 세계에도 제한된 범위이지만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다. 교회를 현 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 인 교황은 교회의 현대화를 목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를 소집하였고 교회법 개정에도 착수하였다. 공의회의 또 하나의 목표는 그리스도교의 일치 촉진으로 요한 23 세는 지난날의 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 원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세를 정립하였다. 요한 23세는 교황청 공의회 의 역할을 이단 색출과 학술 논쟁을 통한 교리의 재확인 이라는 방어적 태도보다는 교리 제시 등에 있어서 새롭 고 의미 있는 방법의 발견에 비중을 두고 강조하였다. 많 은 공의회 교부들도 공의회가 사목적 관점에서 진행되어 야 한다는 교황의 촉구에 힘을 얻어 교황청에서 제출한 분과 위원회의 명단을 거부하고 사목자 중심의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공의회에 참관인으로 초청된 동방 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대표들도 분과 위원회에서 견해를 제시 하고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자문에 응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제1 회기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혼란해 지자 대표 교부들은 교황과 협의하여 의제 재검토를 제 의하여 참석 교부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 23세 는 제2 회기 준비 도중 서거하고, 새로이 선출된 바오로 6세(1963~1978)는 공의회의 성공과 교회법의 개정 그리 고 교회 일치 촉진을 교황의 첫 임무로 삼았다. 제2 회기 가 끝난 다음 교황은 공의회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팔 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콘스탄티노 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를 만났다. 1965년 12월 7일 에 로마와 이스탄불에서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 는 공동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회기에 걸쳐 진행된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 언문을 공포하였고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결정들을 실 천하고 공의회 이후에 교회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주교 대의원 회의를 신설하였다. 바오로 6세가 서거한 후 새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 1세 (1978)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유산의 지속적 실천, 교회 의 정통적 교리와 규율의 보존과 준수, 교회의 복음화 임 무에 대한 자각, 교회법의 개정, 건설적 대화를 통한 교 회 일치 운동에 대한 노력, 폭력 추방과 세계 평화의 증 진 및 수호를 첫 임무로 밝혔다. 교황은 교권과 속권의 상징인 삼중관을 거부하고 교회의 수장 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보다 '로마의 주교' 라는 호칭을 선호하였다. 사람 들은 요한 바오로 1세가 첫 교황 강복을 위해 발코니에 나타났던 모습을 상기하며 그를 '미소 짓는 교황' 이라고 불렀고 그의 재위 기간(1978. 8. 26 ~9. 28)을 두고서 '34 일의 교황' 또는 '9월의 교황' 으로 기억하고 있다. 최근 가톨릭 교회는 교회 사상 놀라운 사건을 겪었다. 그것은 요한 바오로 1세의 급서(急逝)와 요한 바오로 2 세(1978~현재)의 선출이다. 교황사(敎皇史)에 있어서 요 한 바오로 1세는 373년 만에 재위 기간이 짧았던 교황 이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455년 만에 비(非)이탈리아 인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연설 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의 실현과 교회 교도 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일치 를 희망하였다. 교황은 교회 안에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 속에서 어려움을 받았던 바오로 6세와는 달리 교황 권을 고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상기하면서 교회 질 서를 보수적 방향으로 잡으려는 의지를 보였다. 요한 바 오로 2세의 교회 정책의 특성은 국제적 교회 행사나 사 목 방문을 통해서 교황청과 지역 교회의 유대를 강화하 는 것이다. (⇦ 세계 교회사) ※ 참고문헌  Louis J. Rogier · Roger Aubert . M. David Knowles (eds.), Christian Centuties : A New History of the Catholic Chruch, vol. 1 . 2 · 5, London : Darton, Longman and Todd : New York : Paulist Press, McGrow-Hill Company, 1964~1978/ J. Derek Holmes · Bernard W. Bickers, A Short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London : Burns & Oates, 1983/ Thomas Bokentter,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Auckland : Image Books, 1990/ H. Daniel Rops, Histoire de I'Eglise de Christ, vol. 10, Paris : Librairie Arthéme Fayard, 1948~1968(영어판 : The History of the Church of Christ, vol. 10, London : J.M. Dent & Sons Ltd. ; New York : E.P. Dutton & Co. Inc., 1959~1967)/ Louis J. Rogier · Roger Aubert · M. David Knowles(eds.), Nouvelle Histoire de I'Eglise, vol. 5, Paris, 1963~1975/ K. Bilmyer und H. Tuchle, Kirchengeschichte, vol. 3, Paderbon : Ferdinand Schöningh, 1962~196(영어판 : Chruch History, Paderbon : Ferdinand Schüningh, 1958~1966)/ Hubert Jedin(ed.), Handbuch der Kirchengeschichite, vol. 7, Freibrug : Herder, 1962~1979(영어판 : History of the Chruch, vol. 10, London : Burns & Oates, 1965~1981)/ August Franzen, Kleine Kirchgeschichte, Freiburg : Herder, 1965(영어판 : A Concise History of the Church, revised John Dolan, London : Burns & Oates, 1968 ; 최석우 역, 《敎會史》, 분도출판사, 1982)/ 김성태, 《세계교회사》 ,성바오로 출 판사, 1990. 〔金聖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