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知識 〔라〕Scientia 〔영〕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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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의미에서는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는것이며, 엄밀하게는 사물의 성질, 다른 것과의 관계 등에관해 참된 판단을 가지는 것.
지식을 인식과 구별하는 경우에 전자는 작용보다는 성과를 나타내고, 후자는 양쪽을 포함한다. 지식은 억견(臆見)과 구별되고, 단순한 감각이나 기억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사고가 가해져 있는 것이다. 지식은 지성 작용의 결과물이라고도 한다. 지식에 대해 논할때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 전체를 나열하는 일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지식이 모든 지각이나경험에서 오지만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측면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구 분〕 이데아적 지식 :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 이후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식이 경험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 보편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한 유형의 지식을 다루는 수학은 그래서 오랫동안 학문의 모범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는 지각, 기억, 경험, 기술, 인식, 지혜의 단계적 과정을 발견하고개별적인 경험에서 보편으로 가는 귀납적이며 직관적인추상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학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수(ideal number)가 아니라 수 학적인 수(mathematical number)를 전개하고 있다. 사실수학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은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Menon)에는 예비 지식이 없는 노예 소년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70/469~399)의 유도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경험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추리에서 수학적 지식을 개발하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없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어떤특정한 직각 삼각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각 삼각형에 타당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정리는보편적이요, 필연적이다. 그러나 "까마귀가 검다" 라는명제는 어떤가? 우리가 경험하는 범위 내에서 까마귀는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이 명제가 수학적 명제와같이 확실성 있고 보편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주에 수많은 천체가 있는데 거기에는 생물들이 서식하고있는 것이 적지 않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만큼, 어떤천체에 예를 들어 붉은 까마귀가 서식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조약돌 2개에 2개를 보태면 4개가 된다는 수학적 명제는 아마 어떤 천체 위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수학적 명제와 같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함께 띠는 지식을 이데아적인 선험적(apriori) 지식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모든 까마귀는검다"와 같은 명제는 경험적이며, 여기에는 '선험적' 지식에 부수되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였다. 수학과 경험과의 관계는 과학과 경험과의 관계와 다르다. 경험의 범위와 내용을 달리하지만, 경험을 따라서무엇을 논할 수는 없다. 실증적 지식 : 과연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얻어지는 지식은 어떤 것인가? 수(數)의 개념도 처음에 배우는어린이에게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배우지 않을 수없다. 처음부터 "2+2=4" 라는 수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연필 2자루에 2자루를 보태면 4자루가 되는 것에서 셈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수(數)의 개념을 파악하면 일일이 보조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수학을 통한 사고의 조작만으로 계산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초는 역시 감각적 경험에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A는 B보다 크고, B는 C보다 크면, A는 C보다 크다" 라는 명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누구에게나 명백하게 참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며, 이러한판단을 하는 데 어떤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과연 그러한 판단이 선험적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다. A가 B보다 크고, B가 C보다 크면, A가C보다 크다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론이 되지만"보다 크다" 는 개념은 감각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다.논리 실증주의의 대표자인 에어(AJ. Ayer, 1910~1989)는경험적 지식의 필연성에 의심을 품는다. "비록 우리의모든 지식이 의심할 나위 없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는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할 수 없다는 칸트의 유명한 언명이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구별을 재검 토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논리학의 진리들은 경험에서 인식된다고 할 때, 이것은 물론 이러한 진리들이 타고나면서부터 알고 있다는 의미의 본유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수학이나 논리학도 화학이나 역사가 배워야 하는 것처럼 배워야하는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밀(J.S. Mill, 1806~1873)의 주장처럼 논리학이나수학의 명제들도 경험적인 가정에 불과하며, 그 타당성도 마찬가지로(경험적으로) 결정된다는 견해에는 반대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수학이나 논리학의 명제들은경험적으로 그 타당성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경험에서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귀납적 절차를통하여 그러한 명제들을 알게 되는 것이지만 일단 우리가 그러한 원리들을 파악하면 그러한 원리들이 반드시참이며,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경우에도 잘 들어맞게 되는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경험적 일반 원리와 구별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의 타당성이 경험에 의존하는 것일 때에는 그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에어는 칸트와 같이 명제를 경험적 명제와 경험에서독립된 명제로 구별하고, '경험에서 독립된 명제' 는 선험적으로 또는 경험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는' 명제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전제한 것이다.즉 논리학이나 수학의 원리들도 경험적으로 배우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는 지식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는 기하학적 명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삼각형을 칠판에 그려놓고 보조선의 도움을 받아가며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가 일단 밝혀지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삼각형은 하나 하나 그 내각(內角)을 측정해서 보태지 않아도 그 합이 2직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그 명제가 처음에 귀납적 또는 경험적으로파악되더라도 일단 파악이 되면, 필연적으로 타당한 명제는 '경험에서 독립된' 명제인 것이며, 칸트가 말하는선험적(a priori) 명제의 참 뜻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이에 반하여 운동 경기에서 "A는 B를 눌러 이기고, B는C를 이기면, A는 C를 눌러 이긴다" 라는 명제는 경험의명제이다. 먼저 경기장에 나가서 보지 않고서는 A와 B와C의 우열을 말할 수 없다. 더구나 A가 C를 이길 수 있다는 주장은 A가 B보다 강하고, B가 C보다 강하다는 것을논거로 하고 있다는 주장은 A가 B보다 강하고 B가 C보다 강하다는 것을 논거로 하여 추리한 것이지만, 실제 경기에서 반드시 그러한 추측대로 승부가 나타난다고 볼수도 없다. 이 명제의 특성은 타당성이 오직 경험에만 의존하는데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앞서 지적했던 '경험에서 독립된' 명제와 다른 것이다. 분석적 지식 : 지식의 문제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정리 · 비판한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 지식의 유형은 그 지식을 언표하는 명제의 형식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즉선험적 지식을 명제화하면, 예를 들어 "정방형은 등변(等邊)이다" 또는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와 같은 형식 이 된다. 이런 명제의 특색은 이미 포함되어 있는 속성을술어로 분석해냄으로써 하나의 명제를 구성한 것이다.'등변' 이라는 술어는 정방형이라는 주어의 필연적 속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는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고,다른 경험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아야한다. 모든 판단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라고 생각되는데,거기에는 두 가지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즉 술어 B가 주어 A의 일부이며 A라는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경우이거나, B가 완전히 개념 A의 밖에 있어서 마치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그 판단을 분석적이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종합적이라 한다. 따라서 분석적 판단들은 술어와 주어가 동일한것이라고 생각되며, 동일한 것끼리의 결합이 아니라고생각되는 판단은 종합 판단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전자는 설명의 판단이라고 불리고, 후자는 확장의 판단이라고 불리고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술어를 통해 주어의 개념에 아무것도 부가하는 것이 없고, 그의 분석을 통하여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분 개념으로 세분하는데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는 주어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으며 주어를 분석해도 끌어낼 수 없는 술어를 주어에 부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조는 희다" 라는 판단은 분석적이다. 주어가 가지고있는 속성을 설명해 줄 뿐, 새로운 지식은 아니지만 필연적이고 또한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는 장점을 갖고 있다. 반대로 "까마귀는 검다"라는 판단은 타당 범위는 문제될 수 있으나 그것이 참이라면 까마귀에 대한 새로운지식을 주는 것이며, 주어 속에 없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는 지식의 확장이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얻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모든 경험 판단은 종합적이며, 반대로 선험적인 판단은분석적 판단이라고 보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현대에서 명제를 주어와 술어의 관계(S-P)로 분류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술어가 주어에 포함된 것이면분석적 명제, 주어와 술어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종합적 명제라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A>B, B>C 이면 A>C"라는 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와 명제의 관계에서 판단되어야 할 문제이다. 즉 "A>B, B>C"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분석 명제는 논리실증주의에 의하면, 그 타당성이 경험에 의하여 검증되지 않고 기호의 정의에 의하여 보증되는 명제인 데 반하여, 종합 명제는 경험 사실에 의해서만 그 타당성이 검증되는 명제라 한다. "백조는 희다" 라는 명제는 칸트나 분석 철학에서나 별문제없이 둘 다 관용상의 정의로 보아도, '백조' 와 희다' 는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5+7=12"라는 명제를 칸트는 종합 명제라 하였으나 분석 철학에서는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고 분석적이라고 하였다."A>B, B>C이면 A>C" 라는 명제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관용적 기호의 정의에서 나오는 것이지, 본유 관념이 아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것을 부정하면 모순에빠지지 않을 수 없는 기호 사용의 관용이 바로 선험적인 인식의 근거이다. 동어 반복도 수학적 숙달이 필요하고경험적인 문제들을 푸는 데 연역적인 도구로 사용되는것이다. 사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동어 반복도 경험과학에 있어서는 매우 유용하게 연역의 도구로 쓰일 수있을 것이다. 귀납적 지식 : 귀납은 구체적인 경험 사실을 종합하여일반화해 가는 추리 방식이며, 부분에서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납적 지식은 습관에 불과하다고하였으며, 개연적 지식이요, 회의론에 이르고 말았다.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일반적인 명제는 이와 같이 하나의개연적 타당성을 지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점진적 발전을 위하여 회의할 수 없는 겸손한 발판으로 굳어진다.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주어진 경우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 질 확률조차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물리적 대상에 대하여 절대적 확실성을 보류하면서 계속 거기에접근하기 위하여 참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요(형이상학적 지식), 회의론은 회의론 자신의 주장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F. Bacon, Novum Organum, 1620/ T. Hobbes,Elementa Philosophiae, 1642/ F. Engels, Ludwig Feuerbach und derAusgang der klassichen Philosophie, 1886/ K. Marx, Zur Kritik derPolitischen ökonomie, 1859. 〔金完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