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地獄 〔라〕Infemus 〔영〕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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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악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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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악인들.

하느님과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채 죽음으로써,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자유로이 선택한 것 I. 신학에서의 지옥 저승 세계의 처벌 장소로서 지옥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이전에 구약의 이사야서 14장 9-20절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이미 여러 종교에 퍼져 있었다. 지옥의 존재는 각 문화권 안에서 그 표상에 대한 집단적 공포를 반영하였고, 이를 통해 도덕적 악의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지옥에 대한 표상도 바로 이러한 근본적 고찰 안에 있다. 일반적으로 지 옥은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진 최종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 운명에 있어 저승의 경계이자 또한 악의 권한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지옥은 삶이 부정되는 장소 또는 상태로서 생각되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지옥에 대한 교리는 지옥의 현존과 지옥 형벌의 영원성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 개념을 더욱구체화시킨다. 〔성서에서의 의미〕 구약성서 : 사후 세계의 영벌(永罰)이 존재하는 지옥에 관한 구약성서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표상에 대해 접근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구약성서 안에 직접적으로 표현은 되지 않았지만, 유대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실물 자료들을 포함하는 본문들이 있다. 즉 본래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힌놈 계곡'( 여호 15, 8 : 18, 16 ; 2열왕 23, 10)으로 불리는'게엔나' (yέεvvα)가 있다. 게엔나는 기원전 2세기경의표상으로 최후 심판 이후의 지옥불에 관한 자료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결정적 상실의 '상태' 또는'장소' 로서의 지옥에 대한 표상으로는, 지하 세계에 있는 죽음의 왕국으로서 '셔올' ()과 '하데스' (άδης)가 있다. 이곳은 또한 죽음 이후에 최후 심판 때까지 머물게 되는 죄인들의 처벌 장소이기도 하였다. 어떠한 상태라고 생각한 지옥에 대한 개념은 오랜 반성의 역사를통해 죽은 자들의 선하고 악한 과거의 내력과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또한 셔올은 악의 결정적인 운명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구약성서적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나락' 으로서 '테홈' (Tehom) 또는 '아뷔스소스' (ἅβνσσος)가 있다. 이곳은 불순종했던 영혼들이 머무는 죽음의 세계(시편 71, 20)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지하 세계 또는 죽음의 왕국에 대한 이러한 표상의 근저에는, 결국 죽음까지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구약인들의 절대적 신뢰가 있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죽음의 왕국에서 끌어내어지상의 완전한 삶으로 돌려놓을 수 있고(이사 26. 19 다니 12, 2), 마침내 죽음마저도 결정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이사 25, 8)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신약성서 : 사실 하느님의 나라처럼 지옥도 그리스도교의 특수 개념이 아니었다. 지옥에 관한 내용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신약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상태였다. 하느님의 나라가 하느님의 현실성에 기초한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지옥은 하느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멀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였다. 신약 시대는 지옥에 관해 구약성서의 공간적인 표상들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채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우선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이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설교에 위협적인 선언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예수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최후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여기에서 '지옥' (γέεννα)에 관한 선언은 강력한 권고이자 위협이다(마태 5, 22 : 5, 29-30 : 마르 9, 43 : 마태 10,28 : 루가 12, 5 : 마태 18, 9 ; 마르 9, 47 : 마태 23, 15.33). 예수가 언급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또는 그 나라 밖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즉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말론적 위협 선언 안에서, 악마와 그 심부름꾼을 위해서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마태 25, 41),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자들에 대한 영원한 처벌 장소로(마태 5, 29) 지옥에 대해말하고 있다. 특히 예수의 지옥에 관한 선언은 냉정하고회개의 여지가 없는 이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겨냥되고있다. 서간문에서는 단지 야고보의 편지 3장 6절에서만지옥(γέεννα)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오로는 지옥에 관한신학적인 설명을 부가하고 있는데, 즉 영원한 파멸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실된 상태로 지옥에 대해 말하고 있다(2데살 1, 9). 그리고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 (ἅδης)에 대해서는 루가의 복음서 16장23절에서 지적하고 있고,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악한 영혼을 잠정적으로 사로잡아 두는 곳인 '나락' (ἅβνσσος)에 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다(루가 8, 31 : 묵시 9, 1-2.11 ; 11, 7 ; 17, 8 ; 20. 1. 3). 그리고 특히 묵시록에서불바다와 유황 바다로 표현되는 지옥에 대한 상황은 박해받았던 그리스도교인들의 복수와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구약의 전승을 포함해서 지옥을 지시하는 공간적인표상 외에도 신약성서는 지옥의 "영원히 타는 불"(마태3, 12 : 루가 3, 17 : 마태 18, 8 : 25, 41 ; 유다 1, 7), "죽지않는 구더기"(마르 9, 48), "울부짖고 이를 갊" (마태 8, 12; 13, 42. 50)과 당대의 언어 습관을 통해 공포의 형상들 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신약성서의 본문은 일반적으로 훈계적이거나 윤리적요청이 전제된다. 따라서 지옥에 대한 언급도 그에 대한어떠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적이고 실천적이고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권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하느님의 분노나 심판에 관한 예수의 선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올바른 행위를 촉구하는 보다 강력한 충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현존에대한 긍정 또는 부정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삶' 또는 '죽음' 그리고 '천국' 또는 '지옥' 에 관한 판단이다.대부분의 묵시 문학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에 근거한, 즉 우주적인 파국 뒤에 있게 될 하느님에 의한 구원을 말해 주는 반면, 예수는 완성으로 나아가야 할 구원의현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한 삶에 대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판단할 수 있도록 바로 지금 불려진 것이다. 〔초기 교회의 이해〕 신약성서의 본문을 넘겨받은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인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지옥에 관한교리는 중심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초기의신학 저술이나 예술 작품 등에서도 드러나듯이, 초기 공동체는 구원에 대한 낙관적인 확실성이 지배적이었다.따라서 저승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도상학(Ikono-graphie)에서는 창조 때의 낙원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었고, 교부들의 문헌에서도 '지옥' 에 관한 주제는 주변적이었다. 2~3세기에 지옥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였는데, 여기에서 지옥에 대한 진술은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옥의 단순한 현실적 묘사에 기초하고 있다. 즉 구약성서의 지형학적 해석과 관련되고 신약성서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지옥불에 던져진 악마와 저주받은 자들은 영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최후 심판 때에 이루어질 상벌에관한 성서의 증언(마태 25, 13-46)이 최소한 3세기까지받아들여졌다. 5세기가 지나고 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변화되면서, 도덕적 · 교육적 그리고 교회의 원칙을 고수하는 관점에서 지옥에 관한 관심이 커져 갔다. 그리고 영벌에 관한 진술이 신앙 고백문에 등장하였다(Quicumque DS.76 ; Fides Damasi DS. 72). 이로부터 지옥은 중세의 공의회나 교황의 공적인 가르침에서 확고한 교회 용어로 자리잡았다(DS. 801. 838f. 1002). 교부 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지옥 교리의 해석 방법은종말론과 구원론의 관점에서 두 가지 상반된 내용으로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한다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에 중점을 두는 긍정적인 관점이고, 둘째는 지옥에 대한 성서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영원한 처벌을 받는 어떤 많은 무리들이있다고 전제하고 지옥의 법정에 선 인간의 부정적인 구원관으로 대표되는 관점이다. 전자는 하느님의 '자비' 에중점을 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오리제네스(185~253)로 대표되는 일종의 총체적 구원론(Apokatas-tasis) , 즉 모든 이들은 구원된 상태로 최종적 완성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반면, 후자는 하느님의 '정의' 에 중점 을 두고 아우구스티노(354~430)를 출발점으로 해서 많은사람들의 구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종의 회의론적인 구원론(massa damnata, 상실된 사람들)이다. 이 양자의 논쟁을통해 교부 신학과 교도권 사이의 지옥 교리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고, 중세의 교회로 넘어가게 된다. 총체적 구원론의 입장 :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에게서 이 교리의 출발점을 찾아볼 수 있다.그는 종종 "불 속에서의 영원한 벌" (Quis dives 33, 3)에 대해 말하였지만, 완성의 도상에서 사후의 처벌은 구원을위한 처방, '징계를 위한 교정의 고통' 으로 간주되었다.이로 인해 글레멘스는 사후 회개의 가능성에 관한 교리의 첫 증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오리제네스에 의해 대표된다. 물론 지옥에 관한 주제가 그의 신학적 숙고의 중심 주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플라톤 철학의 입장에서 지옥 형벌에 관한 성서의 진술을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지옥불' 은 질료적인 불이 아니라 정신적 불이라는 것이다.그리고 지옥 불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정화' 에있다(De principiis II, 10, 4~6). 한편 오리제네스는 악을 포함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지옥의 현존을 동시에 언급하지만, 자신의 아포카타스타시스(Apokatastasis) 교리에 입각해서 지옥 형벌의 영원한 지속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지옥 교리의 기본 근거인 '아포카타스타시스' 는모든 이성적 피조물에 상응하면서 하느님을 통한 역사의최종적 완성을 의미하는 '세계의 근원적인 재생' 이다. 이교리의 성서적 근거로 그는 사도 행전 3장 21절과 특히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25-28절을 들고있다. 즉 최종적 완성, 즉 재생은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성서의 진술을 통하여 확인된다. 이러한 도정은 아들 아래 있는 모든 것의 '굴복' 과아버지 아래에 아들이 '굴복'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굴복' 은 오리제네스에게 있어서 강제 수단이 아니고, 이성적 존재의 자유를 완전히 필요로 하고 피조물이 받아들여지는 것 안에서 그러한 목적이 드러나는 과정 안에서의 교육적이고 치유적인 도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옥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기에 동조자와 반대자로 나뉘어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 교리의 충실한 후계자는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이다. 그는 아포카타스타시스를 부활과 동일시하고, 예수의 부활 이후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의 역동성과 최종적인 선인 하느님을 향한 인간 영혼의 관조를 바탕으로 언급하고 있다. 4~5세기에도 계속된 논쟁에서 이 교리는 특히 서방교회의 강한 비판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교도권이 개입하였다. 543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는 콘스탄티노플의 메나스(Menas) 총대주교(536~552)에게 보낸 칙령에서, 이 교리를 결정적으로 단죄하였다. "누군가 데몬 또는 신이 없는(asethon) 인간의 처벌이 유한적이고 언젠가 그 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거나,또는 데몬이나 신이 없는 인간의 최종적 재생(apoka-tastasis)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단죄 상태에 있다" (DS. 411). 그 후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543)도 황제의 비판에 동의하였고, 이후 오리제네스의 종말론은 동방이나 서방 교회에서 전반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306~337)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환경 변화는 교회 존재 기반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맥락 아래, 교회의 자기 이해에 있어 '세례받은 이들의 종말론적 공동체' 라는 의미는 뒤로 밀려나고, 교회의 신학과 교리 교육을 위한 최후 심판과 지옥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정신적이고 시간적으로 유보된 오리제네스의 지옥 교리에 반대해서, 지옥의 엄청난 실재와 그 영원한 형벌에관한 교리가 부각되었다. 회의론적 구원론 : 서방 교회에서 아포카타스타시스교리는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거부되었다. 우선 그는 지옥 저주의 현실성과 영원성에 대해 주장하였다. 이러한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는 저주의영원성에 대해 언급하는 성서의 구절(마태 25, 41. 46 ; 2베드 2, 4 : 묵시 20, 10)을 선택하였다. "이곳은 영원한고통이 있고, 저곳은 영원한 삶이 있다" (De Civitate Dei XXI23). 아우구스티노의 지옥에 대한 해석은 구원될 희망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앞선 희열에 대해 낙담하게 되는 회의론적 관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국론》(De CivitateDei)에서 저주받은 자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저주받은 자들은 질료적인 불 속에서 영벌의 고통을 받아야 하고(XXI 9f), 세례나 가톨릭 신앙으로도 이러한 형 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XXI 25, 21).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인간의 근본 처지는, 아담 안에서 근거 지어진'상실된 사람들' 의 죄의 상태이다. 단지 하느님의 무상의 자비로운 은총만이 몇몇의 인간들을 구원한다. 구원받은 자의 수는 저주받은 자들보다 훨씬 적다. 이로써 은총의 선물을 받고 구원받은 자들은 비구원의 부정적인평균 상태로부터 고양되고, 이를 통해 구원의 은총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이로써 인류는 둘로 나뉘고, 이에 상응해서 인간의 역사는 이중의 출발점을 갖게 된다. 영원한지복직관(至福直觀)의 길과 영원한 저주의 길로 향하는(De Civitate Dei XXI 12)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상실된 사람들은 오직 교회와 성사에 참여함으로써구원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은 그의 예정설을 통해 더 공고화되었고, 그의 종말론 정립 이후 서방 교회의 신학에서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완성에 대한희망은 실제적으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중세로의 전환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자신의 《대화록》(Dialogus)의 작성에 있어 영벌에 관한아우구스티노의 기본 입장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는달리 '지옥' 이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교육적이고 도덕적인 적용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우선 그는 아우구스티노보다 상세히 지옥과 그 형벌에 대해 묘사하였다. 그에의하면,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을 때 저승, 특히 지옥은 이전보다 분명해진다는 것이다(Dial. 4, 43). 그리고 아우구스티노나 초대 교부들과는 달리, 지옥 형벌은 최후의 심판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죽음 이후에직접적으로 주어진다고 하였다(4, 29). 이로써 지옥 형벌은 신앙인 각 개인에게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교도권의 정의 : 교회의 지옥 교리에 관한 가르침은아우구스티노와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이후 정리된 지옥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하고 있다. 우선 '지옥의 현존'(DS. 16. 40. 429. 464. 693. 717. 835. 840)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아포카타스타시스 교리, 즉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세상 마지막날에 창조의 완전한 재생이 있으리라는 주장에 반대하여,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 지옥의 영원성' 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DS. 403~411).교황 그레고리오 1세 이후에는 지옥이 최후 심판 이후에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각 개인의 죽음 이후에바로 시작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1336년 교황 베네딕도 12세(1334~1342)의 칙서 <베네딕투스 데우스>(BenedictusDeus)에 의해서 교회의 가르침으로 확증되었다(DS. 1002). 또한 '지옥 불 이 질료적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가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교도권의 설명은다음의 구분을 중요시하고 있다. 즉 인간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을 잃어버린 상실의벌(poena dammi)과 외계의 물질로부터 영원히 가해지는감각적인 고통의 벌(poena senus)이다. 〔중세와 근대의 가르침〕 지옥 환시 : 중세 초기와 중기에는 지옥 형벌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중요하였고, 여기에 저승 세계에 대한 환시가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어 그 정점에 있는 <트국달리의환시>(Visimimghimgi)에서, 지옥에 대한 지리적이고 시각적인 묘사는 구체적이다. 또한 중세의 지옥 환시는 탐욕스러운 부자들과 세속화된 사제들로 인해 지옥 형벌의강도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교회와 사회 비판이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지옥 환시는 중세 중기와 말기그리스도교의 교육적인 면에서 속죄에 대한 경고라는 기능을 하였다. 지옥 환시 전통은 후에 단테(A.Dante, 1265~1321)의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중세 스콜라 신학과 다양한 문학적 주제들의 종합이 이루어졌다. 연옥 교리 : 중세로의 전환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나 중세의 지옥 환시에서 지옥 묘사는 무엇보다도, 죄인들 각자에 맞는 고유한 형벌이 다양하게 '질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알려 주고 있다. 이에 따라 죄와 벌의 직접적 관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중요하게 되었고, 12~13세기의 신학에서는 면죄 행위와 관련해 죄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즉 '용서받을 죄' (veniale pecca-tum)와 '죽을 죄' (mortale peccatum)가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저승 세계의 형벌도 이에 상응하게 되는데, 사후에죽을 죄는 지옥으로, 용서받을 죄는 연옥으로 이끌려진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저승 세계의 독립된 장소로서 '연옥' (Pugatorium)이 탄생한다. 1254년 교황 인노천시오 4세(1243~1254)는 자신의 서한(Ep. Sub catholicaeprofessione)에서, 속죄를 통해서도 없어지지 않는 죽을죄가 있다는 것과 성서 구절(1고린 3, 15)을 근거로 사후에 잠정적인 불의 단련을 통하여 가벼운 죄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연옥 교리를 확정하였다(DS. 838). 이 연옥교리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가톨릭 교회의공식 교리로서 인증되었다(Ds 1820, 1580). 이에 대해 루터(M. Luther, 1483~1546)를 비롯한 종교 개혁파는 저승세계의 영역을 삼분하고 이를 관장하는 세분화된 중세교회법 체계를 비판하고 거부하였다. 루터에게 있어 사후에는 천국과 지옥의 두 가지 가능성만 있지, 속죄를 위한 제3의 장소는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옥과 천국의 대립이 아니라, 악마와 하느님의 대립이 심판의 관점에서 볼 때 결정적 선택 사항이었다. 근대 : 개인의 운명이 정선된 우주론적 균형보다 더중요하다는 인문주의 전통 아래, 계속적으로 증대되는인간 중심적 관점과 세계의 이성적 근거를 촉구하는 계몽주의의 문제 제기 그리고 마침내 역사에 대한 진보론적 사고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관한 논의의 새로운 장을열었다. 즉 영벌에 관한 교리는 세계 질서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의미하는 계몽주의 이상과 함께 공존하기가 쉽지않았다. 다시 말해 이성의 합리적 사유와 인간의 자유를강조하던 계몽주의의 사회적 분위기는 세계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견지하게 하였고, 또 인간이 이제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완성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만들었다. 이로써 지옥은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로서 비이성적인 요소로 간주되었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지옥 벌에 관한 계몽주의의 시민 적 윤리학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의선한 의지와 지옥의 비인간적이고 험악한 표상은 서로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함은 비인간적인지옥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고(T. Hobbes, Leviathan,XXXXIV), 지옥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는 사고는 하느님을 야만인보다 더 비이성적이고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든다(P.-HD Holbach). 둘째, 따라서 인간에 대해영원한 형벌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난다(P-H.D. Holbach). 셋째, 지옥 교리는 사제들에게 유익하게 이용된다는 비판적 입장이 있다. 즉 지옥 교리는 사제들의 권력의 근거이자 그들의 부유함의 메마르지 않는원천이었다(P.HD. Holbach). 넷째, 지옥의 공포를 통하여 영향을 받은 행위는 자유와 관습의 척도가 될 수 없다(I.Kant) .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지옥 교리는 계몽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불쾌한 것이었다.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이 교리를 세계관에서 완전히 없애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철학자인 올바크(P.-H.D Holbach, 1723~1789)였다.그에게 있어 저승에서의 처벌에 관한 믿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고, 지옥에 관한 신앙은 종교적 망상의산물이었다. 〔계몽주의 이후 현대의 신학〕 계몽주의 이후 지옥에대한 신학적 입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첫째, 전통적 의미의 지옥 교리는 약화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성서와 교회 전통의 입장이 부각되었다. 지옥은 어떤 '장소' (Ort)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 (Zustand)이기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의미에서 무서운 지옥의 고통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지옥의 고통은 '최종적 의미상실의 경험과 아픔 그리고인간의 결정적인 상실 존재에 대한 망설임' 에 대한 하나의 '상' (Bild)이라는 것이다(1985년 독일 가톨릭 성인 교리서). 복음서는 무섭고 두려운 지옥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느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지옥에 대한 전통적 표상은 성서가 전해 주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에 역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상은정경이 아닌 유대교의 묵시 문학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그리스도교적 잣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성서의 지옥 설교는 단지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과된 신앙의 결단에 대한 성실성을 암시하는 것이다(H. Kiing, J.Ratzinger) . 둘째, 저주받은 자는 없어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영원한 고통은 없다. 즉 저주받은 이들의 죽음은 최종적이기에 영벌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삶은 단지 신앙인들만을 위해,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이들에게만 부여된다(E. Schillebeeckx) 셋째,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지옥 교리를 포기하게 한다. 이는 총체적 화해론에 관계되는 것으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왔다. 물론 그 중요한 증거자로 사도 바오로(1고린 15,24-28 : 로마 11, 32)와 오리제네스를 들 수 있다. 이 입 장의 첫 번째 현대적 변형으로는 '빈 지옥' 에 관한 이론을 들 수 있다. "지옥의 불길은 도대체 아무나 도달할 수없다." 그래서 지옥은 빈 채로 남아 있다(P. Teihard deChardin). 지옥 교리는 '하나의 교리(dogma)' 로 존재하는것이고, 지옥에 '누군가 있다' 고 믿지는 않는다(H.U. v.Balthasar). 그리고 지옥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잠시나마승리를 구가하였고, 따라서 "이제는 더이상, 누구에 대해서도 승리를 구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K.Barth). 두 번째 변형은 죽음 이후의 회개 가능성에 관한문제이다. 이에 대한 성서의 암시는 죽음의 왕국에서의예수의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1베드 3, 19-20 : 4, 6).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죄인들과 불신자들을 회개시켜야 하는 임무를 지닌 교회를 세운다. 죽음 이후에는 지상의 삶과는 다른 관계가 지배하기 때문에, 죄인들의 지속적인고집과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는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사후에 하느님 왕국으로의 모든 이들의 귀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변형은 '윤회 사상' 을 신앙 교리안에 수용하려는 시도이다. 이 윤회 사상의 기본 사고는,인간의 인격성의 핵심은 자신의 '영혼' 을 단지 한 번이아니라 여러 번 계속해서 한정된 존재 안에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즉 '여러 번의 생' 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 변형설' (Metempsychose)은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의 사상과 불교에서 말해지고 있지만, 1970년 이후 그리스도교에서 하나의 가능한 사고로 받아들여졌다. 〔교회의 가르침〕 1997년 라틴어 표준판이 발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죽을 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 의 고통을 겪는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하는것이다"(1035항). 동시에 지옥에 대한 성서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라고 밝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라고교리서는 언급하고 있다(1036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 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한다면 지옥에 간다고 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1037항)고 밝힘으로써 구원 예정설에 대한 명백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조직 신학적 또는 케리그마적 해석〕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현대 신학에서는 더이상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지옥 벌은 주제화되지 않고 있다. 역사상 많은 세대들이 지옥 설교와 그 교리를 통해 위축되었거나 교회에서멀어졌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해 이론적으로 가능한 부정(Nein)이 그들의 급진성이 아니라, 수없이 구성된 교회의 '죽을 죄들' 안에서 구체화되었던 것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옥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성서의 종말론적 진술에 대한 해석학적 규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성서의 지옥에 대한 기사는 종말론적 위협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을 언젠가 한 번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 보도 또는 저승 세계에 대한 정보로 읽지 말고, 인간 각자의 현재의 상황, 판단 그리고 역사에 대한 성실성을 촉구하는 권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위협적이고 결정적으로 언급한 지옥에 대한 비유들은 당시의묵시문학의 표현을 빌린 표상들(불 · 벌레 · 어둠 등)이다.이 모든 상들(Bilder)은 결정적 상실의 가능성과 인간이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어쨌든 지옥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우주 공간에위치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옥은 신학적으로 말해서하느님으로부터의 최종적 결별 안에 있는 인간의 결정적상실감이다. ···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적이고 자유롭고,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지고 그것이 결정적이라면, 우리에게 지옥이라 일컫는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 지옥의 본질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최종적이고 전적인 결정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부인(Nein Zu Gott)이다" (K. Rahner). 이로써 지옥에 대한 교의학적 진술은 저승 세계의 어느 대상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 실존과 관계된 의미 차원으로확장되었다. 그리고 지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학은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보편 적 구원 의지에 근거하고 있기에 모든 이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1고린 13, 7). 따라서 지옥에 대한 설교는 케리그마(kerygma)적으로설명할 수 있다. 어느 한도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실의 가능성이 실제로 현실화되는지에 대해서, 예수는 자신의최후 심판 담화에서 그 가능성을 분명하게 계시하지 않았다. 지옥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의 육체' 안에서 그리고 '성인들과의 통교 안에서 요청된 구원사적 소집에대해서 절대적으로 통교를 거부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지옥 개념의 본질적인 의미내용을 형성한다. "우리가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그분과 결합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중한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 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3항).따라서 지옥에 대한 설교나 교의적 적용에 있어, 올바르지 못한 노예적 두려움을 중심에 두어서는 안 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설파되어야 한다. 이는 십자가상의 예수가경험한 '하느님의 떠나심' 과 그의 '지옥행' 안에서 보여지듯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 그 거부와 상실 그리고 부정의 심연-지옥에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시편139, 8)-속에서도 웅변적으로 빛남을 보여준다. 지옥에대한 설교는 영원한 구원 상실에 대한 위험을 진지하게전달하면서, 동시에 단호한 하느님의 정의 옆에는 희망차고 신뢰 있는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가 함께 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 하느님의 나라 ; → 각고 ; 셔올 ;심판 ; 영벌) ※ 참고문헌  H.U. v. Balthasar, Was dürfen wir hoffen?, Einsiedeln,1989/ F. Heer, Abschied von Höllen und Himmeln, Miinchen, Esslingen,1970/ G. Minois, Histoire des enfers, Paris, 1994/ R. Hughes, Heaven andHell in Western Art, New York, 1968/ M. Kehl, 《LThK》 5, 1996, pp.231~234/ A. Köppen, Der Teufel und die Holle in der darstellenden Kunstvon den Anfingen bis zum Zeitalter Dantes und Giottos, Berlin, 1895/ H.Kiing, Ewiges Leben?, Miinchen, 1982/ B. Lang, 《NHThG》 2, pp.362~373/ F.-J. Nocke, Eschatologie, Handbuch der Dogamtik, Bd. 2,Theodor Schneider ed., Diisseldor, 1995, pp. 377~4781 K. Rahner, 《SM》2,pp. 735~7391 T. Ramussen, 《TRE》 15, pp. 449~455/ J. Ratzinger, 《LThK》5, p. 448/ A. Riiegg, Die Jenseitsvorstellung vor Dante und die iiberigenliterarischen Vorausetzuungen der Divina Commendia I-II, Einsiedeln,Köln, 1945/ JR. Sachs, Current Eschatology-Univirsal Salvation and theProblem of Hell, Theological Studies 52, 1991 , Pp. 227~2541 E.Schillebeeckx, Menschen, Freiburg, 1990/ H. Vorgrimler, Geschichte derHolle, München 1994/ 一, Neues Theologisches Wörterbuch, Freiburg ·Basel · Wien, 2000, pp. 295ff/ D.P. Walker, The Decline of Hell, London,1964. 〔吳敏奐〕 Ⅱ 종교학에서의 지옥 대부분의 종교와 신화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현세와는다른 어떤 세계로 간다고 한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저 세상' , '저승' 이라고도 하며, 주로 죽은 자〔死者〕들이 사는 세계이다. 그 세계 가운데 특별히 '지옥' 은 생전에 악행을 한 사람들이 죽어서 간 뒤 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곳이다. 우리 말의 지옥(地獄)도 자신의 악업(惡業)에의해 떨어진 고통스러운 지하 감옥을 의미하며, '싫은것' , '고통스러운 것' 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나라카 (naraka)에 어원적 근거를 두고 있다. 지옥에 대한 묘사는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다. 그 다양성은 특히 '지옥은 영원한가? 지옥은 그저 죽은 이들의세계일 뿐인가? 지옥과 천국 또는 현세는 분리되어 있는가? 등의 물음과 관계되어 있다. 대체로는 지옥을 영원한 곳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국어 사전에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히 벌을받는 곳" 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지옥이나 지옥 형벌의영원성이 초기부터 모든 곳에서 확립되어 있었던 것은아니다. 특히 인도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불교에서는 지옥 역시 여러 세계들 중 하나이며, 다른 세계와 분리되어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식의 내세관은 고대 종교로 갈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고대 근동〕 고대 세계에서 죽은 이들이 사는 곳이란어둡고 음울한 지하 묘지와 같은 분위기를 연상시켜 주는 장소였다. 바빌로니아 및 아시리아의 아랄루(Arallu)는 먼지와 진흙을 먹는, 땅속의 어두운 곳이었다. 형벌을받는 지옥이기보다는 그저 불행한 죽은 이들의 거주지였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800?~750)가 쓴 《오디세이아》(Odysseia)에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죽은 이들의 세계에 찾아가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돌아가신 어머니 및 전사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다.죽은 이들의 나라는 캄캄하고 무서운 곳이면서도, 산 사람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현세와 완전히 단절된 곳은 아니었다. 생(生)과 사(死),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강과 언덕이 가로놓여 서로 떨어져 있기는 해도 왕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죽은 이들의 세계라고 해서 특별히 형벌을 받는 곳도 아니었다. 저승에서 벌을 받는다는 개념이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나기시작한 것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부터였다. 〔조로아스터교와 이집트 종교〕 조로아스터교에서는죽은 사람의 영혼이 선행과 악행의 정도를 심판하는 친바트(Chinvat) 다리로 가서 생전의 행위들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선행이 악행보다 많았던 영혼은 점점 더 넓어지는 다리를 건너 하늘로 가는 데 반해, 악행이 선행보다많았던 영혼은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춥고 악취 나는 지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에서는 이곳에 떨어진 악한 이들이 끓는 쇳물에 잠겨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은 함미스타겐(Ham-mistagen)이라는 일종의 연옥으로 간다. 이러한 재판은 살아서 지은 선과 악에 대한 철저한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 누구의 은총으로도 계산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 이집트에서는 지하 세계의 왕 오시리스(Osiris)가 사후에 심판을 행한다고 믿었다. 만일죄의 짐이 심장(heart)보다 무거우면 괴물 암미트(Am-mit)가 그 심장을 먹어 버린다. 그것이 그 죄인의 종말이다.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은 심판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대가를 치른다는 믿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유대교〕 고대 유대교에서 죽은 이들의 세계는 형벌이나 고통의 장소가 아니었다. 다만 자기들의 이전 생활을잊고(시편 88, 12) 세속적인 즐거움을 빼앗긴 채(집회 14,16),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야훼 하느님을 찬양할수 없는(시편 6, 5 : 8, 12-13 : 30, 9 : 115, 17 : 이사 38,18 ; 집회 17, 27-28)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그 위치는 땅아래(민수 16, 30)나 바다 아래(읍기 26, 7) 또는 산기슭밑(요나 2, 6)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체로 어둡고 혼돈스러운 곳(욥기 10, 20-21), 음산한 적막의 장소(시편 94, 17) 정도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이러한 곳의 이름으로 '셔올' ()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하였지만, 이것도 음산한 지하의 감옥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고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게엔나' (γέεννα), 즉 '힌놈 계곡 ()이라는 말이주로 통용되면서 죽은 이들 세계의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힌놈 계곡은 본래 인간을 제물로 받던 이방신 몰록(Moloch)에게 제물을 바치던 예루살렘 주변의 한 계곡 이름이었다. 이곳에는 범죄자들의 시체나동물 시체가 쌓여 있었으며, 악취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 이 불을 피웠다. 이곳의 이미지가 사후 세계와 은유적으로 연결되면서, 기원전 1세기경에는 최후 심판을 받은후에 또는 죽고 난 직후에 사악한 사람들이 머물게 되는더럽고 불쾌한 장소로 간주되었다. 때로는 《아베스타》의영향을 받아 끝없이 불이 일어나는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는 구절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게엔나를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게엔나를 불붙는 지옥으로 간주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이다(마태 5, 22. 29. 30 ; 10, 28 ; 마르 9,43. 45. 47 ; 루가 12, 5 ; 야고 3, 6). 전반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지옥이 영원하다거나 형벌의 장소라는 개념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죽은 이들이 가는곳이나 죽은 이들의 운명에 대한 일부 전승들만 있었을뿐, 전체적으로 합의된 교리는 없었던 셈이다. 영원한 지옥 관념이 명확해진 것은 그리스도교, 이슬람 같은 세계적인 유신론적 종교들이 발생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대중 신앙에서지옥은 대체로 죄에 물든 사람들과 하느님을 부인하는사람들에게 내린 영원한 저주의 장소이자, 사탄과 그 휘하의 악한 천사들의 지배를 받는 불타오르는 지역이다.물론 그것은 대중적 전승에 가까운 내용들이며, 애초부터 교리로 받아들여졌던 것들은 아니다. 그래서 오리제네스(185~253)와 니사의 그레고리오(335?~395?) 같은 초기 교부들은 지옥이 영원하다는 견해와 지옥이 실제로뜨겁게 타오르는 내세의 어떤 장소라는 문자적인 견해에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지옥이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이라고 가르쳤다. 유대-그리스도교와 비슷한 뿌리 위에서 성립된 이슬람에서도 지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죽은 이의 영혼들이 낙원으로 가기 위해 건너가는 좁은 다리 밑에 뜨겁게타오르는 거대한 분화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의 지옥이다. 저주받은 사람들은 다리에서 떨어져 하느님인 알라가 뜻을 바꾸기 전까지 그곳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힌두교와 불교〕 인도의 지옥관은 약간 다르다. 인도의 힌두교에서 지옥은 궁극적인 실재(Brahman)와 합일할때까지 윤회하는 영혼의 도정 가운데 있는 한 단계일 뿐이다. 이것은 인도의 토양 위에서 성립된 불교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의 삶이 거듭되는 육도(六道 : 천상계 · 인간계 · 아수라계 · 축생계 · 아귀계 · 지옥계)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위치한다고 한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뜨거운 팔열 지옥(八熱地獄)과 그 주위에 있는 차가운 팔한 지옥(八寨地獄) 등에 대해 설명한다. 지옥은 악인들이 갈 수 있는 최악의 거처이지만, 힌두교에서처럼 불교의 지옥 역시 윤회의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역으로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곳은 아니다.이곳에 떨어진 중생은 전생의 죄업으로 인해 여러 가지고통을 당한다. 죄인끼리 치고 박고 죽이다가 되살아나면 다시 죽이는 형벌이 있는가 하면, 시뻘건 쇳물이 끓는솥 속에 던져지기도 한다. 이 지옥들의 주재자는 염라대왕(間羅大王)이다. 염라대왕의 '염라' 는 인도의 신화에서 저승 세계를 주재하는죽음의 신 야마(Yama)의 한자어 음역으로, 염마(閻魔)라고도 불린다. 고대 힌두교 문헌인 《리그베다》(Rigveda)에서는 염라가 죄를 벌하는 자가 아니라 죽은 선조들의유쾌한 임금으로 나타나지만, 후대의 신화에서는 죽은자의 잘못을 가리고 그들의 징벌을 결정하는 공평한 심판관으로 알려져 왔다. 이 염라가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전해지면서 염라대왕이라는 완전히 중국적인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한국의 내세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 나라에서 염라대왕은 열여덟 장관과 팔만 옥졸을 거느리고 지옥에 살면서, 죽어 그곳에 떨어지는 인간이 생전에 지은 선과 악을 심판하고 징벌하는 저승의임금으로 믿어져 왔다. 〔한 국〕 우리 나라에서 전래되는 저승은 이승과의 구분이 크지 않다. 그저 사령(死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묘사될 뿐, 생김새도 이승과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죽으면 저승 또는 황천(黃泉)으로 가서 먼저 죽은자들을 만난다. 또 이승으로 와서 후손이 바치는 제물을받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저승은 이승과 별 차이가 없다. 자식 없이 죽은 귀신은 나중에 만나볼 사람도 없고대접도 받지 못해 서러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당연히 사자들의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현세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전통적내세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평 가〕 흥미로운 것은 지옥의 역사가 천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천국과 같은 기쁨의 세계보다는 지옥과 같은 고통의 세계를 더 오랫동안 즐겨 이야기해 왔다. 불교의 지옥도 원시 불교 시대부터 언급되어 왔지만, 정토(淨土)나 극락(極樂) 같은 내세관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후에 생겨났다. 불교에서 지옥은 그림의 재료로 채택될만큼 대중적인 주제가 되었으며, 지옥의 고통받는 장면을 묘사한 '지옥 변상도' (地獄變相圖) 같은 그림도 다수 전해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지옥의 역사는 천국의 역사보다 훨씬 대중적인 주제였다. 지옥은 종교는물론 문학, 예술의 끊임없는 토론거리였다.인류의 문화는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고 발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현세는 부정적 내세, 즉 지옥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는 가정도가능하다. 왜 지옥이 훨씬 대중적인 주제였나? 그 답은 일단 인간이 현실 안에서 경험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해석, 윤리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힘이 없어 억압당하던 이들이 보상받고, 온갖 편법과 탈법으로 억압하던이들이 형벌받아야 할 내세는 현세적 모순을경험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요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옥은 억압받던 대중에게 그림 ·글씨 · 연극 · 노래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왔다. 지옥은 서양의 문학과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등장한다.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 같은 철학자, 아우구스티노(354~430) 같은 신학자, 호메로스나 베르질리우스(기원전 70~19) 같은 시인도 이 주제에 대해 다루었다.지옥은 온갖 문학 유형으로 일상화되고 희화화되었다.반면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지옥에 비해 많지 않았으니, 인류를 움직여 온 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지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해도 과장만은 아니다. (←명부 ; → 저승) ※ 참고문헌  앨리스 K. 터너, 이찬수 역, 《지옥의 역사 I . Ⅲ》, 동연출판사, 1998/ 자크 르 고프, 최애리 역, 《연옥의 탄생》, 문학과 지성사, 2000/ T. 페넬름, 이순성 역, 《사후 세계의 철학적 분석》, 서광사, 1991/ J. Bruce Long, Underworld, 《ER》 15, pp. 126~134/ L.M.Tober · F.S. Lusby, Heaven and Hell, 《ER》 6, pp. 237~243/ P. Camporesi,The Fear of Hell : Images of Dammation and Salvation in Early ModernEurope, trans. by Lucinda Byatt,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University Press, 1991/ A. Dante, The Inferno, trans. by John Ciardi, 1954,New York : 2nd ed., New American Library, 1982/ M. Himmelfarb, Toursof Hell : An Apocalyptic Form in Jewish and Christian Literature,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3/ H. Aldous, Heavenand Hell, New York, Harper, 1956/ H.R. Patch, The Other World :According to Descriptions in Medieval Literature, Cambridge, HarvardUniversity Press, 1950. 〔李贊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