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좌동 본당 智佐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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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망즈 주교가 방문(1915. 12. 1, 왼쪽)한 마잠 공소와 현재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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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망즈 주교가 방문(1915. 12. 1, 왼쪽)한 마잠 공소와 현재의 성당.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경북 김천시 지좌동 405 소재.1935년 6월 16일 김천(현 황금동)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승천. 관할 구역은 김천시 지좌동, 덕곡동, 농소면, 남면 전 지역과 조마면, 감천면, 아포면 일부 지역. 〔교 세〕 1972년 830명, 1977년 1,015명, 1982년 1,193명, 1987년 1,338명, 1992년 1,789명, 1997년 1,634명, 2002년 1,831명. 〔역대 신부〕 초 대 김동언(金東彥) 베드로(1935.6~1939.5), 2대 고군삼(高君三) 베네딕도(1939. 5~1943. 2), 3대 최재선(崔再善) 요한(1943. 2~1945. 5), 4대 최영호(崔榮浩) 비안네(1970. 8~1982. 4), 5대 함정태(咸正泰) 가시아노(1982.4~1983. 1) , 6대 김종필(金鍾弼) 폴리카르포(1983.1~1984. 2), 7대 하성호(河星鎬) 요한(1984. 2~1986. 1), 8대 여창환(呂昌煥) 라우렌시오(1986. 1~1988?), 9대 이강태(李康胎) 베드로(1988?~1991. 6), 10대 이형문(李亨文) 안토니오(1991. 6~1994. 8), 11대 최종현(崔鍾炫) 베드로(1994. 8~1996. 2), 12대 박덕수(朴德洙) 스테파노(1996. 2~1998. 8), 13대 김두찬(金斗燦) 세례자 요한(1998. 8~2001.8), 임시 여창환(2000. 6~8), 14대 김명섭(金明燮) 그레고리오(2001.8~현재). 조선 시대 역참 고을이었던 김천(金泉)의 마잠 지역은병인박해 이전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의 부친 가족이 이 지역으로 피난을 오게 되면서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으로, 김천 지역 교회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김천 지방에는 1866년 병인박해 중에경기도, 충청도, 경남 사천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의해 여러 곳의 교우촌이 형성되었는데, 마잠 역시 그중한 곳이었다. 마잠에 신자가 살고 있었고 신앙 공동체가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문헌 기록은 1892년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부산(현 범일) 본당의 조조(M. Jozeau, 趙得夏) 신부가 마잠지역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하였다는 것으로, 당시 신자수는 20명이었다. 이것으로 볼 때 최소한 1880년대에는 이미 이 지역에 신앙이 전파되었고,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가실(현 낙산) 본당이대구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면서 이 지역은 가실 본당관할이 되었다. 이후 가실 본당 2대 주임인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가 1901년에 김천 본당을 설립함에따라 마잠 지역은 김천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13년에신자인 김옥배의 부친이 김천 시내로 이사를 가면서 총304평의 토지(현 지좌동 396~400번지)와 초가집을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이 초가집에 신자들이 모여 주일 첨례를 드리게 됨으로써 마잠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기증받은 부지에 성당(43.3평), 사제관(5평), 강당 및 사택 (35.5평) 등을 지었으며, 강당에 학당을 차려서 신자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후 마잠 공소는 김천 본당의 주임 신부들이 방문하여 공소 예절을 거행하면서 점차 신자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1935년 6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김동언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이때 본당명을 '지좌'로 정하였다. 김동언 신부 재임기인 1936년 이 지역은큰 수해를 입었는데, 특히 본당 소속 공소인 무학동, 광암동, 선무기(선무터), 먹방이, 늑바위 등의 공소가 매우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김 신부는 지인들에게 구휼금을 청하는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어 각 지방의 신자들은 물론 비신자들에게까지 구휼금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 2대 주임 고군삼 신부에 이어 3대 주임으로 부임한최재선 신부는 일제 말기 일본 관리들로부터 성당의 종과 기물을 헌납하도록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버티었다.그리고 현재 본당 부지와 교회 묘지 및 전답 1,200평(현성의중 · 종합고등학교 부지)을 본당 신자인 김상환의 부친으로부터 희사받았다. 하지만 1945년 5월 최재선 신부의 전임 후에 지좌 본당은 사제가 파견되지 못하여 김천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광복과 한국 전쟁을 거치는 10여 년 동안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이후 1952년 왜관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고,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가 1956년 3월에 지좌동소재의 성의중 · 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지좌 공소에서 매주 주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던 중 1970년8월에 지좌 공소는 지좌동 본당으로 재승격되어 4대 주임으로 최영호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 후 1984년 김천지역의 4개 본당(지좌동, 황금동, 평화동, 지례 본당)의 사목권이 왜관 감목 대리구에서 대구대교구로 넘어올 때까지함정태 신부와 김종필 신부 등이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 사목을 맡았다. 8대 주임 여창환 신부는 1987년 4월에 기존의 목조건물을 철거하고 공사를 시작한 후, 1988년 5월 1일에공사를 완료하여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새로 신축된 성전은 총 건평 254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지하에 강당과 회합실, 지상 1층에 성당과 사제관, 2층에성가대 등을 마련하였다. 13대 주임 김두찬 신부 재임기 인 1999년 10월에 지좌동 본당은 김천 지역 3개 본당과연계하여 노인 봉사 센터를 개소(開所)하였으며, 2000년 2월에는 김천 지역 5개 본당이 공동 사목의 일환으로발족한 김천 지역 연합 가두 선교단에 참가하여 가두 선교 활동을 펼쳤다. 14대 주임 김명섭 신부 재임기인2002년 여름에는 태풍으로 인해 사제관과 수녀원이 피해를 입었고, 본당 신자들의 농경지가 유실되는 아픔을겪었다. 현재 지좌동 본당은 주임 신부와 전 신자가 하나가 되어 피해 복구 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김천 지역 천주교 발생지로서의 위상에 어긋나지 않는 전교 활동에진력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대구 본당 백년사》, 1986/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기초 자료집① 옛 공소의 어제와 오늘(1815~1910)》,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2000. 〔白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