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학
敎會史學
〔라〕historiographia ecclesiastica · 〔영〕ecclesiastical histor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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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아버지라 부르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교회사를 연구하여 편찬하고 기술하는 학문. 교회사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원 및 교회가 시간과 공간에 걸쳐 내 외적(內外的)으로 발전한 역사로서 대내적 발전에는 교 리, 교계 제도, 전례, 규율 등에 관한 사실들이 있고 대 외적 발전에는 복음의 전파, 국가 · 기타 사회 · 종교 단 체와의 관계 등이다. 교회는 신적이자 인적(人的)인 두 요소로 구성된 제도이다. 따라서 교회사학 역시 신학의 대상인 동시에 역사학의 대상이다. 즉 불변하는 신적인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 인식을 위해서는 신학의 원 리를 따라야 한다. 다른 한편, 변화하고 발전하는 인적인 요소도 포함하기에 역사학의 비판적 방법론의 대상도 된 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인 교회와 역사의 대상인 교회는 결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체(實體)로서 인 간에 의해 변화, 발전하지만 그 본질은 성령의 계속적인 현존으로 항상 변함없이 유지된다. 〔서술 방법〕 다른 일반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 요한 기초 작업으로서, 먼저 역사적 사료를 비판한 후 사 실들을 정리하고 확립한다. 그 다음 정리된 역사 사실들 을 종합,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인적 요소들에 관해서는 그 인과 관계를 밝히되 역사의 궁극 원인인 신 적 요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그러 한 사실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교회사 는 신(神)과 인간이 협동한 사상(事象)들을 하나로 체계 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사 서술에서 그 기준은 현재가 아닌 당시 상황이어야 한다. 또한 '황 금과 쇠퇴' , '남용과 개혁' 등의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 으며 아울러 '죄와 배신' 같은 인간의 책임도 배제될 수 는 없다. 결국 교회사는 '그리스도 몸의 건설' 이라는 전 체적인 구원사의 견지에서만 그 파악이 가능하며 바로 이 점 때문에 교회사는 세속사와 구별되어 독립된 학문 으로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과 (功過)는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는 법정의 재판관처럼 명백한 척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판단이 재판 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교회사의 최종 의의는 세상 종 말에 가서야 드러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완전한 진전 도, 완전한 타락도 용인될 수 없고 따라서 교회사가도 최 종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그리고 사료학과 기타 보조 학 문(고문서학, 연대기학, 문장학, 금석학, 계보학 등)의 발전은 17세기에 이르러 교회사에 학문적인 기반을 놓았다. 〔편찬사〕 고대 : 초기 3세기 박해 동안에도 단편적으 로 전해지는 것은 있었으나(3세기경 Sextus Julius Africanus와 로마 히폴리토의 《세계 연대기》) 교회사가 정식으로 저술된 것은 '교회사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체사레아의 에우세 비오(Eusebius, +339)에서 비롯되었다(《교회사》, 10권, 처음 에는 303년까지 기록하였으나 그 후 324년까지 여러 번 증보됨). 그는 교회사를 일정한 관점(사도적 계승, 유대인, 이단자, 박 해)에서 저술하였는데, 그 안에는 많은 공문서의 인용, 현존하지 않는 문서들에서 발췌된 부분들이 전해지고 있 어 초기 3세기에 관한 중요한 역사 자료로 인정받고 있 다. 그의 교회사는 동방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439 까지), 소조메노스(Sozomenos, 425까지), 테오도레토스 (Theodoretos, 428까지) 등과 같은 후계자들이 그 뒤를 이 어서 계속 보완하였고 서방에서는 루피노(Rufinus)가 그 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395년까지 연장하였다. 카시 오도로(Cassiodorus)는 그의 《삼부사》(三部史, Historia tripartita)에서 위의 소크라테스, 소조메노스, 테오도레토스 세 사람의 저술을 수록하고 518년까지 보완하였다. 에 우세비오를 비롯하여 여러 연대기 작가들(Hieronymus, Sulpicius Severus, Seville의 Isidorus 등)은 교회사와 병행하여 세 계 연대기사(세계사)도 저술하면서, 구원사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세속사를 호교론적 견지에 서 해석하려 하였다. 실제로 그는 로마 제국 멸망이 그리 스도교의 책임이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신국론》(De civite Dei, 22권, 413~426)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가장 중 요한 고대 역사 철학서로서 중세 전체를 통해 역사서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로시우스(P. Orosius)도 아우 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아 같은 동기에서 그의 '반이교도 사' 를 저술하였다. 세계사 내지 구원사의 시대 구분은 오로시우스 또는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4제국(다니엘 7장) 으로, 또는 6기 또는 3기로 구분되었다. 중세 : 이 시기에는 고대에서 역사를 구원사로 파악한 입장을 받아들여 서술 형식의 주요 기반으로 삼았지만 문헌의 이해나 그 방법에 있어서 고대를 모방한 정도일 뿐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세 계 연대기들의 구성은 에우세비오와 해로니모에게 의존 하였고(예 : Otto von Freising) 그 밖의 연대기나 역사서들도 단일 민족 또는 일정한 범위(교구, 도시, 수도원)에 한정된 국부사(局部史)에 그쳤다(투르의 그레고리오의 《프랑크족 사》, 베다의 《영국 민족사》 등). 12세기에 처음으로 '교회 사' 라는 이름이 사용되지만(Fleury의 Hugo와 Odericus Vitalis) 그들의 저술은 에우세비오의 방식을 따른 교회사 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룻가(Llucca)의 바르톨로메 오(+1326)는 '새 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 nova)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피렌체의 안토니오도 그와 비슷한 역사서(Summa Historialis)를 시도하였으나 세계 연대기 양식을 그 기본 구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 서 교회사로 불리기에는 어렵다. 한편 중세에서 교회 개 념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이른바 '쇠퇴론' 이다. 이것은 피오레(Fiore)의 요아킴(+1202)의 이론으로서 그가 창시 한 역사 신학은 중세 전성기는 물론이고 그 후 세기에까 지 역사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구원사를 천주 삼위에 의거하여 과거를 성부 시대, 현재를 성자 시대, 미래를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현재 교회는 초기 교 회의 이상적인 모습이 쇠퇴한 상태이므로 초대 교회를 모델로 하여 그때로 돌아가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주 장하였다. 그리고 초기 교회로부터의 쇠퇴는 순교자들의 황금 시대, 콘스탄틴의 은(銀) 시대, 동(銅) 시대 등 몇 단계를 거쳐 현재의 철(鐵) 시대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근세 : 교회사학은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인문주의자 들에 의한 역사적 비판을 곁들인 풍부한 자료들의 발간, 종교 개혁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학 논쟁 등을 통하여 새 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교부 집 간행을 통해(에라스무스의 《교부전》, 1523) 초기 교회 전 승(傳承)에 대한 비판과 쇠퇴론을 일층 심화시켰다. 막 데부르크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에서 저술한 《세기별 교회사》(Megdeburgerr Canturien, 1559~1574, M. Flacius가 주도)에서 현재의 부패하고 변질된 교회는 초 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가톨 릭에서도 응전하였다. 가톨릭의 논쟁 신학은 고대 교회 와의 연속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로마 오라토리오회의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가 저술 한 《교회 연대사》(Annaless ecclesiastici, 1588~1607)이다. 그 는 여기서 그때까지의 구원사적인 교회사 저술을 포기하 고 교회사의 전통적 모습을 문헌적으로 증명하려 하였 다. 이것은 그 후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자주 증보되었 다. 한편 '교회의 특징' (notae ecclesiae)의 제시로 교회 개 념이 객관화되고, 그 결과 구원사관이 결정적으로 후퇴 하게 되었다. 17~18세기는 역사 비판적 방법에 의한 위대한 문서 자료집의 간행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의 생 모르 학파(Mauriner)와 예수회의 볼란두스 학파 (Bollandistae)들은 사료 간행을 위한 역사 비판 방법을 발 전시켰는데 특히 생 모르 학파의 마비용(Mabillon, +1707) 은 고문서학을 창시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역사적 비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공의회 의사록을 위시해서 방 대한 자료집의 간행과 더불어 교회사 문헌의 기반을 확 충시키게 되었다(P.U.G. Ballerini, G. Arnold Mansi, L. Muratori) . 또한 교회사가 분야별로 발전하면서 교의사(D. Petavius, 1583~1652)와 제도사(Thomassin d'Eynac, 《신구 교회사 규율사》, 1688)가 출간되었다. 특히 역사 통계학이 발전하면서 이 방법에 의한 교구사와 수도회사들이 발간되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서 각기 국가별 교구사가 간행 되었고(Ferdinando Ugelli의 《Italia sacra》, 《Gallia christiana》, 《Germania sacra》), 수도회사로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역사가 모범이 되었다(아일랜드의 Luke Wadding, J. Quetif & J. Echard). 교회사가들은 이러한 사실 자료들의 보급, 교회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에 힘입어 프로테스탄트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종합적인 저술을 시도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나탈리스(Alex. Natalis) , 틸몽(Louis de Tillemont) 플뢰리(CIaude Fleury) 등 3명의 교회사가가 이를 시도하였는데, 틸몽의 교회사 는 아직 고대 교회사에 머물렀으나 나탈리스는 교회사 전체를 다루었다. 더욱이 플뢰리의 교회사는 나탈리스의 교회사를 능가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오르시(G.A. Orsi, +1761)는 더욱 우수한 교회사를 저술했다. 17세기 중엽 부터 교회사는 대학과 신학교에서 독립된 강좌로 도입되 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프로테 스탄트 대학들이다. 가톨릭에서는 18세기 중엽에 가서 야 오스트리아와 로마 신학교에서 독립 과목이 되지만 교재들은 아직 프로테스탄트 것을 사용하였고(J.L. v. Mosheim 아니면 M. Dannenmeyr의 《교회사 입문》) 그 결과 계몽 주의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실 당시의 저술들을 보면 계 몽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M. Dannenmayr, X. Gmeier). 19~20세기에 와서 교회사학은 초 자연적 성격의 교회 개념의 재정립, 계몽주의 영향의 극 복, 자료 해석에 따른 새 방법론의 개발 등 필요한 요건 들을 갖추게 됨으로써 융성기를 맞게 된다. 계몽주의적 이고 합리주의적인 교회관에 대한 반동이 전승주의, 낭 만주의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토브리앙(F.R. de Chateaubriand)과 메스트르(L.M. de Maistre) , 독일의 낭만 주의자들은 중세 교회의 위대한 전통과 그 문화적 공헌 을 찬양하며 중세에 대한 편견의 제거를 시도하였고, 뭔 스터 학파의 카트캄프(J.Th. Katerkamp)와 스톨베르크 (F.L. v. Stolberg)는 그들의 교회사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성을 정립함으로써 신앙에 대한 계몽 사상의 무차별주의 를 극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교회사 서술 방향을 정립하 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튀빙겐 대 학의 될러(J.A. Möhler)이 다. 이 튀빙겐 학파는 역 시 교회사학파인 민헨 학파와 더불어 드라이 (J.S. Drey) , 헤플레(C.J. Hefele, 《공의회사》), 될링 거(J.J. Ignaz von Döllinger) , 헤르겐뢰터 (J. Hergenröther) 등을 통해 교회사 연구와 방법론에 있어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현대 : 주로 자료와 의사록의 간행, 각 분야의 전문 연 구, 지역 교회사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새로운 고문서학 의 방법에 의한 자료집의 간행은 고문서고, 무엇보다도 1884년 바티칸 문서고의 개방으로 전체 교회사와 교황 사에 새 시대를 열게 하였다(A. Kehr의 《교황 문서 전집》, 프 랑스 학자들의 《교황 문서집》, 괴레스 학회의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집》). 특히 바티칸의 새 자료들을 풍부하게 수록한 파스토르(L. v. Pastor, 1885~1933)의 《교황사)(Geschichite der Päpste)는 유명한 랑케(L. Ranke)의 《교황사》를 능가했 다. 각 분야의 전문 연구로서는 그리스도교 고고학(G.B. de Rossi, J. Wilpert), 교부학(독일의 프로테스탄트 학자인 A. v. Harnack와 가톨릭의 O. Bardenhewer) , 고대 교회사(L. Duchesne, P. Batiffol) 종교 개혁사(H. Denifle, H. Grisar)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전문적 연구 진행의 결과는 성인 전기학(브뤼셀의 불란두스파), 교의사(Batiffol, J. Tixeront), 전례사(Duchesne), 포교 사(J. Schmidlin, 프로테스탄트의 K.S. Latourette), 성화상학, 종교 민속학 등을 교회사에서 분할시켜 독립된 분과로 탄생시 켰다. 이렇게 꾸준히 증가하는 특수 분야들의 연구에 발 맞추어 교회사 전문지가 등장하고 교회사 연구에 필요한 문헌과 중요한 논문들을 수시로 소개하게 되었다. 그중 에서 가장 모범적인 것은 역시 루뱅에서 1900년 창간된 교회사 전문지일 것이다. 포교사 관계로는 1916년 스트 라이트(R. Streit)가 시작한 문헌지 《Bibliotheca Missionum》 가 가장 유명하다. 교회사 교육에 필요한 교과서 편찬은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에 이어 가톨릭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는데(F.X. Kraus, F.X. v. Funk, 그 후 K. Bihlmeyer와 H. Tüchle 가 신판을 간행)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프랑스에서도 훌 륭한 교과서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F. Mourret, 특히 1936년 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A. Fliche와 V. Martin의 《교회사》 24권). 그 런데 이러한 모든 분야에서의 전문화, 전체 교회사로부 터의 분화(分化) 작업에는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았다. 그 래서인지 제1차 세계대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교 회사가 다시 종합으로 돌아가려는 추세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동시에 민족주의나 유럽주의로 축소된 교회사의 시야도 세계 교회라는 시야에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소리 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시대 구분〕 교회사는 그 대상과 또는 분류에 따라 여 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나 연대순에 의한 구분, 즉 시 대 구분법이 가장 보편적이다. 사실 교회사의 발전 단계 를 일정한 경계선으로 구분하는 문제와 구분한다고 해도 그 기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시대 구분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한 시대의 내적이고 정신적 흐름이 하나로 묶어 제시될 수 있을 때 그 안에 내재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의미가 부각되어 더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이래 일반 세계 사에서 적용된 '고대' , '중세' , '근세' 라는 3단계 구분 법은 19세기 중엽부터 교회사에서도 적용되어, 일반적 으로 8세기 게르만 민족의 개종과 14세기 말엽 르네상 스에서 시작된 근대 정신을 두 큰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 에 따라 세 시대로 구분한다. 물론 모든 역사가들이 이 구분법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고 다른 구분을 내세우는 역사가들도 있었다. 사실 '게르만족의 그리스도교 개종' 이라는 문제도 그 시작이나 완료된 기년(紀年)을 언제로 보느냐보다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한 민족의 대이동(5세 기 초) 내지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입장도 있다. 근세의 시작도 간단하지가 않다. 물론 르네상스와 인문주의가 근세를 열었다는 데 이론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발흥한 기년을 정확히 어느 해로 잡느냐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기에서 결과된 종교개혁(1517)을 교회사의 근세 시작으로 보려하고 있고 또 그것이 오늘 날 거의 관례로 통하고 있다. 한편 인문주의자와 종교 개 혁가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의 구분법 자체를, 비록 관 용되고는 있지만 교회사에 적용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교 회사가도 있다(H. Jedin). 어쨌든 게르만족의 개종 및 인문 주의란 새 사상의 발흥을 교회 사상 2대 사건으로 인정 하고 그것을 세계사의 시대 구분법에 적용할 때 나타나 는 교회사의 시대 구분은 이러하다. 고대(성신 강림에서~7세기 말) : 교회가 그리스-로 마적 문화권에 속하는 세계에서 선교하며 종교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발전한 시대. 이 시대는 313년 밀라노 칙 령으로 다시 양분된다. 이를 전후하여 교회사의 무대가 이교적 및 그리스도교적 로마 제국으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약 700~1517년) : 게르만 민족들 가운데서 활동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서구적 민 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시대로서 다시 3기로 구분된다. ① 초기(약 700~1073, 즉 그레고리 오 7세의 즉위까지) : 게르만족의 개종. 교회가 국가 교회 로서 국가로부터 후견을 받은 시대. ② 중기(1073~1294, 즉 보니파시오 8세의 즉위까지) : 교회가 국가 후견에서 벗 어나 교황권이 전성한 시대. ③ 말기(1294~1517) : 교황 권이 쇠퇴하고 그리스도교적, 서구적 세계의 일치가 붕 괴되는 시기. 근세(1517년~현재) : 교회가 반교회적이고 반종교 적인 세속 문화와 대결하는 시대. 프랑스 혁명, 세계 대 전, 현대 등으로 다시 세분될 수 있다. 〔교회사의 현실성〕 이 문제는 특히 교회의 현재와 교 회사와의 관계, 교회사가와 교회사와의 관계 두가지 면 에서 나타난다. 역사가 과거로부터의 현재의 이해라면 교회사는 교회 과거로부터 현재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 다. 그리스도교의 과거를 완전히 파악하지 않는 한 교회 의 현재는 이해될 수 없다(J.A. Möhler) 교의신학이 교회 의 초월적이고 불변의 본질을 제시한다면 교회사는 교회 의 역사와 변화를 제시한다. 즉 전자는 교회를 그 본질에 서 파악하고 후자는 교회를 그 역사적 모습에서 파악한 다. 예를 들면 교회사는 제도의 원래 뜻을 밝힘으로써 제 도의 개혁을 가능케 하고, 종교 교육을 위한 생생한 교재 를 교회사에서 얻어내게 하며, 인간의 죄와 배신을 통해 교훈을 주고 이상적인 교회와 현실적인 교회의 차이를 인식시키며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게 한다. 그것 은 동시에 교회에 대한 효과적인 변명도 된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구원사적, 호교사적 측면만이 아니라 반드시 그 전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사가는 역사에 대하 여 참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교 정신, 즉 신앙을 가져야 한다. 교회사가는 신앙이 있을 때 성령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서 교회사의 방관자가 아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 고 의미 부여의 필요성을 의식하게 된다. 교회사가와 교 회사와의 관계는 그의 교회에 대한 관계와 마찬가지이 다. 그러나 그의 신앙 때문에 진리를 연구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는 자유까지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 사가의 초자연적 평가 척도는 상대주의적 역사주의 같은 것을 배제하라는 의미이지 진정한 역사까지 배제하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사가는 진리를 사랑하되 그 앞에서 냉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사가는 역 사 진리의 인식을 위한 사랑과 그것에 대한 냉정한 비판 을 항상 병행시켜야 한다. 요컨대 객관성을 지닌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것, 이것이 역사가의 최고의 의무이다. ※ 참고문헌 H. Jedin, Kirchengeschichte, 《LThk》 6/ H. Jedin, 《NCE》 7.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