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 直觀 〔라〕Intuitio 〔영〕Intu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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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 추론 등을 개재시키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인식하는 일. 〔의 미〕 '직관' 이란 문자 그대로 직접 보는 것이고 직접 아는 것이다. 즉 사물 · 사태 · 개념 · 명제 · 가치 등을직접 파악하는 것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직관이란인식되는 대상의 어떤 특정한 요소, 부분 성질, 작용 등이 아니라 그 대상 자체를 그 전체에 있어서 직접, 즉 다른 어떤 것에 의한 매개(媒介)를 통하지 않은 채 파악하는 것이다. 인식되는 대상 쪽에서 보면, 어떤 매개도 없이 인식하는 정신 주관에 직접적이며 총체적으로 나타나고, 드러나서 주어지는 방식이 직관이다. 서양 철학에서'직관' 이란 의미의 '인투이시오' (intuitio)는 '바라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인투에오르' (intueor)에서 유래된 것으로, 시각(視覺) 작용의 단순성 · 직접성 및 포괄성 · 총체성을 반영한다. 이 점에서 직관은 일반적으로 추론적,연역적, 기호적 인식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직관은 대상이나 주제 그리고 질적 내용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크게는 신체적 감각, 이성적 인식 그리고 신비스런 체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을 감각적 직관, 예지적 직관, 영적 직관이라고 부를 수있다. 현대 철학에서 직관이 문제될 때, 보통 직관의 기능적 특질에 따라 직관을 유형화하고 그 인식적 함의(含意)를 모색한다. 직관이란 직접적인 사태 파악이지만,여기에도 그 파악의 특질에 따라 몇 가지 구분이 생긴다. 직접적 파악의 특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직접성에 대응하는 간접성, 즉 매개 작용의 여러 가지유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즉 직관에 어떤 유형의매개가 없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직관의 직접성 내용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직관이 결여되어 있는 매개에는 추론을 통한 매개, 원인에 의한 매개, 정의(定義)된 용어에의한 매개, 정당화에 의한 매개, 기호에 의한 매개, 사유에 의한 매개 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매개들이 없는인식이 직관인 셈이다. 즉 추론 과정 없는 앎, 원인 없이생겨난 앎, 정의된 용어로 기술할 수 없는 앎, 정당화될수 없는 앎, 기호(체계)를 통해 분석되거나 기술될 수 없는 앎, 사유 작용 없이 얻게 된 앎 등이 직관에 속하는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관은 다음 네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있다. 첫째는 '추론을 통하지 않고 정당화되지 않은 참된 믿음' 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육감' (六感)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 의미의 직관은 철학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둘째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에대한 직접적인 앎' 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시키는 어떤추론 과정 없이 정당화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접적' 이란 말의 뜻은 '추론적인 사유에 따른 것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다.셋째는 '어떤 개념에 대한 직접적인 앎' 이다. 이는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는데도 그 개념을 아는 것이므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는 어떤 대상에 대해 명제로 풀이할 수 없는 앎, 즉 '비명제적(非命的) 인식' 을 가리킨다. 이 앎은 그 명제가 참임을 아는 앎과 동일한 것은아니지만, 명제가 참인지를 알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비명제적 지식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감각 적 지각 과 '보편자 또는 시공간에 대한 앎 그리고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런 앎' 이다. 감각적 지각이란 판단하는 능력과 구별되는 인지 작용이고, 보편자 또는 시공간에 대한 직관은 어떤 것이 선천적으로 참임을 직관적으로 아는 데 요구되는 필수적 조건이기도 하다. 이 둘에비해 신비적 직관은 어떤 대상에 대한 명제가 참인지 어먼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실재에대한 선험적 자아의 직관이나 신(神)에 대한 직관 같은것이다. 〔비추론적 인식으로서의 직관〕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직관 : 직관적인 앎을 '강한 의미' 의 것과 '약한 의미'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약한 의미의 직관' 은 다른 어떤 명제로부터 추론해 낸 것이 아닌 명제를 직접적으로알되, 그 명제가 참이고 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할 때갖게 되는 직관이다. 우리는 눈이 둘이라든지 다리가 둘인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런 의미에서 약한 의미의 직관이란 '비추론적(非推論的) 직관' 과 거의 동의어다. 그러나 '강한 의미에서의 직관' 은 이러한 비추론적 직관 중에서 그 직관적 앎의 내용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에한해 이름 붙일 수 있다. "사람의 다리가 둘이다" 라는 직관적 앎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를 관찰에 의거해반박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은 원인을 갖는다"와 같은 직관적 앎에 대해서는,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가운데 그저 그 앎의 내용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강한 의미에서의 직관에는 "모든사건은 원인을 갖는다"와 같은 선험적 진리에 대한 직관외에 "나는 아프다"와 같은 1인칭 진술에 대한 것도 있다. 그러나 강한 의미의 직관이 성립한다 해도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점은 부언해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본래적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제란 없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의심은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의심의 가능성을 배제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명제가 강한 의미의 직관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의문이 제기되는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영역에서 그런 과정이 전개될 수 있는지를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볼 때, '비추론적' 이란 말은 약한 의미의 직관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고, '직관적' 이라는 말은 강한 의미의 직관을 가리키는 폭넓은 의미로쓰이는 말이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 이후 지식의 원형을 추론적인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비추론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은 늘 더 엄격한 설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추론적 지식이란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왜 참인지도 아는 지식이다. 즉 그 명제가 타당하게 추론되어 나온 다른 어떤 명제들을 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명제가 참이라고 믿는, 그런 지식이다. 그래서 비추론적지식을 종종 이 원형에 맞추어 무의식적으로 암암리에추론된 지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직관의 가능 근거 : ① 능력설 : 직관은 그 앎의 대상 을 두고 볼 때, 서로 아주 다른 성격을 갖는 두 가지로구분된다. "이것은 붉다"와 같이 개체에 대한 '감각적 직관' 과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와 같은 일반적 사실에 대한 '비감각적 직관' 이 그것이다. 지극히 단순하고아주 친숙하며 설명할 길 없는 이 두 종류의 직관을 볼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정신 가운데 이런 앎을산출하는 능력을 아주 원초적인 근원 사실로 인정하지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가 '인식' (認識, Cognitio)이라는 정신 작용은 그어떤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야기될 수 없는 것이며 거기서 확인되는 유일한 관계란 추론 관계일 뿐이라고 말하였을 때, 이는 원인을 갖지 않으며 더이상 설명될 수없는 지적 직관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는 감각적 지각을 심적 작용으로 보지 않고 신체적 작용으로 봄으로써 감각적 지각을 인식의 필수적인 요소로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칸트(I. Kant, 1724~1804)가 말하였듯이 감각적 지각과 지적 직관을 인간 정신의 원초적 능력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인식의 두 가지 원천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② 언어학적 설명 : 이러한 중도적 견해는 인간의 직관 능력으로 오직 감각적 직관만을 인정한 흄(D. Hume,1711~1776)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흄도 데카르트처럼어떤 물리적 사건이 왜 어떤 심적 사건에 뒤따라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없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비감각적인직관적 지식이 어떻게 얻어지는지는 설명할 수 있다고보았다. 그래서 이른바 제1 원리들을 직관적으로 아는특별한 능력을 반드시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직관적인 앎은 분석적 진리에 대한 지식이며,그것을 습득하는 과정은 언어적 관습을 학습하는 과정과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는 설명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를테면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라는것을 안다는 것은 실은 '원인' 과 '사건' 이라는 말의 뜻을 안다는 것이고, 이 앎은 심리적 조건화 과정 속에서얻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합리주의자들은, 우선 보편자에 대한 직관적 친숙지(親熟知)를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도입하지 않고는 '원인' 의 의미를 배워 알게 되는 과정이 설명될 수 없으며, 또한 이 언어학적 설명 이론은 지식의습득 자체와 그 지식을 표현하는 능력의 습득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원인 없는 사건을 말하는 것은 언어적 관습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언어적 관습을직관의 근거로 제시한다 해도, '이를 채택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와 '이를 아는 것은 언어적 앎이 아닌 선언어적(先言語的) 앎이 아닌가?' 그리고'언어적 관습도 이런 선언어적 앎을 기초로 해서 채택하는 것이 아닌가?' 등의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된다. 이러한 물음들은 비감각적인 직관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는언어학적 설명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감각적 지각이 분석할 수 없는 특별한 정신 작용이라고 보는 데카르트적 견해에 따르더라도 이는 의심하기어렵다. 이렇듯 합리주의자들에게는 감각적 지각이 인식 된 사실을 언표할 능력을 갖기 전에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확실한 예증이었다. ③ 행동주의적 설명 : 명제 p를 언어로 표현할 능력을갖기에 앞서 p를 안다고 함이 합당하다는 가정을 시인한다면, 이러한 합리주의적인 반론은 새로운 난점에 부딪친다. 예를 들어 어떤 유아가 감각적 직관 능력에 힘입어어떤 물리적 대상 0가 감각적 성질 Q를 가지고 있음을안다면, 나아가 이를 언표할 능력을 갖기 전에 그러함을안다면, 그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사실은 왜 모르는 것인가? 그리고 선언어적인 직관지(直觀知)에 기초하여 '원인' 이니 '사건' 이니 하는 말에 관한 관습의합당성 여부는 왜 판정할 수 없는 것일까? 라일(G. Ryle, 1900~1976)이나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 등은 "S는 p를 안다" 는 명제를 S의 단순한 심적 상태를 가리키는 진술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S가 적절한 기회에 (p를 믿는 이유를 제시할 준비가 되어있든지 혹은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더라도 p를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든지 간에) p를 주장하도록 경도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진술로 본다.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에게는 S의 p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특수하고 사밀(私密)한 내성(內省) 가능한 심적 상태뿐이다. 즉 S는,그가 p를 알며 또 그가 이 p를 안다는 믿음에 대해 다른누구보다도 더 나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행동주의적 대안에 따르면,이와 반대로 공적 척도의 충족이 앎이라는 내밀한 심적상태의 외적 요건만이 아니며, 그러한 척도에 대한 진술은 '안다' 는 것의 의미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 앞에 집이 한 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집' 의 의미를 알고, 정상적인 시력을 갖고 눈을 뜨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고 있는지는 공적 과정 속에서 결정된다. 직관지의 경우엔, S가 p를 믿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행동주의적 요건은 그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행동주의적 분석은 직관 능력을 전제하지 않고도 우리가 직관적인 앎을 가질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감각적 직관의 경우, 직관적인 앎은 그 감각 내용을 기술하는 언어를 아는 사람에게서 어떤 감각적 지각이 이루어지면 얻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감각적 직관의경우, 직관적인 앎은 우리 자신의 언어적 행동을 반성할때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결정적 요건은언어에 대한 이해이며, 이에 도달하는 것은 자극-반응모델로 설명되는 심리적 조건화 과정이다. 〔개념에 대한 친숙지로서의 직관〕 합리주의적 설명 :분명 많은 명제들을 잘 이해하면서도 그 명제 속에 사용되는 용어의 의미, 즉 그 개념을 잘 설명할 수 없을 때그 개념에 대한 '직관적 친숙지' 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것이 보통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S가 F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사용하면서도 그 F에 대해 어떤 비순환적 정의도할 수 없을 때, 'S는 F다움' 에 대해 직관적 앎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한 이해에도 논쟁점이 있다. 데카르트적 전통에 있는 사람이면 '단순한 작용' 이론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추상 작용의 능력을지니고 있어서, 이를 통해 대상들의 속성들로부터 하나의 속성을 추상해 내서 그것을 하나의 용어에 고착시켜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추상 작용은 직관 작용처럼 단순하고 분석 불가능한 특수한 정신적 활동이다. 경험주의적 설명 : 그런데 과연 이런 능력을 존재, 원인, 필연성, 가치 등의 비감각적 개념에 대한 앎을 설명하는 데서도 전제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경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보기엔 그런 개념어들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우리가암암리에 무의식적으로 그들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결과요, 그렇지 않다면 그 용어들은 어떤 개념도 지시하지 않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언어학적 설명 : 그에 반해 합리주의자들은 어떤 용어는 선험적 개념을 가리키며, 이런 개념에 대해 정의를 하려는 것이 오히려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감각적 직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적 직관에 대해서도 언어학적 이론은 새로운 설명을 시도한다. 이 새로운 견해에 따르면, 친숙지의 어떤 대상도 언어 학습자가 일반자를 가리키는 용어의 상관자로서 무엇을 가정해야 하는것은 없다. 이를테면 '희다' 라는 말을 배울 때 이 말에상관자가 되는 어떤 것을 가정해야 할 필요는 없고, 다만시행착오를 거쳐 적절한 상황, 적절한 맥락에서 이 말을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조건화 과정에 들어가기만하면 된다. 이 과정은 어떤 일반 명제에 대한 선지식을요구할 필요가 없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구분하는 '선험적 개념' 의 존재에 대한 논란에서벗어날 수 있다. '희다' 라는 말을 배우는 과정이나 '원인' 이라는 말을 배우는 과정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면,'인과성' (因果性) 같은 비감각적 개념을 가정하고 또 그에 대한 내적 파악 가능성을 전제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인과성' 이라는 개념을 얻는 것은 곧 '원인' 이라는 말을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인' 이라는 말의 사용법을 배우는 데는 이 말에상응하는 어떤 개념적 상관자를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지않다. 〔비명제적 인식으로서의 직관〕 대상에 대한 직접지와대상의 사실에 대한 간접지,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한 무매개적 감각지와 이의 진리성에 대한 매개적 판단 사이의구별은 칸트가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구별은 러셀(B.A.W.Russell, 1872~1970)이 제시한 '친숙지' (Knowledge byAcquaintance)와 '기술지' (記述知, Knowledge by Descrip-tion)의 구별로 이어진다. 러셀은 보편자 및 보편자들 간의 관계에 대해 친숙지를 갖게 해 주는 능력을 상정함으로써 선험적 인식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이 전통적 입장에는 보편자의 실재와 선험적 진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런데 칸트의 직접지에 대한 주장이나 러셀의 친숙지에 대한 주장은 직접적 무매개적이면서도 동시에 이들과는 달리 표현 불가능한 어떤 특정 종류의 인식을 상정하게 하였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직관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것에 대해 어떤 명제를 구성하여 그 진리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는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 대상에 대해 명제적 인식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언어를 통한 개념적 사유가 그 대상의 진수를포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이 세계의 실재로 제시하는 생명적 지속(持續, durée)은 그 자체가 '흐름' 이기 때문에멈추고 고정되어 부분들로 분석될 수 없는 것인데, 개념적 사고란 본성적으로 고정, 분석, 재종합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이를 파악할 수가 없다. 또 후설(E.Husserl, 1859~1938)이 주장하는 것처럼, 순수한 의식에주어지는 사물의 본질은 선술어적(先述語的) 구조를 지니고 있어 명제적 구조화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개념적사유로 접근하기 어렵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실체와 속성의 완전한 동일성으로 이루어지는 신의 완전한 단순성은 거기에 술어를 적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어떤 참된 명제도 얻을 수가 없다. 물론 언어에 앞서는 지식은 없다고 보는 사람이나 지식을 행동주의적으로 풀이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비명제적 지식의 성립에 대해 반대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이러한 지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지각된 대상에대한 믿음을 얻게 된 원인과 이 믿음의 정당한 근거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현대 인식론은 대체로 이 비명제적 직관적 앎에 대해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직관적 앎에 대해 데카르트가 제시한 '단순한 작용' 이론과 직관적인 명제적 지식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칸트가 제시한 비명제적 지식 이론을 동시에 취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행동주의적 접근을 위해 이 두 입장을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주체 S가 어떤 대상 0에 대해 비명제적 지식을가질 수 있으려면 그 대상에 관한 명제의 진리성에 대한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지식을 가질 수 있는 선천적인 이성적 사유 능력을 인정하는 데카르트나 칸트의 입장에 충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베르그송 등이 제시하는 비명제적 앎으로서의 직관에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이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앎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러나 데카르트 등에 반대하는 반이성주의자들은명제적으로 표현 불가능한 것을 직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테면 ''갑' 이 한 말은 아무리 많아도'을' 이 '갑' 의 감각을 재생해 내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본다. 이성주의자들은 자연히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친숙지마저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소통 불가능하고 표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감각이 앎의 일종이라고 할 때,우리가 경험의 재생산에 실패한다는 것은 그 경험의 대상에 대한 앎의 전달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이들은 "경험은 재생될 때에만 표현될 수 있다" 라는 새로운 철학적인 의미의 '표현' 이란 말을 채택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미로 말하면, 일상적인 명제들은베르그송에게서 그렇듯이 실재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한, 그 자체로 불만족스러운 대리인들일 뿐이다. 언어가 실재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표현하기에는 부적 합하다는 주장은 자칫 일반적인 주장의 정당화에 혼란을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 철학적 · 미적 ·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사적(私的)인 정당화만을내세울 수 있게 된다. "나는 내 경험을 표현하지 못하고내 믿음의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오직 내 경험의힘에 의거하여 이 믿음을 갖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말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이 그럴듯한 것은 물리적 대상에 대한 비추론적인 믿음에서처럼 사적 경험을 통해믿음을 정당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의미에서는"나는 미확인 비행 물체를 보았다"라는 것이 경험에 대한 완전하고 적합한 표현이겠지만, 그러나 앞서의 새로운 철학적 의미에서는 경험의 대상에 대한 진술이 경험의 본성에 대한 진술을 함의하지 않는다. 경험의 본성은그 가설에 있어 표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추론적 지식의 정당화의 본성에 대한 행동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철학적 의미의 '표현 불가능성' 이란말에 포함되어 있는 모호성에 대한 비판에 사적 정당화의요구에 대한 비판이 주어진다. 만일 이 정당화가 어떤 믿음의 본래적인 내성(內省) 가능한 속성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의 문제로 검토된다면, 우리는 우리의비추론적 믿음 중 어느 것이 정당화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미확인 비행 물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그것을 본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표현 불가능한 직관에 있어서는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의 경험을 공유한다해도 우리와 믿음까지 공유할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형이상학적 통찰로서의 직관〕 비명제적 지식으로서의 직관 가운데 실제에 있어 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통찰로서의 직관이다. 합리적인 논리적 사유를통해 정제된 지식을 명제적 구조 속에 담아내어 표현하는 것이 학적 지식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관이라 할 수 있다. 보편 타당성을 갖는 지식의추구라는 학적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형이상학적 통찰에 대해서는 이런 전통을 벗어나는 주장 또한 강하다. 앞에서 언급된 베르그송과 후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내용이 명료하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세계의 실재는 본래 '지속' 인데 인간의 지성(intellect)은 행동에 있어서 유용성을 추구한다는 본래의 과제에 충실하기 위해그 실재를 '공간' 속에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공간화'시킨다. 공간화된 대상은 지성의 본성인 논리적 사유에적합한 것이 되어, 논리적 분석과 종합의 과정 속에서 행동에 적합한 내용으로 재구성된다. 물론 여기에는 행동주체의 관점이 개입하고, 따라서 실재 자체보다는 고정되어 분석된 항들의 관계가 관점에 따라 설정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러한 사고가 바로 과학적 사고요, 여기서 얻어지는 과학적 지식은 대상 세계를 공략하는 인간의 행동에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사물 자체의 참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물 자체의 참모습은 지성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활동에 드러나는데,그것이 바로 '직관' 이다. 지성이 사물의 주변을 댐돌며그것의 활용에 관심을 갖는다면, 직관은 사물의 내면에 진입하며 그 참 모습을 통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직관 내용은 명제적 구조에 담긴다 하더라도 그 언어적 표현은 불가피하게 비유적인 것이 되기 쉽다. 유용성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세계의 실재를 파악하려는 형이상학은 이 직관의 방법을 통해서만 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후설에게 있어서도 사물의 본질은 직관에 주어지는데,이때 직관은 '자연적 태도' (natiirliche Einstellung)를 지양한 순수한 선험적 자아의 의식 작용이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주관적 자아는 삶의 연관 관계 안에서 특정한이해 관계 속에 놓이고 그래서 일정한 관점과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자연적 태도를 '괄호 치고 (Einklam-merung) 모든 추론적 판단을 '중지' (epoche)할 때, 우리는 순수한 선험적 주관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선험적 주관만이 비로소 감각적 지각의 표피나 논리적 사유의 형식을 벗어나 사태 자체(Sache selbst)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철학적 인식의 목표인 본질 직관이다. 정신은 이를 위해 이른바 '현상학적 환원' (phaino-menologische Reduktion)을 수행해야 한다. 〔종교적 직관〕 종교적 직관도 크게는 형이상학적 통찰과 성격상 유사한 점이 많다. 종교적 직관은 일반적으로'정신적' 직관으로 이해되는데, 보통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이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신적 명령에 대한 이해이고, 둘째는 감각적이고 이지적이며 초감각적인 여러 방식으로 초월적 존재를 신비스럽게 지각하는, 종교적 영적 체험 가운데서의 신적 존재의 지각이다. 셋째는 성서의 문자적 표현이나 비유에 숨어 있는 의미에 대한 계시적 이해이고, 넷째는 신앙인들 사이의 의사 소통과 신앙공동체 생활의 수단이다. 한편 모든 신비주의나 그노시스주의는 종교적 신비의이해와 관련하여 인지적으로는 직관에 의존한다. 그래서신비적 명상의 최고 경지는 일련의 지속적인 직관 작용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를테면 선불교는 추론적 지성을 경계하고 불성(佛性)의 직접적인 파악을 강조한다.선(禪)은 돈오(頓悟)든 점수(漸修)든 주객을 초월하는것에 대한 통찰을 궁극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명제적 인식을 뛰어 넘는다. 유대교 신비주의에서도 쿠아발라(Quabbalah)의 신비스러운 내용은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최고의 직관적인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인능력은 이를 지각하기 어렵고, 오직 신적 영감에 근접하는 직관만이 추론으로는 불가능한 오묘한 신의 인식을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도 《코란》에서 신과 인간을 결합하는 인지 능력으로서 직관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종교적 인식은 지성에는 적대적이지 않지만 합리적 사유를뛰어넘는 '참여적' 인식이다. 그래서 추론에 속하는 간접적인 인식과는 다른 '제3의 눈 에 의한 직접적 직관이강조된다. '마음' 이 곧 지성과 영혼이 활동하는 장소라고 보는 이슬람 신학에서는 바로 이 '마음' 에 대한 직관이 완전한 우주적 인간에 대한 창조적 상상과 직결된다.이러한 인식만이 신 앞에서 의미가 있으며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다. ※ 참고문헌  R. Rorty, 《EP》 4, pp. 846~852/ F. Kaulbach, 《HWP》 1 , p .339/ F. de Buzon, Les Notions Philosophiques, PU de France,1990, p. 1368/ I. Marcoulesco, 《EP》 7, pp. 269~270. 〔孫東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