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 본당 鎮南浦 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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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당 모습(왼쪽)과 1933년에 한 · 양 절충식으로 신축된 진남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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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당 모습(왼쪽)과 1933년에 한 · 양 절충식으로 신축된 진남포 성당.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 소재. 1900년에 창설되었으나, 1950년 폐쇄되었다.주보는 성 안나. 관할 공소는 진남포시와 용강군(龍岡郡) 일원의 유사리(柳沙里) · 한현리(漢峴里) · 광양만(廣梁灣) · 계명리(桂明里) · 갈촌 전 지역. 〔교세〕 1926년 500명, 1934년 1,300명, 1948년 3,000명. 〔역대신부〕 초대 포리(Faurie, 方) 요한(1900~1906), 2대 르레드(Lereide, 申) 율리오(1906~1914), 3대 신성우(申聖雨)마르코(1920. 10~1921.5), 4대 뤼카(Lucas, 陸嘉恩) 프란치스코(1921.5~1926.3), 5대 더피(Duffy, 都) 파트리치오(1926. 4~1928. 10), 6대 스위니(Sweeney, 徐) 레오(1928.10~1935. 12), 7대 부드(Booth, 夫文化) 굴리엘모(1936.1~9), 8대 스위니(1936. 9~1941. 12), 9대 양기섭(梁基涉)베드로(1942. 2~1945. 9), 10대 한윤승(韓允勝) 필립보(1945. 10~1948. 9), 11대 조문국(趙文國) 바오로(1948.10~1950.6). 진남포 지방은 1897년 진남포가 개항되면서 황해도신천(信川) 본당 주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에 의해 전교되어 공소가 개설되었다가 1900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신부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포리 신부가 부임하여 1906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을 마련하는한편 돈의학교(敦義學校, 1916년 폐교)를 개설하였다. 이어 2대 주임 르레드 신부는 1908년 가을에 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 1916년 폐교)를 개설하였다. 또한 문맹 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1914년 마리아유치원을 설립하여 기초 교육 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교육 사업을 위하여 1909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르레드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된 뒤 6년 동안 신부가 파견되지 못하였던 진남포 본당에 1920년 신성우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가톨릭 청년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침체 상태에놓여 있던 본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4대 주임 뤼카 신 부는 1921년 한국의 전통적 미풍 양속을 내세워 마리아유치원 여자부를 분리하여 해성학원(海星學園)으로 개칭하고, 남자부의 운영은 신자 유지들에게 일임하였다.1917년에는 상장계(喪葬契)를 조직하여 신자들의 상호친목을 촉진시키며 자선 사업에 모범을 보였고, 같은 해성 안나 부인회를 발족시켜 전교 활동 및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메리놀회가 1923년부터 평안도 전역의 사목을 관할하게 되자 메리놀회 선교사들이주임 신부로 부임해 오기 시작하여, 더피 신부가 1926년 5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더피 신부는 평신도 가운데 실력 있고 신앙이 깊은 신자들을 선발하여 전교사로양성하였다. 또한 마리아유치원과 해성학원의 시설을 보강하고 소년 단체와 성가대를 발족시키며 교리 연구반도신설하는 등 다양한 교회 활동으로 신자들의 활기를 돋구었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고 스위니 신부가 이듬해 6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면서 진남포 본당은 도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위니 신부는 1930년 해성학교의교장으로 취임하며 100여 평의 교사(校舍)를 새로 신축하고 4년제 사립 학교 인가를 얻어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해성학교는 도중에 당국의 명령에 의해 폐쇄가 되는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1934년 8월 다시 개교하였다. 당시 보좌 신부였던 포스피샬(Popspichal, 裵) 신부도1931년 본당과 공소에 야학을 개설하고 아동 교육을 전담하여 문맹 퇴치와 인재 발굴에 힘썼다. 아울러 스위니신부는 1932년 시약소(施藥所)를, 1933년에는 양로원을 개설 · 운영하였다. 또한 교세가 급속한 증가를 보이자 8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성전을 신축하였다. 이후 진남포 본당은 다양한 전교 방식으로 전국에서가장 높은 교세 신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평양교구 내의 메리놀 회원들이 일제에 체포 · 구금되어 교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9대 주임으로 양기섭 신부가 1942년 2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본당 운영의 소화(小花)병원을 개설하는 등 1945년까지 전력을 다해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한윤승 신부가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뒤 소화병원은 폐원되고, 그동안 교회와 병원에서 봉사하던 샬트르 성 바 오로회 수녀들도 서울 본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북한 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점차 가중되어월남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교회 운영도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1대 주임 조문국 신부가 1948년 10월 부임하여 냉담자들에 대한 사목 활동을 중점적으로펼쳐 나갔다. 공산 정권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조 신부가한국 전쟁 하루전인 1950년 6월 24일 공산 정권에 의해체포되고 본당은 폐쇄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신자들의 노력으로 1년 남짓 본당을 지킬 수 있었다. 1950년 10월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며 평안도 지역 대부분이 탈환되자,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캐롤(Caroll, 安) 신부를중심으로 평양교구는 재출발하였다. 이때 진남포 본당도페티프렌(Petipren, 邊)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 복구 작업과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며 정상화 작업을 꾀하였으나,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평안도 지방이 다시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 침묵의 교회 ; 돈의학교 ; 빌렘) ※ 참고문헌  《경향잡지》 9호(1934. 9) ; 3호(1935. 3) ; 4호( 1935. 4)32호(1936. 1)/ 天主教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天主教平壤教區史》,1981. 〔金善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