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眞理 〔히〕תֻּמִּים 〔그〕ἀλἡθεια 〔라〕Veritas 〔영〕Truth

글자 크기
10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 주고, 자신의 말로써참된 것을 드러내며, 이중성과 위장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것으로 인간이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 행실과 말이 올바르다는 의미로 '진실' 이라고도 한다. 우리 말에서 '진리' 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타당성' (妥當性)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사물의 성질이나 자연 법칙에 관한 정확한 지식' 을 뜻하기도한다. 철학이 추구하는 주요 대상은 존재론적 진리와 인식론적 진리이다. 전자는 무엇이 참된 존재인지 또는 존재의 본래적 모습이 어떠한지를 다루는 것이고, 후자는어떤 인식이나 명제가 그것이 지시하는 실재(reality)와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다. 수학,논리학, 고고학 등은 각각 그 학문의 특성과 관련된 진리를 추구한다. 그런데 종교는 만물의 근원인 궁극적 실재와 삶의 궁극적 목적과 관련된 최고의 진리를 제시한다. I. 성서에서의 진리 성서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증언하려고 하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성서에서는 진리라는 용어가 대부분 서술적 용법이나 수식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을 뿐, 어떤 명제의 주제어로 사용된 예는 거의 없다. 또한 성서에서 진리라는 낱말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히브리어 개념과 그리스어 개념이 많이다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 용어 : 히브리어에는 그리스어의진리라는 낱말에 맞게 대응하는 낱말은 없다. 진리라는의미의 히브리어 '에메트' (תֻּמִּים)는 사물을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에는 '확고함' , 인격적 존재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에는 '성실함 · 충실함 · 신실함' 또는 '신뢰성' 을 뜻한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 126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한글로 번역되면서 '진실' 과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에메트' 의 의미는 이러한 기본적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된다. 예를 들면, '에메트' 가 '평화' 와 같이 사용되는 경우에 '안전 · 안정' 을 뜻한다(2열왕 20, 19: 이사 39, 8 : 예레 33, 6). 또한 어떤 사물과 연결되어 그사물의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적 역할을 한다. 즉 '확실한 표' (여호 2, 12)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목적지로 인도하는 '맞는(옳은) 길' (창세 24, 48)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은 "무엇이 진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접근 방법을 근본적으로 달리한다. 그리스인들은 안전한 삶을 구축하기 위해 사물의 존재 확실성 또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반면히브리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확고한 토대로 삼았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관계를 근거로 모든 삶의 문제를 결정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과 그 안에있는 만물은 인간의 삶을 보장해 주는 복된 터전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그들이 극심한 역경에 처해 있는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하느님은 그들의 선조와 맺으신 계약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분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심이었다. 의미 :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내용은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하느님의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에메트' 라는 낱말이사용된 전체 횟수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약 53회가 이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든 용례에서 '에메트' 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에메트' 를 사용한 표현 방법을유형별로 분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당신의(하느님의) 에메트"(시편 26, 3 : 30, 10: 43, 3 : 57, 11 ; 71, 22 : 86, 11 : 91, 4 ; 108, 5 ; 이사38, 18. 19 ; 다니 9, 13)라는 표현으로, 이 경우 흔히 '사랑' 이나 '자애' 라는 의미의 '헤셋' (חֵסֵד)과 짝을 이루어사용되었다. 즉 "하느님의 진리와 자애" 로 표현된다(창세24, 27 ; 시편 40, 11. 12 ; 57, 4 : 115, 1 : 117, 2 : 138,2). 둘째는 "자애와 진실이 많은 하느님"(출애 34, 6 ; 시편 89, 15)이라 표현된다. 셋째는 '에메트' 가 하느님을수식하는 용법으로 사용된 경우(시편 31, 6 ; 예레 10, 10)가 있다. 넷째는 하느님이 '에메트' 를 베푸는 분임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창세 32, 10 : 2사무 2. 6 : 15, 20 : 느헤 9, 33 ; 시편 69, 14 : 89, 14 : 예레 33, 6 : 미가 7. 20).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말씀"(2사무 7, 28 : 1열왕 17, 24 ;시편 119, 160), "하느님의 법규" (시편 19, 10 : 119, 142.160), "하느님이 하는 일"시편 111, 7)이 '에메트' 이다. 칠십 인역 성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유형의 '에메트'를 모두 '알레테이아' (ἀλἡθεια)로 번역하였고, 이에 따라 라틴어역 성서도 '베리타스' (veritas)로 번역하였다.그러나 위의 다섯 가지 용법 중에서 첫째부터 네번째 용법까지는 '성실' (faithfulness)로 번역해야 한다. 다섯번째는 믿음직하다는 의미로서의 '신뢰성 · 확실성' (relia-bility, trustworthiness)을 뜻한다. 이 경우는 '진실' (truthful-ness)로 번역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느님의 성실' 은'하느님의 성실함' , 곧 '하느님의 성실한 행위' 를 가리킨다. 이 경우 '성실' 은 하느님 본성의 존재론적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세운 구원 계약에충실하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인 성실한태도와 행위를 지칭한다. 이것은 '헤셋' 과 '에메트' 가 짝을 이루어 흔히 사용되는 사실에서 잘 입증된다. '헤셋'은 하느님 속성 중 하나인 '사랑' 이라는 추상 명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사랑의 행위와 태도를 지칭하는 행위 명사(nomen actionis)이다. 또 '에메트' 는 '하느님의 성실' 에 대한 응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취해야 할 행위나 태도를 뜻하기도하였다(여호 24, 14 ; 1사무 12, 24 ; 1열왕 2, 4 ; 3, 6 ; 2열왕 20, 3 : 시편 51, 6 ; 이사 10, 20 ; 16, 5 : 38, 3 ; 48, 1 ;59, 14. 15 ; 예레 23, 28 ; 에제 18, 9 ; 호세 4, 1 ; 즈가 8,19). 이 경우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태도를 가리키면 '성실' , '성심 · 진심' (sincerity), '진실' 을 뜻하며,이웃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가리키면 주로 '성실' , 진 실' 을 뜻한다. 특히 '말하다' 의 목적어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참말' 이라는 의미의 '진실' 을 뜻한다(시편 15, 2 :예레 9, 4 : 즈가 8, 16). 마지막으로 '에메트' 는 일상 용법에서 '거짓' 의 반대개념인 '진실' 또는 '사실' (reality) 또는 '올바름 · 정직'(uprightness)을 뜻하거나 '거짓말' 의 반대 개념인 '참말'을 뜻한다(창세 42, 16 ; 신명 13, 15 : 17, 4 1열왕 10, 6; 2역대 9, 5 ; 18, 15 : 잠언 8, 7 : 예레 9, 4). 이러한 의미의 '에메트' 는 명사에 이어져서 수식적 용법으로 사용되는 경우와 전치사와 결합하여 부사구로 사용되는 경우가있다. 사람을 수식하는 경우에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사람' 또는 '믿을 수 있는 사람' 을 뜻하며(출애 18, 21 ;느헤 7, 2), 증인 · 입술 · 말을 수식하는 경우에는 참말을하는 '진실한 증인 · 입술 · 말' 을 뜻하며(잠언 12, 19 ;14, 25 : 예레 42, 5), 재판을 수식하는 경우에는 사실에부합되는 '공정한 재판' 을 뜻한다(에제 18, 8 ; 즈가 7,9). 그리고 하느님을 수식하는 경우에는 '성실하신 ·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 을 뜻하기도 하고(시편 51, 6) 가짜가 아닌 참 하느님' 을 뜻하기도 한다(2역대 15, 3 ; 예레10, 10). 부사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발언의 참됨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참으로 · 정말로' 를 뜻하거나(판관 9,15 ; 예레 26, 5 ; 28, 9) 일을 수행하는 방법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로 '진심으로 · 성실하게' 를 뜻한다(판관 9, 16 ; 1사무 12, 24 ; 2열왕 20, 3 ; 이사 10, 20 ;16, 5 : 38, 3 ; 예레 32, 41). '에메트' 는 '진실' 이라는 의미 외에 '진리' 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 말에서는 '진리' 와 '진실' 은 유의어(類義語)이지만 동의어(同義語)는 아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 '에메트' 가명백하게 '진리' 를 뜻하는 경우는 비교적 후대의 문헌에나타난 몇몇 용법뿐이다(다니 10, 21 ; 잠언 22, 21 : 23,23: 전도 12, 10 ; 시편 69, 13) 〔70인역 성서〕 칠십인역 성서는 히브리어 성서에서사용된 '에메트' 의 80%와 '에무나' (נֶצַח, 진실)의 몇몇을 '알레테이아' 로 번역하였다. 그로 인해 그 히브리어 속에 담겨 있는 '성실 · 신뢰' 라는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는 본래적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사물이나 사태의 진상(眞相)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진리 개념이부각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서는 '성실 · 신의' 와'진리 진실' 이 동일한 낱말로 표현되었으나 칠십인역성서는 '성실 · 신의' 를 '피스티스' (πίστις)로, '진리 ·진실' 을 '알레테이아' 로 구분하여 번역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실 · 신의' 와 '진리 · 진실' 이 별개의 두 낱말로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스티스' 에 대응하는 원래의히브리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신뢰 · 신실' 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뜻하는 본래적 의미가 퇴색하였다. 그 대신 인지적 태도를 뜻하는 '믿음' 이라는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겼다(신명 32, 20 : 1사무 26, 23 ; 잠언 3, 3 : 12, 22). 칠십인역 성서의 사용된 '알레테이아' 의 대다수는 '진실' 을 뜻하지만 제2 경전 문서에서는 삶의 참된 도리 또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관한 지식이라는 의미의 '진리' 를 뜻한다(집회 4, 28 : 토비 12, 11 : 지혜 3, 9 : 6, 22). 〔쿰란 문서〕 쿰란 문서에는 진리에 대한 히브리어의전통과 그리스어의 진리 개념이 나란히 수용되어 있다.'성실 · 신실' (1QH6, 12 ; 11, 12. 29-31), '신뢰성' (1QH12, 12), '진실' (1QH 16, 17 : 17, 14 ; 1QSb III, 24 ; CD20, 29f.)은 히브리 전통에 속하며 "하느님 진리의 이해"(1QH 7, 26f.), "진리에 전향"(1QS 6, 15), "진리의 아들들”(1QS 4, 5), "진리의 길"(1QS 4, 17)은 그리스어의 진리개념을 나타낸다. 이러한 개념의 진리는 역사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참된 현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 속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 가르침을 지칭한다(1QS 1, 12. 15). 〔신약성서〕 용어와 용법 : 신약성서에서 '진리' 라는의미로 '알레테이아' (άλἡθεια)라는 명사가 109회 사용되었다. 바오로 서한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진리라는 낱말의용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다. 첫번째는 일상어에서 참말을 한다든가 사실임을보증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이러한 용법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공통될 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에공통된 현상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마태 22, 16 : 마르 5, 33 : 12, 32 : 루가 4, 25 ; 22, 59 ; 요한8, 45. 46 : 16, 17 : 사도 4, 27 : 10, 34 : 26, 25 : 로마 9,1 : 7, 14 : 11, 10 : 12, 6 : 에페 4, 25 : 필립 1, 18 : 골로1, 6 ; 1디모 2, 7ㄱ). 두 번째 경우는 윤리적 · 도덕적 가치로서의 '진실 · 성실 · 정직 · 올바름' 을 뜻하는 경우이고, 세 번째 경우는 진위(眞僞), 정오(正誤), 시비(是非)등의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서의 추상적인 원리로 사용된경우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서로 구분하는 것은 어렵기때문에 하나로 묶어도 된다. 그렇지만 굳이 구분하자면두 번째는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이고(1고린 5, 8 ; 13, 6 ; 에페 4, 24 : 5, 9 : 6, 14 ; 1디모 2,7L ; 1요한 3, 18 ; 2요한 1, 1 ; 3요한 1, 1), 세 번째는 판단과 행위의 지표가 되는 규범이다(요한 3, 21 ; 4, 23. 24; 8, 44 : 로마 1, 18 : 2, 2. 8. 20 : 디도 1, 1). 네 번째는특수하게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인데, 세 번째를 네번째 경우에 포함시켜도 상관없다. 가장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항목은 이 네 번째 경우이다. 바오로 서한 :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단 한번도 '진리' 라는 개념을 신학적 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진술하는 데 '진리' 라는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바오로이다. 로마서 3장7절에서 바오로는 구약성서에 증언된 '하느님의 성실하심' 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하느님의 진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성실하심' 은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지키는 행위를뜻한다. 이러한 의미를 바오로는 칠십인역의 용례를 빌려 '하느님의 진리' 라고 표현하였고, 3절에서는 그 의미를 역시 칠십인역의 용례를 빌려 '하느님의 신의' (τἡν πίστιν τοὔ θεοὔ)로 표현하였다. 로마서 15장 8절의 "하 느님의 진리"도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로마서 1장 25절의 "하느님의 진리"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실하심' 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에 관한 참된 명제' 를 뜻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하느님이 세우신 참된 규범 또는 참된 도리' 를 뜻한다. 이와 같은 경우가 여럿 있다(로마 1,18 ; 2, 2. 20). 그렇지만 이 경우 그 진리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진리' 라는 낱말의 용법에 바오로가 특별히 기여한 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칭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바울로는 "진리"라는 낱말을 사용하여(2고린4, 2 : 13, 8 : 갈라 5, 7 : 에페 4, 21 : 2데살 2, 10. 12. 13 :1디모 2, 4 : 3, 15 : 4, 3) 또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2고린 6, 7 ; 에페 1, 13 ; 골로 1, 5 ; 2디모 2,15) 복음을 지칭하였다. 바오로는 "복음의 진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하였다(갈라 2, 5. 14). 첫째 경우의 진리는 복음이 제공하는 구원의 구체적 현실을 뜻하고, 둘째경우는 복음의 참된 내용을 뜻한다. 사목 서한에 사용된'진리' 는 이단적 가르침의 반대 개념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참된 교리를 의미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1디모 6, 5 :2디모 2, 18 : 3, 8 : 4, 4 : 디도 1, 14). 요한 복음 :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 사건을 증언하는 데 '진리' 라는 낱말을 핵심적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는 복음서 머리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사셨는데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셨다" (요한 1, 14)라고 말한 다음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17절)고 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출애 34, 6 : 시편86, 15)는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구원 계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헤세드'' (사랑 또는 자애)와'에메트' (성실 또는 진실)를 풍성하게 행하시는 분이다(2사무 2, 6 ; 시편 25, 10 : 40, 11. 12 ; 57, 3 ; 61, 7 ; 69,13 ; 115, 1 ; 117, 2 ; 138, 2 등).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에게 해당하는 그 수식 어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푼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사건이 되어 모든 세상 사람에게 베풀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지만 이제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진리를 받아서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유대교의 구원 사건을 능가하는 새로운 구원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다는 뜻이다. 요한 복음의 '은총과 진리' 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 사용된 표현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복음사가가 자신의 독자들이 이 어구의 진리라는 낱말의 의미를 구약성서에 담긴 의미 그대로 이해하기를 바랐다거나,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이다. 헬레니즘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는 독자들은 진리라는 낱말을 당연히 그리스어의 진리 개념 그대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진리라는 낱말의 의미를 히브리어 '에메트' 에 담긴 원래의 의미대로 교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는 진리라는 낱말의 정확한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이미 알고 있는 진리라는 낱말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의 의미를진술하는 것이었다. 은총이라는 낱말은 머리말에서만 4회 사용되었을 따름이지만 '진리' 는 요한 복음 전체에서25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요한 복음 독자들에게 더 친숙한 '진리' 라는 낱말이 '은총과 진리' 라는 표현을 대표해서 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 는 절대 용법으로만 사용되었다.즉 진리라는 낱말에 어떤 소유격 명사 또는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되어 사용된 경우가 없다. 구약 성서에서 '하느님의 에메트 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성실함을 뜻한다.문법적으로 그 의미를 분석하면 '성실함' 은 '하느님' 을서술하는 술어이고 '하느님' 은 이 술어의 의미상 주어이다. 즉 이 표현은 하느님이 성실한 행위를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요한 복음에서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된'진리' 가 하느님에게 기원을 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진리' 를 지칭한다고 하더라도 이 표현은 의미상으로 '주어 + 술어' 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라는 소유격 명사는 '진리' 의 귀속 관계소유주(所有主) 또는 그 근원을 나타내는 작자(作者)를가리킨다. 구약 성서에서 '진리' 는 이스라엘 백성에게행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에서 '진리' 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구원사건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독특하게 요한 복음은진리-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은 진리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진리-그리스도론은 "예수는 진리이다"라는 명제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 명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생명입니다"(요한 14, 6)라는 예수의 말을 간접 화법으로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진리이다"라는 말은 "예수는 참되다(진실하다, 믿음직하다)"라는 말과 전혀 다르다. 뒤의 문장은 예수의 인품을 서술한 것이고, 앞의 문장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 전체는 진리라는 개념으로 지칭되는 그것 자체라는 것이다. 문장 형식적인 면에서, 진리는 예수를 서술하는 술어이지만 내용상으로는문장의 주어인 '예수' 가 술어인 '진리' 의 내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의 삶 전체, 그의 가르침과 활동속에 진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예시된다. 요한 복음의 진리-그리스도론의 종결 부분에서 예수는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바로 그 일을 위해 났으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8, 37). 8장 40절에서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사람으로 자기를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 즉 진리라는 낱말의 개념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았다. 진리를문장의 주어로 내세워 진리의 기능을 서술한 경우가 예외적으로 단 한 번 나온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8, 32). 이 문장도 앞의 문장과 관련시켜 보면 진리가 무엇인지를 진술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될 것인지를 말하는 데 역점이 놓여 있음을 알수 있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진리를 알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고별 연설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요한 17, 17)라고 말하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은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세상에서 하느님에 관해 증언한 말씀을 지칭한다.예수는 육신을 입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진리에 대한 예수의 최후 증언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 18, 37)이다. 이것은 예수의 증언을 듣느냐 아니면 배척하느냐, 예수의 증언을 진리로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이 세운 진리의 규범이나 정의에 부합되느냐 않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증언을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정해진 사람들만이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 복음의 진리-그리스도론은 기이하게도 "진리가 무엇이오?" 라는 빌라도의 물음으로 끝맺는다. 이 물음은 묵살되었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의 진리-그리스도론은 진리가 무엇인지를규명하는 것, 즉 진리의 개념을 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증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빌라도의 물음을 "누가 진리인가?" 또는 "무엇이 진리인가?"로 바꾸어서 묻도록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다" 또는"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진리이다"라는 답변은 요한 복음의 진리-그리스도론의 핵심이다. 〔교회의 가르침〕 성서에서 허위, 사기, 오류, 가짜 또는부실(不實) 등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데 '진리' 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현상은 다른 모든 언어와 공통적이다. '진리' 라는 용어의 성서적 용법의 독특성은 이 용어가 구원론을 서술하는 전문적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즉 구약성서에서는 이 용어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계약을 성실하게 지키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초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의존재론적 진리관과 대응설적 진리관을 요한 복음의 진리관과 융합시켰다. 그리하여 '진리' 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의 신론(神論)을 진술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는 진리를 "존재와 지성의일치"(adequatio rei et intellectus)로 정의하고, 이 정의를하느님의 존재를 진술하는 데 적용하였다. 그는 하느님은 제1 진리이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 명제는 하느님은 최고의 완전한 참된 존재이며,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라는 것을 뜻한다. 즉 하느님은 그가 존재해야 하는 바 그대로 완전히 그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한존재이다(존재론적 진리). 또 하느님은 그 자신을 남김없 이 충분히 아는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와 자기 이해 행위는 절대적으로 일치한다(대응설적 진리관).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 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지칭하며 '하느님의 진리' 라는 표현은 하느님 자신에 관한 계시를 뜻한다. 1997년 라틴어 표준판이 발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에서는 진리를 교회의 가르침, 특히 교의와 같은 의미로사용한다.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 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90항). 그리고 '신앙 진리들의 서열' 에서 삼위 일체의신비를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라고 밝힌다(234항). 또한 이 교리서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하느님이 진리 자체라고 밝히면서(144, 214-217, 2465항), 이 진리가구원의 길이고(851항) 하느님이 계시한 진리 자체에 대해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정의한다(150항).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진리와 행복을 발견하며(27항), 인간은 자연히 진리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고한다(2467항). 성령은 교회와 이에 속한 사람들을 진리로이끈다(243, 2625항)고 밝힌다. 한편, 십계명의 여덟째 계명을 설명하면서도 진리에대해 언급을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며, 하느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드러났고 예수가 진리라고 한다(2464~2466항). 하지만 진리를 '진실, 성실 또는 솔직함' 과 같은 뜻이라고 하면서,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한 진리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고강조하였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데 있어서최상의 증거가 순교라고 한다(2473항). 진리를 거스리는죄에 대해서는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거짓 증언과 거짓 맹세(2476항), 경솔한 판단과 비방(2477~2479항), 지나친 찬사나 아부와 아첨(2480항), 자랑이나 허풍과 빈정거림(2481항), 거짓말(2482~2486항)을 들고 있다. (→ 거짓말) ※ 참고문헌  S. Aalen, Truth, a Key Word in St. John's Gospel,《stEv》 2, 1961, pp. 3~241 J. Blank, Der johanneische Wahrheits-Begriff, 《Bib Zeit》 7, 1963, pp. 163~173/ Fr. Gogarten, Die christlicheWahrheit, FS fiir R. Bultmann zum 65, Geburtstag, pp. 84~981 L.Goppelt, Wahrheit als Befreiung, Was ist Wahrheit?(Hamburgertheologische Ringvorlesmg), Göttingen, 1965, pp. 80~93/ D.J. Hawkin,The Johannine Concept of Truth and its Implication for a TechnologicalSociety, 《EvQ》 59, 1987, pp. 3~13/ K. Koch, Der heraische Wahrheits-begriff im griechischen Sprachraum, Was ist Wahrheit?(Hamburgertheologische Ringvorlesung), Göttingen, 1965, pp. 47~651 L.J. Kuyper,Grace and truth, 《Interp》 18, 1964, pp. 3~19/ H. Schlier, Meditationiiber den johanneischen Begriff der Wahrheit, FS.fir M. Heidegger zum70, Geburtstag, Pfullingen, 1959, pp. 195~203/ D.J. Theron, AAHOEIAin the Pauline Corpus, 《EvQ》 26, 1954, pp. 3~18/ 주교회의 교리 교육위원회 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金昌洛〕 Ⅱ. 철학에서의 진리 진리는 참됨의 추상적 특징을 지칭하고, 어떤 사태나현실에 대한 참된 판단을 의미한다. 여기서 '진리란 무 엇인가? 에 대한 대답은 진리의 개념을 지칭하므로, 참된 판단의 기준이나 특징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나아가진리는 단순히 거짓이나 틀림의 반대 개념에 속하는 참이나 타당성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논리적 법칙에 따라 옳게 추론된 결론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 문제 제기〕 현대에 이르러 진리에 대한 문제는 양분된다. 즉 '진리를 존재 자체와 일치하는 넓은 개념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가능한 한 좁고 엄밀한전문 용어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전통 서양 철학의 언어 방식인 반면, 후자는 순수 논리적이고 언어학적 관점을 따른다. 어떤 식으로든 진리에 대한 문제는 결국 "이성과 사태의 일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의 역시확고한 것도 아니며 만족스럽지도 않다. 다만 "X는 참〔眞〕이다”라는 서술에서 "참이다"라는 술어의 의미를 해명해 내는 가운데 진리의 명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여기서 참이라는 개념은 우선 타당성을 진술한다. 왜냐하면 "참이다" 라는 서술의 관점은 "참일 것이다"내지는 "참이어야 한다" 라는 서술과는 구분되기 때문이다.나아가 "참이다" 라는 서술은 임의의 판단을 진술하기보다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해명할 수 있는 타당성을 변호한다. 따라서 "X는 참이다" 라는 서술은 우선 추론적 근거가 있는 타당성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진리의 의미는이러한 규정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추론적 근거가 있다는 것은 단지 진리의 외적이고 실용적 측면을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의 외적 측면은 진리의 내적측면이나 심연 구조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참이라는 의미를 중재하기 위해서는 X는 참이다" 라는 진술 속에서X가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X는 한 문장을 위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어떤 타당성도 변호하지 못한다. 여기서 X는 오히려하나의 내용이나 사태를 표현하는 어떤 진술을 위해 주어의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X가 어떤 서술을 이끌고 있는 한에서 "참이다" 라는 술어 역시 X를 진술하고 있다. 한편, "참이다"라고 진술되는 사태는 현존하거나 아니면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 사태가 현존하는 것으로 주장될 경우, 그 서술은 참이다. 현존하는것으로 주장된 사태는 그 사실 자체와의 관계를 진술하는 한에서 사태가 되며, 여기서 관계는 사태와 그 사실자체의 동일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의 지평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서술 내지는 사태와 그사실 자체는 외적인 것으로 머무르게 된다. 서술은 사실그 자체를 겨냥한다거나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불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그 사실 자체가 인식되거나 개방된다는 것과 어떻게 인식되고 전개되는가 하는 방법이드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X는 참이다" 라는서술은 사태와 사실의 동일성이라는 지평에서 사실 자체의 개방성으로 분류되며, 그것도 술어의 척도에 준하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결국 "X는 참이다" 라는 서술의 적합한 언어적 해명은 "그 사실은 스스로 그렇게 관계를 맺는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진리의 통합적 개념은 오직 사실 자체의 타당성대변과 개방성이라는 양극성을 통해서 결정된다. 이러한진리의 통합적 개념으로부터 사상사에 등장하거나 현대에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구분과 지칭들이 해명되고 이해되며, 경우에 따라 수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칸트(I.Kant, 1724~1804)의 '선험적 진리' 와 헤겔(G.W.F. Hegel,1770~1831)의 '순수 진리' 라는 표현은 이러한 총괄적 진리 개념을 특성화한 것이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구조적 계기이다. 따라서 이런 표현들은 특정의 관점에서진리를 분류할 수 있는 형식적 규정성(범주)을 지칭한다. 〔의미의 다양성〕 일반적 의미의 진리는 '존재(사물)와이성'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의 상호 부합을 말하며단적으로 존재(사물)와 이성의 상호 관철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해서 진리는 우선 인식의 진리로 대두된다. 이러한 인식의 진리나 논리적 진리는 판단 속에서 완결된다.즉 이성적 사유가 존재하는 사태와 비례한다는 사실에서이루어지고, 그것도 사유가 사태를 실재하고 성립되는것으로 서술 속에 담아내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적 진리는 적어도 이론적 인식에서는 존재에 척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준하여 측정되며, 존재에 따라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진리' 는 사유가 존재자의 모든 규정성들과 함께 존재자를 재연하거나 또한이런 의미에서 적합한 인식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오직 사유하고 서술한 징표들만이 존재자 안에발견된다고 한다면, 그 인식은 오히려 부적합한 인식이될 것이다. 결국 진리는 오직 파악된 각각의 형상적 대상에 대한 하나의 비례성을 요구할 뿐이다. 하나의 개념은 판단의 진리에 대해 유비적으로도 참이라 불릴 수 있다. 그 개념은 물론 참된 판단을 가능하게하는 존재자가 그 이상의 정당성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고, 숨어 있지 않으며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참된 판단을 전제하는 한에서 성립된다. 진정한 진리는 보편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 여기서 보편 타당성이란 그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파악된다는 것을의미하지만, 한 사람의 정신에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허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진리는 '절대적' 이며, 상대적진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적 인식의 진리는 오직인간에 의한 사실적 인식 속에서 실현되는 한편, 그 인식의 성립은 수많은 역사적 조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서도 진리의 역사성을 거론할 수있다. 다른 방식으로 실존적 진리는 오직 이성에 다가오는 학문적(이론적) 진리라는 의미에서 '보편타당한 진리'와 대립되어 있다. 여기서 학문적 진리는 예비 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적 진리는 '일체의 의식' 을 지향하는 한편, 실존적 진리는 개인의 실존에 호소한다. 여기서 실존은 개인이 처한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결단을 촉구한다. 물론 개인적 결단은 이성을 능가하여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결단의 설득력은 증명에 의하지 않고서도 심리적압박을 가할 수 있다. 나아가 인식의 진리로부터 존재의 진리도 구분되어야한다. 즉 존재론적 진리 또는 존재적 진리는 존재 자체나존재자에 부합하는 진리이다. 존재의 진리는 존재자와정신적 인식의 상호 부합성을 의미한다. 인간적 인식과의 실질적 일치라는 의미의 진리는 존재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된' (진짜) 황금이라고부르며, 그럼으로써 그렇게 지칭되는 물질이 실질적으로황금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거짓' (가짜) 황금이라는 말도 한다. 이는 마치 황금처럼 빛나기 때문에 몇몇 사람에게는 황금으로 간주되지만 실질적으로는 황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존재의 진리가 통일성이나 선성(善性)과 함께 모든 존재자에 해당하는 규정과 같이 선천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는 결국 사유에의 적응을 의미하게 된다. 모든 존재자는 이러한 적응력을 통하여 사유의 대상으로 성립될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이성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를 띤 존재의 진리는 존재자의 선천적 규정으로 확정된다. 결국 이러한 모든 존재자들의 인식 가능성(inteli-gibilitas)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신(神)의 정신 안에 있는 이데아(ldea)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삼는다. 그래서 존재의 진리는 모든 존재자가 신의이데아를 척도로 삼으며, 또한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상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존재와 분리시켜 진리 그 자체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면, 이는 진리에대한 허상을 제공할 수도 있다. 즉 누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진리를 사유한다고 말할 뿐만아니라, 그 판단의 내용 이외에 그 자신의 논리적 구조가사유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 선험적으로 고찰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논리적 선험주의의 입장이 된다. 윤리적 의미의 진리는 말과 내적 설득력의 일치를 서술할 뿐만 아니라, 외적 행위와 내적 의향의 일치를 서술한다. 나아가 윤리적 진리는 자기 자신의 진실한 판단과 진리의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올바른 의지를 서술한다. 신(神)적 진리는 존재의 진리와 인식의 진리 그리고진리 내포성을 하나로 근거 짓는 실체적 진리이다. 피조물에 대한 신의 진리는 주어진 대상에 대한 인식의 비례가 아니라 신의 이데아에 대한 피조물의 비례이며, 곧 창조하는 진리이다. 신의 창조적 진리와 유비를 이루는 인간적 진리는 인간의 실천적 진리이다. 행위에 앞서 이루어지는 양심의 판단, 인위적이고 기술적인 계획 등에서이러한 유비가 나타난다. 〔진리의 이중성〕 수백 년 동안 아베로에스(1126-1198)와 같은 중세의 몇몇 철학자들은 진리의 이중성에 대한이론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신앙의 진리에 속하는 것들이 철학적으로는 허위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중세의 어떤 학자도 이러한 진리의 이중성 자체를 문제삼 아 논란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의 통일성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다만 중세의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직면하여 토론을 제기했을뿐이다. 즉 신앙의 진리들을 어떻게 철학적 사유를 통해증명할 수 있는 명제와 일치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난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진리에 대한 이성적 접근과 신학적 접근이 시도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신학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의 일치 가능성 내지는 이해 가능성은 보에시우스(470/475?-524)부터 모색되었다. 그는 《신학 논고집》(Opusulula sacra,520)에서 신학적 진리와 이성적 진리의 조화를 추구하는 기념비적 선언을 하였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 정신의 불꽃을 인정하는 만큼, 나는 그 진리에 대한 물음들을 개념화하고 성문화하려고 오랫동안 탐구해 왔다." 이를 통하여 보에시우스는 이성적 근거를 통해 신앙의 진리에 파고드는 철학적 방법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진리의 본질보다는 진리의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 영원하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인간의 시간적 인식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여기서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인식에 대한 회의을 넘어서의식에 주어져 있는 확실한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자신이 살아 있고 회상하고 통찰하고 의욕하고 생각하고 알며 판단한다는 것 등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가의심하고 있는 순간이야말로, 그는 살아 있다" (De trinitate,X, 10). 결국 인간은 모든 현상에 속을 수 있을지라도 현재 속고 있다는 이 사실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 (Si fallor,enim sum, De civitate dei, 11, 6)라는 명제에 도달하였다.그는 이러한 회의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논리적 진리와는 다른 의식의 진리를 발견하였다. 이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철학적 출발점뿐만 아니라 감각적 경험의 타당성에 관한 흡(D.Hume, 1711~ 1776)의 이론과, 사실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를 구분한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의 선구자가 되었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진리의 근원을 조명설과 언어 철학으로 해명하였다. 진리가 인식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빛이 시각 작용에 미치는 영향에 비교된다. 여기서 눈은 정신의 직관력에 해당하고, 밝혀지는 대상은이데아적 내용에 해당하며, 태양의 빛은 이데아를 인식가능하도록 만드는 진리 자체이다. 인간은 단어로써 대상을 지칭하며, 단어는 모든 인식의 전제 조건인 내적 언어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적 언어는 불변의 힘이요 영원한 진리인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이후의 시대에 끊임없는 영감을 발휘하는 논리적 진리와 의식의 진리라는 양극단을 제공한 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전통적 도식을 확립하였다. 그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이성과 사물의 상호 부합(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으로 인식된다. 모든 인간적 인식은 구체적 사물에 대한 감각적 지각에서 시작되 어 능동 이성의 즉각성을 통한 추상의 방식을 취한다. 인간은 추상을 통해 개별적이고 구체적 존재자에 대한, 즉감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inteligibile in sensibili)에대한 그 무엇이나 본질의 인식에 이른다. 여기서 토마스는 진리에 이르는 인식 행위를 인식 주체가 대상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는 한편, 인식 원리는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반작용으로 이해하였다. 즉 진리의 인식이란 정신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회귀하는 것" (reditio completain seipsum)이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해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성이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한에 있어서, 사유와 존재의 상호 부합으로서의 진리란 바로 이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De veritate,q.1, a.9). 이러한 진리 인식의 과정에 선천적으로(a priori) 전제되는 것이 정신의 빛(lumen mentis)이다. 정신의 빛은 인식되는 그 무엇으로 이성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도록 하는 그 무엇으로(sicut quo intelligitur) 이성에 관계한다(Summa Theologiae, I, q.88, a.3, ad 1). 마치 빛 자신은무엇을 보지 않으면서도 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원리인것처럼, 정신의 빛은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본질 속에서 인식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존재는 항상미리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이 스스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사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존재자는 그 존재에 관여한다는 명백한 사실에기초한다. 따라서 존재의 초월적 진리는 현실적 진리로드러난다. 이렇게 진리의 선천적 규정이 인식하는 정신에 속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 질서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선(善)과 미(美)의 선천적 규정도 인간의 욕구 능력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한 존재자는 다른 어떤 것을위한 특정의 완성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선하며 아름답다고 불린다. 따라서 진, 선, 미는 초월적 진리의 세 가지 기본 양식이다. 하이데거(M.Heideger, 1889~1976)는 진리에 대한 물음을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지평을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에서 제기하였다. 그는 오히려 진리에 대한 물음을 인간적 발견의 실존 속에서 던질 뿐만 아니라, 존재자를 벗기고 역사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존재로 선회하여던질 것을 촉구하였다. 즉 존재자의 진리이든 서술의 진리이든, 이들의 진리는 사물과 이성의 상호 부합이라는구조를 통해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진리를 가능케 하는이 구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따라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전통적 존재론에서 제기된 진리의 근본 조건을 문제삼는가운데 가능한 모든 존재론의 기반이 되는 전회(轉回,Kehre)를 시도한다. 여기서 진리는 존재의 조건이며 진리의 조건은 존재자 이전에 현 존재(Dasein)이다. "진리가 있는 한에서만 존재자가 아닌 존재가 주어져 있다(esgibt). 또한 현 존재가 주어진 한에서만, 그리고 현 존재가 주어져 있는 동안에만 진리는 있다." 이제 진리는 원칙적으로 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것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진리의 개방성과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가 일 어나는 본원적 존재 현상 내지는 진리 현상을 생기(生起, Ereignis)라고 부른다. 생기는 존재가 자신의 진리인비 은폐성에 고유해지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있음에 고유해지는 가운데 일어난다. 따라서 그는 진리의역사성(Geschichtlichkeit)보다는 진리의 역운성(Geschick-lichkeit)에 치중한다고 볼 수 있다. 역운성은 존재의 보내 줌에 의해 이제 막 당도한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진리의 이중성 문제는 근세에 접어들면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지만, 진리의 개방성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 참고문헌  W. Brugger, Philosophisches Worterbuch : Wahrheit,1985, pp. 447~450/ Anselmus, De veritate, ed. F.S. Schmidt, 1966/Thomas de Aquino, De veritate, ed. E. Stein, 1930~1931/ G.W.F.Hegel, Wissenschaft der Logik, ed. Lasson, 1934/ M. Heidegger, VomWesen der Wahrheit, 1967/ M. Miller, Sein und Geist, 1940/ J. Pieper,Wahrheit der Dinge, 1947/ N. Rescher, The Coherence Theory of Truth,Oxford, 1973. 〔申昌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