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로마의 Giless de Rome(1243/1247~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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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주(Bourges)의 대주교, 아우구스티노 은수자회의 신학자. 철학자. 설교가. 라틴어식 이름은 로마의에지디오(Aegidius Romanus)이다. 〔생애와 활동〕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신학 스승으로인정받고 있는 질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에 붙어 다니는 여러 가지 칭호(Ro-manus, de Roma, de Urbe)로 보아 그가 로마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4세 때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티노은수자회에 입회하였고, 1260년 기초 학문 공부를 위해파리로 갔다. 이 당시 그의 스승들에 대해서는 오늘까지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1266년부터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가 파리에 두 번째 머물던 1269~1272년 사이에 그의 제자로 공부했으리라고 여겨진다. 1270년경부터 그는 파리에있는 소속 수도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271 ~1272년에 그는 베드로 롬바르두스(1095~1160)의 《명제집》(Senteniarum Libri) 첫 번째 권에 대한주석서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의 교수 활동의 결실로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은 127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는1272년 학사 학위를 받았고 계속 교수 활동과 저서 집필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존재와본질론》(Theoremata de esse et essentia), 《존재와 본질에 대한 토론집》(Quaestioness disputatae de esse et essentia)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1277년 천사에 대한 이론으로 파문당하였고, 결국 파리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1280년 후에 프랑스 국왕이 된 필리프 4세(1285~1314)의 요청으로 《통치 기원론》(De regimine principium)을 편집하였다. 1281년 8월 질은 파도바(Padova)에서 개최된 수도회총회의 주요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학문 분야에서 자격을 지닌 이가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학사 학위증은 수도원이나 로마 관구, 수도회 전체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1283년 5월에는 코리(Cori) 관구장 회의에 참여하였고, 다음해 5월에는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개최된 총회에, 10월에는 제나차노(Genazzano)의 관구장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285년 5월에는 토스카나(Toscana) 관구장 회의에 참석하였다. 1285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교직을 맡았다. 1287년 이전에 그의 신학 교수 자격증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지만 1285년 질은 교수가 되었다.전승에 의하면 1286년 1월 필리프 4세가 파리 대학을방문하였을 때, 그가 학교 대표로 환영사를 하였다고 한다. 신학 교수로의 승진은 수도원 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미니코회원들이 1279년에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식적으로 수도원의 박사로 칭하자, 아우구스티노회는 피렌체 총회에서 질을 공적 박사로 공포하였고 산하의 학생 및 선생들에게 그의 저서를 필수적으로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의 강의 때문에 1290년 5월에개최된 총회에 참석할 때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1292년로마에서 열린 총회에서 그는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1295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후에 교황이 된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의 친분은 그의 교회 내 출세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교황이 된 그에게는 프랑스 주교단을 잘 아는 이탈리아 신학자가 필요하였고, 그래서 1295년 4월 질은 프랑스 부르주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구청에서 보냈지만, 1296년 그가 이탈리아의 아나니(Anagni)에 왔을 때 그곳에 머물면서 교구는 대리인이 관리하고보고만 받으라는 교황의 특별 교서를 받았다. 1299년그는 다시 부르주로 돌아가고, 이듬해 교구 내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장과 교구 관할권 문제로 다투지만 느베르(Nevers)의 주교인 장(Jean de Savigny)의 도움으로 화해하 였다. 1302년 로마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지만, 그는자신의 교구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 1302. 11. 18)에큰 영향을 미친다.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서거와 프랑스인인 새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의 등극으로 그의 특권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의 말년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교황 글레멘스 5세가 소집한 비엔 공의회(1311. 10. 16~1312.5.6) 참석이다.성전 기사 수도회 문제의 해결을 논의한 이 공의회 이전에, 그는 1308년에 이 수도회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 또한 1309~1312년에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킨 한 회원(Pietro Olivi)의 사상을 검토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한 재판에 참여하였다.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활동은 부르주에서 개최된 관구공의회에 참여한 것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에서 1316년1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사 상〕 그는 여러 주제로 많은 책을 저술하였지만, 그의 사상 대부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계승하고있다. 그러나 신학적 · 철학적인 부분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술에 있어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논리적이며 용어를 분별하여 사용하고있다. 그의 문장은 정확하고 조직적이고 친밀한 면을 보여 준다. 정치에 대한 입장 : 정치학 분야에서 그의 유명한 저서는 《통치 기원론》(1277~1279)과 교황 수위권을 옹호한《교회 직무론》(De Ecclesiastica potestate, 1302)이다. 첫 작품에서 그는 인간 생활을 위해 시민 공동체의 본질적 성격을 인정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토마스주의(Thomism) 측면에서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들은 정치 공동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정치 공동체와 동떨어진 인간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이 정치공동체의 개념에서 공적 주체(인물)인 제후와 그의 권위가 필요하다는 사상을 도출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왕과교황권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저술한 《교회 직무론》에서 그는, 정치적 권력은 다른 모든 권력처럼 교회로부터 그리고 교회를 통해 나온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황을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권력의근원인 교황권의 절대성과 무제한성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였다. 교황권은 성령의 질서처럼 다른 질서를 첨가할수 없는 영적인 질서로 세속적인 모든 권력을 포함하고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이고 다른 것들은 이 영적인질서에 봉사해야 하며, 교황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사상은 교황의 권한 밖에 존재하는 어떠한 사회도 있을수 없다는 교황 수위권과 교회의 권한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는 비테르보의 자코모(Giacomo da Viterbo)에게 강한영향을 미쳤다. 그의 교황 수위권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은 도미니코회 소속인 파리의 요한(Johannes Parisiensis,1269~1306)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왕과 교황의 직무 론》(De potestate regia et papali)에서 세속 권력과 교황권의분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교황이 세속 권에 개입하는것을 권력 남용이라며 부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황은교회의 복지와 선을 위한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뿐이며, 지상에서의 평화와 정의의 보장은 황제권에 속한다. 교회는 세계적인 통합을 원하지만 왕국은 그렇지 않다. 삶의 주변 환경, 권력, 권위는 왕국의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왕국들이 한 왕국에 필연적으로 소속되어야 할이유는 없으며, 교황의 수위권은 교회 조직의 필요성에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치에 관련된 일치나 통합에 대해 교황은 관여할 이유가 없다. 주교들은 영적인 면에서권위를 가지며, 교황이 교회에 속해 있지만 교회가 교황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교회, 즉 추기경단은 교황을 합법적으로 면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단테(A. Dante,1265~1321) 역시 《제정론》(De Monarchia)에서 지상의 복지를 실행하고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는 것은 황제에게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철학에 대한 입장 : 철학에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토마스와는 다른 그만의 독특성을 보여 준다.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의 사상을 알았던 그는 '본질과 존재의 관계' 와 '본질적 형상의일치' 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주장에의하면,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의 구별은 추상적이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명제집 주석서》의 첫 권에서 본질과 존재를 실제적으로 구별하고《존재와 본질론》, 《존재와 본질에 대한 토론집》에서 심화 · 발전시키고 있다. 존재는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창조된 존재이며, 존재에 본질이 부과되면 실재(exis-tentia)가 된다. 존재와 본질은 실제적으로 다르지만 이둘은 하나를 이루는데, 그것은 그 자체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유성(偶有性), 즉 창조 행위에 의해서이다.다시 말하면 본질 자체가 실재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이러한 논리는 하느님에게만 적용시킬 수 있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하느님의 본질이 흐른다. 하느님은 자유롭고 넓은 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저 준다. 마치 바닷물이 모든 항아리에 담기는 것처럼. 항아리의 용량은 다 같지 않지만, 모든 항아리는 같은 바닷물을 받을수 있다. 질에게 있어서 본질은 실재에 선행하는 것이다.본질이 일차적인 현실성이라면, 실재는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현실성이다. 이러한 본질과 실재의 실제적 구별은우연성을 부정함으로써 창조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형이상학의 다른 특징은 본질적 형상의 일치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ataphysics)을 주석한작품에서 그는 모든 생명체에 나타나는 본질적 형상의일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지지하지만, 인간은 여기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철학적인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체에 대한 교의나 그리스도론 등에서 신학적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장소, 운동 등의 물리학 이론에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의 영원성에 대한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반대하고 토마스적 입장을 취한다. 심리학적인 문제에서는 영혼 자체와 영혼의 능력을구별하고, 영혼의 능력은 영혼과 활동 사이의 중계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영혼 본질 자체와 같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인식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을 따르고 지성이란 본래 비어 있는 것, 즉 '비어 있는 탁자'라고 하였다. 인식의 최초 원천은 감각적인 경험이다. 즉인간의 인식은 감각에서 나오며, 지성의 대상이란 추상화의 과정을 요구하는 감각적 본질이다. 이 점에서 그는플라톤 사상을 부정하고 있다. 윤리학 분야에서 그는 인간의 의지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활성화되기어렵다고 하였다. 오직 자기에게 좋다는 것을 알 때(bonum apprehensum) 의지는 활성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의지는다른 능력과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는 행위를 지배하고(domina sui actus) 있고, 한번 활성화된 의지는 자신을 조정하거나 행동에 있어 다른 능력들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이론으로 인간이 죄를 짓는 데 있어서의지와 지성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1277년 검열의 대상이 되고 파문 된 그의 논제에서, 그는 악의적인 의지는필연적으로 이성의 오류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파리에 되돌아온 시기에 집필한 그의 후기 작품인《스승의 명제》(Propositio magistralis)에서는, 악의는 이성의 오류를 항상 동반한다고 확언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무엇을 원할 때 아무런 좋은 것이 없다면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의도라도 어떤 좋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원한다는 것이다. 의식을 가지고 죄를 짓는 사람은 무지 때문에(per ignorantiam) 죄를짓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선에 대한 비판 기준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의지와 이성의 관계를 보면 악의를 품은 의지는 이성의 오류를 가져오지만,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욕망에 의해 부패된 의지가 이성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에 대한 입장 : 그는 신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비판하고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신적인 일치' (unio divina) 개념에강하게 기초하고 있다. 이 개념은 삼위 일체 문제에서 예수의 신성 문제, 즉 창조되지 않고 낳음을 받은 본성 문제와 성령의 발산(좆아 나심), 삼위 사이의 사랑의 관계그리고 신적 파견 문제들에 나타난다. 그는 이 문제들을삼위의 관계성 관점보다는 삼위의 본질적 일치에 중점을두고 해결하였다. 그는 또한 무한한 하느님을 완전 포용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감안하여 신학의 대상은하느님 자체에 대한 철학적 공론이 되어서는 안 되고, 신학은 애정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은하느님에 대한 연구이지만, 하느님 자체에 대한 인식보다는 인간을 영광스럽게 하는 주체인 하느님의 사랑에집중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의 창조주이며 인간을구원하는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철학적 행위가 아닌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지성으로 하느님을 알려는 이는 신학의 대상을 감축시키며, 사랑으로 알 려는 이는 사랑의 대상(하느님)과 비슷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지성으로 하느님과 일치되는 것은 우리의 가능한능력에 의해서이며, 사랑 안에 그와 일치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있는 것과 같고 신적인 방법에 의해서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색(철학)은 신적 신비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 가능성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는 이성주의로특성지울 수 있다. 그는 삼위 일체의 논리성을 보여 줄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삼위 일체를 알 수 없다는 토마스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성이 삼위 일체의 신적 위격을 알 수 없다는것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설교자로서의 그는 13세기의 설교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형태로, 자신의 신학 작품과 연결된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여 준다. 76개나 되는 그의 설교집은 대부분 대학생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었다. (→ 베드로 롬바르두스 ; 비엔 공의회 ; 성전 기사 수도회 ; <우남 상탐>) ※ 참고문헌  Giles of Rome, Errors Philosophorum, J. Koch ed., trans.by J.O. Riedl, Molwauke, 1944/ La Filosofia Medievale. secolo XIII eXIV, La Storia della Filosofia, diretta da Mario dal Pra, Casa Editrice DR.Francesco Vallardi società Editrice Libraria, 1976/ B.F. de Mottoni,Mensura im Werk. De mensura angelorum des Aegidius Romanus,Mensura. Mass. Zahl. Zahlensymbolik im Mittelalter, MiscellaneaMedievalia, 16-1, ed. A. Zimmermann, Berlin . New York, 1983, pp.86~102/ G. Reale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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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ge, Giles ofRome's De regimine principium. Reading and Writing Politics at Court andUniversity. c. 1275~1325, Cambridge et alli, 1999/ R. Lambertini, Von derinstitia generalis zur iustitia legalis. Die Politisierung desGerechtigkeitsbegriffes im 13. Jahrhundert am Beispiel des AegidiusRomanus, Geistesleben im 13. Jahrhundert, Miscellanea Mediavalia 27,JA. Aertsen · A. Speer eds. , Berlin · New York, 2000, pp. 131~145.〔李再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