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이며 르네상스 시대 학자. 교회의 개혁가. 질은 1469년 비테르보에서 안토니노 카니시오(Anto-nino Canisi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파도바(Padova)에서는 니포(Agostino Nifo, 14732~1538)에게서, 이스트라(Istra)의 은둔소에서는 가바르도(Domizio Gavardo)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피렌체의 피치니오(MarsiglioFicinio)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는데, 특히 피치니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493년 비테르보에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고, 이때부터 아베 로에스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로마로 돌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심취하였다. 그의 연구 활동에서는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과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사상, 그리고 성서가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그는 마리아노(Mariano da Genazzano) 수사의 지도를 받은피렌체에서뿐만 아니라 볼로냐, 페라라, 베네치아, 시에나, 나폴리에서도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52~1498)는 피렌체에서 교회의 악폐를 비난하며 교회의 개혁을 공개적으로요구하였다. 질은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 시가 분열되는 것을 막고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대항하는교회 측의 운동에 온건한 방법으로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질은 사보나롤라에 대한 견해와 태도에 변화가 생겼고, 그가 사형을 당하자 나폴리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는 나폴리에서 폰타니아(Pontania) 학술원의 일원이 되었는데, 여기서 '에지디오' (Aegidius)라는 이름을받았다. 다방면의 위대한 인문주의자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그리스 문학가이자 라틴어 학자로서 박학다식한 연설가였다. 그는 성서 연구,특히 히브리어, 히브리 신비 철학, 랍비 문학 등을 쉬지않고 연구하였다. 또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시(詩)를썼고, 철학적인 작품을 저술하면서 중요한 신학적인 주석을 편집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역사의 통람(通覽)을 시도하였다. 특히 교황 레오 10세(1513~1521)에게 헌정한역사서(Historia viginti saeculorum)는 당시 교회의 역사를이해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와 율리오 2세(1503~1513), 나폴리의 왕인 페르디난도 1세(1458~1494)를 비롯하여 피렌체와 베네치아 시에서도 질이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 주기를 원하였다. 1503년 그는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 규칙을 있는 그대로 엄격하게 지키자는 운동에 동참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운동이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를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파엔차(Faen-za) 회복을 위한 베네치아와의 담판에 파견하였으며,1506년에는 수도회를 지도할 교황 대리로 임명하였다.그리고 그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1507년에는 그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질은 수도회내의 직무 이외에도 아주 까다로운 교황청의 문제들을해결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그가 수도회에서 맡는공적인 직무를 사직할 때인 1518년 1월 25일까지 그의주 관심사는 수도회의 개혁이었다. 그는 수도자들이 수도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열정과 사랑으로 지도하였다. 그리고 개혁을 성공리에 완수하기 위해서 분원이나관구를 자주 방문하거나, 수도 생활의 개혁에 필요한 권한을 위임하여 대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혁의지가 없는 원장이나관구장을 정직시키거나 해임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시 교회의 일반적인 사치 풍조분위기로 인해 많은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1512년 5월에 개최된 제5차 라테란 공의회 개회 연설에서 교회의 여러 악폐를 점잖으면서도 솔직하게 열거하고 그 해결책을 용기 있게 제안하였는데, 공의회 참석자들은 그의 연설에 깊이 감동받았다. 그는 이 개회 연설에서 공의회의 목적은 사랑의 정신으로 교회의 오점을씻어 버리고, 교회 전통 안에 보존된 소중한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 목표를 구현하기위한 무기는 자비와 믿음, 정직함과 기도라고 강조하면서, "사람이 거룩함에 의해 변해야지, 거룩함이 사람에의해 바뀌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하며 교회가 거룩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터키인들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서유럽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151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막시밀리안 1세(1493~1519)에게 교황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얼마 후 네피(Nepi) 교구를 돌보도록 임무가주어졌고, 그 후 비테르보와 토스카나(Toscana)의 교구장직을 맡았다. 질은 1517년 7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1518년에는 교황사절로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또한 1521년 교황 선거에서 여러 번 교황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교황 레오 10세 말기부터 글레멘스 7세(1523~1534) , 바오로 3세(1534~1549)에 이르기까지 교황청이 해결해야 할많은 문제들을 담당하였는데, 그 와중에도 철학과 언어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1519~1556)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로마의천사의 성(城)(Castel Sant'Angelo)에서 실질적인 포로 생활을 하던 교황 글레멘스 7세를 돕기 위해 마르케(Marche)에서 자비(自費)로 2개 군단 2,00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교황을 도왔다. 이후 그는 교회 개혁의 옹호자로 계속 봉사하다가 1532년 11월 12일 혹은 2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서 본문 비판, 신학적인 문제, 철학적인 논문들, 정치 종교적인 문제, 언어학과 문법에 관한 내용 등많은 글들을 남겼다. 그의 후임자인 비테르보의 교구장 루돌피(Nicolo Rudollf)는 질의 저술을 64권이나 수집하였으나 대부분 분실되었으며, 약간의 필사본만이 유럽의여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 라테란 공의회, 제5차 ; 사보나롤라 ; 아우구스티노회) ※ 참고문헌 A. Flichl · A. Martin eds., Storia della Chiesa, XVI,Torino, 1977, pp. 63~641 一, Storia della Chiesa, XVIII, Torino, 1976,pp. 330~336/ H. Jedin ed., Church History, V, New York, 1980/ U. Mariani,《EC》 V, pp. 141~143/ F.X. Martin, 《NCE》 VI, pp. 485~4861 A. Palmieri,《DTC》 VI-I, pp. 1365~1371. 〔金喜中〕
질, 비테르보의 Giles de Viterbo(1469~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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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비테르보의 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