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에 활동한 영국의 역사가. 수도원장. 성인. 축일은 1월 29일. 8세기 초반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은 질다는 500년경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왕국 출신으로 알려져있지만,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직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도자였을가능성이 높다. 〔생 애〕 질다에 대한 두 가지 전기가 전해지고 있는데,하나는 11세기 프랑스의 브르타뉴(Bretagne) 지방에 있는 뤼(Rhuys) 수도원 출신의 한 수사가 쓴 것이고, 다른하나는 12세기경의 웨일스(Wales) 사람인 캐라독(Cara-doc)이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내용 중에는 신빙성에 문제가 되는 것이 많아 사료적 가치가 없다. 이후많은 학자들이 이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하던 중,질다라는 이름을 가진 성인이 최소한 두 명은 있다는 주장도 한때 있었다. 그러나 더 깊은 연구가 있은 후 질다성인은 한 사람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런 혼란이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질다에 대한 자료가 그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정리되기 시작하였고,또 그 자료도 장기간에 걸쳐 작성 · 보완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캐라독은 질다가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에서 죽었다고 하였고, 오핸론(O'Halon)은 질다 외에 여러 명의 성인이 이 도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다.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질다의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이 모든 자료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질다는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던 덤바턴(Dumbarton)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클라이드(Clyde) 강 연안지역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카우(Cau) 또는 나우(Nau)였으며 그의 형은 후일(Huel)혹은 쿠일(Cuil)이었다. 일투드(IIltud, +6세기 초) 성인의지도로 웨일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돌(Dol)의 주교가된 삼손(Samson, +565) 성인과 레온의 베드로 성인과 같이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자로 생활한 후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고, 북아일랜드에 있는 아마(Amagh)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수도원과 교회 건립에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아일랜드의 연대기편자는 질다를 아일랜드 성인 목록의 두 번째 서열에 올려 놓아 그를 위한 특별한 전례나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였다. 질다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지 순례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독한 삶을 즐기던질다는 브르타뉴 외곽 지역에 있는 오트(Houat) 섬에서은수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기도와연구 그리고 금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은거한 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섬뿐만 아니라 본토의 지방인뤼에도 수도원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뤼의성 질다(Saint Gilldas de Rhuys) 수도원을 창건하였는데 그로 인해 질다는 '뤼의 질다' 로 불리기도 한다. 질다가 영국 왕에게 보내는 유명한 편지를 저술한 곳도 이곳이었다. 질다의 유해는 안전을 위해 프랑스 중부의 베리(Berry)에 옮겨진 후 10세기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다. 18세기에는 이 유해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 반(Vannes)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질다는 브르타뉴와 그외 지역의 많은 성당과 수도원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질다 성인의 축일은 이 지역에서는 1월 29일로 정해져 있다. 성인의 다른 축일인 5월 11일은 유골을 옮긴 날을 기념한 것이다. 〔저서와 가치〕 547년을 전후하여 질다는, 베다 존자(672/673~735)의 표현에 따르면 "영국사에 관한 눈물겨운 담론" 으로 평가되는 《브리튼의 전복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 Brittaniae)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책은 질다가 당시 사람들의 도덕적 결함을 고발하기 위한 의도로 저술하였는데, 내용에 나온 사건들은 사실에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제1부 서론, 제2부 로마제국의 침략기부터 5세기까지의 영국사, 제3부 다섯 명의 브리타니아(Britannia) 소왕들(petty kings)에게 보내는편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부의 편지에서 질다는성직자들이 나태하고 성직 매매를 일삼는 것을 신랄하게비판하였다. 질다의 작품은 매우 심오하여 성서에 대한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5세기에 로마 제국의 통치가 끝나자 브리타니아인들은당시 갈리아 지방의 총독인 아이티우스(F. Aetius, 390?~454)에게 스코틀랜드에 살던 픽트족과 스콧족 출신 침입 자들을 막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총독이 이를 거절하자 브리타니아인들은 자력으로 침입자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색슨족도 브리타니아 연합의 일원이 되면서 분쟁은 종식되었다. 질다는 이런 사정에 의해 색슨족이 타네트 섬에 정착해 살다가 브리타니아에 대해 저항을 일으킨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질다는 브리타니아에서의 매우 힘든 생활 여건에 대해 논하면서 마을이 이 당시에만 파괴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의문시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따르면 이보다 훨씬 전에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질다는 게르만 민족이 영국에 정착한 사실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게르만 민족은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브리타니아인들이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의 지도하에 다시 부흥하여 500년경 바돈 산(Mons Badonicus)에서 색슨족을 물리친 것에 관해 쓴 질다의 언급은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질다가 이 전쟁과 연관하여 아더(Arthur) 왕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더 왕의 실존을 의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질다는 이상하게도 실명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때문이다.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질다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질다는 이 밖에도 《참회록》(Penitential), 《로리카(Lorica) 찬가》, 《여행 기도》 등을 저술하였다. 질다는 가장 선구적인 영국사가로 알려져 있으며, 베다와 알쿠이노(732/735?-804)의 책에도 인용되었다. 질다의 작품 사본은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참고문헌 C. Edmonds,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6, KevinKnight, 2003/ B.F. Byerly, 《NCE》 6, 2003, pp. 217~218/ F.W. Bautz, DerWeise(Sapiens) Biographisch-Bih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II,1990. 〔李種凡〕
질다 Gidas(500?~570?)
글자 크기
10권

성 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