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 샤르트르 학파의 신학자, 철학자. 라틴어식 이름은 포레의 질베르토(Gilbertus Porrentanus)이다. 〔생애와 활동〕 질베르는 1080년경 프랑스 중서부의푸아티에(Poitier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귀족 가문인 동시에 학자 가문이었다. 그는 고향인 푸아티에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공부한 후 샤르트르(Chartres)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샤르트르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샤르트르의 베르나르도(Bemardus Chartonensis, +1124/1130?)를알게 되었다. 1100년경 랑(Laon)에서 유명한 신학자인 안셀름(Anselm de Laon, ?~1117)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공부를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114년에는 베르나르도에게 샤르트르 학파의 사상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는 서간을 보냈다. 1126~1137년까지 샤르트르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저술 활동도 하였다. 이 시기 대부분의 저서는 성서, 신학그리고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학문에 있어서연구의 수준 저하와 연구 기간의 감축을 주장하는 이들에대항하여 투쟁하였으며, 도서관의 질적 · 양적 발전을 위해 힘썼다. 1141년에는 아벨라르(P. Abélard, 1079~1142)의 사상을 검열한 상스(Sens)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다.그리고 샤르트르에서의 약 20년간의 교수 활동을 끝으로 그는 신학과 변증법을 가르치기 위해 파리로 갔다.1141년 그는 파리의 포레 가(Rue des Porrées)에 작은 규모의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중에 후에샤르트르의 주교가 된 요한(Joannes Saresberiensis, 1115~1180)이 있다. 이곳에서 그는 능숙한 변증법과 예리하고박식한 교부학 지식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함으로써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질베르는 1142년 푸아티에의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 사상 중에 삼위 일체설과 육화설은 교구에서 항상 논쟁거리였다. 1146년교구 시노드에서 질베르의 신학 사상은, '절대 웃음을모르는 사람' 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부제들인 카롱(Calonde Thouars)과 아르노(Arnaud de Brioux)에 의해 문제가제기됨으로써 그의 사상의 정통성이 의심받게 되었다.그들은 질베르를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에게이단으로 고발하였고, 교황은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고데스칼(Godescals) 에게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의 삼위 일체 신학을 주석한 질베르의 책을 검열토록 하였다. 이 사건으로 1147년 파리에서 교회 회의가 개최되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mardus deClairvaux, 1090~1153)를 비롯한 다른 세 명의 신학 박사 들에 의해 질베르의 신론과 삼위 일체 사상이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질베르는 그들에게 탄핵에 대한 구체적인증거를 요구하였고, 이를 밝히지 못하자 교회 회의는 질베르의 사상에 대한 어떤 확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끝났다. 하지만 다음해 3월 21일에 개최된 랭스(Reims) 교회회의에서 다시 논의가 되었다. 이때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의 본질과 그의 신적 속성의 실제적인 차이점에 있어서 신성은 하느님이 아니다. 둘째, 신적 본질과 신적 인격으로서의 차이점, 즉 부여된 삼위의 위격은 하느님의 인격 자체가 아니다. 셋째, 삼위의 관계성이나 성격, 특수성 그리고 일치등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다. 넷째, 신적 본성, 즉 신성은 육화되지 않았다. 육화는 단지제2위인 아들의 인격에 관한 것이지 신적인 것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중에서 네 번째의 제안은 교회 회의에서 탄핵을 받았다. 이 교회 회의에서 반대자들보다 신론에 대해 우수한 지식을 가진 질베르는 자신을 변호하였지만, "만약 당신들이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면 나 역시 당신들의 의견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겸손은 질베르를 이단으로 배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질베르에게 신앙 선서가 요구되었고, 결국 질베르는 네 개의 조항으로 된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랭스 교회 회의는 하느님과 신성(divinitas), , 하느님과 그의 속성 그리고 신적 본체와 삼위가 가지는 신적 인격이 같다는 것을확언 · 공포하였고, 하느님 안에 있는 영원한 실재로서의존재성이 하느님과 동일하지 않다는 이론을 단죄하였다.또한 신적 본체와 본성은 같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사실문제가 되었던 그의 사상에서 이단성은 삼위 일체론보다는 성서를 잘못 주해한 것에 있었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어쨌든 질베르는 가톨릭 교회의 결정에 복종하였고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그의 필사본에 썼던 잘못된 사상을 고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반대파와 화해를 하고 교구로 돌아와 계속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고발하였던 두 명의 대부제들도 용서하였다.그러나 그가 베르나르도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을 합리화하는 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자신의 책을 교정할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15세기까지 질베르의 사상 중일부 논제들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83~322/321)의 작품이나 보에시우스의 작품처럼 대학에서도 다루어졌다. 특히 그의 삼위 일체론을 계승한 이들 중에는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de Floris, 1132~1202)이 유명하다.그와 질베르의 차이점은 삼위의 위격 구별로, 요아킴은역사 안에서 각 삼위의 활동으로 인간 역사를 세 단계, 즉아버지의 시대(창조와 함께 시작)와 아들의 시대(구원과 함께 시작) 그리고 자신을 개방시키는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삼위 일체론은 1256년에 단죄를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적 방법을 혼합한 실재주의(Realism) 경향을 지닌 질베르의 사상은 신비주의자들에게는 마치 위험한 이성주의로 보였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충성 그리고 개인적인 경건심은 그의 사 상이나 활동에 있어 정통성을 보증할 수 있게 하였다. 질베르의 사상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의 성사론은 모두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질베르는 1154년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에는 그의 철학자, 신학자로서의 탁월한 지성과 주교로서의 덕을추모하는 이들이 모였고, 심지어 반대파도 참석하였다. 〔사 상〕 철학 : 질베르의 철학은 독특한 점이 없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질베르를 형이상학 분야에서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한다. 질베르는 철학 분야에서 샤르트르 학파의 특성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의 형이상학을 따르고 있으며, 문법과 논리학을 사용하여 신학과 철학의 긴밀한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보에시우스의 형이상학을 심화·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각 사람은 각자의 인간성을 지닌다. 그는 개체의 내적 구성에 관해 독특한 견해를 가졌다. 개체 안에서 개별화된 본질 혹은 실체와 실체적 형상(formae substantiales) 혹은 생득적(生得的) 형상(formaenativae)이 구별된다. 생득적 형상은 같은 '종' (種, species)과 '유' (類, genus)의 대상들 안에 비슷하다는 의미에서 공통된 것이다. 생득적 형상들은 하느님 안에 그것들의 원형을 갖는다. 정신이 사물들 안에서 이런 생득적형상들을 고찰할 때, 우리의 정신은 이런 형상들이 합치되고 구체화되어 있는 질료(materia)에서 그런 형상들을추상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 와 '종' 을 성립시킨다. 이런 '유' 와 '종' 은 자립체(subsistentiae)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이 아니다. 예컨대 '유' 는 '종' 안에서의 차이를 지니면서도 비슷한사물들을 비교하여 얻은 자립체들의 집합(collectio)이다.'종' 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게 얻어진다. '종' 개념도 비슷한 개체 대상들의 비슷한 본질적 규정 혹은 형상을 비교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묶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질베르의 추상설은 과장적 실재론이 아니고중용적 혹은 온건적 실재론이다. 그러나 그의 개체적 본질 혹은 실체와 공통 본질 사이의 이상한 구별은 삼위 일체론에 있어서도 하느님과 신성, 성부와 성부성 등을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하게 된다. 신학 : 질베르는 스콜라학적인 순수 이성 탐구의 철학적인 논제들이 신학 안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갈 시기에 활동하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질베르는 삼위 일체 신비를 명확히 하기위해 철학의 실체(substantia)와 자립적 존재(subsistentia)의 구별을 적용시켰다. 그에 의하면 시간적 제약을 받는세상의 사물들이 물질적 요소로 결합된 이원론적인 것과는 달리, 영원 순수 존재인 하느님 안에는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고 구분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을 초월한 곳에 사물의 본질인 하느님이 있고, 사물들은 이 하느님으로부터 그들 고유의 특성을 부여받는다. 하느님은 하느님 자체인 이유로 이 순수 형상은 이것에 참여하는 세 위격과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본질(essentia)은하나이지만, 이 하나에 참여하는 삼위의 인격은 세 개의 실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질베르는 하느님(Deus)과 신성(divinitas)을 구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성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며 하느님과 같을 수 없다. 그는 하느님과그의 신성, 아버지와 부성, 아들과 아들성, 성령과 그의좆아나심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삼위일체에서 삼위의 구별은 위격적인 것뿐 아니라 신적 본성(natura divina)도 구별되어야 한다. 질베르는 이 이론을육화에 적용시켰다. 결과적으로 그의 그리스도론은 신적본성이 인간 본성을 취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며, 신적 본성 자체가 육화된 것이 아니라 제2 신적 위격이 육화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 위격의 불가분리성을 인정하기에 하느님 안에서의 복수성은 인정하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논리를 신학에 적용시킨 그는 하느님 아버지(Pater)라는 말은 허용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언어 논리상 술어는 한 개체나 인격이 될 수없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좋은 분이다" 라는 말을 할수 있지만, "하느님은 위격(Persona)이다"라는 말은 있을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이라는 말을 인격적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질베르는 하느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기에 하느님의 현존을 규정하기위해 인간의 범주를 하느님께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교회 회의를 통해 단죄를 받아 철회되었다. 사물의 유사성에 기초한 그의 과장적 실재론 혹은 온건한 실재론은 플라톤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의 영향 이외에도 질베르의사상은, 물리학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샤르트르 학파의 경향을 강하게 볼 수 있다. 그의 저서인 《육원리론》(六原理論, Liber sex principior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윤리학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석이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편집되지 않은 채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육원리론》은 중세에 스콜라 학파의 고전으로 여겨져 많이 읽혀졌으나, 이 책의 저자가 질베르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남아 있다. 이외에도 성서 분야에서 《아가에 대한 설교집》(Sermones super Canticum Canticorum, Strasbourg, 1497)과 시편, 마태오와 요한의 복음 주해서, 바오로 서간 및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해서, 로마인들에게 보낸편지 주해서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에 대한 주해서 등이있다. (→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 아벨라르 ; 요아킴,플로라의) ※ 참고문헌 A. Berthaud, Gilbert de la Porrée, évêque de Poitiers, etsa philosophie, Poitiers, 1892/ R.L. Poole, Illustrations of the history ofMedieval Thought and Learning, London, 1920/ J. Assenmacher, DieGeschichte des Individuationprinzips in der Scholastik, Leipzig, 1926/A. Forest, Le réalisme de G. De la P., Rev. néoscol. De Phil 36, 1934,pp. 101~110/ A. Hayen, Le concile de Reims et lerreur théologique deGilbert de la Porrée, Archives dhist. Doctr. et litt. Du Moyen Age, 10,1935~1936, pp. 29~ 102/ M. Grabman, Die theologische Erkenntnisund Einleitungslehre des hl.Thomas v. Aquin, Freiburg, 1948/ N.MHaring, The case of Gilbert de la Porrée, Bishop of Poitiers 1142~1154,Medioeval Studies 13, 1951 , pp. 1~45/ S.Vanni Rovighi, La filosofia diG.P. Miscellanea del centro di studi medievali, Milano, 1956, pp. 1~64/M.A. Schmidt, Gottheit u. Trinität nach dem Kommentar des GilbertPorreta zu Boethius De Trinitate, Basel, 1956/ M.E. Williams, The Teaching of Gilbert Porreta on the Trinity, Roma, 1951/ M. Simon., Laglose de l'épire aux Romains de Gilbert de la Porrée, Louvain, 1956/ S.Gammersbach, Gilbert von Poitiers und sein Prozess im Urteil derZeitgenosen, Köln, 1959/ R.L. Poole, Illustrations of the History ofMedieval Thought and Learning, Mass, 1961/ B. Maioli, GilbertoPorretano, Bulzoni, Roma, 1979/ L.O. Nielsen, Theology andPhilosophy in the Twelfth Century : A Study of Gilbert PorretasThinking and the Theological Expositions of the Doctrine of theIncarnation during the Period 1130~1180, Leiden, 1982/ M.L. Colish,Early Porretan Theology, Recherches de Theologie ancienne etmedievale 56, 1989, pp. 58~791 T. Gross-Diaz, The PsalmsCommentary of Gilbert of Poitiers : From Lectio Divina to the LectureRoom, Leiden, 1996. 〔李再淑〕
질베르, 포레의 Gilbert de la Porrée(1080?~1154)
글자 크기
10권

간질병자를 고친 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