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익산시 창인 1가동 235 소재. 1935년 6월 16일 군산(현 둔율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 명칭은 '이리' 였으나 1977년본당 이전과 함께 현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주보는 예수성심. 관할 구역은 익산시 중앙동, 갈산동, 창인동, 남중동, 주현동, 마동 일부 지역. 〔교 세〕 1952년 1,405명,1957년 1,719명, 1962년 2,459명, 1967년 2,044명,1972년 2,054명, 1977년 2,353명, 1982년 3,704명,1987년 2,601명, 1992년 2,003명, 1997년 2,213명,2002년 2,098명. 〔역대 신부〕 초대 하한주(河漢珠) 요셉(1935. 6~1939. 4), 2대 김기봉(金基奉) 필립보(1939.4~1941.5), 3대 김영구(金榮九) 베드로(1941.5~1947.4),4대 이기순(李基順) 도미니코(1947. 4~1956. 4), 5대 김후상(金厚相) 바오로(1956. 4~1957.8), 6대 정재석(鄭在石) 요셉(1957. 8~1962. 12), 7대 김영일(金永鎰) 아우구스티노(1962. 12~1964.6) , 8대 박영규(朴英圭) 바르나바(1964. 6~1966. 7), 9대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1966. 7~1969. 12), 10대 김영구(1969. 12~1970.7 11대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1970. 7~1974. 6), 12대 박진량
(朴鎮亮) 라우렌시오(1974. 6~1976. 4), 13대 김용태(金容泰) 베네딕도(1976. 4~1979. 1), 14대 김영신(金英信)바오로(1979. 1~1984. 1), 15대 고경훈(高暻勳) 프란치스코(1984. 1~1988. 1), 16대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1988. 1~1992. 1), 17대 범석규(范錫圭) 마티아(1992.1~1993. 2), 18대 서석기(徐錫基) 베드로(1993. 2~1997.8), 19대 황인규(黃寅奎) 마태오(1997. 8~2000. 8), 20대박종근(朴鍾瑾) 안드레아(2000. 8~현재). 〔공소 및 포교소 설치〕 천주교의 불모 지역이었던 이리 일대에 신자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 솔아단과 새실(현 신흥리)에 공소가 설치되었을 즈음이었다.1926년경에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는 추세 속에서,전라도 각지에서 이리 지역으로 많은 신자 세대가 전입해 왔다. 그들은 이리에서 5리쯤 떨어진 전주(현 전동) 본당 관할의 새실 공소로 가서 성사를 받았다. 이후 이리신자들은 공소를 설비한 후, 전주 본당에 요청하여1931년 가을 전주 감목 대리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신부의 방문으로 첫 판공 성사를 치렀다. 1929년 5월에군산 본당이 설립되자, 이리 공소는 군산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당시 군산 본당 초대 주임인 김영구 신부는비록 이리 공소가 빈약하지만 장차 이리 지역이 호남 교통의 중심지로서 발전할 것을 예측하고, 김양홍 신부에게 포교소 설립을 건의하였다. 이후 전주읍 청수정에 살던 이춘화(토마스)가 이리읍 주현동 195번지의 땅 430여 평을 매입하여 기증하고 성당과 제대 설치 비용까지부담함으로써, 1934년 2월 성당이 준공되어 이리 천주교 포교소가 설치되었다. 〔본당 설정과 발전〕 포교소가 설치되면서 전라도 각지, 특히 산협 지대의 신자들이 전입해 옴에 따라 이리지역 신자수가 날로 증가하여 이리 천주교 포교소가 준본당과 다름없게 되자 1935년 6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하한주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리 본당에는 성당 건물만 있을 뿐 제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에 하한주 신부는 군산 본당에 머물면서 사제관 및 부속 시설 작업을 하여 1935년 10월 에 사제관을 준공하였는데, 본당 및 각지의 신자들은 본당 설립 축하 기념품으로 종과 풍금, 14처와 성모상 등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하 신부는 본당에 평의회(성당 재정 담당), 유지회(성당 건축 재원 담당)를 조직하여 성당 유지와 장래의 발전을 준비하였다. 공소에는 공소계를 모아 자립을 꾀하는 한편, 본당과 공소에 성모 포교 부인단을 설립하여 전교와 성가정 확립, 자녀 교육 및 부인들의정신 계발에 노력하였다. 또한 전라북도 천주교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가톨릭 청년단을 설립하였고, 천주교회를 이끌어 갈 2세 교육을 위하여 소년 십자군을 창설하였다. 4대 주임 이기순 신부는 본당 단체 활성화에 노력하여애령회, 청년회, 학생회, 성가대, 복사단, 교리 교사회등을 조직함으로써 본당의 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늘어나는 신자수에 비해 성당이 협소한 데다가 성당이 위치한 주현동이 변두리 지역으로 교통이 불편함에 따라,1948년에 북창동 235번지 소재의 부지 2,000여 평을매입한 후, 1950년 새 성당을 건축할 재료를 구비하여기초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공사는 중단되고, 건축 자재도 모두 소실되는 어려움을겪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5월에는 삼례 본당을분리 · 설정하였다. 1954년 10월 중단되었던 성당 신축공사를 재개한 후, 이듬해 12월에 공사를 완료하여 성당(140평)과 사제관(30평)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처럼이기순 신부는 재임 10년 동안 본당 단체 조직과 새 성전 건립에 온 힘을 기울여 이리 본당을 해마다 평균 100명의 영세자를 배출하는, 전라북도에서 막강한 교세를자랑하는 본당으로 발전시켰다. 6대 주임 정재석 신부는 1960년 3월에 본당 관할의황등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본당 관할의 6개 공소를 새 본당에 이관하였다. 6월에는 본당에 인보성체 수도회 분원을 설치하여 본당 운영이 한층 원활해졌고, 공소 개발에 주력하여 팔봉 · 석탄리 공소 강당 건립과 함께 금마 · 익산 공소를 설립하였다. 7대 주임 김영일 신부는 1962년에 재속 형제회를 설립하였고, 천주의 성모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였으며, 1963년 가을에는부용 공소를 설립하였다. 8대 주임 박영규 신부는 1964년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본당 레지오 마리애 단체 활성화에 노력하여 1965년 한 해 동안 4개의쁘레시디움을 창단시켰으며, 1966년 1월에는 성심 신용조합을 조직하였다. 박 신부는 재임 기간 동안 사제관을신축하고, 해성중학원을 세워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교육하였으며, 천주교회 공동 묘지를 조성하는 등 본당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9대 주임 김재덕 신부는1967년 12월에 주현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으며, 재임 기간 동안 본당에 인보 성체 수도회 분원이 철수되고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었다. 특히 김 신부는 성무를 제외한 본당 관리권을 신자들에게 이양함으로써,신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본당 운영에 참여하는 계기를만들었다. 11대 주임 오현택 신부는 1971년 1월 1일부터 성당 의자 100개 놓기 운동을 전개하여 부활절에 완료하였으며, 1972년 7월에는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 단원들의 레지오 연구회를 개최하였다. 1973년 9월에는 본당 산하23개 반의 반장 재교육을 위한 세미나를 실시하였는데,여기서 반장들은 반회 활동 강화책의 일환으로 자발적인조직체 재편성을 통한 본당 운영의 묘를 살리기로 결의하였다. 13대 주임 김용태 신부는 1977년 4월 인북선도로 개통 등의 도시 계획으로 인하여 성당과 부속 건물등 885평이 국가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남은 659평을정리한 1,600만 원으로 현 본당 위치에 새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성당 신축 때까지는 철거 보상으로 인수한 시공관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1977년 11월 11일 밤에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로 시공관은 지붕이 뚫어지고 대들보가 부러졌으며 유리창이 깨지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교구 인성회는 본당에 임시 본부를 두고 복구 활동에 적극 동참하여1978년 6월 18일에 새 성전 신축 기공식을 거행할 수있었다. 14대 주임 김영신 신부는 1979년 6월 22일에 성전신축 공사를 완료하여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81년 8월에는신자들의 헌금으로 루르드 성모상을 건립하여 제막식을거행하였다. 그리고 본당 34개 구역 공동체의 자발적인참여와 지도로, 매달 1회 사도회 임원들을 중심으로 구역 형제회 모임을 실시하였다. 한편 성당 신축 후 본당이자리를 잡아 가자 김 신부 재임 동안 본당에는 10여 개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었고, 여교사회 .울뜨레야 · 루가회 · 돈 보스코회 등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1983년에는 '근로자의 집' 이 개설되었다. 15대 주임 고경훈 신부는 1984년 1월에 영등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으며, 12월 30일에는 근로자의 집을'성 요셉 노동자의 집' 으로 명명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85년 4월에는 신자 재교육과 본당 공동체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령 쇄신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10월에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발한 활동으로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에는 기존 수녀원을 철거한 후 수녀원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하였으며, 1988년 1월에는 송학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16대 주임 문정현 신부는 1989년에 성당 도색 공사를 실시하여 본당의 외적 환경이 한결 새롭게 단장되었다. 17대 주임 범석규 신부는 1992년에 사제관 보일러 및 급수 공사와 함께 성당의 냉 · 난방 공사를 실시하였다. 18대 주임 서석기 신부는 1995년에 사제관과 수녀원의 냉 · 난방 공사를 실시하였다. 20대 주임 박종근 신부는 2002년 1월 26일 마동 본당이 설정됨으로써 본당 관할 구역 중 마동 일부 지역을새 본당에 이관하였다. 한편 1983년 본당에 개설된 성요셉 노동자의 집은 20여 년 동안 전북 지역 노동 사목을 주도하면서 상담을 통한 노동자 권익 보호와 법 제도개선 활동에 노력하였으며, 현재는 비정규직 노동자와외국인 이주 노동자를 위한 사목에 중점을 두어 활동하 고 있다. (⇦ 이리 본당 ; → 전주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전주교구사》 I · Ⅱ, 천주교 전주교구, 1998. 〔白秉根〕
창인동 본당 昌仁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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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창인동 성당과 사제관(1936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