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創造 〔그〕κτίσις 〔라〕Creatio 〔영〕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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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빛이 생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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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빛이 생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든 종속적이든,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도록 하는 것. 세상과 그것의 지은이인 하느님 사이의 지속적인 기본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곧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기원과 근거와 궁극적 목적을하느님 안에 갖는 방식을 표현하는 신학 용어이다. 능동적 의미로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 를 뜻하고, 수동적 의미로는 '창조된 세상 전체' , 곧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창조' 는 '구원' 과함께 한 쌍의 상관(相關) 개념 또는 공속(共屬) 개념을형성한다. 즉 창조와 구원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하나의 신적 행위로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이다. I . 어원과 의미 〔구약성서〕 하늘과 땅, 인간과 사물은 자신의 존재에있어 하느님에게 힘입고 있다. 구약성서는 이런 확신을표현하기 위해 많은 용어들을 사용한다. 곧 하느님은 세계를 '세운다' (זָקוּף), , '고정한다' (לִקְבּוֹעַ). '짓는다' (לִבנוֹת),'형성한다' (נוצר)의, , '만든다' (עֲשׂוֹת). 이런 용어들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행위로부터 취해진 용어들이다.그 밖에도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창조신학의 전문 용어인 동사 '바라' (לִיצוֹר, 창조하다)와 논쟁중에 있는 동사인 '카나' (לְקַבֵּל, 얻다 · 획득하다)가 있다. 먼저 '카나' 를 살펴보면, 셈족 언어들에서 발견되는'카나' 의 공통된 뿌리 〔語根〕는 לְקַבֵּל(얻다 · 소유하다)이다.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 '카나' 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셈족 언어들의 공통된 뿌리(שׁוֹרֶשׁ)의 의미가무엇인지와 함께 문제가 되고 있다. 히브리어 '카나' 는크게 세 가지 의미, 곧 '얻다 소유하다' , '만들다 · 창조하다' , '낳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히브리어'카나' 가 과연 '만들다 ·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는지는 논쟁 중에 있다. '만들다' 또는 '낳다' 라는 의미에서 '카나' 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창세 14, 19. 22 ;신명 32, 6 ; 시편 139, 13 : 잠언 8, 22), 여기서 주어는 항상 야훼이다. 그리고 '바라' 를 살펴보면, 히브리어 동사 '바라' 의뿌리(שׁוֹרֶשׁ)를 한층 더 오래된 셈족의 다른 언어들 안에서 입증하는 일은 문헌상 어렵다. 히브리어 '바라' 의 뿌리는 아마도 고대 남부 아랍어 '짓다' (br') · '건축'(mbr')과 연관될 것이다. 그리고 카르타고어로는 '조각가 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단어들의 의미로볼 때, 히브리어 동사 '바라' 의 뿌리는 아카드어 문헌과우가리트어 문헌에 나와 있는 셈어의 공통된 뿌리인כדי(만들다 · 짓다 · 창조하다)의 용례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 '바라' 는 49번 나온다. 논쟁 중에 있는민수기 16장 30절, 시편 89장 13절과 48절을 제외하고'바라' 는 명확히 유배 시대나 그 후대의 본문들에 나온다. 따라서 히브리어 '바라' 가 유배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신학적 개념으로 구약성서 안에 소개되었다는 주장은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단어의 전사(前史)는 알려져 있지 않다. 히브리어 '바라' 의 적용 범위는 엄밀히 한정되어 있다. 곧 '바라' 는 배타적으로 신적 창조를 가리키는 데에사용된다. 따라서 '바라' 는 특수한 신학적 용어로서, 이미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인간의 모든이차적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의 비교 불가능성을 명확히 표현하는 개념이다. 〔70인역 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 성서는 히브리어 '바라' 를 주로 '크티제인' (κτίζειν)과 '포이에인'(ποιέω, 만들다)으로 번역하였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그리스어 단어들(ἅρχειν, γεννἆν, δεικνὑειν, δε-ικνὑναι, γίνεσθαι, καταδεικνὑναι, κατασκενάζειν)을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70인역 창세기에서 '바라' 는 '포이에인' 과 '아르케인' (ἅρχειν, 시작하다 · 일으키다), '기네스타이' (γίνεσθαι, 존재하게 되다)로 번역될 뿐, 단 한 번도 '크티제인' 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사 (עֲשׂוֹת, 만든다)의 번역어로 흔히 사용되는 '포이에인'이 하느님의 행위만을 배타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크티제인' 이 70인역 창세기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70인역 오경보다 한층 더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70인역 성서의 다른 부분들에서,비로소 '크티제인' 이 히브리어 '바라' 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크티제인' 이 이처럼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새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70인역이 단 한 군데에서도, 그리스사상에서 우주 생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던 '데미우르게인' (δημιουργειν, 제작하다 · 창조하다)이라는 동사를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연관지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70인역 성서가 하느님의 행위와 연관지어 이단어를 사용하기를 꺼린 까닭은, 이 단어가 수공업적이고 기술적인 행동과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질료의존적인 '제작신' (製作神, δημιουργός)의 행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크티제인' 과 그 파생어들은 신약성서에서 창조를 가리키기 위해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들이다. 호메로스(Homeros)에 따르면, '크티제인' 은 본래 '땅 한곳을 거주할 수 있게 만들다' , '정착시키다' 를 뜻한다.이런 의미 때문에 이 동사는 '하나의 도시를 세우다' 라는 뜻을 지니게 되는데,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에 이런 의미로 통상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약성서 저자들이이 단어와 그 파생어들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창조주로,그리고 창조계와 피조물을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단어들이 70인역에서 이미 사용되었고 또 70인역이 헬레니즘 유대교의 언어 관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로 인해신약성서에서 '크티제인' 과 그 파생어들은 하느님과의연관성 아래 창조를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되며, 따라서이 단어들의 주체는 오직 하느님이다.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크티제인' 과 그 파생어들의의미는 다음과 같다. '크티조' (κτίζω)는 '창조하다' 를,'크티스테스' (κτίστης)는 '창조주' (1베드 4, 19)를, '크티스마' (κτίσμα)는 피조물 곧 개별적 피조물(1디모 4, 4: 야고 1, 18 ; 묵시 5, 13 ; 8, 9)을 의미한다. 그리고 '크티시스 (κτίσις)는 '창조' 를 뜻하는데,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창조 행위 곧 하나의 행위로서의 창조(로마 1, 20)를 의미하고, 둘째로 창조된 것 곧 피조물(로마 8, 39 : 2고린 5, 17 : 골로 1, 15 : 히브 4, 13 : 1베드 2. 13)을 의미하며, 셋째로 하나의 포괄적 용어로서창조계 전체 곧 모든 피조물의 총체성(히브 9, 11 ; 묵시3, 14 ; 마르 10, 6 : 13, 19 : 2베드 3, 4)을 의미한다. 〔서양 언어권〕 여러 언어권 안에서 '창조' 라는 개념은각각 여러 영역에서 취해진 채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리스어 성서는 '창조' 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도시를 세우다 · 건설하다' 를 뜻하는 단어인 '크티제인' 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크티제인' 에 상응하는 라틴어인 '콘데레' (condere, 건설하다 · 세우다)보다는 '낳다' 를 뜻하는 라틴어 '크레아레' (creare)를 선택하였다. 현대 서양 언어들에서 라틴 계통의 언어들과 영어는, '창조' (creation)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라틴어 '크레아레' 와 '크레아시오' (creatio)를 넘겨받았다. 이에 반해 게르만 계통의 언어들은 '게슈탈텐' (gestalten, 형성하다 · 만들다)과 연관되어 있는 '창조' (Schöpifung)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이 단어들(gestalten, Schöpfung)은 영어'세이프' (shape, 형성하다 만들다)과 같은 뿌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II . 구약성서에서의 창조 구약성서에서 창조는,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일상의 삶 안에서 경험하는 위기와 혼돈의 문제에 직면한 신앙인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에 근거하여 깊은 성찰 끝에 이르게 된 '신학적설명' (theologoumenon, 신학적 가르침)에 속한다. 〔이스라엘 주변의 창조 신화〕 세상과 인간이 창조신의작품이라는 견해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이집트 도시 온(On, 헬리오폴리스)의 우주 생성론에 따르 면 눈(Nun, 혼돈의 물 · 태초의 바다)에서 나온 고유한 힘에서 태어난 아툼(Atum)이 자신의 정액을 삼킨 다음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성장하도록 함으로써, 공기(Shu)와습기(Tefnut)를 산출하였다. 이 한 쌍의 신들, 곧 '슈' 와'테프누트' 로부터 하늘과 땅이 태어났다. 한편 고대 이집트 도시 멤피스의 종교에 따르면, 프타(Ptah) 신이 심장과 혀를 통해 신들과 생명의 힘들에게 존재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녹로에서 빚어진 숫양 신(神) 크눔(Chnum)의 작품으로 이해하였다. 평화적 특징을 지닌 이집트 우주 생성론과는 달리,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 · 페니키아의 우주 생성론은 투쟁적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신화들에는 하나의 창조신이 우주를 형성하기 위해 혼돈의 힘들과 싸워 이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빌론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따르면, 마르둑(Maruk)은 바다의 괴물인 티야마트(Tiamat)와의 힘겨운 투쟁 뒤에 혼돈에서 우주를 창조해 낸다. 페니키아 종교의 요소를 넘겨받은 카라테페(Karatepe, 소아시아의 도시)와 렙티스 마냐(Leptismagna, 북아프리카의 도시)에서 출토된 명문(銘文)들을 보면, 엘(EI) 신은 가나안의 신들 가운데서 '땅의 창조주'라는 별명을 갖는다. 우가리트 문헌에서도 엘 신은 '땅의 창조주 , '피조물의 창조주 ,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 , '신들의 창조주 · 생산자' 로 불린다. 이에 반해 엘의처(妻)인 아세라(Asherah) 여신은 '신들의 여창조주 · 여생산자' 로 불린다. 우가리트 문헌 중 하나인 <바알 서사시>에는, 바알(Baal) 신이 왕으로서 인정받고 질서와 평화를 상징하는 왕궁을 엘 신의 산 위에 짓기까지 바알이어떻게 바다의 신 얌(Yam)을 정복해야 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이런 창조신화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런 신화가 유일한 창조신의힘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물의 창조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아닐 뿐더러, 마르둑과 크눔에게서 드러나듯이 우주나인간을 만들어 내는 신들마저도 자신들의 기원에 있어서'원 물질' , 곧 모든 존재자의 기초로서 서술되는 '원초적물질' 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에서 창조 사상의 발전〕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라는 것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안에서 매우 오래된 것으로 이스라엘의 전승 안에서 하나의 기본 역할을하고 있었을지라도,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배 전의구절들은 많지 않다. 하느님에게 창조 행위를 귀속시키는 가장 오랜 본문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야훼 전승 문헌(Jahwist=J)이다(창세 2, 4ㄴ-24).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창조 행위의 출발점은 땅의 원상태로 표상되는, 물과 식물이 없는 메마른 사막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창조 행위의 주된 내용은 하느님이 경작지에 물을 대고 정원을 마련하고 땅의 먼지로부터 인간과동물을 빚어 만든다는 대목 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땅의먼지로부터 인간과 동물을 빚어 만든 일은 이집트의 신크눔이 인간을 빚어낸 방식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지어 낸 일은 특별한관찰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2, 22)에 나오는 히브리어 동사 '짓다' (בָּנָה)와 같은 뿌리를 지닌 우가리트어 '짓다' (כּוּן)라는 표현은, 우가리트어로 쓰여진 창조 문헌에 따르면 '지어진 존재들의 지은이' (피조물들의창조주), 곧 인류의 아버지로서의 품위를 지니고 있는 창조신 엘의 별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연관성에도불구하고 야훼 전승 문헌은 인간 창조 이야기(2, 4ㄴ-24)에서 고유한 묘사를 통해 모든 주술적인 것을 하느님의행동에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하느님이 물질에 대한전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도야훼 전승 문헌의 묘사에 따르면, 창조는 신적 본성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의향으로 이루는하느님의 행위이자, 사랑으로 보살피는 하느님의 행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창조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인간에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첫 번째 표징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이사야서 29장 16절, 45장 9절, 64장 7절과 예레미야서 18장 1-6절은 필시 창세기 2장 7절과 연관된다. 창조에 대한 유배 전 예언자들의 언급을 살펴보면, 비록 유배 시대 예언서의 신학 안에 집합적으로 나타나는창조 신학의 논증이 유배 전의 발전된 창조 사상을 전제하고 있을지라도, 유배 전의 예언자들이 창조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창세기 2장 외에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예레미야가 야훼에 의한 세상의 창조에 대해 언급하 였다(27, 5 : 31, 35 : 38, 16). 창세기 8장 22절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예레미야서 31장 36절은 야훼에 의해창조된 사물들의 질서의 영속성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산헤립의 침공을 계기로 역사도야훼의 작품이고, 오래 전에 미리 그분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사상을 정형화하였다(22, 11 : 37, 26). 그 밖에도사무엘 상권 2장 8절이 창조에 대해 시사해 주고 있고,창세기 14장 19절에서 저자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야훼' 와 동일시한 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을 하늘과 땅의 창조주 로 묘사하는 대목은 확실히, 가나안인들이 가졌던 창조신에 대한 견해를 반영해 주고 있다. 유배 시대부터 창조 사상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유대 민족의 종교적 사고 안에서 하나의 큰 역할을 하였다.일련의 시가 본문들은 가나안과 바빌론의 신화로부터 나온 표상들을 사용하여 창조를 투쟁으로, 곧 하느님이 태초의 물과 벌인 대결로 묘사해 놓는다. 태초의 물은 소름끼치는 괴물로 간주되며, 라합 또는 레비아단이라고불린다(욥기 3, 8 : 7, 12 : 9, 12 : 26, 12-13 : 시편 74,13-14 : 89, 10-11 : 이사 51, 9). 그리고 마르둑(<에누마엘리쉬> 4, 7-9)이 괴물 티야마트를 두 동강 내어 그 시신의 반쪽으로 하늘 위에 바다를 만든 다음 자물쇠를 채우고 빗장을 질러 하늘 위의 물을 막아 놓았던 것처럼, 야훼도 또한 바다를 가른 다음(시편 74, 13 : 이사 51, 9) 빗 장과 대문을 세워 바다의 도도한 파도를 제압한다(용기38, 10). 척도와 균형과 조화에 관한 지혜 문학 고유의 감각과실천적 의미를 바탕으로, 지혜 문학은 창조를 건축술의작업으로 즐겨 이해한다. 인격화된 지혜인 하느님의 지혜는 창조계의 모든 부분들에, 곧 태초의 물, 산, 궁창,구름, 땅의 기둥들에 적합한 자리와 꼭 맞는 규모와 필요한 안정성을 준다(잠언 3, 18-19 : 8, 22-31 ; 지혜 7, 21 ;9, 9 : 집회 24, 1-6). 이와 마찬가지로 욥기는 땅의 창조를 건물의 건축으로 묘사한다. 곧 자리가 측량되고 기초가 다져지고 주춧돌이 놓여진다. 이와 병행하여 땅의 내부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거친 물흐름을 거슬러 제방을쌓는다는 표상이 발견되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그런 물길을 온전히 제한한다. 이 표상은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시편 104, 8-9 : 148, 5-6 ; 잠언 8, 29 : 예레 5, 22). 이런사고 방식의 가장 완전한 표현은 창세기 1장(1, 1-2, 4ㄱ)의 창조 설화에서 발견된다. 〔창세기 1장과 제2 이사야서와 지혜 문학의 창조 신학〕 모세 오경, 예언서, 성문서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성서는 각 부분을 대표하는 창조 신학을 갖고 있다. 창세기 1장 : 사제계 문헌(Priesterschrift = P)의 창조설화(창세 1, 1-2, 4ㄱ)에 따르면, 하느님은 질서 정연하게 짜여져 있는 여섯 단계의 건축 과정으로 혼돈에서 우주를 창조하였다. 들판의 풀줄기에서 하늘의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작업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 4ㄴ절 이하와는 달리, 이 대목에서 하느님은 빛 ·땅 · 식물들을 현존재로 불러내는 일을 말씀만으로 넉넉히 해낸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들은, 특히 저주와 축복이문제가 될 때 말이 큰 작용력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한번 발설된 주술의 말인 주문은 그 자체 안에작용력을 지니므로 더이상 발설한 이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과 예언자들의 신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고 탁월한신적 구원 의지로 경험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신적 구원의지는 하느님에 의해 자유로이 선택된 이스라엘을 향해있고 또 모든 저항을 거슬러 관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사제계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것이 우주의 성립과발전에 관계될 때에도, 이미 잠재적으로 현존해 있는 어떤 것을 주술을 통해 불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능하고 자율적인 의지의 한량 없는 작용력의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결국 창세기 1장에서 한번발설된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은 채 항구히 계속되는 창조 질서의 법칙 내지 세계 질서의 원인이 된다. 곧낮과 밤의 변화는 중단되지 않게 항구히 설정되며(1, 3-5), 땅은 단 한 번으로 영구히 식물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1, 11), 해와 달은 주기적으로 끊임없이움직이는 진행 과정을 시작한다(1, 16-18). 그런데 사제계 저자는 하늘 창공의 두 큰 빛들과 야생동물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말씀하심' 에 대한 언급 곁에 하느님의 '만드심' 에 대한 언급을 병행한다(창세 1,14-16. 24-25). '말씀하심' 에 대한 하느님의 '만드심' 의이런 병행(Parallelismus)은, '말씀하심' 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명확하게 하고 심화하는 의미를 지닌다. 끝으로 큰바닷괴물들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더 나아가창조계 전체의 창조에 대해서 사제계 저자가 사용하는전문 용어 '바라' 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의 기적적이고초월적인 면을 강조한다. 창세기 1장이 선포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세계는 자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유롭고 탁월한 행위에 힘입고 있다. 곧 세상은탁월한 능력을 지닌 하느님이 자유로이 말을 거는 한에서 존재하므로, 신들의 발생 과정에 따른 자연적 · 필연적 결실이 아니다. 둘째, 세상은 좋은 것이다. 곧 세상은, 고대의 우주 생성론들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선의 원리와 자립적인 악의 원리 사이의 만남과 투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근원이다. 셋째, 세상은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해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자 창조 과정의 목적으로서, 자신의 주위 세계를 돌볼 책임이 있다. 제2 이사야서 : 제2 이사야서(40-55장)에 있어서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으로, 신학적으로 함께 속해 있는한 쌍의 공속(共屬) 개념이다. 왜냐하면 창조와 구원, 이두 개념은 제2 이사야의 신학 안에서 역사를 매개로 하나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신학 안에서 창조는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주된 역할을 한다. 곧 야훼는 "모든 것을 만든 하느님"(이사 44, 26)으로서, 혼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땅을 굳게세우고(45, 18), 이스라엘을 예배 공동체로 형성하고(43,21),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일의 창조를 지금 인간 역사 안에 시작하고 있는 분이다(48, 6-7). 다시 말해야훼는 비교할 수 없는 분,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는 유일한 하느님(45, 5), 시작이자 마침인 분(48, 5)으로서 창조자이자 구원자이다. 야훼가 온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사실은 제2 이사야에게는 논쟁할 여지가 없는 명확한 공리(公理)이다(40, 22.26 : 43, 1. 7. 15 : 44, 24 : 45, 7. 12. 18 : 54, 5). 그분은세상 끝까지 창조한 분이다(40, 28). 제2 이사야는 심지어 어둠과 비구원까지도 야훼의 창조 능력에 귀속시킨다(45, 7). 야훼의 이 창조 능력은 세상의 기원과 보존 안에서 작용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구원의 기적, 곧 새로운 창조 안에서도 작용한다(41, 20 ; 45,8 ; 48, 7). 야훼에 의해 이룩될 새로운 출애급으로서의구원 사건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하였던 차원을 완전히 능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 이사야는이 새로운 일을 예전의 일들을 기초로 묘사하는데, 그 까닭은 예전의 일들, 곧 출애급 사건과 이를 통한 이스라엘백성의 창조는 야훼가 현재 행하고자 하는 새로운 일에대한 하나의 역사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제2이사야는 갈대 바다의 통과, 곧 출애급 사건을 '혼돈의힘들에 대한 신적 용사의 승리' 라는 옛 창조 신화의 언어로 표현한다. 이로써 제2 이사야는 역사 안에서 구원능력을 발휘한 야훼 하느님과 한처음에 창조 능력을 떨친 하느님 그리고 새로운 구원 사건을 창조할 분을, 같은한 분 하느님으로 고백한다. 다시 말해 제2 이사야는 야훼가 행할 새로운 일의 창조, 곧 새로운 출애급 사건을,야훼가 이미 행하였던 역사적 출애급 사건의 더욱 웅장한 재현이자 한처음 천지 창조의 절정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제2 이사야에게 있어서 창조와 구원은 역사를 매개로 하여 하나로 결합된다. 제2 이사야서 안에 나타나는 두 가지 사실, 곧 야훼가세상 끝까지 창조하였고(40, 28) 모든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땅을 빚어 만든(45, 18) '창조주' 라는 사실과 야훼가역사 안에서 구원을 이룩하였고 또 새로이 구원을 이룩할 '구원자' 라는 사실은, "모든 민족들이 돌아가야 할 유일한 하느님이 다름 아닌 야훼" 라는 선포로 수렴된다(45, 22). 여기에는 신학적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창조 신앙이 지니고 있는 완전한 종합 명제가 들어 있다. 즉 그종합 명제란 이스라엘이 예배하고 증언하는 하느님은 인간이 살아가도록 세상을 만들고 혼돈의 위협에서 질서를보존하는 창조의 하느님이자, 노예살이의 혼돈에서 한백성을 창조하였고 지금도 그 백성을 재창조하는 구원의하느님이며, 더 나아가 이런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미치게 하는 온 인류의 보편적인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바빌론 유배' 라는 역사적인 비극의 시대에 하느님이 제2 이사야에게 준 소명은 다름 아닌 '새로운 창조' , 곧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창조할 새로운 일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창조' 라는 주제는 후대에 제3 이사야(이사 65, 17-25)와 묵시 문학 안에서 더욱 발전하였고, 신약성서 안에서 다시금 새로운 어조로 전개되었다. 지혜 문학 :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 안에는 구원사적인관점 곁에, 한층 더 우주론적인 관점이 발전하였다. 이우주론적 관점의 발전은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지혜 문학과 헬레니즘적 지혜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우주, 곧 세상은 장관이 펼쳐지는 곳으로서(읍기 36, 25-26), 인간의 탐구 대상이다(지혜 7, 17-20). 세상은 놀라움과 경탄을 불러일으킨 채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욥기 28, 28), 또 찬미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시편 8: 19 : 24 : 33 : 93 : 96 : 104 : 148 ; 집회 42 ; 다니 3,52-54).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 안에서 창조는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며, 신앙의 절대적 근거가 된다. 심지어 현존하는 세상은 거의 하느님 존재의 한 증명으로 자리 매김된다(지혜 13, 1-9). 그런데 지혜 문학 안에서, 창조와 구원은 역사를 매개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매개로 결합된다. 인격화된 지혜(잠언 8, 22-31 : 31 : 집회 1, 1-10 : 24, 1-34 ;지혜 7, 22-8, 1 : 9, 9-18)가 창조의 첫 작품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다. 그래서 이 지혜는 지혜서에서 위대한 장인으로 묘사된다(지혜 7, 21 : 8, 6). 그리고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인 지혜는 창조된 것들 위에 부어지며(집회 1, 9-10), 따라서세상의 창조 질서 안에는 하느님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다른 한편 이 지혜를 알고 이 지혜를 따라 사는 일은 생명과 구원을 의미하는데, 그 까닭은 지혜가 인간을 위한하느님의 뜻으로서 생명과 구원의 토대가 되는 율법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집회 24, 1-34 : 바룩 4, 1). 이처럼 창조와 구원은 지혜 문학 안에서 지혜를 매개로 연결된다. 오늘날 창조를 하느님에 관한 특수한 증언의 자리로표현하는 지혜 문학의 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증가함에 따라 지혜 문학의 신학을 가장자리로 내몰던 경향은 쇠퇴하였으며, 이로써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 와 '자연에 있어서 하느님의 창조 행위' 라는 이분법은 극복되었다. 사실 창조 신앙과 구원 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지혜 문학의 신학 안에 '함께 속' 〔共屬〕하여 있다. 〔창조의 특징〕 구약성서의 창조 신학은, '산출' (産出,productio)의 관점 아래 하느님에 대한 항구한 의존성에따른 시간적 차원의 시작이나 원인적 차원의 시작을 고려하는 형이상학적 차원을 일차적으로 문제삼지 않는다.사실 하느님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였다는 것은 고대근동의 일차적 표상도 아니고, 이스라엘 창조 신앙의 일차적 표상도 아니다. 그보다 구약성서의 창조 신학은 세계와 인간의 창조를, 한처음에 창조주이자 왕인 하느님에 의해 세계와 인간이 그분과 갖게 된 좋고도 파괴될 수없는 생명의 관계로 규정한다(창세 1, 1 ; 시편 93 ; 104).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창조와의 관련성에 있어서 '무(Nichts)-존재자(Etwas, 어떤것)' 라는 대당(對當) 개념보다는 '혼돈-우주' , '죽음-삶 이라는 대당 개념들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즉 어떤 것이 창조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무엇이 왜 · 무슨 목적으로 창조되었고 또 창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그들의관심사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관심사를 자신들이 이해할 수있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창조이전 세계의 상(像, imago)들을 이야기로 그려냄으로써세계의 시작을 창조 이전의 세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그리고 세계를 하느님의 창조로 표상할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혼돈의 상들이 바로 그런 창조 이전 세계의 상들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혼돈의 상들인네 가지 요소들은 창조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이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요소들이며 창조를 통해 하느님에 의해 손질되는 것들이다. 그 네 가지란 꼴을 갖추지못하고 비어 있는 땅(시편 107, 40 : 욥기 6, 18), 위협적인 비구원의 힘으로서의 어둠(욥기 3, 5 ; 10, 21-22), 원해(시편 69, 3. 16 : 요나 2, 6), 물(고대 바빌론의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단물과 짠물이라는 두 개의 혼돈적 형태의 '물' )이다. 결국 창조주 하느님은 이 세계와 대립되는세계인 '혼돈' 으로부터 이 세계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우주를 질서지어져 있는 생명의 집으로 만들고생명체로 가득 채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땅이 존재하는 동안, 땅은 '혼돈과 우주' . '죽음과 생명' · '자기 파멸과 자기 질서화' 의 '상호 작용' 이라는구약성서의 창조 신학적 도식들을 따를 것이다. 그러면서도 땅은 또한, 창조주 하느님이 나누어 주는 생명의 힘의 영역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의행동에만 적용되는 동사 '바라' 의 뜻이 말해 주듯이, '살아 있는 것을 창조한다' 는 것은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그분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갖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창조계 안에 충실과 자비로 헌신적으로 머물면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피조물에 대한 의무를 지운다.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이런 '자기 매임'(Selbstbindung)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한처음 창조 행위의본질을 구성한다. 이 점은 창세기 2-4장에서, 그리고 특히 창세기 6-9장의 홍수 설화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홍수 이야기는, 창조주 하느님의 심판으로 받게 될 징벌에 의해 언젠가 하나의 우주적 파국이 닥칠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즉 홍수 이야기는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일찍이 한처음에, 곧 신화적 시간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과 그때 창조주 하느님이 충실과 자비로 창조계에대해 스스로 의무를 지우는 창조주로서의 '자기 매임' 을강화함으로써(창세 9, 8-17) 창조주인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익히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홍수설화 안에는 신학적 범주로서의 창조의 특징이 표현되어있다. 곧 창조의 특징이란, 창조주 하느님이 인류가 살고있는 땅에 대해 충실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며, 원칙에 있어서 그리고 철회할 수 없게 이 땅과 인간을 긍정적으로수락한다는 사실이다. 〔창조 신학의 원초적인 사회학적 배경〕 "창조주 하느 님이 인류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해 충실과 사랑의 관계를가지며, 하느님이 원칙에 있어서 그리고 철회할 수 없게이 땅과 인간을 긍정적으로 수락한다" 라는 차원에서 볼때,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와 창세기 6-9장의 홍수 설화는 하나의 공속적인 변증법적 전체 진술을 형성한다.이런 전체 진술은 신화와 반(反)신화 사이의 긴장으로이해될 수 있다. 우선 창세기 1장은 존재하고 있고 또 존재해야 하는 것을 합법화하고, 창세기 6-9장은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불법화한다. 그리고 이로써 구약성서 창조 신학의 원초적 '사회학적 배경' (Sitz im Leben, 삶의 자리)이 파악될 수 있게 된다. 구약성서 창조 신학의원초적 삶의 자리는 고대 근동의 종교사 안에 깊숙이 뻗쳐 있는 창조 신학적 유래와 연관되어 있다. 고대 근동 창조 신화의 중요한 삶의 자리는 농경 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새해의 시작과 한 인간의 출생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집합적 또는 개별적 삶의 역사 안에는 비구원적 계기와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상황들 안에서 새해와 갓 태어난 새 인간에게 근거와 의미를 주기 위하여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의 신화가 낭송되며, 그때 좋은 시작과 함께 신 또는 신들에 의해 이룩되는 세계의 질서와 삶의 질서에 새해와 새 인간을 충만한구원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아주 오랜 옛날에 신화는 제의(祭儀,cultus) 안에서 낭송되고 제의의 의식(儀式) 안에서 모방됨으로써 그 생생한 힘을이어 나갔다. 이런 창조 신화와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구약성서의 창조 신학은 세상과 인간의 좋은 시작에 관한 말씀인창조 이야기를 통해, 혼돈의 위협으로부터 하늘과 땅을창조한 이스라엘 하느님의 능력과 충실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일상의 삶에서 혼돈의 경험들에 직면해 있는 신앙인들에게 삶의 불안과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고 방지할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일상의 삶 안에서 겪는 혼돈의 경험들이란, 정치 · 사회 공동체적인 파국 및 개별적인 불행에 따른 고통과 질병 등의 경험들을 가리킨다. 우리 인간이 일상의 삶 안에서 겪는 이런 혼돈의 경험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설화안에서는 네 가지 혼돈의 상들로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다(1, 2). 따라서 구약성서 창조 신학의 고유하고도 원초적인 '사회학적 배경' 에는 하나의 성서적 변신론의 문제가놓여 있다. 이렇게 볼 때 사제계 저자(창세 1장)는 제2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유배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하게 된 혼돈의 문제에 대해 구원론적으로 의도된 이런 창조 신학으로 이 문제에 답변함으로써 그들을 사로잡았던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해 신명기 전승의 신학이 죄ㅡ하느님의 진노ㅡ하느님의 심판ㅡ회개' 라는 범주들을 통해 개별적이고집합적인 파국들을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던 것과는 달리,제2 이사야와 사제계 저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인 이스라엘 하느님의 능력과 충실성에 기댐으로써 이스라엘이당면해 있던 혼돈의 경험들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시도하였던 것이다. Ⅲ . 신약성서에서의 창조 신약성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피조성(被造性)에 대한 앎을 구약성서와 함께 공유한다. 〔공관 복음서〕 예수의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임박한 하느님 나라는 그가 선포한 비유들 안에서뿐 아니라그가 행한 치유와 구마 안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며, 신약성서의 창조 신앙은 임박한 하느님 나라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치유 행위 및 구마(驅魔) 행위는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를 보여 주는 표징(루가11, 20 ; 마태 12, 28)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의 손상된 창조의 회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는 표징(마르 1,23-28 : 9, 14-29)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의 경고를담고 있는 예수의 말들이 창조계의 실재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면 걱정에 관한격언(루가 12, 22-31 ; 마태 6, 25-33)에서, 예수는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계와 가까이 있으면서 그 피조물들을 돌본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청중에게 커다 란 도움을 줄 수 있는 권고를 하였다.그리고 하느님이 선인과 악인 위에 태양이 떠오르게 하고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 위에 비가 내리게 한다(마태 5,44-45)는 사실이, 예수 선포의 중심에자리잡고 있는 실천적 요구인 원수 사랑을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이런창조 신학과의 연관성에서 소외된 사회 계층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우선적관심도 이해될 수 있는데, 그 까닭은소외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 안에는 어지럽혀진 창조 질서가 반영되어있으며, 손상된 창조 질서의 회복이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루가7, 34-35 : 10, 21 : 마태 11, 19. 25-27). 그 밖에도 예수는 창세기 1장 27절을 인용하면서 창조의 시초부터 있어 온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하느님의창조 질서의 표현으로 강조하였다(마르10, 6-9). 〔요한의 복음서〕 요한 복음서 머리말에 나오는 진술(1, 1-3)은 신약성서의 창조 신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지혜 문학의 영향 아래 요한 복음서 머리말에는 로고스(λὁγος)가 등장한다. 로고스는 한처음부터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과함께 있었으며, 창조에 있어서 중개자의 기능을 하였다. 곧 하느님의 창조행위인 천지 창조는 로고스를 통해 중개되며, 로고스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게 된다. 물론 로고스가 하 느님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로고스는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질서 짓는 분으로서 그분 안에 빛과 생명이 있다(1, 4). 그런데 창조의 중개자인 로고스에 의해주어지는 이 생명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 , 곧- 구원으로정의된다. 결국 창조의 중개성과 구원은 그리스도론적해석 안에서 결합되며, 요한 복음서 머리말의 창조 신학적 기초는 이어지는 요한 복음서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론을 위해 자리를 내놓는다. 그러므로 '세상' (κόσμος),'생명' (ζωἡ) , 빛 (Фῶς)과 같은 개념들은 창조론적 함의(connotatio ctisiologica)가 아닌, 그리스도론적 함의(connotatio christologica)를 지닌다. 사실 요한 복음서 머리말에서 로고스가 창조를 중개하는 분으로 나타나는 데반해, 이어지는 요한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는 성부의 역사적 계시로서 생명을 열어 보이는 분으로 나타난다. 〔바오로 서간〕 바오로는 창조와 창조계를 하느님의 행위와 작품으로 보는 구약성서적이고 유대교적인 기본 이해에서 출발한다. 바오로는 하느님을 "없는 것을 불러내시어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하느님" (로마 4, 17)으로 고 백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한 분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또 우리는 그분을 지향하고 있다"(1고린 8, 6)라고진술하였다. 더 나아가 바오로는 같은 구절(1고린 8, 6)에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창조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향해 열어 놓았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의 창조주인 한 분 하느님에 대한 고백에이어서, 창조의 중개자이신 한 분 주님에 대한 고백을 함으로써 바오로는 같은 한 구절 안에다 두 개의 신앙 고백,곧 창조주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창조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결합시켜 놓는다. 하지만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선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되며, 그런 다음에 창조의 주님으로 고백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님인 한에서 창조의주님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의 창조론은 그리스도론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바오로의창조론이 그리스도론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은,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새로운 창조'내지 '새로워진 인간 실존' 의 주제를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바오로는 '새로운 창조' 의 주제를 이사야 전승, 곧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이사 43, 19 ; 65, 17 : 66, 22)로부터 취하여 '새로운 창조' 의 개념을, 부패에 종속되어 있는 피조물을 뜻하는 '옛 창조' 에 대한 반립 명제의의미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쿰란 공동체(1QH 3, 21-22)와 디아스포라 유대교(Diasporajudentum)가 '새로운 창조' 를 '우주론적' 으로 파악하였던 것과는 달리, 바오로는 '새로운 창조' 를 한 개인 실존의 전적인 새로워짐을언표하는 '구원론적 범주' 로 파악하였다. '새로운 창조' 라는 말은 바오로 서간에 두 번 언급된다(2고린 5, 17 ; 갈라 6, 15). 이 두 구절에서 새로운 창조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열리게 된, 그리고 믿음과 세례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명의 충만한 실재' 를 가리킨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원적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는,'성자의 파견' 내지 '하느님이 예수를 주님으로 부활시킨 사건' 이 하느님의 행위이듯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행위이며, 부활한 그리스도는 이 새로운 창조의 중개자이다. 결국 바오로에 따르면,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새로운 창조' 의 중개자로 고백되는 한에서 그리스도는 또한 '한처음의 천지 창조' 의중개자로 고백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의 창조론은구원론적으로 정향된 그리스도 중심적 창조론이다. 〔바오로 후 전승〕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시기적으로 바오로 서간과 요한의 복음서 중간에 위치해 있 .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1, 15-20)는 요한 복음서 머리말처럼 창조를, 창조의중개자인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킨다. 곧 그리스도는 모든피조물의 원초적 근거로서 모든 것을 존속시키며, 창조물을 파멸로부터 안전하게 한다(골로 1, 15-17). 그리고그분은 만물의 화해자이자 새로운 창조를 위한 보증이다. 그러나 바오로의 전승 안에 충실히 머물지만 바오로 의 종말론을 손질하고 있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창조는 인간학적으로 그리고 교회론적으로 해석되며, 공동체는 '새로운 창조' 의 의미에서 구원된 피조물의 대표로 해석된다(1, 18. 21-23). 에페소인들에게 보낸편지 2장 10절에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13절과의 관련 아래 이런 공동체의 피조성이 더욱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오로의 전승에 좀 더가까이 머물러 있다면, 사도 행전은 이로부터 좀 더 멀리나아간다. 왜냐하면 사도 행전은 아레오파고 연설(17,22-31)을 통해 바오로를,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창조 진술과 스토아 학파의 신관 내지 범신론이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인물로 묘사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행전 17장 28절에서 바오로에의해 인용되고 있는 문장은 본래 범신론적인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의 아레오파고 연설을 통해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창조 진술과 스토아 학파의 신관이조리 있게 연결됨으로써, 하느님은 우주를 존재로 불러내고 또 당신의 창조물을 지탱하며 인간 곁에 가까이 있는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묘사된다. 그리하여 하느님 인식에 이르게 하는 창조계의 기능과, 범신론적이고 우주론적인 표상들에 대한 사상적 접근(사도 17, 27-29)은 함께 성서적 창조 신앙 안으로 들어간다(사도 17, 28-29 ;창세 1, 27). '창조의 중개자 그리스도론' 의 맥을 이으면서도 다른형태를 보여 주는 독자적인 것으로는 요한의 복음서 1장1-3절과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5절 외에도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편지는 요한의 복음서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와마찬가지로 헬레니즘적 유대교의 지혜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다. 창조 진술에 대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편지의 기본 노선은 두 개의 조망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자신의 힘찬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는 창조 중개자로서의 그리스도(1, 2-3)에 대한 조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보이는 것이 생겨났다(11, 13)는조망이다. 〔요한의 묵시록〕 요한 묵시록이 새로운 창조로서의 종말을 겨냥하여 수신자로 하여금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의세력에 의해 겪게 되는 현재의 곤궁을 극복하도록 해 주려는 의도를 갖고 쓰여졌다는 점에서, 창조의 주제는 요한 묵시록 안에서 시종일관 긴장 속에 전개된다. 그러나요한 묵시록은 창조 자체를 주제화하여 표현하는 것이아니라, 인간과 세계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하느님의 당연한 권리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리고묵시 문학적 종말의 기다림 안에서 다가오는 심판을 '창조의 회복' 으로 전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상(像, imago) 또는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하느님 상을 주제화하여 표현하였다(17-19장). 결국 요한의묵시록에서 새로운 창조로서의 종말론적 완성은, 새로운천지 창조를 의미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과 '새 예루살 렘 의 환시(visio) 안에서 인상 깊게 표현되어 있듯이(21-22장), 모든 것을 종결하는 신적 창조 행위의 실현이다. IV . 조직 신학에서의 창조 조직 신학에서 '창조' 는 관계 개념으로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자유로운 연관성 아래 세상이 지속적으로 하느님과 갖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기본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신학적 개념〕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기본 진술로 시작된다. "한 분이신 하느님, 전능하신 성부, 하늘과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DS150). 이 신앙 진술의 구조에서 드러나듯이 신앙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사태를 향해 방향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인격적 실재인 하느님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다. 인격적 실재인 하느님에 대한 이런 신앙은 그분의 존재와 가장 탁월한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또하느님이 계시한 바를 믿는 것을 포함하므로, 이런 위격적 하느님 신앙의 빛 안에서 신앙인은 세상을 창조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인격적 관계는역사적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에 뿌리를두고 있다. 그 때문에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야훼 처바오트' (, 군대의하느님이신 주)의 그리스어 번역어인 '전능하신 하느님'(θεός παντοκράτωρ) 곧 구원사에 있어서 계약의 하느님을, 세상과 인류의 보편적인 창조주 하느님과 동일하게여긴다. 다시 말해 노예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킨하느님, 곧 계약과 율법의 하느님이자 메시아를 약속하신 하느님은 가장 탁월한 능력을 지닌 창조주 하느님과동일하다. 여기서 가장 탁월한 능력의 창조주란, "하늘과 땅"(창세 1, 1)을 질서 짓고 이룩한 분으로 모든 인간과 민족의 하느님이자 아버지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창조와 계약의 이 하느님은, 그분이 "당신 영광의 계시를위해"(이사 66, 19)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과 함께 종말의때에 구원 공동체 안에 모을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에 있어서 세상의 완성자,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이사65, 17)에 있어서 세계의 완성자인 그 하느님과 또한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역사와 분리된 채 오직 자연에서 비롯되어 이루어진 신앙이 아니다. 사실 창조주이자 구원자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역사와 우주 안에서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능력에 대한 하나의 기본 경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기본 경험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근원에 대한 지평' (protologia, 始原論)과 '모든 것을종결하는 세계 완성에 대한 지평' (eschatologia, 終末論)이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인격적 하느님 경험의 한가운데에서부터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과 세계의 초월적 근원이자 초월적 목적으로 드러낸다.그리고 끝내 그리스도 사건의 빛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 은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함으로써당신의 정체를 온전히 드러낸다. 더 나아가 이런 창조 신앙 안에서 그 이상의 측면들이 발전하게 된다. 즉 창조의중개자로서의 영원한 말씀, 근원과 목적으로서의 삼위하느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완성 그리고창조와 종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그런 측면들이다.결국 창조 사업은 성부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서로 친교를 이루는 성부 · 성자 · 성령의 공동 행위이다. 곧 삼위하느님은 하나의 단일한 창조 행위의 원리이다. 〔정 의〕 창조에 대한 전통적 진술은 다음과 같다. "창조란 각 실체에 따라서 무(無)로부터 사물을 산출하는것이다" (Creatio est productio rei secundum totam substantiamex nihilo). 이 정의에서 '사물의 산출' (productio rei)이라는말은 결함이 있는데, 그 까닭은 이 말이 배타적으로 시작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비인격적 특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로부터' (ex nihilo)는 마치 무가 창조를 앞서는 것처럼 무를 실체화할 오해의 소지가 있다. 또 각실체에 따라서' (secundum totam substantiam)는 오직 정적인 실체만이 하느님의 창조 행위일 뿐이며, 역동성과 완성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아닌 것으로 비침으로써 창조의 의미가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오히려 창조 개념은세계의 시작뿐 아니라 그 완성까지 세계의 전 실재를 포괄하며, 아울러 세계의 정적인 존재뿐 아니라 세계의 역동성을 포괄한다. 오늘날 창조론에서 창조에 대한 진술은 주로 "인격적실재로서의 지은이(auctor)" 개념(P. Smulders)이나 "지속적인 기본 관계" 개념(K. Rahner)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격적 범주들은 창조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는 인격적 실재인 하느님의 역동적 행위이고, 또 창조의 충만함은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피조물인 인간 안에서 명확해질 수 있으며, 인간은 하느님의창조물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격적 지은이의 개념이 원인성의 개념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는 인격적 지은이의 개념 안에는 관계의 개념이 또한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격적 실재또는 위격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관계 존재, 곧 원초적으로 관계 안에 존재하며 또 끊임없이 관계를 이룩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는 세상과역사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자유로운 연관성 안에서세상이 지속적으로 인격적 지은이인 하느님과 갖는 기본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즉 창조는 하느님에 대한 세상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관계를, 모든 것이 비롯된'근원' 이자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근거' 이며 모든 것을완성하는 목적' 으로서 규정하는 관계 개념이다. 이런 "인격적 실재로서의 지은이" 개념과 "지속적인기본 관계" 개념을 토대로 창조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수 있다. 곧 창조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 인격적 실재인 하느님과의 기본 관계 안에서 비롯되고 지탱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모든 것의 지은이인 하느님의 이런 행위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호의적 행위임을 의미한다. 이 진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모든 것의지은이인 하느님은 순수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인격적인 구원자 하느님이다.이것은 창조가 하나의 자발적인 행위로서 주도적인 신적사랑의 행위 이외에 다른 어떤 근원 및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정의(DS 3002, 3025)는 모든 실재가 신적 사랑의 순수한 주도성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이 사랑은 대상을 전제하는 것이아니라 대상을 일으키며, 또 그 대상을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둘째, 하느님의 창조 대상은 전적으로 모든 차원 안에있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전적으로' 라는 말은 '무로부터' 라는 말의 긍정적 의미이다. 즉 모든 실재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행위로부터 나오고 하느님의 행위에 감싸여있다. 그리고 '모든 차원' 이라는 말은 시작과 종말의 단일성, 발전과 완성의 단일성 그리고 물질적인 피조물의단일성과 정신적 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가리킨다. 이런 '전적으로' 와 '모든 차원' 이라는 의미에서 세상과 그것의 지은이인 하느님의 기본 관계는 근원이자근거이며 목적으로 지속된다. 그런데 셋째,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연(natura, 본성)으로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소여성(所與性, data)으로서 이해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격으로서 곧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과자신의 주위 세계를 자유로이 긍정하고 회복하고 완성하는 인격적 존재로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초월하는 정신적 존재이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전통적표상과는 달리, 창조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 안에서 세상이 또한 창조되고 있고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즉 하느님과 피조물사이의 지속적인 기본 관계는 그분의 창조 사업에 협력 하는 인간의 자유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의 인격적 지은이인 하느님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향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호의적 행위' 이다. 〔목적과 동기〕 전통 신학에 따르면, 창조의 목적은 주관적 목적(finis operantis)과 객관적 목적(finis operis)으로나뉜다. 창조의 주관적 목적은 하느님 편에서의 '창조의동기' 를 말하고, 창조의 객관적 목적은 피조물 편에서의'창조의 목적' 을 의미한다. 하느님 안에는 하느님을 창조로 이끌어야 했던 어떤필연성도 없다. 곧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서 창조를 필요로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창조가 그분 자신에게아무런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계는 그분에게 무조건적인 가치를 지니며, 그 자체로 사랑받는 것이 된다. 바로 그 점에서 하느님은 세상에 대한 자유로운'자기 매임' (Selbstbindung) 안에서 세상과 인간에게 의존한 채 창조 사업을 계속 수행한다. 따라서 창조의 동기는하느님이 자신의 선을 피조물과 함께 나누려는 하느님의관대함(generositas, 아량), 곧 거저 주고자 하는 하느님의사랑이다. 이런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인 하느님은 유한한 존재들이 당신의 고유한 선에 참여하도록 그것들을존재로 불러낸 것이다. 그래서 쾰른 관구 공의회(1860)는 창조의 동기를 "그분의 절대적인 선성(善性)의 사랑"(amor bonitatis suae absolutae)이라고 표현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사실을 "하느님이 자신의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나 자신의 완성을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피조물들에게 베푸는 선익을 통해 하느님의 완전함을 현시하기 위함"이라고 기술하였다(DS 3002). 이렇게 볼 때 창조의 목적은 창조계의 완성, 특히 인간의 완성과 하느님의 영광이다. 창조의 목적이 무엇보다도 인격적 존재이자 공동체적 존재인 인간인 까닭은, 인간만이 홀로 세계의 피조성을 초월하고 피조물로서의자기 인식의 빛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인격적 상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역사의 과정 안에서우주를 자신에게로 모은 채 자기 자신을 자유 안에서 되찾고자기 자신의 온 힘과 세상의충만한 힘으로 하느님의 창조말씀과 창조 행위에 응답할 수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성안에서 모든 창조물은 자신의의미의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 실존의 충만성,곧 인간의 완성은 하느님의 영광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또 그런 자신 안에서 더나은 세계를 실현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창조주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곧인간이 하느님에게 힘입어 자유로운 자기 실현과 완성에이르는 한에서 이것은 또한 인간이 하느님에게 영광을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의 목적은인간의 완성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이다. 이레네오(130/140?~202?)의 표현대로 "살아 있는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다" (Gloria Dei vivens homo : 《이단 논박》 IV,20, 7).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하느님 영광을 반영한 결정체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절정이며 창조의 목적이다(골로 1, 16).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업적에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긍정이자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충만한 긍정이다(2고린 1, 20). 〔과제와 질서〕 창조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이다.이런 자유의 행위에 의해 하느님은 인간을 감싸고 있는세계를 창조의 절정이자 창조 과정의 목적인 인간에게주며, 이때 창조는 하나의 선물이자 하나의 과제로 주어진다. 곧 창조는 하느님의 선성(bonitas)의 선물이자, 인간이 완성을 목표로 하여 수행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다. 따라서 '자연' (natura, 본성)이라는 개념과는 달리 '창조' 라는 개념은 하나의 실천적 특성, 곧 과제 수행적 특성을 갖는다. 곧 인간은 자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창조계를 돌볼 책임이 있다(창세 1, 26 : 2, 15). 물론 책임은 권한을 수반한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창조의 과제를 부여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수임자' (受任者)로서, 자연의 사물들을 기술과 문화를 통해 손질하여그것들을 사용하는 권한도 함께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터인 환경을 파괴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창조계를 계속 발전시킴으로써 창조주의 창조 사업에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이 현재 세대의 복지를 위해서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 세대의 복지를 위해서도 책임을지고 전(全) 창조계의 지속적인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투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늘날, 특히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신학적 문제 의식안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즉 창조의 개념으로 '세상의 시작에 대한 하나의 설명' (pro-tologia)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현존해 있는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는 세상 사물들의 질서, 곧 '창조 질서' (ordo creationis)를 인간의 삶안에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확립하는 일이 문제가 되고있다. 여기서 창조 질서란 말은, 세상 사물들이 각각의고유한 존재와 본질에 따라 물질의 기능적 구조에 있어서나 생명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느님의사랑과 질서 짓는 능력과 지혜를 함축적으로 반영하고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세상 사물들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의지를 계시한다. 그러므로생태계의 위기와 보존, 환경 윤리 · 생명 윤리의 확립, 정의로운 정치 · 사회 · 경제의 형성, 더 나은 생태학적 생활 공간의 형성에 관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능동적으로 책임을 지고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도 창조 질서에 속한다. 특히 생태학적 위기에 직 면하여 모든 피조물의 삶의 공간인 창조계의 보호를 위한 투신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창조 신앙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실천 사항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의 과제는창조 질서 안에 정향되어 있다. 〔창조와 진화〕 생명과 인간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진화론은 자연에 관한 현대의 해석에서 가장 성공적인 모형으로 꼽힌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생명의 발생과 변화에대한 문제를 놓고 자연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설명하는이론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1996년 10월 교황청 과학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담화에서도 인정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이 메시지를 '다원적진화론의 복권' 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록 한때 진화론과창조 신앙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비쳤을지라도, 자연과학의 범주인 '진화' 와 신학적 범주인 '창조' 는 결코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진화론은 창조 의지로부터 비롯되는 생명의 근원과 의미에 관한 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 신학은 생명의발생과 진화에 관한 물음에 대해 자연 과학적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에 대한 한때의 신학적 저항은 일차적으로 창조신앙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구상된 고전 형이상학 안에서 그리고 수많은 일상의 표상들안에서 우세하던 하나의 정적 · 무시간적 존재 이해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실 역동적 존재 견해는 진화론에 의해제시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유대교 · 그리스도교의 창조론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던 하나의 기본 사상을 철저히 일관되게 전개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대신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세계는 하나의 시작을 갖고 있고 또 시간의 전개와 함께 역사 안에서 되어 가는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 능력의 완전성은, 하느님이 당신에 의해 존재하게 된 피조물들을 스스로 원인일 수 있도록 만들어 그 피조물들이 제각기 고유한 작용을 할 수 있도록능력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관찰될 수 있다(《신학 대전》 I,q.4, a.2 ; 《대이교 대전》 Ⅱ, 42). 세상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자신 안에 진화적 힘들을 지닌 채 스스로 자신의 발전의 원인일 수 있도록 역동적이고도 생생한 실재로서 하느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창조 의지에 따라피조물들이 역사 안에서 진화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이되어야 할 바대로 된다는 사실은 철저히 창조 신앙의 노선 위에 있다. 창조의 개념 안에는 피조물 편에서 볼 때, 무로부터 하나의 시작을 가짐으로써 현존하게 되는 유한한 존재자가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창조 사상 안에는,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정의(definino)와 존재의의미를 비로소 갖는, 그리고 항상 또다시 새롭게 가져야하는 현존재로서의 피조물이 고려되어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사물과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는 그 근원이자 근거이며 목적인 하느님의 실재에 지속적으로 매 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세상의 모든 사물이 진화를통해 이루어진 존재이거나 아니면 기술 공학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 사실이 창조주하느님에 대한 피조적 의존성으로부터 세상의 사물들이독립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umani Generis ;DS 3896) 창조주에 대한 창조된 존재의 실존적이고 지속적인 의존성을 전통 신학은 '보존' (conservatio, 유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의존성은 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아니라 초월 신학적으로 내세적 원인들의 원인으로서,되어 감 안에서의 존재로서, 창조의 세상적 역동성 안에서와 그 너머에서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으로서, 시간의근원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원성은순전히 부정적으로 '무시간성' 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존재 실현력(schöpferiche Seinsmä-chtigkeit)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존재 실현력이란 계속 부서지고 흩어지는 일시적 존재자인 피조물의현존재를 포괄하고 지탱하는 힘을 말한다. 〔구 분〕 '근원적 창조' (creatio originalis),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새로운 창조' (creatio nova)로 구분되는창조의 세 가지 차원은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본질을 구성한다. 근원적 창조 : 이는 소극적으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의미하고, 적극적으로는 '그런 존재로서의 존재자 창조' (creatio entis qua entis)를 의미한다. 이두 가지 형식은 경험적 영역의 초월적이고 기초적인 차원을 지시한다. 곧 이 두 가지는 발전 상태에 있는 세계전체의 절대적이고 지속적인 근거를 가리킨다. 따라서근원적 창조는 절대적이고도 지속적인 창조로서, 한처음의 천지 창조뿐 아니라 끊임없이 발생해 왔고 현재에도발생하고 있고 또 곧 발생할 직접적인 창조를 뜻한다. 이런 '근원적 창조' 의 개념 안에는 결코 과거로 되지 않는직접적인 신적 창조 작용, 존재하고 되어 가는 것과 그것을 지탱하는 근거 사이에 발생하는 포괄적인 창조 작용과 근본 관계에 의한 보존, 존재와 되어 감의 기적 그리고 진화와 상승을 위한 세계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 등의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은 순전히 선행하는질료로부터 상대적으로 세계를 만드는 제작신(δημιονρ-γός)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체 세계의 절대적인 지은이로서 그리고 세상 너머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안에 깊숙이 있으면서 세상과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이루는 분으로 이해된다. 곧 창조주 하느님은세상의 절대적 근거이자 지속적인 초월적 근거이다. 그러므로 세계와 그 안의 모든 것은 무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각각의 때에 창조된 것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는 현재의 때에도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있는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하느님은 세계를 그 자체로 고유한 법칙과 품위를 지닌 자율적 실재로 창조하였다(사목 36항). 곧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 전체 세계는 자신 안에 물질과 정신, 자연과 역사, 시작과 종말 등의 모든 내용을 포괄한 채궁극적 단일성을 구성하는 자립적이고 자주적인 실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것 안에 초월적인 방식으로 내밀하게, 곧 비대상적인 방식으로 내적으로 현존하면서 온 세상 사물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각 사물의 존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전체 세계의 절대적이고 지속적인 초월적 근거이며, 세상은 자신의 절대적 지은이와 근원적이고 내적인관계 안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세계는 '하느님과의 전적인 다름' 안에서 하느님에게 지속적으로 의존해 있는 실재이며, 결코 하느님의 한 부분인 것도 아니고 하느님과함께 공동 원리인 것도 아니다. 결국 하느님은 초월적인방식의 의미에서 온 세상 사물의 가장 깊은 내부로부터절대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근원적인 창조 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의미에서 근원적 창조는 세계 전체에 대한하나의 초월적이고 기초적인 규정이다. 지속적 창조 : 이 개념은 세계의 지속과 발전의 경험적 영역과 관련된다. 곧 지속적 창조는 경험적 영역 위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이고 상대적인 하느님의 창조 작용을가리킨다. 따라서 '지속적 창조' 는,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근원적 창조' 와는 달리, 하느님에 의해 이미 주어진세상의 실재를 통해 매개되는 '지속적이고 상대적인 창조 이다. 전통 신학에는 '신적 협력' (concursus divinus)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피조물과 함께 협력하여 참으로 새로운 것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즉긴장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세계의 발전 과정 안에서 가능하게 만들고 유도하는 하느님과 고유한 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하는 피조물은 전적으로 서로에게 관계되어 있으며, 양자는 경쟁 관계가 아닌 공동 협력을 통해 함께 작용한다. 그런데 신적 협력이 이미 주어져 있는 세상의 실재를 통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이런 협력은 지속적인 창조, 곧 하느님의 지속적이고 상대적인 창조 작용에 해당한다. 자연의 진화와 자연 · 우주의 역사는 이런 '신적 협력'내지 '지속적 창조' 의 차원에서 조망될 수 있다. 자연 과학적 진화론의 설명에 따르면, 물질적 존재 형태들은 상대적으로 한층 더 단순한 존재 형태로부터 발생한다. 이는 창조 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에 의해 이미 존재하게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지속적 창조 작용에 해당한다. 이런 지속적 창조 작용의 영향을 통해 하느님은, 존재하게된 그 순간에 설치되어 있지 않던 '새로운 것(곧 생명, 의식, 정신)으로의 물질적 사물의 진입' 과 '능동적 자기 초월' 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때 하느님은 밖에서개입하는 것이 아닌데, 그 까닭은 그는 창조된 모든 것안에 초월적으로 그리고 대화적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앞을 향한 그리고 한층 더 높은 차원을 향한 자연의 진전과 상승은, 결국 유한한 존재자의 내부에잠재해 있지만 유한한 존재자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과는 다른 내재적 원동력에 의해 실현되며, 이 차원이 신적협력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진화 안에서 발생하는 생명 과 인간은 창조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연히 생겨나는것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속적 창조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피조적 존재들이다. 새로운 창조 : 이는 새로운 시작 곧 구원으로서, 미래에 발생할 종말의 완성뿐 아니라 현재 이미 시작되었고또 매 순간 발생하는 완성의 선취(anticipatio)를 의미한다. 성서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 따르면, 세상의되어 감 안에서 진화할 수 있는 것의 진전과 상승만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시작된 처음부터 창조의 궁극적 목적, 곧 종말의 완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런데 종말의 완성은 근본적으로 진화를넘어서는 것이며, 진화가 이 궁극적 완성, 곧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의 사랑에 충만히 참여하는 일' 을 가져오거나 산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궁극적 완성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확신과 그것의 실현에 대한 신뢰적 희망은 창조 신앙에 속한다. 먼저 '완성의 성취' 를 살펴보면, 종말의 완성은 이미이 세상 안에 다가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하느님의 다스림에 참여하는 한에서,종말의 완성은 이 세상 안에 앞당겨 실현되기 때문이다.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은 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가능성을 무엇보다도 인간 안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전체 창조물과 그 근거인 하느님에게 원칙적으로 자신을 열어 놓고,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안에 사랑과 구원을 위해 하느님에게 자리를 마련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한 인간들의 중개에 의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중개에 의해,인간은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역사 한가운데에서부터 선취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창조 신앙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해 주며, 이로써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도록 의무를 부여한다. 그리고 다가올 '세상의 완성' 을 살펴보면, 세상의 현상태와 세상 종말의 완성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사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부서지고 흩어지는 가운데 존재한다. 인간은 이처럼 지나가는 자연과 세상에 대해, 또 다가오는 자기 자신의 죽음과 다른 이들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 안에가득 차 있는 고통과 불의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며 존재한다. 그 때문에 인간뿐 아니라 그 밖의 창조물도 그리고심지어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영도 신음한 채 구원을 갈망한다(로마 8, 19-26). 그런데 이 구원은 원칙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의 가능성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창조신앙은 하느님이 사랑의 창조적 전능으로써 '근본적인새로운 시작' ,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은 새로운 시작'을 이룩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 근본적인까닭은, 그것이 더이상 피조물의 활동을 통해 중개되지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이 절대적이지 않은 까닭은, 비록 완성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그런 완성과 구원에 이르는 존재는 다름 아닌 피조물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묘사에 따르면, 이 새로 운 시작과 이에 대한 희망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아니라 전체 창조물에 해당된다(이사 65, 17 : 66, 22 : 로마 8, 19-24 ; 11, 36 : 2베드 3, 13 : 묵시 21, 1. 5). 따라서 새로운 창조로서의 완성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곧 완성을 통해 다른이와 더불어사는 영원한 삶이 열리고, 여러 상대자와의 친교가 시작되며, 우주의 모든 존재들 간의 대화가 개시(開始)된다.이런 '우주적 대화' (universaler dialog) 안에서 하느님은마침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될 것이다(1고린 15, 28).(⇦ 우주 ; ← 세계 ; 자연 ; 창조론 ; 창조 설화 ; → 구원 ; 재창조 ; 종말론 ; 진화론) ※ 참고문헌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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