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創造論 〔라〕De creatione,Ctisiologia 〔영〕Doctrine of creation, Ctis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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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은 자연 환경과 생태학적인 관심까지 주제로 삼는다.

창조론은 자연 환경과 생태학적인 관심까지 주제로 삼는다.

창조에 대해 설명하는 신학의 한 분야. 창조론을 뜻하는 라틴어 '크티시올로지아' (ctisiologia)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크티시스' (κτίσις, 창조)와 '로고스' (λόγος, 말 ·가르침)의 합성어로서, '창조에 대해 말하기' , 곧 '창조에 대한 가르침' 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창조론은 하느님아닌 모든 것이 그 근원이자 근거이며 목적인 하느님과갖는 기본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자, 특히 창조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피조성(被造性)에 대한 가르침이다.
〔내 용〕 창조 신앙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기본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의 역사적 하느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이런경험들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앙은 권능을 갖고 현존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모든 것의 보편적 지은이로 고백한다. 창조론은 이런 창조 신앙에 대한 성찰과 해석이다. 즉 창조론은 성서의 계시 사실들로부터 조명된 포괄적인 의미 연관성 안에서 하느님과 세계의 기본 관계를 숙고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전 실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창조론 안에서 하느님은 초월적 원(原)근거이자 목적으로서 숙고된다. 그리고 세계는 그 안에내재해 있는 하느님과 구분되는 자립적 실재이며, 하느님의 공동 협력을 통해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시간 · 자연 · 진화 · 사물 · 생명체 · 인간 · 정신 · 자유 ·역사 등이 가능해지고 끝내 목표로 인도되는 실재로 숙고된다. 또한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통교의 수령자로 숙고된다. 이렇게 볼 때 창조론은 신론적 설명이자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신학적 해석이며 신학적 인간학의 토대이다. 그뿐 아니라 창조론은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성령론과 종말론을 향해 질서지어져 있는데, 그 까닭은 로고스를 통해 창조된 세상 안에 로고스가 친히 육화하여 죽고 부활함으로써 그가 온 우주를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고, 종말때까지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세상에 현존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며, 또 세상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그 목표인 종말의 완성으로 인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창조는능동적으로는 하나의 초경험적 사건을 의미하고, 수동적으로는 그런 사건의 경험적 결과를 의미한다. 전자는 항구히 계속되는 신적 창조 사건을 가리키고, 후자는 하느님에 의해 발생함으로써 전적 · 지속적으로 그분과 연관되는 모든 것, 곧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후자, 곧 수동적 의미의 창조만이 감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전자, 곧 능동적 의미의창조는 모든 사고 범주를 넘어서는 것으로 다만 은유를통해서 묘사될 수 있을 뿐 인간적 표상에 의한 어떤 접근도 불허한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인간의 기본 경험과 초경험적영역을 문제삼는 창조론은, 경험적 영역에 근거하여 우주의 생성과 발전과 진화에 대한 물음에 답변하는 자연과학의 이론과 결코 같지 않다. 사실 과학은 세계 내부적범주들에 따라서 원인들에 대해 묻기 때문에 창조를 그런 범주적 진술들로 환원시켜 잘못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신적 행위로서의 창조의 특성이 부인될 수 있다.그러나 창조는 순전히 경험적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리고 창조론은 결코 신 존재의 증명이나 형이상학적특성을 지닌 자연 신학적 변신론(辨神論, theodicea)이 아니다. 창조론은 오직 구원사로부터 조명되는 '살아 있는하느님'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의 우연성으로부터 추론하여 절대적 존재에게서 세상이 기원하였음을 이끌어 낼 수는 있지만, 그런 기원을 창조로서 인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DS 3026). 아울러 자연 신학적변신론은 그리스도교 창조 신앙에 의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창조론은 악의 문제를더욱 예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일원론(monismus)로서의 범신론(pan-theismus), 유출설(emanatismus) 이원론(dualismus)과 같은 일정한 형이상학적 체계는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 곧창조론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론은 창조형이상학과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양자가 같은 차원의 것이라면 창조 신앙은 구원 신앙과의 연결점을 상실할 것이고, 결국 창조론의 본질적 특성은 훼손될 것이다. 사실 창조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말씀은 신인(神人)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창조주가 자신의창조물인 세상 안으로 깊숙이 자기 자신을 투신한 채 육화한다는 사실은 형이상학적으로는 결코 이해되지도, 분명해지지도 못한다. 〔역사적 형성 과정〕 창조의 주제는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다른세계관들과의 논쟁 안에서, 그리고 창세기에 대한 주해서들, 설교, 교리 교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전체 진 술 안에서 발견된다. 12~13세기 이후 여기서 벗어나창조의 주제는 명제집 주해서(Sentenzenkommentar)들과신학 전체를 다루는 대전(summa)들 안에서 다루어지며,이 경우 창조론은 신론 안에 또는 신론 다음에 하나의 고정된 위치를 갖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특히 19세기 이래 교의 신학 서적들 안에 창조론은 고유한 신학적 논고(tractatus)로 자리 매김된다. 그러나 오랜 스콜라 신학의경향을 띤 이런 창조론은 20세기 초까지 신학 고유의 특성보다는 형이상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부터 자연 과학과의 관계, 현실과의 관계 그리고 긴박한 환경 문제와의 관계 아래 '창조 의 주제를 다룬 신학 서적과 논문들이 증가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학적 흐름 : 창조론은 2세기 중엽에 사도 후 교부들의 작품 안에서 나타났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무로부터유로 만드셨음"을 믿는 것이야말로 첫째 계명이라고 주장하였다(계명 I, 1). 이것이 그리스도교 문학과 신학 작품에 나타난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에 대한첫 언급이다. 《디다케》와 《바르나바의 편지》는 하느님이온 우주를 다스리는 주님이라고 가르친다.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의 《제1 고린토 서간》은 하느님을 "아버지이자 온 우주의 창조자" , "창조주이자 모든 세대의아버지", "모든 영들의 창조자요 보호자" (19, 2 ; 35, 3 :59, 3)라고 부름으로써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한다. 창조론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대작들은 그노시스주의에 대한 대응에서 이루어졌다. 리용의 이레네오(130/ 140?~202?)는 《이단 논박》에서 그노시스주의적 이원론을 거슬러 구원사적 관점에서 창조를 이해하면서 창조와 구원의단일성을 선포하였다. 즉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그노시스주의적 이원론을 거슬러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한다. 한편 호교 교부들은 영원한 질료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견해를 거슬러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하였다. 동방 교부들 가운데 구원사적 관점에서 창조를 이해한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와 오리제네스(185~253)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에 따르면,창조는 하나의 계속되는 현실, 곧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이다. 그리고 오리제네스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모든 창조물이 근원적 단일성에 따라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는 신적 교육학을 언급함으로써, 창조를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이해하였다. 이것이 오리제네스의 이른바'비롯됨(exitus)-돌아감(reditus)' 도식(schema)이다. 아우구스티노 : 서방 교회에서 창조론 또는 창조 신학이 꼴을 갖추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아우구스티노(354-430)이다. 《창세기 축자 해석》, 《미완성 창세기 축자 해석》, 《마니교 논박 창세기론》 등의 창세기 주해서들은 그의 창조론 또는 창조 신학을 잘 보여준다. 그는 '거의 무' (paene nihil)라고 할 수 있는 '질료'(materia) , 곧 "꼴을 갖추지 않은 채 비어 있는 땅" (창세 1,2)조차도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무로부터의 창조' 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해석하였다. 그리고 창조는 하나의 반신(半神)적 유출(emanatio)도 아니고,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독립해 있는 실재도 아니다.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하느님에게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천재성은 시간과 우주의 공동 창조에 관한 근원적 통찰에서 드러난다. 세계는 '시간 안' (in tempore)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cum tempore) 창조되었다. 시간은 하나의 공간이나 하나의 용기(容器), 곧 무형의 질료(materia informis)가 아니라 변화의 한 기능이고 지속의한 척도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이런 성찰은 창조론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간에 대한그의 성찰은 원칙에 있어서 '창조' 와 '보존' (conservatio,유지)에 대한 하나의 단일하고 통일된 전망을 가능하게해 주었고, 이로써 시원론(始原論, protologia)적이고 우주론(cosmologia)적인 견해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의 또 다른 업적은 창조를 삼위 일체와 연관지은 점이다. 창조는 삼위 하느님의 단일한 행위이다. 곧 창조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런 창조 사업의 완성은 성령에 의해 보증된다. 따라서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창조물은 삼위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을 지니고 있다. 삼위 일체론과의 이런 연결 때문에 아우구스티노의 창조론 안에는 기본적으로 낙관론이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 스콜라 신학의 전성기에 활약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에 따르면, 창조는존재의 수여자로부터 모든 피조물이 존재를 받는 일이다. 따라서 창조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관계이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존재이고 모든피조물은 존재를 갖는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존재의 충만함이자 완전함인 데 반해, 모든 피조물은 충만하고 완전한 신적 본성에 대한 하나의 '참여' (participatio, 한 몫을나누어 받음)로써 존재를 갖게 된다. 이 참여가 피조성을규정한다. 창조는 두 가지 측면, 즉 능동적 창조(creatioactiva)와 수동적 창조(creatio passiva)에서 관찰될 수 있다. 능동적 창조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수동적 창조는 피조물 안에 이루어진 결과를 가리킨다. 능동적 창조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무로부터의 사물의 산출" 로서 정의된다(《신학 대전》 I, q. 45, a. 2 ad 2). 창조의 근본 특성을 부각시키는 이런 의미의 창조는 창조된 새로운 사물에 앞서 어떤 실재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무로부터' 란 말은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 무가 있었음' 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보편적 원인에서 기원하는 모든 존재의 질서' 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는 시간적 선후에 관한 표상이 아니라,존재의 질서(ordo, 순서)에 관한 표상이다. 반면 수동적창조는 '존재의 근거'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토마스아퀴나스에 의해 "존재의 주고받음으로부터 발생하는 하나의 관계"로 정의되었다. 곧 "창조는 피조물이 자신의존재 원리인 창조주와 갖게 되는 하나의 관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신학 대전》 I,q.45, a.3 c.). 이 관계는 자연과 우주의 실재를 통해 존속한다. 질송(É.H. Gilson, 1884~1978)의 저서인 《토마스주의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 입문》(Le Thomisme, Introduction au système de saintThomas d'Aquin, 1919)에 따르면, 이 관계는 일방적인 의존 관계이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의존하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의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를 무엇보다도 관계 개념으로 이해하는 토마스아퀴나스의 관점은 오늘날의 창조론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세기 초의 신학적 흐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인 20세기 초에는 뚜렷이 철학적 특성으로 각인된 창조론이 있었다. 창조의 주제는 신학적 논고인 창조론 안에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철학 교재에서도 다루어졌으며, 철학 교재 안에서 창조는 형이상학에 속하는 자연 신학 내지 변신론의 주제이자 영혼론 내지 심리학의주제였다. 신학적 논고로서의 창조론 내용의 큰 부분은이런 철학에서 도출되었으며, 따라서 변신론의 명제들과영혼론의 명제들이 창조론의 중요한 주제였다. 창조론은다만 이런 명제들을 '계시의 원천들로부터' (ex fontibusrevelationis) 입증하는 일을 할 뿐이었다. 이런 신학 풍토에서 신학자들은 창조론을 신학의 고유한 분야로 여기기보다는 신학에서 이차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결국 창조론의 중요성은 신학에서 약화되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창조론은 오랜 전통을 지니며, 그 전통은 자연 신학과 계 시 신학의 분리가 완결되던 유명론의 시대까지 소급된다. 그러면서도 20세기 초의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논고인 '신론' 다음에 창조에 대한 신학적 논고인 '창조론' 이 오도록 배치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실신학의 체계화가 시작된 이래 창조론은 신론에서 출발해왔다. 그리고 이런 배치 방식은 공식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넘겨받은 것이었다. 테야르 드 샤르댕 : 오랫동안 창조 신학은 아주 순진한 형태의 창조 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창조론이 하느님 행위로서의 창조를 자연의 인과적 고리로부터멀리 옮겨 놓고 창조를 세계의 시초에 한정시킴으로써창조 신앙의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의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와서 테야르 드 샤르댕(P.Teilhard de Chardin, 1881~1955)에 의해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이루어졌다. 그는 우주 또는 세계를,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반영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세상 안의 고통 · 실패 · 불행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은 삼위 일체의 생명을 나누어받도록 방향지어져 있다. 모든 생명은 발전하며 따라서그것은 과정 중에 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방향은 구심적이다. 곧 진화하는 모든 생명은 창조적 중심인 오메가(Ω) 점을 향하여 방향지어져 있으며, 수렴에 의해 그 중심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진화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창조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오메가 점은 창조적이고 진화적인 과정에 대한 위격적 · 초월적인 중심으로서, 창조적이고 진화적인 과정의 밖에 그리고 그 과정 너머에 있다. 그러나 이 오메가 점은 그 자신에게로 모든것을 끌어당기는 인력에 의해, 위를 향해 상승하는 우주의 모든 생명력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우주 또는 전체 세계는 하나의 명확한 방향 안에서 상승하게 되고 진전하게 된다. 결국 알파(A) 점으로부터 오메가 점에 이르는 광활한 발전 과정은 진화적 창조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란, 비록 우주 안에 분산과 퇴보의 상황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의 상승과 진전이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이자 보존자인 하느님의 항구한 보호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언급한 '진화적 창조' 는 초기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표현인 '지속적 창조' 를 시사한다. 교회의 가르침 : 창조 신앙은 전례 안에 자리를 갖고있으며, 가장 오래된 신경들은 하느님을 구원사와의 연관성 아래 '파테르 옴니포텐스' (pater omnipotens, 전능하신아버지)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전능하신' (ommipotens)이라는 표현은 추상적인 전능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구원사를 향해 정향되어 있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창조능력' 을 가리키며, '아버지' (pater)는 인격적 실재로서의'지은이' (auctor)를 가리킨다. 그리고 초기 교의사에서교회의 창조 이해는 우선, 물질과 역사를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그노시스주의의 오류들을 거슬러 구원사적 관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점은 특히 리용의 이레네오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회가 이런 이원론적 오류들과 대 립하면서 교회 안에는 구원사적 관점과는 다른 관점, 곧시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관점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관점은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447년 톨레도 교회 회의는 물질을 악마적인 것으로여기는 프리실리아누스주의(Phosilicins)의 이원론을거슬러,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주이기에 우주의 모든 것은 영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DS 283~286). 그리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카타리파(Cathan)의 이원론을 거슬러 "삼위 하느님, 곧 성부 · 성자 · 성령이 우주의 유일한 근원으로서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세계, 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의창조주" 라고 고백한다(DS 800). 교회 가르침 안에 나타나 있는 이런 시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관점은 20세기초엽까지 견지되었다. 그런데 교회의 창조 이해는 이와 같은 이원론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범신론과 같은 일원론을 거스르는 방향으로도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앙 고백에서 기본 요소에 속하는 창조주 하느님에대한 믿음은 한편으로 그노시스주의적 이원론과 대립되고, 다른 한편으로 신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스토아 학파의 범신론적 일원론과 대립되기 때문이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는 범신론적 경향을 띤 19세기 관념론의 일원론에 맞서, 하느님과 세상이 하나가 아니라 구분되며 하느님이 "각각의 존재 요소인 실체에 따라서 무로부터"(secundum totam substantiam ex nihilo) 세상의 모든것을 창조하였음을 새롭게 강조하였다(DS 3001~3003,3021~3025).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창조에 대한 교의의 역사는 커다란 변화 가운데 진행되었다. 오늘날 창조론은'진화와 창조' 문제에 관한 주제뿐 아니라 '생태학' 의문제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창조 질서 및 창조 과제와관련하여 문제삼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목헌장>(Gaudium et Spes)에서 현 시대를 위한 창조 신앙의신학적 설명에 규준이 될 만한 차원들을 제시하면서 '창조의 과제'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곧 인간은책임 있게 이 세상을 형성하고, 또 가정과 사회 안에 친교의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능력과 임무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문화의 발전과 자연 · 인문 · 사회 과학의 진보를 이룩하는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경쟁자가 아니다. 그러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인간으로 하여금세상에 대한 책임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관심으로부터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점에 대해 책임과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다고 강조하였다(사목34항).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생태학의 문제를 주된 문제로 언급하지 않았다. 생태학적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나온 <팔십 주년>(1971.5. 14), <세계정의에 관하여>(1971. 11. 30), <사회적 관심>(1987. 12.30), <백 주년>(1991.5.1) 등의 교회 문헌들에서 언급되고 있다. 곧 '자연 환경' , '공해' , '생태학적 관심' , '생태계의 요구' 와 같은 주제가 여기서 문제로 대두된다. 〔현대 창조론의 방향〕 신학의 전체 체계 안에서 창조론은 전통적으로 신론 다음에 위치한다. 현대에 들어와창조론을 교의 신학의 전체 체계 안에 새롭게 정위(定位)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세벤(M.J. Scheeben, 1835~1888)과 시마르(H.T. Simar, 1835~1902)는 창조 교의가 그외 모든 신앙 진리들의 전제이자 기초라고 말하고, 창조론을 특수 교의 신학의 한 부분, 곧 특수 교의 신학 안에서 다른 분야들을 위한 토대가 되는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반해 라너(K. Rahner, 1904~1984)는 창조론을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지속적인 기본 관계인 '피조성' 을다루는 분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창조론을 특수 교의신학의 앞에 오는, 그리고 특수 교의 신학의 기초가 되는기초 신학의 첫 번째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면서 라너는 현대 창조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섯 가지 차원에서 제시하였다. 첫째, 창조론은 신론적으로 정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특수 교의 신학의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신론은 인간의 피조성의 지은이이자 의미 부여자인 하느님에 대해이야기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의 신학적 신론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위한' (pro nobis) 것과는 상관없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내용을설명하는 분야가 아니다. 오히려 신론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하느님이 자유롭고 인격적인 자기 계시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의 소유로 내어 주는 분이라고 설명하는 분야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절대성과 위격성은인간을 향한 그분의 자유로운 행위의 구원사적 경험 안에서, 따라서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기본 관계를 의미하는 '피조성' 안에서 해명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피조적 존재이자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하느님이 누군지 또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창조론을 함축하지 않는 어떤 신론도 있을수 없다. 둘째, 창조론은 은총론적으로 정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은총론이 피조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을, 하느님의조건 없는 자기 통교를 위한 '청종(聽從)의 능력' (poten-tia oboedientialis)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은 창조된 순간부터 하나의 순수 본성(natura pura)으로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초자연적 실존 규정을 갖추고 있는 본성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청종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곧 인간의 피조성은 처음부터 신적 자기 통교의 자유로운 행위의 전제로 이해된다. 따라서 창조론또는 창조 신학은 오직 계약의 신학 전제로서 이해될 때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하느님은 창조할 수 있는데, 그까닭은 그분이 자기 자신을 사랑 안에서 자유로이 주실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창조는, 은총과 육화 안에서 자신을 타자에게 자유로이 선사하는 하느님 능력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의 의미, 곧창조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의 의미는 육화한 로고스의은총 안에서 비로소 충만히 획득되고 실현된다. 셋째, 창조론은 인간학적으로 정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인간학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우주 중심에 있는 '세계의 한 부분' 이 아니라, '초자연적 실존 규정' 을 갖추고주체성의 조건인 주위 세계와 함께 있는 하나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론이 인간을 주위 세계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피조적 존재로 항구히 고려할 때에만, 창조론은 비로소 창조론의 충만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 점과 연관시켜 천사론을 살펴보면, 창조론의 한 주제로 다루어져 온 '천사론' 은 창조론의 한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적 인간학의 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구원사 안에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해 온 천사들을 포함하여 인간의 주위 세계는이 세상에 육화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거룩한 특성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주위 세계의 이런 거룩한 특성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인(神人)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은총의관계에 철저히 종속된다. 넷째, 창조론은 그리스도론적으로 정향되어야 한다.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정점에 위치해 있는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최고도의 본질 실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론은 처음부터 세계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피조성의 구체화로 통찰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이런 그리스도 중심성 안에서 피조성이 충만한 본질에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이 믿을 수 없게 보이는 신화론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주적 그리스도론일수 있으려면, 창조론은 창조가 궁극적으로 위격적 일치안에서 절정에 이른 육화한 하느님의 자기 통교에 방향지어져 있음을 처음부터 고려해야 한다. 다섯째, 창조론은 구원사(救援史)적으로 정향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역사에 진정한 시작과 진정한 목적을 주는 구원사 안에서 창조가 주제화되기 때문이다. 창조론은 창조를 역사의 구성 요소로서 그리고 피조성을 역사성의 근거로서 인식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창조를 구원사의 가능성의 구성 요소로 인식한다. 즉 창조는 구원사에 대한 가르침과 종말론적 완성의 조건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의 형상(形相)적 요소이다. 그런데 구원사 안에 같은 시작과 목적을 갖고 있는 정신과 물질이 포함되는 한에서, 창조론은 물질과 정신의 구별뿐 아니라근원과 목적에 있어서 물질과 정신의 단일성을 분명하게표현해야 하고, 아울러 물질을 정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가 세상 역사의 조건의 설정으로서 이해되고, 더 나아가 되어 가는 존재의 자유로운 설정이자 유한한 존재의 항상 새로운 상승적인자기 초월의 지속적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지속적 창조이자 새로운 창조로서 이해되는 한에서, 창조는 무엇보다도구원사 안에서 주제화된다. (→ 교의 신학 ; 그노시스 ;기초 신학 ; 아우구스티노 ; 창조 ; 테야르 드 샤르뎅 ;토마스 아퀴나스) ※ 참고문헌  H. Kessler, 《LThK》 9, 2000, pp. 240~241/ K. Rahner,Herders Theologisches Taschenlexikon, Bd. 6, Freiburg i. Br., 1973, pp.35 ~3551 K. Rahner . H. Vorgrimler, Kleines TheologischesWörterbuch, Freiburg i. Br., 1978, p. 376/ A. Ganoczy, Lexikon derKatholischen Dogmatik, hrsg. v. W. Beinert, Freiburg i. Br., 1987/ D. Carroll, Creation, New Dictionary ofTheology, J.A. Kommonchak . M.Collins . D.A. Lane eds., Wilmington, 1989/ P. Giesel, Schopfung undVollendung, Neue Summe Theologie, Bd. 2, hrsg. v. P. Eicher, Freiburgi. Br., 1989/ G. Colombo, Die Theologie der Schöpfung im 20.Jahrhundert, Bilanz der Theologie im 20 Jahrhundert, Bd. 3, hrsg. v. H.Vorgrimler . R.V. Gucht, Freiburg i. Br., 1970, pp. 36~62/ J. Auer,Kleine Katholische Dogmatik : Die Welt, Gottesschofung, Bd. 3,Regensburg, 1975/ J. Moltman, Gott in der Schöpfung : ökologischeSchöpfungslehre, München, 1985/ É.H. Gilson, Le Thomisme :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Saint Thomas d'Aquin, Paris, 1986/ J.Neuner . H. Roos, Der Glaube der Kirche in den Urkunden derLehrverkündigung, Regensburg, 1986/ N. Kretzman, The Metaphysicsof Creation : Aquinas's Natural Theology in Summa contra Gentiles II,Oxford, 2001 〔韓鉦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