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蔡濟恭(1720~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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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

채제공 .

조선 후기 영 · 정조 시기에 탕평책의 한 축을 받친 남인 계열의 정치가이자 개혁적 관료. 본관은 평강(平康),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저서로 《번암집》(樊巖集) 59권이전해지는데, 시(詩)가 19권이며 권수(卷首) 2권에는 정조가 내린 어찰(御札) 및 전교(傳敎)들을 별도로 수록하였다. 이황(李滉, 1501~1570) 이래 '청량' (淸凉)으로 상징되는 남인 계열의 조선 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에 입각한 연행시집(嚥行詩集) 《함인록》(含忍錄)도 남겼다. 〔생 애〕 채제공은 숙종 46년(1720) 충청도 홍주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응일(膺一)과 어머니 연안(延安) 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청년기부터 지방관으로 지낸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1735년 15세의 나이로 향시(鄕試)에 급제하였고, 8년 뒤인 1743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748년 사관(史官)을 뽑는 한림회권(翰林會圈)에 탕평을 표방한 영조(英祖, 1724~1776)의 특명으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영조의 왕위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란인 무신난(戊申亂, 즉이인좌의 난, 1728) 평정에 공을 세운 그의 스승 오광운 (吳光運, 1689~1745)을 잇게 하려는 의도였다.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서 균역법 폐단의 시정과 변방 대책을 올렸다. 1755년 나주 괘서 사건〔乙亥獄事〕 때는 문사랑(問事郞)을 역임하였고, 1758년 《열성지장》(列聖狀) 편찬 공로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당시 채제공은 스승 오광운을 이어 청남〔南人 清論〕정파를 이끌었는데, 소론 강경 정파〔峻論〕의 지도자 이종성(李宗城, 1692~1759)과 연대하여 사도세자와 영조의악화된 부자 관계를 회복시키려 노력하였다. 특히 그해에 세자를 폐위시키겠다는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졌을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 이 때문에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正祖, 1777~1800)에게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충신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해 윤 5월에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의죽음)이 일어났다. 이후 개성유수, 홍문관 제학, 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 · 예조 · 호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772년에는 왕세손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을 맡았다. 당시 채제공은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의 외척당인 북당과 김귀주(金龜柱,1740~1786)의 외척당인 남당 양쪽에서 모두 기피 인물로지목되었을 정도로 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정조가왕세손으로 대리청정을 한 뒤에는 호조판서 · 좌참찬(左參贊)으로 활약하였고,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로서 행장(行狀) · 시장(諡狀)및 어제(御製) · 어필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정조 즉위 후, 영조 말년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노 · 소론 외척당과 김상로(金尙魯, 1702~?) · 홍계희(洪啓禧,1703~1771) 계열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할 때, 채제공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判義 禁府事)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 1777년 가을에 홍계희 계열의 자객이 궁궐에 침입하는 상황이 벌어지자,궁궐을 수비하는 수궁대장(守宮大將)을 맡기도 하였다.그는 정조 즉위 직후부터 착수된 개혁 정책을 충실히 보좌하였다. 정조의 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단을 교정하는 조목을 마련하여 1801년(순조 1)에 사노비 해방을 가능하게 하였고, 규장각이 설치되자 노론 지도자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함께 제학으로서 규장각 직제를 완성하였다. 또 당시 청에 보낸 외교 문서 문제가발생하자, 1778년 3월에는 사은 겸 진주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 청나라에 . 가서 이를 해결하였으며, 그 전후강화 유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축출되고,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을 수장으로 하는정권이 들어서자, 채제공은 3대 죄안(罪案)이라는 명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고, 이후 8년 가까이 정계에서 물러나 서울 근교 명덕산에 은거하였다. 홍국영과 특히 가까웠다는 것,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격한 주장을 하다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들과 같은 흉언을 실제로 말하였다는 것등이 그의 3대 죄안이었다. 이 3대 죄안은 1786년 9월에 정조가 직접 근거가 없거나 부당함을 지적하여 논의자체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노론계와도친밀하였던 홍명보(洪明輔)를 잇는 홍수보(洪秀輔) 계열, 친우였던 목만중(睦萬中) 계열, 가까운 친척인 채홍리(蔡弘履) 계열이 청남 정파에서 갈라져 나갔다. 1788년 그는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다. 이때 황극(皇極)을 세움으로써 영조 이래 군주 주도의 탕평책을 계속 추진할 것, 당론(黨論)을 없앨 것, 의리를밝힐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것,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6조를 진언하였고 이를실천하려 노력하였다. 특히 그는 당론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하고, 정통 학문을 의미하는 사문(斯文)을 확대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점이 그의 정치적 후계자 중 서양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천주교 신앙까지 수용하는서학파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1790년에는 좌의정으로 행정부 수장이 되었고, 그해 7월 우의정김종수가 모친상으로 물러나자, 이후 3년 동안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전담하였다. 이 시기에 탕평책을 계속추진하기 위한 장치로, 이조전랑(吏曹銓郞)이 가졌던 동료 추천제〔自代制〕 및 당하관 독점 추천권〔通清權〕을 없애기도 하였다. 또한 도성 안에서 물화를 독점 판매하려는 시전(市廛)의 물가 조작이 계속되자,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실시하여 육의전(六廛)을 뺀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앴다. 이는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일반 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한 획기적인조치였다. 동시에 이 기간에 반대 정파들의 역공으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珍山事件)이 심각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 1793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해 윤 4월에 있 었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와 같이,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伸寃)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討逆〕를 취해서 새로운 의리〔壬午義理〕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한 심각한 대치 국면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을 담은 영조 친필의 비밀 문서인 '금등' (金滕)이 공개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노론 당파에게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어서, 이후 벽파(僻派)로 불리는 노론 강경파의집요한 공격이 야기되었다. 특히 그의 측근 세력 중에 서학자 및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 때문에, 척사' (斥邪)를 기치로 한 거센 공격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화성(華城, 수원성) 축성 사업을 총지휘하여1795년 2월 완공하였다. 1798년 전후부터 벽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 정파가 다시 서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그해 6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는 정조연간에 《경종개수실록》(景宗改修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799년 1월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 그를 세상에 좀처럼 나기 어려운 뛰어난 인물(間氣人物)이라고 칭송하였고, "나와 이 대신 사이에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홀로 아는 깊은 일치함〔契合〕이 있었다"라며 한탄하였다. 그의 장례일에는 정조의 제문이 내려졌고, 장례는 경상도 지역 10여 개 서원에서 적극 참여하여 사림장(士林葬)으로 거행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에 있다. 1801년(순조1)에 벽파 정권은 그의 후계자 가운데 신유년에 국사범으로 처단된 서학 신봉자가 많다는 점 그리고 청과 서양의 힘을 빌려 조선을 압박하려 기도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백서>(帛書) 사건을 이유로 그의 관작(官爵)을 박탈하였다. 그러나1823년에 올려진 영남만인소가 받아들여져 다시 관작이회복되었고, 순조 연간 청양(靑陽)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 1541~1615) · 허목(許穆, 1595~1682)과 채제공을 함께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건립되었다. 〔서학에 대한 견해〕 채제공은 자신의 인척이나 정치적후계자들이 많이 믿었던 천주교 때문에 사후 삭탈관작을당하였지만, 그 자신은 서학을 이단 사상이라 판단하고있었다. 특히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언급하면서 서학에 대해서 두 가지 비판을 하였다. 첫째, '무부무군' (無父無君)이어서 인간의 일상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둘째, 천당설이나 기적설은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특징으로 하므로, 신이(神異)를 강조하는 등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이어져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불교의 별파(別派)라고 결론지었고, 진산 사건 이후에도 "서양학은 실로 불교 서적과 대동소이하다" 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학(邪學) 배척을 내세워서 서학 신봉자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자는 주장을 당론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라고 배격하였다. 제사 폐지 문제도 결국은 천당 · 지옥설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런데 그는 불교, 도교, 양명학 같은이단 사상도 가정이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상으로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상제가 하늘과 땅 어디에서나 늘 좌우에서 인간을 굽어 살펴본다는 설' 〔上帝監臨陟降左右之說〕은 좋다는 견해도 피력하였다. 백성의 교화에 유익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정조는 그에게 서학 문제를 위임하였고, 그는 "그 사람은 사람 되게 하고 그 책은 태워 버린다"라는 교화 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조연간의 천주교 정책은 이단이라도 통치에 잘 쓰기만 하면 도움이 되므로 교화 우선 원칙을 사용함이 좋다는 포용론이 주로 시행되었다. (→ 남인과 천주교) 大學 ※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桐巢漫錄》/ 《樊集》/ 《海左集》/《與猶堂全書》/ 《訥庵記略》/ 姜萬吉, 《朝鮮 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朴光用,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趙珖, <樊巖 蔡濟恭의 西學觀 研究>, 《史叢》 17 · 18합집, 1973. 〔朴光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