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斥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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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척화비.

1871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서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대개 화강암으로 만든 이 비석은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의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크기는 지역에 따라 달라 부산에있는 것은 1.8m나 되지만 함양에 있는 것은 1.2m에 불과하다. 척화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이래의 구호인"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큰 글자로,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흥선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주선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을 활용하여 열강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해 결하려고 하였으나, 반대파의 압력으로 1866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을 체포해 처형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는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무력으로 맞서며 외적을 끌어들인 책임을 물어 천주교 신자들을 절두산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또 1868년에 오페르트(E.J. Oppert)가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책임을 추궁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였고, 1871년에 미국 군함이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강화도를 침공하였다가 철수하자(신미양요) 6월 2일 결연한 척화 의지를 담은 국왕의 교서를 전국에 반포하여 민심을단결시킨 다음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하여 척사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박해를 강화하여 1871년에 39명, 1872년에 24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깊은 척화비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 공사가 이 틈을 이용하여 철거를 요구함에 따라 정부에서 9월 16일 모두 철거하라고 전국에 명령을내렸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대부분사라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서울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경복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부산에 건립된 것은 용두산 공원 안에 옮겨 세워져있다. 그리고 함양군 함양읍과 안의면 옛 면사무소 안,홍성군 구항명 오봉리 등지에도 각각 1기(基)씩 보존되 어 있다. (→ 병인박해 ; 신미양요 ; 위청 척사론) ※ 참고문헌  《高宗時代史》, 고종 8년 4월 25일자/ 金源模, 《近代韓美交涉史》 , 홍성사, 1979/ ㅡ, <대원군의 대외 정 책> , 《한국사》37, 국사편찬위원회 , 2000.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