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왕국설 千年王國說 〔라〕Miilenarisimus 〔영〕Millenarianism, Millenn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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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 전에 천년 왕국이 나타난다고 여겼다.

마지막 심판 전에 천년 왕국이 나타난다고 여겼다.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마지막 천년 동안 그리스도가 부활한 의인들과 함께 지상에서 통치한다는 주장. 이 왕 국은 현재와 하느님이 직접 다스릴 미래 사이에 나타나 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된다.
〔성서에서의 의미〕 천년 왕국설은 요한의 묵시록 20 장 1-15절, 특히 4-6절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두 짐승과 그 추종자들을 이긴 뒤(묵 시 19, 11-21) 악마를 묶어 천년 동안 나락에 가둔다. 이 는 악마가 이 시대에 어떤 민족도 더이상 현혹시키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20, 1-3). 순교자들의 영혼은 살 아나 천년 동안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통치한다 (20, 4-6). 이것이 '첫째 부활' 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둘째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난다(20, 5-6). 나머 지 죽은 자들은 이 시대에 살아나지 못한다(20, 5). 이 천년이 끝난 뒤 사탄이 잠시 풀려나 민족들을 그리스도 인과 전쟁하도록 현혹시키지만, 하느님의 관여로 세력을 영원히 잃게 된다(20, 7-10). 그 뒤에 죽은 이들의 보편 적 부활과 세상 심판이 뒤따른다(20, 11-15). 이러한 천 년 왕국 사상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중심 사상은 하느님 의 구원 능력에 대한 확신이었다.
천년 왕국에 대한 사상은 유대교의 묵시 문학 작품에 서 언급되고 있다. 제1 에녹서에는 메시아가 없는 중간 시기에 대한 내용(91, 12-17 ; 93)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과거의 역사는 균일하지 않은 일곱 개의 주간으로 나뉘어 있다. 이 일곱 주간이 지나면 세 주간이 뒤따라 오는데, 그 첫째 즉 여덟째 주간은 의(義)의 시대 이고, 아홉째 주간은 세계가 파괴되는 시대이며, 열째 주 간에는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다. 이후 새 하늘에서 영원 한 주간들이 시작된다. 제2 에녹서에도 메시아가 등장하 지 않는 종말론적 연표가 나타난다(32, 3-33, 1). 현세 의 지상 시대는 각각 천년으로 되어 있는 일곱 날로 구성 되어 있다. 일곱째 날이 천년 동안의 휴식이 주어지는 때 로서, 이것이 지나면 영원한 여덟째 날이 온다. 그렇다고 이 일곱째 날이 메시아의 통치 시기는 아니다. 메시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조를 교회의 초 기 문헌들처럼 메시아가 통치하는 천년 왕국으로 개작하 는 것은 쉬울 수 있다.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쓰 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제2 에스드라서에 따르면(5, 2- 7, 4), 이 사악하고 타락한 시대는 하느님 자신이 종식시 켜야 한다. 그 다음에 다른 기능을 분명히 갖고 있지 않
은 메시아가 와서 죽음을 겪지 않고 승천하였던 사람들 과 마지막 때의 고통을 겪고 살아남은 지상의 의인들과 함께 400년 동안 통치한다. 이 기간이 끝나면 자신의 임 무가 끝난 메시아는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죽 는다. 이후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교회사에서의 등장〕 초대 교회 : 예로니모(347~419) 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유대계 그리스도인, 특히 에비온파(Ebionaei)에서 메시아와 의인들의 통치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천년 왕국설 이 소아시아 서해안에 퍼졌다. 1세기 말에 에페소에서
활동하고 그노시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체린투스(Ce- rintus)는 의인들의 육체가 새 예루살렘에서도 욕정과 쾌 락에 빠져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그리스도 왕국이 감각적인 쾌락, 즉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결혼 축제를 제공하는 곳이라 묘사하였다. 유스 티노(100/110?~165?)의 《트리폰과의 대화》도 이러한 소아 시아의 종말론을 증언하는데, 구원은 역사 안에서 완성 되므로 구원사의 마지막 국면이 그리스도 왕국이라고 하 였다. 그는 많은 신자들이 이 천년 왕국설을 받아들였지 만, 열심한 신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천년 왕국설은 2세기에 몬타누스주의(Motranismus)에 서 등장하였다. 몬타누스(Montanus)는 그리스도인은 순 교를 자원해야, 아니 순교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 는 원시 교회의 종말론적인 긴장을 부활시켜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년 왕 국설의 유토피아를 주장하던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는 리용의 이레네오(130/144?~202?)였다. 그는 반 (反)그노시스주의적 해석학을 바탕으로 천년 왕국설 전 통을 구원사적 신학 범주에 연결하면서 종말론을 구상하 였다. 그러나 2~3세기의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천년 왕 국설을 논박한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피조물을 만든 후 이레째 되는 날 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는 창세기 2장 2절과 시편 90장 4절에 대한 《바르나바 편지》(15, 3-9)의 성서 주석 은, 소아시아 전통을 전적으로 따르면서 세상의 시대를 6 000년으로 산정하였다.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180?~250?)는 천년 왕국설의 관점에서 '세상- 주간-예형론' 을 학문적으로 전개한 첫 인물이다. 그는 천지 창조(기원전 5499년)부터 서기 221년까지 종교계 와 세속의 역사를 다룬 5권의 책인 《연대기》(Chrono- graphiai, 221)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세상의 기간을 5,500년으로 산정하였다. 그리고 6,000년이 완료된 뒤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인 안식일이 뒤따른다고 하였다. 히폴리토(170~236)도 예수의 탄생 연도를 5 ,500년으로 계산하였다. 또한 234년에 《연대기》를 저술하면서 당시 까지 지나간 시대가 5,738년이라고 산정하였다. 이를 통해 히폴리토가 아프리카누스와 마찬가지로 재림이 임 박하였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온건하게 반대하였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에서 천년 왕국설은 중요하 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리제네스(185-253)는 《원리론》 (De principis)에서 구약과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약속에 관한 문자적 해석에 대해 우의적(寓意的, allegory) · 영적 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실제로 물리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 그리스 도는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그들을 바칠 때까지 그들 가운데서 통치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 집트 아르시노에(Arsinoë)의 주교로 천년 왕국설을 주장 한 네포스(Nepos)는 자신의 작품 《우의론자 논박》에서 요한의 묵시록을 증거로 인용하면서 천년 왕국을 문자적
의미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올림푸스의 메토디오 (Methodius, + 300?)는 자신의 논고 <부활에 관하여>에서 비유적 · 영적 해석 방법을 논박하였다. 그는 종말의 낙 원은 천상 왕국에 이르기 위한 전단계이자 과도기이며, 천년 왕국은 천사 같은 아름다움에 이르는 통로라고 여 겼다. 그렇지만 4세기 동방에서 오리제네스의 견해를 따 르는 학자들은 천년 왕국설을 거부하였다.
서방 지역에서 천년 왕국설은 3~5세기에 활동한 그 리스도교 시인인 콤모디아노(Commodianus)의 시와 페타 우(Pettau, 이전의 페타비오)의 주교인 빅토리노(Victorinus, ?~304?)가 집필한 최초의 요한 묵시록 라틴어 주석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서방에서 천년 왕국설의 정점은 락탄 시오(L.C.F. Lactantius, 250?~321?)가 집필한 《신의 훈시》 (Divinae institutiones)다. 이 책의 7권 《복된 삶》(De vita beata)에는 천년 왕국설의 주장이 있는 종말론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중간 통치 동안 하늘의 천체들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땅은 스스로 음식을 생산해 낼 것이며 산에서는 꿀이 흘러내릴 것이 다. 술과 젖이 강을 이루어 흘러가고, 모든 짐승과 새들 은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다. 락탄시오의 영향은 북아프 리카의 주교인 힐라리아노(Quintus Julius Hilarianus)가 397년 쓴 짧은 연대기적 개요에도 드러난다. 그러나 술 피치오(S. Sulpicius, 360?~420/425?)가 400년경에 출판한 《연대기》(Chronica)에는 천년 왕국설의 내용이 더이상 담 겨 있지 않다.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이후 천년 왕국설은 서방에서 거의 생명력을 잃었다. 히폴리 토의 《연대기》를 354년 라틴어로 개작하고 뒤이어 쓴 호로시우스의 《연대기》에 천년 왕국설에 관한 암시가 전 혀 없는 것은, 로마의 공식적 입장을 나타내는 간접 증거 이다. 한편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처음에 온건한 천 년 왕국설을 주장하였지만, 예로니모와 티코니오(Tyco- nius, 330?~390)의 영향으로 자신의 역사 신학에서 천년 왕국설을 신학적으로 논박하였다. 그는 묵시록의 그리스 도 천년 왕국을 교회론적으로 교회 안에서 구원의 현존 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의 왕 국이고 하늘나라이다" (《신국론》 20, 9). 아우구스티노 이 후 교회에서는 가시아노(J. Cassianus, 360?~432/435)를 비 롯하여 천년 왕국설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 평가를 내리 는 신학자들이 있었다. 더구나 6세기 초에 교회의 공식 적 견해를 반영하는 이른바 <젤라시아노 교령>(Decretum Gelasianum)은 천년 왕국설을 주장하는 작품들과 분명한 경계를 긋고 있다.
중세와 종교 개혁 시기 : 아우구스티노의 우의적 천년 왕국설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자, 실질적인 천년 왕국에 대한 주장은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 은 아니었다. 11세기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네덜란드 의 이단이었던 탕켈름(Tanchelm)과 같은 자칭 메시아라 주장하는 이들이 이끄는 집단들에 빠졌는데, 특히 사회 변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에서 이 같은 일이 발 생하였다. 12세기에는 시토회 원장이었던 플로라의 요
아킴(Joachim de Floris, 1132~1202)이 천년 왕국설을 주장 하였다. 그는 세 번째 시대, 곧 성령의 나라가 도래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시대 가 1260년에 몇 가지 대변동이 일어난 뒤 실제로 도래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5세기 보헤미아 지방에서는 후스파들이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을 공격하면서 그리 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종교 개혁 시기에 천년 왕국설이 다시 등장하였다. 특 히 민처(T.Müntzer, 1489~1525)는 천년 왕국의 도래와 그 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16세기에 가장 유 명하였던 천년 왕국설은 민스터(Münster)에서 발생하였 다.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들이 이 도시의 통치 권을 갖게 되자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비신자들을 추방 하였고, 이 도시가 포위되자 새 예루살렘을 건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근대 이후 : 17세기 영국의 성서학자였던 미드(J. Mead)는 성서는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이 있고 난 후 많은 학자들이 천년 왕국이 언제 올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 다. 그들은 파괴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 도의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들 에게 있어서 역사의 과정은 하느님의 나라로 가까이 가 는 발전이지 퇴보가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투쟁을 거치지 않고 과거에 항상 승리하였던 노력과 같은 종류 의 노력에 근거하여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진 보주의적 천년 왕국설을 받아들인 사람이 '대각성 운동' (The Grate Awakening Movemens)으로 알려진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킨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였다. 그 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 천년 왕국 설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왕국 이 20세기 말엽에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650년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이 되었고 미국에서 큰 영향력 을 미쳤던 진보주의적 천년 왕국설은 여러 종파의 설립 에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모르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다.
〔의 의〕 성서의 영향이 없었다면 천년 왕국설은 존재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천년 왕국설은, 일부 교부들이 옹호하기도 하였지만, 어느 때에도 교회 전체 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년 왕국설은 일부 지역에서 신앙 공동체의 자의식을 견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천년 왕국설은 역사 안에서 성취되지 않았어도 모든 역사를 넘어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실현할 목표를 자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 의 천년 왕국설은 진리를 찾는 역사적 과정에서 효과적 인 촉매 역할을 한 창의적 · 선동적 유토피아로 이해될 수 있다. (→ 묵시 문학 ; 몬타누스주의 : 에비온파 ; 요 아킴, 플로라의 ; 요한의 묵시록 ; 재세례파 ; 천년 왕국 운동)
※ 참고문헌  G.G. Blum, Chiliasmus Ⅱ, 《TRE》 7, pp. 729~733/ 0. Böcher, Chiliasmus I, 《TRE》 7, pp. 723~729/ E. Dassmann, Kirchengeschidhte 1, Stuttgart · Berlin . Köln, 1991/ G. Englhardt,
Chiliasmus, 《LThK》 2, 1958, pp. 1058~1062/ K.S. Frank, Lehrbuch der Geschichte der Alten Kirche, Paderborn . München . Wien · Zürich, 1996/ M. Kehl, Chiliasmus, 《LThK》 2, 1994, pp. 1045~1047/ J.P. Dolan, 《NCE》 9, 2003, pp. 633~637.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