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가사 天主歌辭

글자 크기
10

지식인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일반 신자들, 특히 문맹자들의 교리 교육과 신앙의 활성화를 위해 만든 가사. 천주가사의 주 교육 대상은 글을 모르는 아녀자들이다. 이들이 쉽게 교리와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였으며, 당시의 대중 가사 형식을 빌려 작사하였다. 노래의 내용이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 구원을 갈망하기에 '천당 노래' , '천당 강론' 이라고도 하였다. 어린이들은 5~6세가 되면 어머니와 할머니와 더불어 주요 기도문과 함께 천주가사를 배워 천당을 노래하고 꿈꾸었으며, 여인들은 어디서나 천당 노래를 부르며 시련과 고통을 넘어 공포와 죽음을 극복하였다.
I. 개 념
천주가사는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천주교와 직 · 간접으로 관련하여 자신의 신앙 고백이나 가르침, 선교 등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가사이다. 이는 가사의 전통적인 양식인 3 · 4조 내지 4 · 4조를 기본으로 하여 종래 창가라고 지칭되던 6 · 5조, 7 · 5조, 8 · 5조 등의 개화기 단형 가사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천주교 내에서는 흔히 '천주교 가사' , '천주교 성가, '천주 찬가 , '천당 노래' , '사주구령가' (事主救靈歌)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 후기에 나타난 종교 가사의 하위 범주인 불교 · 동학 · 유교가사 등과 대비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교회 내 전승되는 문헌을 보면 천주가사의 전승자들은 이를 문학으로 인식하였다기보다는 단순하게 신앙을 표현한 글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천주가사라는 개념은 오늘날 분화된 갈래 의식을 통해서 본 것이지 당대에 인식하였던 개념은 아니다. 천주가사의 음악적인 전승 역시 민요나 독경 등과 같이 음영(吟詠)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시조나 판소리, 잡가 등과 같이 대중 속으로 침투하여 화려하게 발달하였던 가창(歌唱)과는 거리가 있다.
천주가사를 곡조에 맞추어 노래한 것은 1900년 이후부터이며, 가사의 전승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거나 공동체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그 시대에 널리 유포된 주변의 노래에서 곡조를 차용(借用)하거나 단조로운 곡을 붙여 불렀다. 이후 1920년부터는 《죠션어 성가집》 등에 천주가사의 일부가 성가에 인용되었다.
Ⅱ. 문학적 연원
천주교의 교리와 내용이 '가사' 라는 양식으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가사가 형성되고 변모하기까지의 문화적 경험 속에서 천주교가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멀리는 고려 말부터 시작된 가사 문학은 민요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 갈래적 성격이 서정 · 서사를 포괄하는 교술적(敎述的)이며, 4 · 4조의 4음보격으로 줄 수에 제한이 없는 연속체여서 '열린 문학' 으로서 개방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기본적으로 음영 혹은 가창되었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향수층(享受層)의 확대로 생활 속의 문학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가사 내용은 유교적 충의(忠義)를 바탕으로 자연 속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서정적인 지향에서, 자성(自省)과 교훈의 문학으로 처세와 윤리의 방도를 깊이 있게 따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율격도 완벽한 4음보격으로 질서와 균제를 숭상하는 사대부의 사고 방식을 적절히 반영하였고, 마무리도 시조와 같은 결사법(結辭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조선 후기에 와서 가사는 크게 변모하였다. 문화적으로도 격동기를 맞이하는 19세기의 시조가 양반뿐만 아니라 왕실은 물론 중인층과 여항인(閭巷人)까지 폭넓은 수용층을 확보하면서 가곡창 위주의 고급화 경향과 시조창 위주의 통속화 경향으로 분화된 것에 비해, 가사는 시대적 격렬함으로 기행 · 내방 · 서민가사 등 양식적 개방성과 탄력성을 더욱 확장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불교 · 동학 · 천주가사 등이 출현하였으며, 이념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암송하기 좋도록 한 줄은 반드시 네 토막이고 한 토막은 반드시 넉자로 된 형태를 갖추었다. 이 시기의 가사는 그 연원인 민요와 다시 어울리고,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口語)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실생활과 더욱 가까운 생활 속의 문학이 되었다. 즉 사대부들에 의해 창안된 가사가 확장되어 서민의 생활 문학으로 바뀌는 시기에 천주가사가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Ⅲ. 출현 배경
천주가사는 조선 후기 양난(兩難)의 충격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던 시기에 출현하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는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던 남인 계통의 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학문의 수준을 넘어 신앙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천주가사의 출현은 현실의 질곡을 넘어 새로운 세계관을 지향하던 사회와 한편으로는 서민 의식의 각성으로 보다 활발해진 문학사적 변화와 선교를 위한 교회의 필요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 가사는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소재의 확대를 통하여 문학의 변화, 특히 시가 문학 변모의 중심에 있었다. 향수층의 확대와 함께 민요와 결합한 가사 문학은 갈래적 특성상 교술 문학이면서 가창되거나 음영되었기 때문에 천주교의 선교를 위한 가장 적절하고 대중적인 양식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천주가사의 출현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출현한 이후 천주가사는 천주교 전파에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한역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신앙의 수준으로 발전시킨 다음, 이를 민중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가사와 같은 대중적 양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한문으로 된 서적이나 사설시조, 한시 등의 양식보다는 민중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가사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쉽게 암송하여 부를 수 있는 가사는 선교와 신앙 교육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여겨졌으며,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항하여 천주교 내부의 단결을 공고히 다질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천주교의 전래 초기부터 보였던 신앙의 토착화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새로운 사상을 전통적인 가사 양식에 담아 전파함으로써 거부감 없이 새로운 사상이 수용되었다. 혁신과 전통이라는 천주가사의 양면성은 전통이 좀 더 해체되고, 문학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시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근대시로의 이행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주가사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작품들에서는 대체로 앞에서 제시한 조선 후기 가사 문학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 자체가 주로 교리 해설에 가깝고, 음영되었으며, 종래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담아 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IV. 보급과 확대
천주가사는 기본적으로 천주교 교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주교의 교리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주가사는 천주교 교리와 당대의 시대적 흐름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우리 문화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절대적인 신앙을 우리말과 우리의 양식으로 소화해 낸 천주가사에 대한 이해는 천주교가 시대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 내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조선 후기 천주교는 당시 사회 변화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천주가사의 전개 양상도 기본적으로 그러한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개항이 당시 사회의 변화에 가속도를 주었다면, 이어 나타나는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의 입장이 크게 강화되는 사건이었다.
〔발생 · 정착기의 양상〕 발생 · 정착기는 천주교가 알려진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6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 천주교는 학문적인 한계를 넘어 본격적인 신앙의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탄압을 받아 수많은 순교자가 나타났다. 천주교의 도입 초기에 천주가사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가사라는 양식이 양반층에서 평민들에게까지 확대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의 구체적인 작품은 <천주공경가>, <십계명가>를 비롯하여 천주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인 <.향가>, 구세사(救世史)와 삼세(三世)를 노래한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의 <삼세대의>, <십계 강론>, <천당 강론>, <디옥강론>, 옥중에서 신자들을 각성시키는 이문우(李文祐, 요한)의 <옥중데성>, 남종삼(南鍾三, 요한)의 가사 2편, 남상교(南尚敎, 아우구스티노)의 <경세가>, 작가 미상의<경세가>, <회두가>, <장주교 노래>와 <강신부 노래>, <병인년 언문뒤푸리>, <피악슈션가> 등과 사말(四末, 죽음 · 심판 · 천당 · 지옥)을 노래한 <션종가>, <ᄉᆞ심판가>, <공심판가>, 복음 삼덕을 노래한 <신덕가>, <망덕가>, <애덕가>, 칠성사(七聖事)를 내용으로 하는 <령세>, <견진>, <고ᅙᆡ>, <셩뎨>, <죵부>, <신픔>, <혼비> 등 7편, 그리고 제성(提醒)과 수덕(修德)을 노래한 <졔성>, <ᅙᆡᆼ션> 등의 수덕가로 여러 편의 가첩(歌帖)에 중복되어 전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국문 가사 일반의 특징을 그대로 지닌 4 4조 연속체의 장형 가사로, 주로 천주교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박해 시대에 구전이나 노래를 통해 전승되다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 비로소 필사되었기 때문에 제작 시기 및 작가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그동안 천주가사의 효시(噶矢)로는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실린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가 거론되었다. <천주공경가>는 당시 서학 수용 과정에서 일어났던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발전, 영혼 불멸의 문제, 신앙 태도로서 제사 금지의 문제, 천주 존재론의 시비, 천당 지옥설의 시비 등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들을 노래하고 있으며, <십계명가>는 제목 그대로 십계명을 내용으로 한다. 이들 작품은 그 제목 밑에 각각 '천주공경가 기해년 납월 어주어사 이광암벽작가' (天主恭敬歌 己亥年 臘月 於走魚寺 李曠菴檗作歌), '기해 납월 어주어사 강론후 정선암 권공상학 이공총억 작가시지 이광암벽작가' (己亥 臘月 於走魚寺 講論後 丁選庵 權公相學 李公寵億 作歌寄之 李曠菴檗作歌)라는 기록이 있어 1779년 주어사 · 천진암 강학회 후에 이벽과 정약전 등이 지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달레(Ch. Dallet, 1829~1878)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ne de I'Eglise de Corée) 등의 기록 검토를 통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중 작가와 저작 연대가 밝혀진 것으로는 <옥즁뎨성>과 <삼셰대의>가 있다. <옥즁뎨성>은 1840년 이문우가 창작한 것으로 65구의 비교적 짧은 가사이다. 천상 과거에 합격하여 죽음을 이기고 영혼의 승리와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박해 중 옥중에서 천주교인들의 치명(致命) 순교를 각성시킨 내용이다. <삼셰대의>는 1840년에 순교한 민극가의 작품으로 총 287구의 장편 가사이다. 천당과 십계(현세) · 지옥 등의 삼계(三界) 의미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며, 세례받은 신자들이 신약 및 구약성서의 내용을 묵상할 수 있게 엮은 노래로 다분히 경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낙방거사인 경북 상주의 이생원이 지었다는 <피악슈션가>에는 천주학으로 유학의 모자람을 보충한다는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유학의 경전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인유론적(引儒論的) 입장이 나타나 있고, 우리의 민속과 결부된 내용이 많이 엿보인다. <ᄉᆞ향가>는 가장 이본(異本)이 많은 가사로 천주교 교리의 종합편이다. 이 노래에는 인간의 본향이 하느님 나라〔天鄉〕임을 밝히고 교리를 종합적으로 수용하며, 또한 유교 윤리와 천주교 윤리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주요 내용의 전개에 문답 형식이 원용되며, 영혼 · 삼사오관(三司五管) · 삼혼분별(三魂分別) · 신마유분(神魔有分) 등 서양 철학을 수용하여 작품화한 천주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시기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것은 칠성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련의 작품과 <졔셩>, <ᅙᆡᆼ션> 등 수덕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보통의 경우 <삼세대의> 뒤에 부기되어 전하며, 제목이 곧 교리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여 <ᄉᆞ향가>나 <피악슈션가>처럼 우리의 정서나 민속과 내면화되어 일체가 된 작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전의 작품과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단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병인박해(丙寅迫害) 직후 피폐화된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간에 교회를 떠난 신자들에 대한 재교육과 선교를 위해 급조된 가사일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모두 천주교 교리를 내용으로 하여 교훈적인 성격이 강하다. 또한 박해 속에서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상 영복을 얻자는 호교론적(護敎論的) 지향을 지닌다. 가사의 소개와 가명(歌名)이 그 시대의 신심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가사가 문학 작품처럼 독창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교리의 산물이요 교리 교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고 다른 가사들이 모방하고 인용하는 작품은 <ᄉᆞ향가>, <피악슈션가>, <삼세대의> 등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향가>는 신자들에게 내세를 지향하고 박해를 극복하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노래였다.
한편 천주가사는 당시 수입된 한역 서학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七罪宗〕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七德〕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인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의 《칠극》(七克)을 비롯하여, 양심 성찰 지침서인 《성찰기략》(省察記略), 참회 기도서인 《회죄직지》(悔罪直指) , 영성 생활 지침서인 《신명초행》(神命初行), 칠성사의 교리 해설서인 《성교절요》(聖敎切要), 사후 묵상서인 《사말론》(四末論) 등이 그것이다. 특히 《칠극》은 천주가사 전편에 걸쳐 영향을 주는데, 이는 다른 천주가사에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ᄉᆞ향가>에서 일종의 수신(修身) 덕목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ᄉᆞ향가>는 《신명초행》에서 영향을 받았고, <션종가>, <ᄉᆞ심판가>, <공심판가〉는 《사말론》의 내용을 가사화하였다는 주장도 주목할 일이다.
그런데 <ᄉᆞ향가>를 비롯한 작품들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저작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최양업 신부의 작품이라는 근거는 '김약슬본' 등에 나타난 기록과 교회 내 전승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필사 시기가 분명히 제시된 가첩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는 점과 근거로 제시한 가첩의 필사 시기가 1910년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최양업 신부의 저작 근거로는 미흡한 점이 많다. 따라서 최양업 저작설은 '구전 방식' 이라는 작품의 전승 형태에 대한 검토나 관련 문헌과의 관계, 작품에 내재된 구조 등 모든 것이 검토될 때까지 일단 유보되는 것이 좋다.
이들 가사는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부르고 전하였던 노래들이며, 이러한 노래를 통해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키고 내부적으로 결속력을 다져 이어지는 박해를 견디어 갈 수 있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의 정황으로 볼 때, 필사되어 서책으로 보존되었다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내용의 변화가 상당할 것이다. 기록된 장소가 전국적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한다. <ᄉᆞ향가> 등이 기록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필사본 가첩의 경우 '김동욱본' (충남 연기), '남마두본' (인천영종도), '오광렬본' (경기 수원), '김베드루본' (경남 동래), '유요왕본' (전북 익산) 등과 같이 장소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로 보아 이 시기의 가사들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이동에 따라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로 인해 원형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근대 전환기의 양상〕 근대 전환기는 긴 어둠의 시대를 접고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어 지하 교회의 처지에서 벗어난 시기이다. 그래서 천주가사도 생활 속의 신앙을 노래하거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나타나 긴 박해 기간 동안에 숨어서 부르던 노래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리의 직접적인 해설을 주로 한 이전의 가사에 비해 그 내용과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천주가사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구전되던 가사가 결집된 필사본 가사집으로 출현하였고, 둘째 전통적 가사 형식이 고착되면서도 개인의 영성에서 우러난 작품이 새롭게 창작되었다. 셋째 잡지류 등 언론 매체를 통해 발표되기 시작하면서 형식과 내용의 변화가 일어났다.
필사본 천주가사집의 출현 :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 박해는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교우촌이나 공소를 막론하고 한국 천주교회의 조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교회 지도층은 체포되거나 죽었으며,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근근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1876년 제6대 조선 대목구장인 리델(Ridel, 李福明) 주교 등이 입국하면서 교회 지도층은 피폐화된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선교 정책을 취하였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먼저 '회장' (會長, Catechista)제도를 부활시켜 선교 일선에서의 활동을 강화하였다. 선교를 위한 특별한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회장들이 선택한 방법은 천주가사를 통한 선교와 신자 재교육이었으며, 이에 따라 각 성당에 서실(書室)을 설치하여 필사본 천주가사집을 보급하였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필사본 천주가사집(표1)은 1885년의 시복 자료본을 필두로 총 53종이다. 이 중 필사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이본은 33종으로, 이 가운데 24종이 19세기 후반부터 1910년대 사이에 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교 일선에서 교리 교육적 기능에 기인한 천주 가사의 현실적 효용성이 인정되었으며, 한편으로 우리 문화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교회 지도층과는 달리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민족적인 것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내용의 심화와 변모 : 근대 전환기 천주가사의 특징은 형식에 있어서 4 · 4조가 고착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6 · 5조, 7 · 5조, 8 · 5조로의 변모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 내용도 개인의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심도 있는 작품이나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 민요의 표현을 차용한 노래, 새로 전파된 프로테스탄트와의 갈등, 전례에 따른 노래 등으로 이전 시대에 비해 심화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해체와 변형이라는 이행기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작품은 필사본으로 전하는 것과 교회 내 간행물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대별된다. 필사본으로 전하는 작품에는 작가 미상의 <충효가>, <ᄌᆞ가>, 김낙호(金樂浩, 야고보)의 <자신ᄎᆡᆨ가>, 이성수(李聖秀, 프란치스코)의 <리별가>, 조호식의<금침가>, 《박동헌 가첩》(朴東憲歌站)에 나와 있는 <도ᅙᆡ신전>, <경쥬론>, <춘산완시>, <셩연론>, <화ᄋᆡ론> <졍신부 생신>, <삼로론설>, <ᄉᆡ신부 경축> 등과 서재양의<별별가>, <태평가>, <허탄가>, <성모승텬가>, <예수셩탄가>, <예수부활가>, 박제원의 <소경자탄가>, <사말추론가>, 김기동의 <성탄가>, <구경요지>, <묵상요지>, <묵상요해>, 남마두의 <텬당가>, <십ᄌᆞ셩가찬시가>, <ᄋᆡ주ᄋᆡ인가〉, <극난가>, <반졀가>(國文歌) , <예수셩탄 경하가>, 작가 미상의 <렬교인의 디하야>, <루톄ᄀᆡ교>, <ᄅᆡᆼ담자 위ᅙᆞ야>, <탄세가>, <공동묘디>, <렬교란 말 듯기 슬혀>, <첩을 엇어 손 보자고>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경향신문> 등 교회 내 간행물에는 약 400여 편의 가사나 가사체 작품이 수록되고 있다.
이 시기에 창작된 천주가사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전 시기에 비해서 구술성이 약화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많은 작품이 유일본으로 전하고, 또한 이들 중 대부분이 4 · 4조가 엄격히 적용되는 고착된 형식을 보이는데, 잡지나 신문에 작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가창 위주라기보다는 눈으로 읽고 감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미상의 <충효가>는 357구의 장편 가사로, 그 표지의 '신묘 삼월 일' (辛卯三月日)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91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노래의 특징은 다른 천주가사처럼 천주교의 교리를 노래하였지만, 충효의 개념과 대상을 부모, 국왕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까지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또 동양 고전의 고사를 인용하여 천주교 사상과 유교 사상의 합일적인 지향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 점도 지적된다. 이는 천주교가 공인된 시점에서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모습으로 간주된다. 1889년에 창작된 <ᄌᆞ가> 교리 중심의 교훈적인 내용으로 성리학의 이론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인유 해석론(引懦解釋論)이 노래되고 있다. 작품의 중간 중간 '대경소리' , '슬프다' 처럼 장단이나 곡조를 알려 주는 단서가 나타나고 있어 장편 가사의 가창성 여부를 규명하는 근거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조카 사위인 김낙호가 1912년에 지은<자신ᄎᆡᆨ가>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자신의 신앙 생활을 성찰하며 자신을 꾸짖는 내용이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대한 전반적 반성과 아침 · 저녁 기도를 통한 회개, 하느님께 드리는 묵상 기도 그리고 결사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특징은 타인에 대한 권유나 계몽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함으로써 이전의 천주가사나 개화기 가사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조호식이 지은 <금침가>는 전통적인 중국 고사나 사서 삼경, 통감, 《동의보감》, 역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재가 풍부하게 인용되어 신앙을 노래하고 있으며, 《칠극》 등의 한문 교리서와 <ᄉᆞ향가>나 <피악슈션가> 등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대상이 평민이 아니라 양반층, 특히 개화파에 속하는 근대 지성인들이라는 데 있다. 한자어가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서두에 나타난 "잠들었네 잠들었네 세속 사람 잠들었네 잠을 깨소 잠을 깨소 세속 사람 잠을 깨소" 라는 구절은 개화 가사와 다르지 않다.
이성수의 <리별가>는 여러 가첩에 전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형인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신부와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다. 이내수 신부는 1882년 페낭(Pe-nang)으로 유학, 1884년에 귀국하여 1897년에 서품을 받았으며, 1900년 무안 우적동(牛跡洞)에서 선종하였다. 이 작품은 이내수 신부의 죽음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1900년 이후에 창작되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형이 사제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남, 유학할 때의 이별, 귀국 후 사제가 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의 헤어짐과 그에 따르는 아픔, 마지막으로 형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곡진하게 노래하고 있다.
《박동헌 가첩》에 수록된 <도ᅙᆡ신전>, <경쥬론>, <춘산완시>, <셩연론>, <화ᄋᆡ론> 등은 김휘중(金輝重, 요셉) 신부의 작품이다. 이 중 <도히신전>은 현세를 괴로운 바다로 보고 이를 이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ᄉᆞ향가>나 <삼세대의>와 비슷하거나 중복되는 구절들이 많다. 그리고 <경쥬론>은 술을 경계한 노래이고, <성연론>은 예수가 세운 성체성사의 거룩함과 영성체의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춘산완시>이다. 이 작품은 봄날 작가가 춘산(春山)을 구경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을 맑은 영혼을 닦기 위한 공간으로 보아 후에 '청록파' 시인들이 도달한 바와 같이 자연에 대한 완숙한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화산 본당의 복사와 화산학교 학감을 지낸 서재양은 여러 편의 가사를 지어 남겼는데, 신심 서적인 《사후묵상》(死後默想)과 민극가의 <삼셰대의>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하였으며, 풍부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이 짙다. 전체적인 내용은 세상의 허망함을 알고 하느님을 굳게 믿어 하느님 나라의 영복을 누리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들 작품은 가사 문학이 사라지는 시대에 지어진 작품인 만큼 4 · 4조의 고착화된 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창되었다기보다는 독서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남마두는 본명이 남상은으로, 20세기 초 <ᄋᆡ국가>를 창작하여 <경향신문>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등 문학적 자질이 뛰어나 많은 작품을 <경향신문>이나 <경향잡지>등에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필사본 천주가사집인 《남마두본》 가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ᄉᆞ향가>나 <삼세대의> 등의 작품에서 나오는 박해 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정통 가톨릭 교리에 입각하여 창작된 작품이 많다.
한편 <렬교인의 ᄃᆡ하야>와 <렬교란 말 듯기 슬혀>, 〈루테ᄀᆡ교> 등은 20세기 초에 프로테스탄트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그들과의 갈등을 나타내고 있어, 시대상의 반영으로서 천주가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에 비해 <ᄅᆡᆼ담자 위ᅙᆞ야>는 냉담하는 천주교인의 회두를 위하여 노래하고 있으며, <탄셰가>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영혼 구원에 대해 무심함을 한탄하고 있다. <공동묘디>에서는 풍수설에 매혹되어 명당을 찾는 것은 헛된 일임을 노래하고 있고, <첩을 엇어 손 보자고>는 가문을 잇기 위한 첩을 얻는 당시의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신문, 잡지류를 통해 발표된 작품 : 이 시기에 이르러서 중요한 특징은 교회 내의 각종 신문이나 잡지 등에 가사나 가사체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한국 시가의 변모 양상과 같은 양상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으로 1906년 10월 19일에 창간된 <경향신문>과 《경향잡지》, 1927년 창간된 <천주교회보>(현 <가톨릭 신문>)나 <별> 그리고 《가톨릭 청년》(1933), 《가톨릭 연구》(1934) 등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은 한국 가톨릭 내에서 전 시대의 문학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가 탐색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주교의 간행물은 1906년 <경향신문>에서 시작된다. 이 신문은 순 한글로 천주교 선교를 위한 내용을 취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 신문으로서의 구실도 하였다. 이는 발행인이 외국인인 드망즈 신부이기에 다른 신문에 비해 당시 당국의 제약을 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향신문>에 발표된 가사들은 시형(詩形)의 변화가 많지 않고 4 · 4조의 고답적인 형식을 따르는 한편, 당시 시대적 고민을 담은 내용, 즉 전환기의 절실함이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경향신문>이 폐간된 이후 발행된 《경향잡지》와 그 외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율격의 변화를 수반한 시형의 변화가 많은 반면, 내용은 교리 해설과 천주교인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한 교훈적인 것 그리고 각종 기념식이나 경축식 때 불렀던 축가 등 천주교 내부의 관심사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경향신문>과는 다른 이러한 흐름은 간행 연대의 차이와 일제의 탄압 등 국권 침탈에 따르는 시대적 분위기에 기인하는 면이 없지 않으나, 민족과 현실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교회 지도층의 인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가사가 시대를 반영하면서 새롭게 그 모습의 변모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별>이나 <천주교회보>, 《가톨릭 청년》, 《가톨릭 연구》 등에 수록된 작품은 <경향신문>이나 《경향잡지》에 수록된 작품보다 더 파격이 많고, 다양한 형식과 다양한 내용을 보인다. 이들 작품의 전반적 특징은 대체로 분량이 짧아졌으며, 4 · 4율격을 계승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이외에도 6 · 5조, 7 · 5조로의 변형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형식에서도 연(聯) 구분이 있고, 각 줄의 배열도 전통에서 벗어난 것, 노래 형식이 선 · 후창으로 나누어진 것, 후렴이 있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작가가 밝혀진 것이 많고 새로 수입된 서구적인 노래의 가사로 지어진 것이 많은 반면, 대부분 전통적 방식으로 노래 부르기보다는 읽기 위한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형태의 변화는 조선 후기 잡가의 형태 변화나 현대시의 성립 과정과도 일치하는데, 이 시기의 천주가사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였으며, 다른 갈래와 활발한 교섭 양상이 나타나 천주교 내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의 변화를 수용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신문 · 잡지에 수록된 작품은 가사라기보다는 가사체 작품 혹은 가사의 변모 양태라고 하는 것이 좋을 만큼, 형식의 변모는 동시대의 지면에서 혼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구체적인 유형은 전통적인 4 · 4조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작품군, 4 · 4조를 그대로 이어받되 연 구분이 있는 작품군, 후렴이 있거나 '계' (啓)와 '창' (唱)이 이어지는 작품군, 7 · 5조 내지는 3 · 4 · 5조 등 세 음보 갈래로 된 작품군, 파격으로 인해 자유율에 가깝게 지어진 작품군 등 대략 다섯 가지로 대별된다. 이러한 율격과 형식의 변모는 우리 사회 내부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보여 주는 전환기적 속성으로 파악되며, 한편으로는 현대시 성립의 전(前)단계로 우리 문학의 이행 과정을 실질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편 내용은 대부분 교회 내적인 행사나 교리 해설 등에 한정됨으로써 박해 시대의 모습에서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천주교 사상이 완전히 용해되지 못하였다는 시각에서 1920년대에 새로운 시형인 자유시로서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전환기 문학으로서의 천주가사의 한계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대중적인 성격을 지녔던 <경향신문>에 이어 발간된 《경향잡지》가 일제의 탄압으로 순수 종교지의 입장을 표방하였으므로이는 곧 우리 문학의 한계점으로 지적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우리의 시가 현대시로 발전하여 본격적인 작품이 나오는 상황에서 《가톨릭 청년》이나 《가톨릭 연구》 등의 잡지가 현대시의 성립에 어느 정도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때, 한국 문학사 안에서 천주교 문학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천주가사 전개 양상에서 보이는 특징은 그것이 우리의 문화사적 변화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즉 근대의 눈뜨는 시기에 천주가사에도 변화가 나타나며, 그 변화는 집단적인 영성에서 개인적인 영성으로 심화, 발전하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앙의 자유 이전의 천주가사들이 수많은 민속을 원용하여 신앙을 체질화시키며 반(反)가톨릭에 대항하여 신앙을 노래하였다면, 이후의 가사는 개인의 내면으로 성숙되는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 시대 상황과 보편화된 민족의 정서가 보태어져 한국적 영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신문 · 잡지에 실린 작품은 지면의 한계성과 가톨릭 지도층의 정책 방향, 일제의 탄압 등에 의해 천주교 내적인 문제로 소재가 축소되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4 · 4조에서 벗어난 다양한 율격으로 현대시 성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된다.
V. 천주가사에 나타난 영성
천주가사는 '사주구령가' 라고도 불린다. 이는 천주가사의 영성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인데, 이를테면 천주가사라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의 길을 가르치는 신앙 본래의 목적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천주가사의 영성을 말한다면 하느님 나라 지향, 공동체적 삶, 순교자 지향, 전례 중심의 영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성찰과 통회를 통한 수덕의 삶과 이를 통해 시련을 겁내지 않고 진리를 향하는 단호한 도전을 통해 생활화된 신앙, 토착화 된 삶의 모습 등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천주교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이 지향하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그 내용이 하느님 나라로 초점이 모아지면서 심화되고 정리되었을 뿐이다.
대중 교화와 성화(聖化)의 목적에서 기원된 천주가사는 <ᄉᆞ향가>, <피악슈션가>, <옥즁뎨성> 등에서 보듯이 제목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천주교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한 구체적인 소재는 그 시대의 생활에서 차용하였다. 즉 초기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생소한 교리를 전달하기 위해 수준 높은 상징이나 비유보다는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민속이나 소박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은 교의(敎義)와 윤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천주가사에 나타난 영성을 종합하면 토착화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수덕의 길로서의 천주가사의 영성은 궁극적으로는 전례 중심의 신앙으로 집약되지만, 구체적인 행동 강령인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 및 실천 도덕과 상통하는 것으로, 권선징악의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현세의 행업에 따라 내세(來世)가 결정되는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단지 천주가사가 기존의 불교가사나 여타의 수덕 가사류와 다른 것은 자력 구원(自力救援)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의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영성의 본질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닦는 것은 천주가사에서 강조되어 있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죄악의 뿌리를 알고 이를 극복하는 피악수선(避惡修善)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칠죄종(七罪宗)과 칠극(七克)이다. 교만은 겸손, 인색은 자선(施捨), 탐욕은 담박(淡泊), 분노는 인내〔含忍〕, 질투는 인애(仁愛), 음욕은 정결, 나태는 근면〔欣勤〕으로 대응되는 것은 인간 안에 내재한 양면적인 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칠극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통회는 인생의 험난한 여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한편 천주가사에서 현세 혹은 현실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물의 골짜기, 즉 체읍지곡(涕泣之谷)으로 인식되며, 따라서 현실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영성이 잘 표현된다. 현세는 영생을 위해 준비하는 장소이고, 죽음 또한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제시되며, 천상 영복을 받을 수 있는 순교자적 삶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점은 삶의 지침이 되었고, 묵상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사말인 죽음, 심판, 천당, 지옥에 대한 성찰로 나타났다. 하느님 나라 지향의 영성은 박해기 영성의 특징을 이루지만, 현실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것은 한국 선교의 일선에 섰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영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비극미 혹은 비장미로 한(恨)의 정서를 이끌어 냈던 19세기 사회의 분위기와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VI. 의의와 한계
천주가사는 그 용어에서 보듯이 '천주' 라는 서구 사상과 '가사' 라는 전통적 양식의 융합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는 '서구적 내용의 한국적 형식화' 라는 입장이나 혹은 '외래 문화의 내적 전승' 이라는 양면성으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개항기 혹은 이행기의 문화적 특징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천주가사의 의의는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의 접근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문학사를 중심으로 한 가사- 창가-근대시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그 위상에 대한 고찰이고, 두 번째는 한국의 사회 · 문화적 상황에서 천주가사가 지니는 의미이며, 세 번째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갖는 의의이다.
19세기 가사 문학에는 근대 계몽기에 보여지는 변모의 놀라운 잠재력이 이미 내재해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천주가사는 한국의 시가 문학이 변모하는 중심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여타의 가사와는 달리 천주교 사상으로 대표되는 근대적인 이념을 수용하여 계몽기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이나 그것이 <경향신문> 등 교회 기관지를 통해 보급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악곡으로 가창되었다는 점 등은 천주가사가 우리 나라 근대 문학이나 음악을 태동시키는 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는 측면에서 문화사적인 의의를 충분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또한 천주가사가 가사 문학의 한 흐름으로서 우리 문학사 속에 존재하는 것 자체도 문화 담당층의 주체적 역량과 문화 지평의 거대함을 확인해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천주가사의 수용으로 우리 문화는 더욱 근대와 가깝게 그 폭을 확장시켰으며, 이는 우리 문화의 열린 가능성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사회 개혁을 갈망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된 천주교 사상은 18세기 말 진산 사건과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기점으로 변화를 겪었다. 초기 교회를 주도하면서 이성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였던 양반 계층이 순교하거나 교회를 떠나고 기나긴 목자 없는 시대를 거치면서 신앙의 중심에 일반 서민들이 등장하게 된다. 서민 중심의 신앙은 지식인이나 사회 지도층이 새로운 주도권 구축이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수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가톨릭의 중심이 양반 지식층에서 서민들로 이동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민들은 논리나 이성적인 차원을 떠나 생활 속의 신앙으로 서학을 수용하였으며, 이로써 신앙이 철저하게 생활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성적인 능력은 부족하였으나, 18세기 초반의 양반층과 같이 사회적 욕구를 신앙으로 치환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목자 없는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간 천주교 신앙은 수많은 박해를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천주가사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는 박해라는 커다란 시련을 이겨 낸 실질적인 문화 담당층의 주체적 역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천주교 내부적으로 보면 천주가사의 출현은 신앙인들이 시대적 상황에 맞서서 자기를 지키고 신앙의 명맥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따라서 천주가사에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며 현실의 극복을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였던 한국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또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왔던 시대의 흐름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천주가사의 교회사적 의의로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천주가사가 그 자체로 토착화된 교리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가톨릭 신앙이 토착화된 구체적인 사례이다.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서양의 신심서들은 우리의 심성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언어로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천주교 신앙을 심화시켰다. 이스라엘의 시편이 교의의 전례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노래 속에서 체계적인 구약성서의 신학을 발견하기 어렵듯이, 천주가사도 교리의 종합편이지만 체계적인 신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한국 가톨릭의 현실로 볼 때 어렵다는 표현보다는 적극적으로 정리되고 계발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전래사 속에서 나타나는 한국의 천주교는 중국화된 서적을 통해 산발적으로 조선에 수입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정교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천주가사가 수많은 박해 속에 순교로 점철된 이 땅의 신앙 선조들의 경험과 생활 속에서 전승된 만큼 그 안에는 한국 천주교회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학과 영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성적인 입장에서 보면 신앙이 체질화되고, 자기화된 신앙을 통해 교리를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 예수가 육화하듯이 정서적으로 우리 민족의 내면으로 들어와 깊은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그 의의로 지적된다.
한편 천주가사는 교리 중심의 언술로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이기보다는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만의 문학이라는 비판도 있으며, 현실이 극복해야할 대상이고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여정에 불과하다는 내세 중심적 세계관은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으로,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배층과의 피나는 투쟁 속에서 자신을 발전시킨 동학 등과는 달리 가톨릭만의 구원을 위하여 민족이 처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도 이후 계속된 가톨릭의 정책 방향과 더불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으로 여겨진다. (⇦ 벽이가사 ; ← 《사주구령가》 ; <사향가> ; 《사후묵상》 : <삼세대의> ; <피악수선가>)
※ 참고문헌  김진소, ,<천주가의 연구>,《교회사 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하성 래, 《천주가사 연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이경민, 《天主歌 研究》, 전남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7/ 차기진, <조선 후기 천주가사에 대한 재검토>, <교회와 역사》 272호 (1998. 1)/ 양희찬, <박해 시대 천주가사에 나타난 현세적 의식과 신앙관에 대한 고찰>,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김영수, 《천주가사 자료집》(상 · 하),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00~2001. 〔金榮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