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타종교(비그리스도교)
敎會 - 他宗敎
〔라〕ecclesia et non-christianismus · 〔영〕church and non-christian religions
2권
교회는 불교의 풍부한 가치와 깊이를 인정한다.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 (No world peace without religious peace). 이는 1893년에 열렸던 '세계 종교 박 람회' 1백 주년을 맞아 인도의 방갈로르(8월 18~22일) 와 미국 시카고(8월 24일~9월 4일)에서 개최된 '세계 종 교 회의' 의 주제이다. 이 주제는 오늘날 종교간의 만남 과 상호 이해, 그리고 대화가 얼마나 절실히 요청되는가 를 역설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는 종교적 충돌로 인한 비극적 유혈 분쟁들이 그치지 않 고 있다. 이러한 슬픈 종교적 현실은, 전세계 모든 종교 인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에 대하 여 깊은 이해와 반성을 촉구하게 한다. 아직도 이스라엘 에서는 유대교와 회교(이슬람)가,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 아 정교와 회교가,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는 가톨릭과 회교가, 이라크에서는 회교 수니파와 시아파가, 인도 대 륙에서는 힌두교와 회교가 또는 힌두교와 시크교가, 스 리랑카에서는 소승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적개심을 갖고 살육을 일삼고 있다. 타종교에 대한 성숙한 이해는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를 위한 선결적 전제 조건이다. 현대는 종교와 종교가 서로 피해 갈 수 없는, 다시 말해서 함께 공존을 모색하지 않 으면 안되는 '종교 다원주의' (religious pluralism) 시대이 다. 종교 다원주의란 그 자체만으로 각각의 종교 전통을 따르는 신앙인 각자에게 이미 그들 신앙의 정체성을 다 시 한번 되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하나의 도전이다. 그리 스도인에게 이 도전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교 전통과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접 어든 것이다. 이는 지구촌 시대의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 다. 피할 수 없는 사건으로 다가온 종교간의 만남은, 시대 가 변했으니 이제-그 대화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다른 종교와 대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극적 인 자세는 종교간의 대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한 주변적인 자세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 간의 대화는 한 종교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가 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그 본질을 이해하지 않 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른바 '타' 종교와의 만남 없이는 '나의' 종교의 진리 이해 역시 불완전해진다는 것을 자 각하는 것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시작된다. 〔역사적 반성 및 고찰〕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편협하 고 배타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의 종교적 견해를 심각하게 고려하였으며, 로마의 관리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예수는 비록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진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존경심을 표하였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한 예수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다른 종교 전통에 대한 그리스도교 의 개방적 태도의 기초가 여기에서 마련된다. 그러나, 불 행하게도 교회는 타종교 전통에 대하여 지극히 편협하고 독선적인 그리고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왔다. 교회 는, 제국주의적 자세로 타종교인들은 교회의 선교 대상 이며, 회개의 대상이라고 말해 왔다. 사실, 최근에 이르 기까지도 다른 종교 전통의 비그리스도교인들을 선험적 으로 과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자세가 지 배적이었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정언(定言)은 이를 뒷바침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 라' 를 '교회' 와 철저히 동일시하는 과오를 범해 온 것이 다. 교회 또한 "구원의 도정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 고 있음" (교회 6, 40, 48, 50항 ; 사목 43항)을 망각하고, 움직일 수 없는 '절대 진리' 의 확고한 보지자(保持者)로 군림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 회가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교의사 적, 사상사적 정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심층 이해하는 동 시에 이 과오 또한 가볍게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함께 인정해야만 한다. I . 교회의 입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관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는, 그 자체가 지닌 의미만으로도 교회 내에(ecclesia ad intra) 또한 교회 외에(ecclesia ad extra) 전면적 혁신을 초 래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비유된다. 여기서 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타종교 전통의 존재 의미와 그 가치를 깊게 성찰, 공식적인 인정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비그 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 선 언에서 교회는 타종교 전통이 그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 을 위해 구원의 수단이 된다는 식의 직접적인 표현은 사 용하고 있지 않지만, 타종교 전통에 속하여 있는 이들에 게도 그 전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가능할 것 이라는 신학적 입장을 신중하게 표명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 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 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 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 또한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혹은 윤리 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 전시키기를 모든 자녀에게 권하는 바이다"(비그리스도교 2항). 또한, <교회 헌장>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섭리 (攝理)는 선의의 모든 이들의 구원을 희망하신다고 분명 히 말하고 있다. "마침내,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느님 백성에 관련되어 있 다.···또 알지 못하는 신(神)을 영상(影像) 속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 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 시며(사도 17, 25-28), 구세주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1디모 2, 4). 사실, 자기의 탓 없이 그리 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 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 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들 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 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생명 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 (교회 16항). 사실, 우리 모두는 온갖 차별, 즉 혈통이나 사회적 조 건, 종교적 차별을 넘어 단 하나의 공동체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전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 시었으니(사도 17, 26) 모든 민족들은 단 하나의 기원을 가졌고, 또한 단 하나의 최후 목적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하느님의 섭리와 착하심의 증거와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이고(지혜 8, 1 ; 사도 14, 17 ; 로마 2, 6-7 ; 1디모 2, 4),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천 상 성도에서 간선자들이 다시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여러 민족들이 하느님의 빛 속을 거닐겠기 때문이다(묵 시 21, 23)"(비그리스도교 1항).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기본 입장〕 가톨릭 교회는 다 른 종교적 전통 혹은 종교적 신념 체계 및 사조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가톨릭 안에서도 학 파와 학자 등의 타종교 전통에 대한 신학적 입장와 견해 에 따라 이론이 분분하며 심지어 상호 충돌하는 주장까 지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라너(Karl Rahner)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Die anonymen Christen) 이론으로 타종교 전 통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한층 깊게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한스 킹(Hans Küng)으로 대표할 수 있 는 칼 라너 비판이 있다. 또한 타종교 전통과의 대화에서 대표적인 태도로 말해질 수 있는 상대주의(rlativism)적, 절대주의(absolutism)적 태도 및 이 둘 모두를 넘어서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의 전문적 학설 및 주장, 이론들이 신 학계에 많이 등장하였다. 교회는 다른 종교 전통들과의 만남을 갖기도 전에 선 험적으로 다른 종교를 경시하는 우월적인 태도를 버리 고, 이들이 지닌 '참되고 좋은 것' (교회 16항), '고귀하고 종교적이며 인간적인 요소들' (사목 92항), '관상적 전통 들' 및 '진리와 은총의 요소들' (선교 9항), '말씀의 씨앗 들' (선교 11, 15항) '모든 이를 비추는 이 진리의 빛' (비그 리스도교 2항) 등 긍정적인 면모를 인정하려고 노력하여 야 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다른 종교 전통의 사람들과 깊 은 대화를 나누도록 촉구해야 한다. 다른 종교 전통 내지 세계관과의 허심 탄회하고 형제적인 만남 한가운데서, 그리스도 신앙 진리의 고유성은 보다 더 명백하고 투명 하게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입장은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1964. 1. 4)의 취지이기도 하다. 이 회칙은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진실성을 표 현하도록 촉구하며, 그리스도교의 정체가 하느님을 찾고 흠숭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언젠가는 인정받게 되리라 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고 말한다. 이와 함께 여러 비그 리스도교들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을 등한시 하려 하지 않음도 천명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 전통의 신앙인 들과 함께 가능한 한 , 공동 이상을 촉진하고 옹호하기를 원한다" 고 천명한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 하여 다른 종교 전통과의 단순한 대화를 넘어선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실천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한 바 있듯 이, 이 요청을 유보 없이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특정한 학파 및 학자의 견해가 공식적 인 교회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 므로, 교회의 공식적 문헌 및 관계 문헌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기본 입장 및 태도를 정립할 수 있겠다. 힌두교 및 불교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2항에 서는 '힌두교와 불교'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힌두교(인도교)에 있어서 사람들은 신의 비밀을 탐구하 여, 한없이 풍부한 신화와 깊은 철학의 시도로써 표현하 는 동시에, 인생고에서의 해탈을 찾아 수덕 생활이나 깊 은 관상이나 신뢰와 사랑으로 신에게로 향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학파에 따라 무상한 현세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열심 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완전한 해탈 상태에 이르든지 혹은 자신의 노 력이나 위로부터의 도움에 의하여 최고 조명(照明)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힌두교(Hinduism) 또는 브라만교 (Brahmanism)는 인도에서 아리안족 이 정착한 후에(기원전 1500경) 정복 자와 피정복자들이 가진 문화적 요소를 이용하여 발달한 종교이다. 힌 두교는 스스로를 '계시 종교' 로 자 처하지 않는다. 인간 체험의 밑바닥 부터, 자아의 깊이에 대한 끝없는 추 구로, 풍부한 인간 체험을 하나도 잃 지 않으려는 부단한 명상으로 힌두교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간디 (Gandhi)가 말하는 것처럼 "힌두교 는 부단한 진리 탐구의 종교이며, 진 리의 종교이다. 진리란 곧 신(神)이다."힌두교의 엄격한 생활 방식은 소수 특권층만이 온전히 따를 수 있었고, 대 중들 특히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실행하기 어려웠다. 이 에 보다 대중적인 종교 생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기원 전 500년경에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에 의 해 탄생한 불교였다. 불교는 자신의 행위 즉 '업' (業)에 서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종교이다. 그 목적은 고 통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고해(苦海) 이다. 고통은 무지와 생의 욕망에서 온다. 이런 욕망을 자신에게서 제거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 상의 고통스럽고 무상한 사물들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일체의 고통이 없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불교의 교리는 열반에 이르는 '팔정도' (八正道)를 제시 하였다. 그 첫째는 '정견' (正見) 즉 사물에 대한 깊은 통 찰이며, 둘째는 '정업' (正業) 즉 자비 무사(慈悲無私)하 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원의이다. 이러한 '팔정도'의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체험에 기초를 둔 착실하고 실천적인 방법으로 자력 구원(自力 救援)이 추구되고 있다. 불교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불교의 자비는 자기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방법이지, 자기 자신 밖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도 그 근본 정신을 능가하여 사랑의 교리 와 흡사한 교리로 발전했으니, 대승(大乘) 불교에서 이 를 찾아볼 수 있다. 불교와 힌두교의 풍부한 가치와 깊이를 교회는 기꺼이 인정한다. 이 두 종교는 인생이 고해라고 하는 인도 열대 지방의 독특한 자연 환경 및 대중 생활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두 종교는 불행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고, 관상 · 고행 혹은 팔정도로써 이 고해에서의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 교회는 두 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다른 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불교와 힌두교는 인간이 운명에 굴복하도록 가르치고 있 다. 인간이 탐욕과 번뇌에 좌우되지 않고 영적으로 끗끗 이 서 있도록 가르치기는 하지만, 불행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정화된 마음에는 비 참한 인간 운명이 그다지 통절히 느껴지지 않을지 모른 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여전히 큰 슬픔으로 남아 있다 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세상은 단지 허상(虛 像, Maya)에 불과하다고 보며, 세상의 발전을 위한 구체 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을 별로 촉진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이 불교와 힌두교의 교설을 따른다면, '영 원' 이란 희망하든 그렇지 않든 무방하다. 거기에는 사랑 의 상봉(相逢)이나 인간성의 신장(伸張)이 아니라, 다만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개인 존재의 소멸(涅槃)이라는 "비인격적 해탈"이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힌두교도나 불교도들은 이 세상의 비참을 필연적인 것으로 감수하고 인간 삶의 발전을 체념하고 있기도 하다. 회교(이슬람)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3항은 '회교' 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또한 회교도들 도 존경하고 있다. 생명의 실존자, 자비롭고 전능한 천지 의 창조주(성 그레고리오 7세의 편지 21, 마우리타니아 왕이 안시르에게 보낸 편지, 라틴 교부 제148권, 450면 이하 참조) , 사람들과 얘기하시는 유일신을 그들도 흠숭하며 아브라 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은 그들 신의 비밀한 결정에도 순종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즐 겨 주장한다. 예수를 하느님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예 언자로는 공경한다. 동정 성모를 공경하며 때로는 그의 도움을 정성되이 청하기도 한다. 또 하느님께서 모든 사 람을 부활시키시고 갚아 주실 심판 날을 기다린다. 여기 서 그들은 윤리 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써, 또는 애 긍시사와 재계로써 하느님을 섬긴다. 역사 과정에 있어 서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회교도들 사이에 불목과 원한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성스러운 교회 회의가 모든 사람 에게 권고하는 바이니, 과거를 잊어 버리고 서로 이해해 주기를 진실로 바라며, 모든 이에게 사회 정의와 윤리선 과 나아가서는 평화와 자유를 옹호해 주고 촉진시켜 주 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교회의 태도 속에는 회교와 그 리스도교의 다른 점에 대한 이해도 포함한다. 힌두교, 불 교와 더불어 비그리스도교 중에서 가장 큰 종교인 회교 는, 600년경 다신교를 믿고 있던 아랍 민족 가운데서 발 생하였다. 이 종교는 아라비아의 도시 메카에서 마호메 트라는 인물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계시 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모 든 계시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믿었다. 신은 절대 적으로 유일하고 단일하며 전능하다는 것이 마호메트가 가르친 교리의 핵심이다. 그가 계시를 받아 기록했다는 '코란' 은 글자 그대로 신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간주되는 회교의 경전이다. 회교 역시, 힌두교와 불교처럼 운명론을 언급한다. '이슬람' (Islam)이라는 회교의 이름은 신에게 절대 위탁 (복종)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위탁이란 운명론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라 신이 인간과 만물에 아무 런 자율성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상은 자기 운명을 개 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알 라는 빈부의 운명을 인도하고 각자의 신분까지도 결정해 놓았다. 회교도들은 자신과 이웃의 운명을 저항 없이 받 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회교의 경전 '코란' 이 성서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회 생활의 지침을 제시해 놓고 그것을 알라의 뜻(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정 도 기인한다. 따라서 회교도 인도의 종교들과 마찬가지 로 인간의 지상 운명을 거의 변함없이 고통과 빈곤 속에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교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통한 '유대 교' 에 대한 교회의 표명은 특별한 인상을 준다. "이 성스 러운 교회 회의는 교회의 신비를 탐구함에 있어서 신약 의 백성과 아브라함의 혈통을 맺어 주는 인연을 기억하 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과 불리움은 하느님 의 신비로운 구세 계획대로 이미 성조들과 모세와 예언 자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한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 라함의 후손들인(갈라 3, 7)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부르심을 받았고, 선민이 종살이 땅에 서 탈출한 역사적 사실은 교회의 구원을 신비롭게 표상 하는 것이라고 공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옛 계약을 맺으신 그 백 성을 통하여 교회가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았고···뿌리에 서 교회가 자라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다(로마 11, 1724).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입양과 영광과 여러 가지 언약과 입법과 경신례와 약속을 차지하였고 선조들 과 동족이며 (동정 마리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 성으로는 그들 중에서 태어나시었다' (로마 9, 4-5) 하신 사도 바오로의 혈친에 관한 말씀도 교회는 언제나 되새 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초석이요 기둥인 사도들 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한 초기 제자들 대부 분이 유대 백성 중에서 태어났음을 잊지 않고 있다. 성서 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자기를 찾아 주시는 때를 알지 못하였고(루가 19, 44), 대부분의 유대인이 복 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복음의 전파를 방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로마 11, 28). 그렇지만 성 바 오로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회심 없이 받았으나 조상들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로마 11, 28-29 ; 교회 9항). ···그 리스도교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정신적 공동 유산이 이렇 듯 큰 것이므로 이 성스러운 교회 회의는 서로의 이해와 서로의 존경을 증진시키며 권장하는 바이다. 특히 성서 와 신학의 연구와 형제적 대화에서 이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유대인들의 집권층과 그 추종자들이 그리 스도의 죽음을 강요하였지만(요한 19, 6), 그리스도가 수 난하실 때에 저질러진 범죄를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 대아인에게 차별 없이 책임지우거나 더구나 오늘의 유대 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 서 마치 성서상의 귀결인 듯이 유대인들을 하느님한테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그러므 로 누구든지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 복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칠까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누구를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라면 모두 교회가 배격한다. 교회 는 유대인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정치적인 동기에서 가 아니라 종교적이요 복음적인 사랑에서 유대인들에 대 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 였든지 간에 차별 없이 통탄하는 바이다. 교회가 언제나 주장하였고 또 현재에도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모든 사 람들의 죄 때문에 자원으로 수난하고 죽으시어 모든 사 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표 시와 온갖 은총의 원천으로 선포하는 것이다"(비그리스교 4항). 인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 서구 세계에서는 고통과 비참에 대하여 항상 '인본주의' (humanism)라는 그리스 도교와 아주 다른 태도가 발전해 왔다. 하느님의 존재에 관하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란 인간 생활의 근본 원리가 되기에는 너무나 불확실하다. 인류 는 자신의 행복과 선을 위하여 자신에 의존해야 한다. 불 행과 고통은 과학, 기술, 지성 등 인간이 가진 모든 수단 으로 정복되어야 한다. 회교도와 같이 운명에 굴복해서 도 안되고, 힌두교도나 불교도처럼 행동과 사상의 발전 을 속박해서도 안된다. 주저 없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 이렇게 진지하고 용기 있는 태도는 운명에 대한 숙명론 적인 굴복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동 방의 성자(聖者)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현자(賢 者)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인생의 문제는 커다란 문제였 다. 아니 어쩌면 더 큰 문제였다. 아무리 더욱 충실히 살 고 한층 완전해지려는 욕구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 부터 솟아날지라도, 인본주의가 주장하는 바로는 인간은 그저 인간에 불과하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에게 영원, 혹은 완전한 사랑, 범(梵)이 니 하는 문제는 근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와 회 교가 적어도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다면, 인본주의는 그 러한 탈출구조차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자기의 존재 이유를, 삶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법이다. 인생이 중요한 것임을 자각할수록 그만큼 이 문제를 절 감하는 것이다. 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것일까? 이 세상이란 그저 뜻없는 우스개 거리에 불과한 것인가? 해답보다는 의문이 더 많 은 이 존재의 물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과연 무엇일 까? 물론 인본주의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영예롭게 인 정한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인간을 인간 이상의 다른 아 무것도 될 수 없는 운명에 버려둔다. 인간이 바로 구원의 척도이기에 인간의 점진적 향상 이외의 아무런 기대도 제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기대라는 것도 결국은 각자 의 죽음으로 소멸되고 마는 것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인 본주의를 밀고 나갈 때, 결국 또 다른 차원의 회의주의 (skepticism) 혹은 허무주의(nihilism)로 귀결되는 것은 결 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범세계적인 무신론은 교회로 하여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도전으로 나타난다. 특히 제도화된 마르크스적 무신론은 서구 인본주의의 두드러 진 형태의 하나로 '유사 종교' (pseudo-religion)의 역할을 담당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교 의를 '해방' 내지 '구원의 가르침' 이라고 주장한다. 마 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노동자의 조건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혁명이 일어나고 무산 계급이 득세하여 생산 수 단을 사회화하고 무산 계급의 독재 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사회는 구원의 도읍이 되고, 본래의 자연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올바른 관계가 회복 되고, 각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에게 아무런 직업 제한이 없 다. 무엇이나 자신이 선택하는 일을 발전시킬 수 있고, 생산 일반은 사회에 의하여 규제된다. 여기서는 '내가'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침에는 고기를 잡고 오후에는 사냥을 하며 저녁에는 가축을 기르고 식도락을 즐길 수 있다. 내가 직업적으로 어부나 사냥꾼이나 축산업자나 식품 비평가가 되지 않더 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마르크스). 이러한 구원의 선포가 인류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 까? 마르크스주의의 이른바 '유물 사관' 을 운명의 정복 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교회는 진지하게 던 진다. 유물 사관의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엄밀 히 말해서 이것은 인간을 역사의 저당물로 격하시키는 하나의 결정론(決定論)이다. 대치할 수 없는 '나' 는 전 체 안에 상실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개인은 언제나 전 체를 위하여 희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체를 위한 자기 희생이라는 그리스도교적 개념과는 매 우 다른 것이다. 개인을 희생시킬 수 있을 만큼 개인의 가치를 과소 평가하는 인간 사회는 필경 붕괴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한 자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 의에 있어서 역사 과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여기서 도 역시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이 인간을 해방할 것인가? 구원의 도읍인가? 복지 국가인가? 설사 그런 것이 성취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 간을 자기 운명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까? 죽음 뒤에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번영인가? 1915년 네덜란드의 사회 학자 트로엘스트라(Troelstra)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물 사관은 이 세상에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하는 데 공헌한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그 러나 그것을 완전한 인생 철학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이론의 기초는 너무나 편협하고 그 실천 방법은 너무 나 일방적이다. 유물 사관이 사회, 국가, 계급, 정당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한, 생산 방법상의 빛을 던져 주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우주 발전 과정과 인간 의 깊은 본능과 염원은 그 사회학적 전망을 넘어서 있다. 유물 사관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 한 채, 인간을 사회적 기능이라는 한 가지 측면에서만 보 고 있다. 이것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사회학적' 인 설명 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 만족하는 일종의 숙명론에 흐르 기 쉬우며 인간 양심을 손상하는 어떤 사실을 '필연' 으 로 시인해 버릴 수도 있다. ···결국 유물 사관이 인간의 '종교적' 성향을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일종의 '종교적 경향' 을 지니고 있다 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 마르크스 주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로부터 많은 유산을 이어받 았다. 여기에는 만물이 본래의 목적으로 귀환한다는 '신 성한' 미래가 있고, '믿을' 메시지가 있고, 일종의 '거룩 한 백성' 인 당(黨)이 있다. '때가 찼다' 고 보는 '지금' 이 있고, '고통받는 구세주' 로서의 노동자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치 · 경제 · 사회학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 을 뿐,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대답하 지 않는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해서, 대답할 수 없는 것 이다. 기타 신흥 종교 : 대화의 상대로서 비그리스도교(타종 교)가 아닌 기성 종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의 신흥 종 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하여, 성서에 근거를 둔다고 주장하는 특히 한국적 상황과 관련된 '통일교' 및 미국을 기저로 상당한 신도 를 확보한 '여호와의 증인' 및 기타 그리스도교에 관련 된 신흥 종교〔宗派〕와 인도 및 동양 사상에 기초하여 서 양 세계에서 크게 유행하는 크리쉬나무르티(J. Krishnamurti)의 신지학회, 라즈니쉬(Rajneesh) 추종 집단, 마하 크리쉬나(Maha Krishna) 및 초월 명상 요가 수행을 빙자 한 소종파 집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선전, 포교 방 식은 매우 특별하여 출판,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을 이 용한다. 특히 이들은 현대인이 처해 있는 정치 · 사회 · 문화적 혼란을 백분 활용하여 그 지반을 계속 확장해 가 고 있다. 이들이 일반인에게 초래하는 영향과 혼란은 이 미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인상을 준다. 교회도 이미 이들 의 위험 정도를 인지하여 <통일교에 관한 지침>(교황청 비 그리스도교 사무국 문헌, 1985. 1.24)을 통하여 통일교가 종교 와 정치를 극도로 혼동하고 있으며, 온갖 분야에서 종교 를 빙자하여 영리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과, 그 스스로 그리스도교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나 그 교리가 얼마나 반그리스도교적인가를 밝힌 바 있다. 또 <그리스도교적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한 서한>(교황청 신앙 교리성, 1989. 10. 15)을 통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적 전통에 기초한 명 상, 수행 방법과 우리 그리스도교의 명상과 기도를 혼동 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교회는 특히 오늘날 서구 세계에 풍미하는, 힌두 전통 에 기초한 밀의(密儀)적 신종파(新宗派) 운동은 기존의 모든 도덕, 가치 규범, 전통적 · 종교적 · 윤리적 인식 전 체를 위선으로 매도하고, 기성 종교가 조장하는 '죄의 식' 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파격적 교설까지 등장하 고 있으나 그 위험성과 그 교설이 초래하는 파멸적이고 허망한 결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연구나 체계적 대책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지극히 유감스런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II . 한국의 종교 · 사회적 상황 속에서의 교회 오늘의 한국 사회는 다원적(多元的) 종교 사회로 급속 히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 불교 및 민간 신앙 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어 이제는 하나의 기 성 종교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지만 종교 사상적 혼란의 흔적은 일상의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철저히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광신적 주장에서부터 반종교적, 반 문화적, 반사회적 사조까지 합세하여 극심한 혼란의 양 상을 보여 준다. 우후죽순으로 자라나는 수백여 개에 이 르는 신흥 종교들이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있고, 최근에 는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종교, 종파 운동 등이 유입되어 '세계 종교의 전시장' 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현상은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적, 역사적 문제와 맞물려 발생하는 결과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현실 위에 교회는 여러 종교를 구성하는 한 구성원으로, 종교 본래의 의무 를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과, 우리의 교 회마저 혼미한 사회 안에서 교회 본연의 자세로 깨어 있 지 못하고 그 연결 고리 속에 함께 함몰되어 가지 않는가 하는 진지한 되물음이 요청된다. 특히 오늘날 사람과 사 회 전반이 물질 만능 사조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종교가 종교적 영성을 증거하지 못한다는, 신앙인 이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만 현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공통 적으로 보여지는 현대적 경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그 어느 사회보다도 문제 의 정도와 내용이 심각하다는 데 많은 이들이 이의 없이 동의한다. 특히 급속한 양적 성장을 보이며 나타나는 신 흥 종교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종교간의 대립 및 갈등 혹은 종교적 사상 으로 인한 혼란은 일반화된 현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 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지역이나 특정 집단에서만 발견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까지 보편 화되고 있고, 그 와중에서 적절한 도움과 안내를 받지 못 하는 많은 대중은 사상적 혼미 속에서 광신적인 자세로 혹은 반종교적인 무관심으로 도피해 버리기도 한다. 가 톨릭 교회만 하더라도 늘어가는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 의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및 대책조차 제대로 수립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 하여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교회를 떠나는 많은 이들의 이유 중 하나가, 종 교와 종교간의 가치 체계 충돌로 인한 혼란 때문이라는 사실은 안일한 교회 당국의 각성을 촉구한다 하겠다. 수 백 개의 종교가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충돌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뜻한다. 앞 으로의 사회는 다원적 종교 상황이 더욱 가속화될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우리가 신앙하는 종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청됨은 당연하다. 타종교 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보다 풍요롭게 하 고 더욱 깊고 높은 차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 무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적 종교 상황을 고려할 때 두 가지 커다란 숙제가 남는다. 더욱 가속화될 다종교적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보지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순수한 종교적 차원의 문제와, 또 하나는 '공동선의 실 현' 이라는 대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어떻게 실천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Ⅲ . 연구 현황과 전망 많은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교회 가 초대 교부 시대부터 줄곧 고수해 온 폐쇄적이고 배타 적인 태도를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였 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몇 선언들은 이러한 도전 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길을 열어 놓은 하나의 이정표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신학자들은 트뢸치(E. Troeltsch)의 '종교 다원주의' 와 바르트(K. Barth)로 대표되는 '배타주의' (혹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양한 입장을 취해 왔다. 상대주의에 대한 트뢸치의 절 대화와 신앙에 대한 바르트의 절대화는 변증법적 혼란을 야기시켰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신학자들은 그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다양하고 많은 신 학이 양산되었지만 분명하고 단일한 해결책은 아직도 요 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전망 및 평가〕 세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 교들이 존재하며 이 종교의 수만큼 구구하기 그지없이 많은 구원 표상(救援表象)과 구원 교설(救援敎說)들이 존재한다. 모든 종교가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진리 요 청은 내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외 없이 하나의 진리 요청을 내세운다. 결코 공통 분모로 환원시킬 수 없는 이 무수한 종교들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원하신 정상적 구원 도정' 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이러한 여러 종교 내지 세계관 의 집단들이 과연 모두 하느님이 원하신 것인가의 여부 에 대한 물음은 확답을 내리지 말고 개방된 채로 열어 두 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모든 종교는 다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또한 진리의 물음에 진지한 자세 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세클러(M. Seckler)는 종교란 역사적으로 인간의 가능 한 지식과 의식을 반영하는 '구원 기획' (救援企劃, Heilsentwurfe), '해석 체계' (解釋體系, Deutesysteme) 그리고 '실천 유형' (實踐類型, Praxismodele)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종교 전통은 비판적 시험의 대상이 된 다. 동시에 이러한 입장은 다른 종교 전통의 비그리스도 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절대적이라고 하 면서도 역시 여러 종교의 하나로 이해하는 경험적 그리 스도교의 여러 면에도 적확하게 해당된다 하겠다. 타종 교 전통의 비그리스도교인들이 그들이 속해 있는 종교 전통 안에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 는 한편, 그 역전된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 야 한다. 종교 전체를 하느님이 원하신 구원 도정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라 하여 교회의 분열 과 대립 그 결과를 하느님이 섭리하신 것이라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러 종교 전통의 모든 현상은 완전 히 해명되지 않는 궁극의 신비, 그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모든 종교 전통의 진리 요청, 구원 요 청은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교묘한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 라 신앙의 증거, 실천적 삶을 통하여만 자신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종교간의 관계가, 종교간의 이해와 만남이 결코 "동화(assimilation)의 관계도, 대체 (substitution)의 관계도 아니고, 오히려 서로가 풍요로워 지는 관계(mutual fecundation)의 하나" 라는 파니카(R.Pannikkar)의 지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교회 일 치 운동)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종교의 자유에 관한 선언>/ 대건신학대 학 전망 편집부, 《가톨릭 신앙 입문-화란(새 교리서)》, 1983/ 정양 모, <21세기를 향한 종교간 이해와 지구 윤리-한국 종교의 대응> (세계 종교 회의 100주년 기념 한국 종교인 학술 대회 발표문), 1993. 11. 5/ 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성바오로출판사, 1985/ 폴 틸리히 저, 전진흥 역, 《기독교와 세계 종 교》, 대한기독교서회, 1975/ 왈벗 뷜만 저, 정한교 역, 《선민과 만민》, 분도출판사, 1992/ M.V. Cyriac, Meetiong fReligions-Dialogue, No. 3, Madras, 1982/ R. Pannikkar, The Interreligious Dialogue, New York, Paulist Press, 1978/ Stsniey J. Samartha, Courage for Dialouge, Maryknoll, N.Y., Orbis books, 1981/ Hans Kiing, Josef van Ess, Heinrich von Stietncron, Heinz Bech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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