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소재. 1898년 4월 매화동 본당에서 분리 · 설정되었으며, 1912년 9월에 해주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관할 구역은 신천 · 해주 · 봉산 · 송화 · 문화군 일대. 〔교 세〕 1898년 1,162명, 1902년 1,550명, 1910년 720명, 1912년 720명. 〔역대 신부〕 초대 빌렘(N.J.M. Wilhelm, 洪錫九) 요셉(1898. 4~1912.9).
황해도 지역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1860년대 초이다. 이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는 1863~1865년 사이에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성사를 베풀었다. 이때 17세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청계동 지역 역시 방문하여 그곳 신자의 집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청계동의 신앙 공동체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발발로 신자들이 순교하면서 와해되었다. 이후 청계동을 중심으로 인접한 신천 · 재령군 일대의 복음화의 초석이 된 이는 안태훈(安泰勳, 베드로)이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유학이 좌절되자 가족을 이끌고 해주에서 청계동 산골로 이주한 그는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을 물리쳤다. 이 와중에 천여 푸대의 곡식을 동학군에게서 노획하여 군량미로 사용하였는데, 이듬해 이 군량미로 인해 당시 세력가인 어윤중(魚允中), 민영준(閃泳駿) 등에 의해 신변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그는 종현(현 명동) 성당에 몇 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우며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896년 10월 군량미 문제가 천주교회의 알선으로 해결된 후, 그는 많은 양의 교리서를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최소 7개의 마을에서 개종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자, 안태훈은 안악의 마렴(1897년 여름 '매화동' 으로 개칭) 본당 주임인 빌렘 신부에게 청계동에 공소를 개설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에 빌렘 신부는 전교 회장 2명을 청계동에 파견하여 개종 운동 실태를 살피게 하는 한편, 공소 개설에 필요한 사전 준비를 시켰다. 뿐만 아니라 1897년 1월 11일과 12일 양일간 직접 청계동을 방문하여 청계동과 그 인근의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부활절에도 안태훈의 집에서 공소를 열고 세 차례에 걸쳐 총 66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와 같이 청계동을 비롯한 황해도 일원에서 개종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해주 관찰사 김가진(金嘉鎭)은 일부 몰지각한 신입 교우들의 비행과 월권 행위를 빙자하여 1897년 1월 천주교 단속령을 군수들에게 하달하였다. 이 여파로 1898년 2월 안태훈과 그의 동생 안태건(安泰健, 가밀로)이 체포되어 투옥되자, 빌렘 신부는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C. de Plan-cy)에게 부탁하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청계동 지역의 교세가 증가하자 빌렘 신부는 1898년 4월 22일에 매화동 본당에서 청계동으로 옮겨와 정착하였고, 이에 청계동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빌렘 신부가 부임하기 전부터 성당 건축 기금을 조성해오던 청계동 신자들은 1898년 10월 공사에 착수하여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기존의 강당(8칸)에 11칸을 증축하여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아울러 1899년 5월 관할 공소인 재령 공소를, 같은 해에는 해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1902년에는 순위도(巡威島)에 공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황해도 지역 천주교회의 급격한 신장은 향촌 사회와의 갈등을 야기하여 양자 간에 충돌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1901년부터 1903년까지 황해도에서 일어난 해서교안(海西敎案)이다. 해서교안은 지방 관리들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이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반발,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신입 교우들의 비리(非理)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해서교안의 여파로 빌렘 신부도 1903년 2월에 서울로 소환되어 약 8개월 동안 체재하다가 11월에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해도의 교회 상황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즉 해서교안과 함께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과 일진회(一進會)의 침투 등으로 인해 황해도에서의 선교 활동은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에 청계동 본당의 교세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10년을 전후하여 성인 영세자의 배출이 중단되는 등 선교의 희망과 교세 확장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빌렘 신부는 공소로 개설시킨 이래 교세가 날로 발전하고 있던 해주로의 진출을 결정하고, 마침내 1912년 9월 8일 해주 성당의 종 축성을 계기로 청계동을 떠나 해주로 부임하였다. 그 결과 청계동 본당은 해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으며, 1949년 5월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으로 해주 본당이 폐쇄되면서 공소마저 폐쇄되고 말았다. → 빌렘, 니콜라 조제프 마리 ; 안태훈 ; 침묵의 교회 ; 해서 교안 ; 해주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서상요, <교회 약사- 청계동 본당>, <교회와 역사》 94호(1983. 4), 한국교회사연구소, p. 6. 〔白秉根〕
청계동 본당 清溪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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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 성당 앞에 모인 신자들과(왼쪽) 성당 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