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 충주시와 음성군 · 진천군 · 증평군 · 괴산군 · 청원군 · 보은군 · 옥천군 · 영동군 등 2개 시와 8개 군을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주교구. 주보는 '성가정' . 주교좌는 내덕2동 본당. 1953년 9월 1일 서울 대목구에서 '충청북도 감목 대리구 로 설정됨과 동시에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으며, 1958년 6월 23일에 '청주 대목구 로 설정되었고,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 설정과 동시에 청주교구' 로 승격되면서 대구 · 부산 · 마산 · 안동교구와 함께 대구 관구를 형성하였다. 대목구 설정 당시에는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과 단양군도 사목 관할 구역이었으나, 1968년 이루어진 교구 경계 조정 협의와 다음해 5월 1일자의 교황청령에 의해 이 지역은 1965년에 설정된 원주교구 관할로 이관되었다. 청주교구의 사목권은 1970년 10월 3일 메리놀 외방전교회로부터 한국인성직자에게 이양되었다. 〔역대 교구장〕 초대 파디(J. Pardy, 巴智, 야고보) 주교(1958. 7. 4~1969. 6. 28), 2대 정진석(鄭鎮奭, 니콜라오) 주교(1970. 6. 25~1998. 5. 29), 3대 장봉훈(張奉勳, 가브리엘) 주교(1999. 6. 26~현재). 〔교 세〕 1959년 18,600명, 1969년 48,893명, 1983년 48,805명, 1993년 93 662명, 1999년 118,099명, 2002년 127 ,995명.
: I. 복음의 전래와 순교자의 탄생
〔초기의 신앙 공동체와 순교자〕 충청북도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즉 충주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이 남한강 물길로 쉽게 통할 수 있는 서울과 경기도 양근(현 양평)의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인 뒤, 이웃과 친지들에게 이를 전함으로써 처음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는 음성 출신으로 충주에서 살다가 영세 입교한 이국승(李國昇, 바오로)이 공주에서 순교하고, 이기연(李箕延)과 이부춘(李富春) · 이석중(李石中) 부자, 권아기련(權阿只連) 등이 충주에서 순교하였으며, 20여 명의 신자들이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앞서 1786년 무렵에는 그 전 해 서울에서 일어난 명례방 사건(明禮坊事件)으로 체포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단양으로 유배되어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고, 남쪽의 내포(內浦) 지방에서 살다가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로 체포된 원시보(야고보)와 배관겸(프란치스코)이 병영 소재지인 청주로 이송되어 1799년에 순교하였다. 또 신유박해로 체포된 내포 출신 김사집(프란치스코)도 청주로 끌려와서 순교하였다.
당시 제천의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도 옹기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서울을 떠나 피신해 다니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1801년 2월 그믐(음) 이곳에 도착하여 은거하면서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9월 2일(음)에 〈백서〉(帛書)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동료 옥천희(玉千禧, 요한)가 체포된데 이어 황심(黃沁, 토마스)이 체포되고, 황심의 고변으로 배론에 있던 황사영과 김한빈(金漢彬, 베드로),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체포되면서 배론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동시에 <백서>도 관청에 압수되었으며, 황사영과 동료들은 그해 말 서울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충청북도 지역은 한동안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830년대 이후 진천의 동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혹은 진천읍 문봉리)과 배티(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보은의 멍에목(현 보은군 내속리면 구병리)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배론에도 새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49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말에 귀국한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처음으로 정한 사목 중심지가 바로 진천의 동골과 배티 교우촌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1850년부터 1855년 말까지 이들 교우촌에서 일정 기간 기거하며 전국의 교우촌을 순방하다가 경상도 지역으로 사목 중심지를 이전하였으며, 그 뒤로는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신부가 1858년 10월부터 1860년까지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복음의 확대와 병인박해〕 1843년 무렵에는 수원 출신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이 배론 교우촌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855년 초에는 장상 메스트르(J.A. Maistre, 李) 신부가 장주기 성인의 집에 '성 요셉 신학교 를 설립한 뒤 신학생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856년 8월에는 푸르티에(J.A.C. Pourthié, 申妖案) 교장 신부가 신학교에 부임하였고, 1861년 10월에는 배티에서 사목하던 프티니콜라 신부가 이곳으로 부임하여 그를 돕게 되었다. 처음에 이 신학교는 소신학교로만 운영되었으나, 1861년부터는 대신학교도 함께 운영되었다. 또한 1864년 말에는 삭발례와 소품을 주는 서품식도 갖게 되었으나,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해 폐쇄되고 말았다.
그동안 충청북도 지역에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의 이주로 복음이 확대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다시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진천의 산간 지대에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였는데, 배티와 삼박골 교우촌(백곡면 양백리)을 비롯하여 훗날의 증언 기록에 나타나는 진천읍의 지장골, 이월의 새울, 백곡의 절골 · 발래기 · 용진골 · 정삼이골 교우촌 등이 그것이다. 또 충주의 방축골(현 진천군 덕산면과 음성군 맹동면의 경계), 충주시 신니면의 광벌(광월리), 음성군 감곡면의 늘거리(문촌리) 등에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괴산의 연풍과 청주 · 단양 · 제천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1866년 이후로 계속된 병인박해는 이들 교우촌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동시에 충청북도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니, 그 첫 번째가 1866년 3월 30일 충청도의 보령 수영(일명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黃錫斗, 루가) 성인과 장주기 성인이다. 연풍 출신인 황석두 성인은 회장으로 임명된 후 선교사들의 조선어 · 한문 선생과 한글본 서적 편찬자로 활동해 왔고, 장주기 성인은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으로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남종삼(南鍾三, 요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南尚敎, 아우구스티노)는 제천 묘재(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의 거처에서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으며, 성 요셉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 신부도 배론에서 체포되어 3월 11일 서울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충청북도 출신 신자들은 이들 외에도 아주 많았다. 우선 청주에서는 진천 출신 오반지(吳盤池, 바오로)와 배티의 장 토마스, 김선화(베드로), 이영준(아우구스티노), 진천 새울 출신 조대여(판크라시오)와 김준기(안드레아), 진천 용진골에 살던 손관보(베드로)와 여 요셉, 충주 출신 최용은(암브로시오) 회장, 제천 출신 이성욱(베드로)과 이성천(베드로), 송성보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충주에서는 방축골 출신 김성서(파비아노), 민윤명(프란치스코) 회장, 광벌 출신 목 요셉과 목 아우구스티노, 권중문(안드레아) , 연풍 출신 김 마르티노와 김 마태오, 김 요셉, 김 데레사 등이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 죽산에서는 배티 출신 박 프란치스코 ·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서울에서는 배티 출신 송 베네딕도 가족, 김백심(암브로시오) · 김성회(바오로) 부자, 청주 출신 송구현(宋龜鉉, 도미니코), 김조이(金召史, 막달레나) 등이, 공주에서는 진천 출신 김원중(스테파노)이 순교하였다. 현재 배티 골짜기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도 이때 죽음을 당한 신자들의 것이다.
: Ⅱ. 공소 · 본당의 설립과 확대
〔전교 자유기의 공소와 장호원 본당〕 박해가 끝난 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였다. 이때 충청북도 지역을 처음 순방한 선교사는 1877년에 입국한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였고, 1876년 입국하여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된 후 1883년에 재입국한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신부와 충청도 남부 지역을 주로 순방한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도 때때
로 충청북도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 중에서 로베르 신부는 강원도와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1882년에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경상도 충청도 · 강원도 등지의 교우촌들을 방문하였다. 그중에서 1883~1884년에 공소로 설정된 충청북도 지역의 교우촌은 청원의 탑수(강내면 탑연리, 120명), 괴산의 검단이(청천면 평단리, 197명) · 만월문(청천면 월문리, 53명)과 새술막(소수면 길선리, 75명), 음성 가미실 (감곡면 사곡리, 90명), 영동 공소동(양강면 지촌리, 30명) 등 12개였으며, 신자수는 모두 724명이었다.
1884년 가을에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드게트 신부가 로베르 신부와 충청북도의 공소들을 나누어 순방해 주었다. 그러다가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의 체결로 전교의 자유가 인정되던 해부터는 드게트 신부가 충청북도 각 지역의 공소들을 순방하였으며, 로베르 신부의 보좌 보두네(F.X. Baudounet, 尹沙勿) 신부가 청원과 괴산 · 영동 지역의 일부 공소를 맡아 주었다. 이 해 충청북도 지역의 공소수는 모두 25개였고, 신자수는 1,0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또 1888년에는 르 메르(L.B.J. Le Merre, 李類斯) 신부가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면서 충주 · 청주 · 괴산 · 청주 등지까지 순방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은 드게트 신부가 관할하였다. 제천의 새말(봉양읍 신리, 64명), 중원의 숭선(신니면 문숭리, 76명)은 1884년에 드게트 신부와 로베르 신부에 의해 각각 공소로 설정되었으며, 진천의 배티(백곡면 양백리, 30명)는 1888년 가을 판공 때 두세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1892년 초 간양골 본당(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량리) 관할이던 진천 지역(배티, 새울, 용진골 공소)과 풍수원 본당 관할이던 제천 지역(추동, 지루개, 만지실 공소) 이외의 충청북도 공소, 즉 청주 · 충주 · 보은 · 괴산 · 음성 등지의 공소들은 모두 원주 부엉골 본당(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소속이 되었다. 이 해 2월 22일 마르탱(L. Martin, 沈良) 신부가 원주 원심이(현 강천면 도전리)에 거처를 두고 부엉골 본당을 담당한 이후 그의 사목 순방을받게 된 것이다. 이어 1894년 4월 14일에는 미리내에서 조선어를 익혀 오던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신부가 부엉골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진천의 새울 공소(현 이월면 신계리)가 부엉골 본당 관할로 이전되었다.
부이용 신부는 부엉골에 부임하여 사목을 하는 동안 궁벽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본당을 이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96년 5월 충청도 북서쪽에 위치한 장호원(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새 집과 성당 부지를 매입한 뒤 9월 17일에는 부엉골을 떠나 장호원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장호원(현 감곡) 본당을 설립하였다. 1896~1897년 장호원 본당의 교세는 23개 공소에 신자수 1,187명이었으며, 승선 공소를 비롯하여 음성 수레울(생극면 차곡리), 보은 덕동(탄부면 덕동리), 청원 새내(북일면 정하리) 공소 등에 많은 신자들이 있었다.
〔본당의 확대〕 부이용 신부는 이후 1947년까지 장호원 본당에서 재임하다가 선종하였다. 그동안 부이용 신부는 공소가 없던 보은 · 옥천 지역에 새 공소를 설립하였고, 1903년 11월에는 새 성당(한옥 성당)을 완공하여 이듬해 10월 2일 주보를 매괴의 성모로 모시고 봉헌식을 가졌으며, 1908년에는 '매괴학당' (남학교)을 설립하였다. 매괴학당은 1912년에 여학교가 병설되고, 1916년에 초급 학교 인가를, 1938년에 '매괴심상소학교(玫瑰尋常小學校) 개칭 인가를 받았다. 이어 1920년 9월 18일에는 장호원 본당에서 높은 사랑 본당(즉 고마리 본당, 현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소재)이 분리 · 신설되어 초대 주임으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부이용 신부는 1930년 3월 고딕 양식의 새 성당(현 성당, 연면적 691.95㎡)을 완공하고 1936년 10월 6일 봉헌식을 가졌다. 설립 당시 높은 사랑 본당의 교세는 22개 공소에 신자수 900여 명이었다.
이에 앞서 1906년 5월 20일에는 공주 본당에서 '옥천 본당' 이 분리 · 설정됨과 동시에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 결과 청주의 남쪽 일부와 영동 · 옥천 · 보은 지역은 옥천 본당 관할이 되고, 청주의 북쪽 지역과 괴산 · 충주 · 음성 · 진천 일부는 장호원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10~1911년 옥천 본당의 교세는 21개 공소에 신자수 965명이었다. 당시 진천의 배티 일대는 안성 본당 관할이었으며, 제천 지역의 공소들은 1904년에 설립된 용소막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옥천 본당은 1914년 2대 주임 이종순(李鍾順, 요셉) 신부에 의해 비룡(현 청원군 남이면 비룡리)으로 이전되었다가, 1919년 11월 12일에는 다시 대전 방축리로 이전되면서 대전(현 목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본당의 이전으로 공소로 남게 되었던 옥천 공소는 1928년 9월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부활되었으며, 높은 사랑 본당은 1936년 4월 정원진(鄭元鎮, 루가) 신부에 의해 증평으로 이전됨으로써 증평 본당이 되었다. 1932년 10월에는 청주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목동 본당에 재임하던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청주 본당의 관할 구역은 옛 증평 본당의 남쪽(현 청주지역)과 목동 본당의 북쪽 일부 지역이었다. 청주 본당은 1962년 3월 청주 서운동으로 이전되면서 서운동 본당으로 개칭된다. 1940년 7월 14일에는 용소막 본당에서 제천(현 원주교구 남천동) 본당이 분리되고,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 15일에는 장호원 본당 소속 충주 공소가 충주(현 교현동)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충청북도 지역에는 모두 6개의 본당이 있게 되었다.
: Ⅲ. 교구 설정과 성장
[감목 대리구 설정과 초기 현황] 충청북도의 교회사가 다시 변화를 겪게 된 것은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였다. 1927년 이래 평양교구의 사목을 맡아 오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가 북한에서의 전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에게 새로운 전교 지역을 위임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노 주교가 이를 수용하면서 충청북도 지역을 메리놀회에 위임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노기남 주교는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1953년 9월 1일 '충청북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한 다음,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사목하고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파디 신부를 9월 12일 장호원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입국한 메리놀회 부총장 월시(J.E. Walsh) 신부와 함께 9월 16일 장호원 본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파디 신부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 파디 신부는 이후 청주 본당과 충주 본당에 기본스(J. Gibbons, 노) 신부와 보어(J. Borer, 玉保乙) 신부를 각각 임명한 뒤, 자신은 청주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12월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감목 대리구 설정 당시 충청북도에는 장호원 · 옥천 · 청주 · 제천 · 충주 등 5개 본당에 신자수 8,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증평 본당은 전쟁으로 주임 신부가 공석이 되어 일시 충주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가, 1955년 8월에야 메리놀회의 주노(M. Zunno, 주은로)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또 이를 전후하여 1955년 6월에는 충주 본당에서 음성 본당이, 같은 해 10월에는 옥천 본당에서 보은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으며, 다음해 6월에는 진천 본당과 영동 본당이, 1957년에는 단양 본당(현 원주교구)과 부강 본당, 내덕동(현 내덕2동 주교좌) 본당, 금왕 본당, 황간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본당은 모두 15개로 증가하게 되었다. 기존의 청주 본당은 내덕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북문로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충주 본당의 보어 신부는 1955년 4월 19일 장애아들을 위한 자선과 구령을 목적으로 '성심맹아학원' 을 설립한 뒤 1960년 2월 농아부는 성심농아학교(현 충주 성심학교)로 인가받고, 1961년 12월 맹아부(1960년 지현동으로 이전)를 성심맹인학교(현 충주 성모학교)로 인가받았다. 그리고 청주 본당에서는 1954년 2월 레지오 마리애를 도 입하여 '하자 없으신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였으며, 이후 쁘레시디움의 증가로 1956년 8월 20일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가 설립되고 다음해 10월 7일에는 이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장호원 본당에서는 1953년 3월에 매괴국민학교 부설 '매상업고등학교(현 매괴여자중 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첫 입학식을 가진 뒤 이듬해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옥천 본당에서는 1956년에 '성모 의원' (1972년 가톨릭의대 부속 병원 편입, 1989년 폐원)을, 증평 본당에서는 1957년 3월에 '메리놀 의원' (1990년 폐원)을 개원하였다.
〔청주 대목구 설정과 교구 승격〕 충청북도 감목 대리구는 1958년 6월 23일 청주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이어 7월 4일 감목 대리 파디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9월 16일 미국에서 주교 축성식을 갖고 입국한 뒤 다음해 1월 26일 착좌식을 가졌다. 당시 청주 대목구의 교세는 15개 본당에 성직자 29명, 신자수 18,600명이었다. 이후 파디 주교는 1958년에 괴산 본당을, 다음해에 주덕 본당과 청산 본당을, 1960년에 오송 본당과 지곡(현 지현동) 본당을 차례로 설립하였다. 한편 내덕동 본당에서는 1960년 기존 성당 인근의 부지를 매입하여 8월 22일에 주교좌 성당 정초식을 가졌고, 1961년 10월에는 동 · 서양 건축 양식을 혼합한 272평의 성당을 완공한 뒤 파디 주교의 집전 아래 '성가정' 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같은 해 1월 5일 파디 주교는 한국 최초로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의 활동을 도입하여 교현동 본당에 성 요셉 협의회를 설립하였는데, 이와 같은 협의회가 1962년 5월까지 7개로 확대되면서 다음해 4월에는 청주 대목구 중앙 이사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면서 청주 대목구는 대구 관구에 속하는 주교구가 되었고, 그해 7월 25일 파디 주교의 교구장 착좌식과 청주교구 설정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북문로 본당이 서운동으로 이전되었으며(서운동본당), 1964년 9월에는 수동 본당이, 12월에는 내수 본당과 미원 본당이 설립되었다. 또 1968년 10월에는 평신도 단체로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가 창립되었다. 한편 1968년의 춘계 주교 회의에서 제천 · 단양 지역의 사목을 1965년 신설된 원주교구로 이관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여, 그해 11월 제천의 남천동 · 의림동 본당과 단양 본당의 사목이 원주교구로 이양되면서 청주교구의 사목 관할 구역은 현재와 같이 축소되었다. 이 지역의 이양이 교황청령에 의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1969년 5월 1일이었다.
파디 주교는 이처럼 교구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9년 6월 28일 고령을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하였으며, 다음날 주노 신부가 교구장 직무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70년 6월 25일 정진석 신부가 제2대 청주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0월 3일 주교 축성식과 착좌식을 가짐으로써, 교구 사목권은 메리놀 외방전교회에서 한국인 성직자에게로 이양되었다. 당시 교구의 교세는 본당 22개소에 신부 27명(한국인 8, 메리놀회 19), 총 신자수 48,073명이었다.
〔교구의 성장과 현재〕 청주교구에서는 정진석 주교 착좌 이후인 1971년 9월 목행동 본당을 설립하였으며, 12월에는 꾸르실료 운동을 교구에 도입하였다. 이어 1974년 9월에 사직동 본당이 설립되었고, 1976년 가톨릭 회관 축복식을 가졌으며, 같은 해 9월 12일에는 오웅진(吳雄鎮, 요한) 신부에 의해 '꽃동네'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소재)가 설립되어 사랑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또 1977년 1월 16일에는 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창설됨으로써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7월 30일에는 가톨릭 농민회 충북 지부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진천 본당에 재임하던 장봉훈(張奉勳) 신부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김우분(막달레나) 수녀를 백곡에 파견하여 배티 성지의 성역화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8년 11월 5일 교구에서는 교구 설정 20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개최하고, 다음해 12월 6일에는 새 교구 청사를 완공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1981년 사창동 본당이 신설되었으며, 다음해 3월에는 청주 '갈릴리 어린이집'(지체아 특수 교육 기관)이 개원하였고, 7월에는 교리 교사 연합회가, 11월에는 행복한 가정 운동 협의회가, 1983년 3월에는 교도소 후원회(현 사회 교정 사목)가 연이어 창립되었다. 또 꽃동네는 1980년 9월 교구 사제 총회에서 설립 인가를, 1984년 보건 복지부로부터 사회 복지시설 인가를 받았으며, 1983년 부랑자 요양원이 완공된데 이어 정신병 · 결핵 · 노인 · 알코올 중독자 요양원이 차례로 건립되고, 1989년에는 인곡 자애 병원과 가평 꽃동네가 설립되면서 소외 계층을 위해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가는 대표적인 복지 시설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연풍에서는 1963년에 매입한 공소 강당(옛 향청 건물)을 중심으로 순교 성지 조성 사업이 이루어져 오다가, 1982년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평해 황씨 문중 산에서 성지 구내로 이장하면서 성역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구세주의 모친 꼬미시움이 1987년 6월 28일 레지아로 승격되었다. 이어 교구에서는 다음해 8월 15일 교구 설정 30주년 기념 신앙 대회와 성모 성년 전국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0월에는 충주시 산척면에서 요한 보스코 기술 교육원' (1964년 설립, 현 마리스타 기술 교육원) 축복식이, 1990년 4월에는 성 황석두 루가 선교 형제회에 의해 청원군 오창면에서 '자모원' (미혼모의 집) 개원식이 차례로 있었다. 소외 계층을 위한 교구의 관심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1991년 5월에는 청주 수동의 '성 빈천시오의 집' (무료 급식소)과 청주 사천동의 '성가 마을' (모자원)이, 8월에는 청주 수곡동의 '산남 종합 사회 복지관' 이 문을 열었다. 또 보혈 선교 수녀회에서는 1993년 7월 청원군 현도면에 노인 복지 시설인 '은혜의 집' 을, 1996년 12월 청주시 미평동에 '혜원 장애인 종합 복지관' 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교구의 복지 활동은 1995년 6월 교구청 내에 사회 복지국이 신설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앞서 1992년 11월에는 교구 가톨릭 여성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95년 1월 25일 교구에서는 청주시 복대동에 마련될 남북 통일 기원 기념 성당 기공식을 가졌다. 같은 해 11월에는 충주 가톨릭 회관 축복식이 있었고, 1996년 1월에는 감곡 성당이 충북 유형 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꽃동네에서 사랑의 연수원 교육관 준공식과 거창 꽃동네 설립 기념식을 가졌으며, 교구에서는 파티마 성모상 방문 및 레지오 마리애 설립 75주년을 기념하여 티없으신 성모 성심께 교구를 봉헌하는 동시에 예비 신자 3,200여 명도 봉헌하였다. 한편 배티 성지에서는 1996년부터 장봉훈 담임 신부의 주관 아래 최양업 신부의 시복 작업을 추진하여 관련 자료집들을 발간하고,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교구장 정진석 주교는 이듬해 9월 20일 최 신부의 약전이 첨부된 시복 청원서에 서명한 뒤 이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9년 4월에는 가톨릭대학과 공동으로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도 개최하였다.
1997년 1월 교구에서는 교구 법원을 설립하였고, 3월에는 내덕동 연수원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8년 3월에는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사업으로 추진해 온 한국 최초의 특성화 학교인 양업고등학교 개교식을, 3월 20일에는 청주시 주중동에서 청주 성모병원 개원식을 가졌으며, 11월 30일에는 현도면에서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준공식을 갖고 이듬해 3월에 개교하였다. 그러던 중 1998년 5월 29일 교구장 정진석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서임되자, 6월 23일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식과 정진석 주교 환송식을 치른 다음, 29일의 참사회를 통해 김원택(金元澤,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를 교구장 직무 대행으로 선출하고, 다음해 5월 1일부터 6월 24일까지 민족 공동체 복음화를 위한 고리 기도를 실시하였다.
1999년 6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배티 성지 담임으로 재임해 오던 장봉훈 신부를 제3대 청주교구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장봉훈 주교는 8월 24일 내덕 2동 주교좌 성당에서 주교 축성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갖고, 12월 25일에 2000년 대희년 개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어 다음해 2월과 4월에는 청주시 노인 종합 복지관과 청원의 청소년 수련관이 각각 개관하였으며, 10월 14일부터는 대희년 전국 가정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9년 말 청주교구의 교세는 본당 53개에 신부 105명, 신자수 118,099명이었다. 장봉훈 주교는 이후 주님의 뜻대로' (루가 22, 42)라는 주교 표어대로, 모든 사제와 신자들이 성서 말씀과 성령 · 성체를 중심으로 가정 안에서 일치와 화목을 이루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신심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노력하였다.
이에 앞서 장봉훈 주교는 1999년 12월 3일 배티 성지 안에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연구소에서는 최양업 신부의 현양 사업과 시복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가는 한편, 2000년부터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작업에 직접 참여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하느님의 종'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에 대한 교령 및 장애 없음을 인준(2002년 9월 및 2004년 1월)받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편 교구에서는 그동안 청주와 충주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2002년 9월 충주와 청주 중앙 공원에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장봉훈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2001년 분평동 본당과 생극 본당을 신설하는 등 본당 분할과 교세 확장에 힘쓰면서 가정 공동체의 복음화와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 소공동체 운동과 지역 사회의 복음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8년에 맞이하게 될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사업의 결실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경향잡지》/ <가톨릭신문> 1 <평화신문>/ 《가톨릭대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필사본)/ 천주교 내덕동 교회, 《내덕 25년사》, 뒷목 출판사, 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 울大教區敎區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울 教區年報》 I · Ⅱ, 명동 천주교회, 1984· 1987/ 옥천 본당사 편찬 위원회, 《옥천 본당사(상)》, 청주교구 옥천 본당, 199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천주교회 연감》, 1994/ 청주교구, 《교구 연감》, 1995/ 천주교 교현동 교회, 《교현 본당 50년사》, 충주 교현 천주교회, 1995/ 배티 사적지 편, 《최 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1~3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1997/ 류한영 · 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감곡 본당 100년사 편찬 위원회, 《감곡 본당 100년사》, 청주교구 감곡 본당, 2000/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 양업 연구 총서 제2집》,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http://cheongju.catholic.or.kr/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회 총람》, 2004. 〔車基真〕
청주교구
清州教育
글자 크기
11권

1 /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