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교구 소속 침묵의 교회.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소재. 1926년 7월 6일 설립되어 1950년 폐쇄되었으며, 주보는 성령. [교 세] 1926년 110명, 1929년 370명, 1931년 446명. 〔역대 신부] 초대 바인거(M. Bainger, 方 仁建) 마르코(1926. 7~1945.9), 2대 이재철(李載喆) 베드로(1945. 9~1950).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그 사목을 담당하게 되자, 1925년까지 22명의 신부와 수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서울 베네딕도회는 계속해서 인력이 충원되고 함경도 지역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는 청진에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1925년부터 부지를 물색하여 1926년 7월 이전에 청진시 포항동에 약 2,300평의 땅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간도 훈춘현의 팔지(八池, 훗날 六道泡) 본당 보좌로 있던 바인거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서울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사제관 건립을 위해 7월 27일 플뢰칭거(I. Flötzinger, 富) 수사를 청진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18일에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사제관의 완공과 함께 청진에 도착한 바인거 신부는 부임 직후부터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쳐 설립 이듬해 신자수를 205명으로 증가시켰으며, '예수 성심회' 와 '성모 성심회' 를 조직하여 신자들의 활동을 독려하였다. 또한 서울-청진 간 철도 개통으로 1928년 나남(羅南)과 성진(城津)에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1936년 나남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바인거 신부는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자 성당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931년 10월 25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바인거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본당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 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31년 본당 내에 작은 집을 짓고 12월부터 주간 학교(소년반 · 소녀반) 및 야학교(부인들을 위한 재봉 과정), 교리 학교를 시작하였다. 1937년 3월 성심회 청년부를 설립하고, 1940년 7월에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바인거 신부가 1945년 9월 17일 병사하자, 이재철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신부는 본당이 폐쇄되기 전까지 2개의 공소를 관할하며 초등 교육 기관인 해성학교를 운영하였다.
1949년 교구장 사우어 주교를 비롯하여 함흥과 덕원 면속구의 성직자들이 공산 당국에 체포되는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재철 신부는 그 위기를 모면하고, 한국 전쟁 이전까지 비밀리에 함경도 지역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1950년 6월 24일 이 신부가 체포되고 성당을 포함한 교회 재산이 몰수되면서 본당은 폐쇄되고 말았다. (→ 원산 대목구 ; 침묵의 교회 )
※ 참고문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洪延周〕
청진 본당
清津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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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1931년 10월 새 성당 봉헌식을 마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