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룰라리우스, 미카엘 Cerularius, Michae(1000?~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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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1043~1058). 1054년의 동방 이교(東方離敎, Schisma Orientale)를 일으킨 동방 교회의 당사자.
〔생 애〕 체룰라리우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평신도로 있던 1040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4세(1034~1041)에게 대항할 음모를 꾸몄던 것 같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수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에게 죄가 없었으며, 자신의 자유 의사로 수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의 인정을 받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황제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다. 그러나 1043년에 총대주교가 된 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가 로마에 종속되는 문제로 황제와 관계를 끊었다.
로마 교회와의 갈등 : 그는 서방 교회에 대해 항상 적대감을 보였으며, 10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모든 서방 교회의 수도원들을 폐쇄시켰다. 그가 이러한 적대감을 보인 것은 남부 이탈리아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의 제독으로 가톨릭 신자인 아르지로스(Argiros)가 당시 남부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노르만족들에 대항하여 교황 레오 9세(1049~1054)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던 것에 대한 반발로 여겨진다. 체룰라리우스는 이러한 정책으로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반(反)서방 교회적인 정책을 펴면서 불목하였고, 당시 불가리아의 대주교인 아크리다의 레오네(Leone di Acrida)를 부추겨 로마에 반대하는 서한을 준비시켰다. 한편 총대주교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황제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총대주교로 하여금 교황에게 화해의 서신을 보내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 서신의 내용은 교황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의 종교적 상황은 20여 년 전부터 열교(裂敎)로 갈라질 조짐을 보여 왔지만, 정치적으로는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족들에 대항하여 동로마 제국과 교황이 서로 동맹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1053년 6월 노르만족의 포로가 된 교황 레오 9세는 동맹 협상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고자 1054년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다. 교황 사절단은 단장인 실바 칸디다의 훔베르트(Humbert di Silva Candida) 추기경과 후에 교황 스테파노 9세(1057~1058)가 된 로트링겐의 프리드리히(Friedrich von Lothringen) 그리고 아말피의 대주교 베드로였다.
이 3명의 사절들은 1054년 1월에 출발하여 그해 3월 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그때 교황 사절단과 동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는 돈독하였다. 반면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교황 사절단과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알현에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곧 적대감을 나타냈다. 총대주교는 교황 사절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수도자인 스테타토스(Niceta Stethatos)를 부추겨 서방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는 논쟁을 벌였다. 그 후 스테타토스의 일시적인 함구와 1054년 6월 24일 스투디오스(Studios) 수도원에서 서방 교회에 호감을 보이는 논의들이 있었지만,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총대주교는 사절단에게 그 도시 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을 금지시키고, 백성들에게 자신을 반대하는 언행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자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와 로마를 화해시키려는 자신들의 시도가 무익함을 깨닫고, 1054년 7월 16일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장엄 전례를 통해 중앙 제대 위에 파문서를 두고 떠났다. 이 파문은 총대주교와 아크리다의 레오 대주교 그리고 성찬 전례 중누룩을 넣지 않은 제병을 쓰는 로마 전례에 반대하여 누룩 있는 빵(Azzimo)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경리 담당자 콘스탄티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파문장은 교황 교서의 형식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이 문서는 교황 레오 9세가 사망한 후에 반포되었다. 한편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 측에서는 같은 해 7월 21일과 26일에 교황 사절들을 파문함으로써 맞대응하였다. 그리고 전 동방 교회 지역에 이에 대한 회칙을 발송하였는데, 이 회칙은 파노플리아(Panoplia)가 작성한 듯하다. 당시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였던 베드로는 체룰라리우스의 극단적인 논쟁에 동조하지 않고 교황청과의 일치를 모색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화해를 위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특히 그 후 서방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동 · 서방의 관계는 더욱 적대적이 되었다.
정치적 영향 : 체룰라리우스는 '영성적인 것의 우위설' 에 따라 현세적인 세력과도 싸웠다. 그는 어떻게 대중의 마음을 이끌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를 굴복시켰고, 그 후로 동로마 제국 역사상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절대적인 총대주교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오직 공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황후 테오도라(1055~1056)에게 여성에 의한 국가 통치는 동로마 제국을 위태롭게 한다고 직언하였으며, 새로이 황제를 임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허약한 황제 미카엘 6세(1056~1057)의 폐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사치우스 1세(1057~1059)를 왕좌에 앉혔다. 그는 황제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었지만 점차 거만해졌으며, 그로 인해 권력을 지키려는 다툼이 황제와 총대주교 사이에서 일어났다. 결국 체룰라리우스는 1058년 11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되었고, 이듬해 1월 21일에 사망하였다.
〔평 가〕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사망한 후에도 오른손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이미 시작되었던 동방 이교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이교는 오래지 않아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좌들도 이교가 되는 계기를 열었다. 즉 시리아, 불가리아, 러시아, 루마니아와 같은 동방 교회들은 그리스의 이교와 밀접하게 결합됨으로써 오늘날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동방 교회 전체에서 참회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에 대한 공경 예절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역대 총대주교 중에서 그처럼 권력을 얻은 자는 없었다. 사실 그는 결점이 없지 않았다. 신학면에서 약하였고, 말년에는 권력에 의해 타락하여 격하고 완고하며 앙심을 많이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후 테오도라에게 죽음까지 불사하며 조언하였던 것으로 보아 대단한 용기와 강한 책임감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나쁜 동기에 공헌했던 것은 그의 불행이었다. (⇦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 → 동방 이교 ; 레오 9세)
※ 참고문헌  A. Michel, Humbert und Kerullarios, vol. 2, Pader-born, 1924~1930/ E. Amman, 《DThC》 10, PP. 1677~1705/ M. Jugie, Leschisme byzantin, Parigi, 1941, pp. 187~246/ V. Laurent, Le titre de pa- triarche oecuménique et Michel Cérularie, III(Studadi e testi 123), Citttà del Vaticano, 1946, pp. 373~396/ V. Grumel, Les régestes des actes du patriarcat de Constantinople I, vol. 3, Paris, 1947, pp. 1~16. 李文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