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아를(Arles)의 대주교(502~542). . 라틴 교부. 수도자. 축일은 8월 27일.
체사리오는 뛰어난 강론가였으며,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족들이 유럽을 점령한 시기에 갈리아 지역에서 교회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면서 이방인들이 권력을 잡는 중세 시대로 교회를 지속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469년 또는 470년 부르군트 왕국에 속한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의 로마 시민이며 독실한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18세 되던 486년 또는 487년에 살롱의 주교인 실베스테르(Silvester, 485?~527?)로부터 삭발례를 받았다. 그리고 489년에 레랭(Lérins)의 수도원에 입회하였으며, 포도주 창고 관리인으로 선발되었다(Vita Caesarii 1. 9). 이 수도원은 특별히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정신대로 생활하는 수도원이었는데, 그곳에서 체사리오는 아우구스티노와 레랭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리에즈(Riez)의 파우스토(Faustus, + 490?)의 저서들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너무나 엄격한 단식 생활 탓에 건강이 약해지자, 아를로 가서 문법학자이자 수사학자인 포메리오(Julianus Pomerius)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그곳의 주교(485?~502?)인 에오니오(Eo-nius, Aeonius)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았고, 시외에 있는 한 수도원의 지도를 부탁받아 498년 또는 499년에 수도원장이 된 후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Vita Caesarii 1, 12-13). 에오니오가 사망한 지 몇 달 뒤인 502년 12월에 그는 주교로 선출되어 542년까지 아를의 대주교로 갈리아 남부 지역의 교회 운영을 위한 중책을 맡았다.
그는 서고트족의 왕인 알라리크 2세(484~507)와 동고트족의 왕인 테오도리쿠스(471-526)의 도움을 받아 갈리아 지역 내에서 아를 주교좌가 수석의 위치를 갖게 하였다. 당시 아를은 남부 갈리아 지역의 정치적 ·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체사리오는 당시 갈리아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였다. 그 시대는 정치적 · 정신적 성숙의 시기였다. 그는 507년까지는 서고트족의 영향 아래, 508~537년까지는 동고트족의 통치 아래, 그리고 이후에는 프랑크족의 통치 아래에서 아를의 위치를 지켰고 견고하게 하였다.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활약하였고, 그가 소집한 프랑스의 주교 회의들은 당시 교회 개혁을 위한 규범을 확고히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그는 529년 프랑스 오랑주(Orange)에서 개최되었던 교회 회의에서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던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us)를 단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2세(530~532)로부터 인준을 받은 이 결정은,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에 대한 가르침을 보다 절제된 모습으로 보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체사리오는 열심한 사목자였고, 아우구스티노와 비교될 만큼 유명한 민중 설교가로서 그의 강론들 중 다수(238편)가 현존한다. 그는 솔선수범하여 매일 강론을 하였으며 작은 교회 공동체들을 위해서도 정기적인 강론을 하도록 신부들에게 지시하였고, 신부들을 돕기 위해서 강론 모음집을 만들었다. 그의 강론들은 성서 구절과 교회 축일에 관한 강론들, 그리고 흥미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포함하하며 구체적이고 간당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신자들의 생활과 여전히 만연한 우상 숭배 및 미신을 따르는 많은 국민들의 사고 방식의 차이점과 서로 충돌하는 모습들을 이 강론들은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런 이유에서 체사리오의 강론들은 6세기 갈리아 지역 신자들의 생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증언이다. 체사리오는 이 강론들을 통하여 중세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현재 성무 일도서의 교부 독서에도 그의 자비에 관한 강론이 실려 있다(3권, 558~560).
또한 그는 수도자들을 위한 규범집도 만들었다. 《거룩한 동정녀들의 법규》(Statuta sanctarum virginum)와 3편의 편지들은 수녀들을 위해 썼고, 수사들을 위해서는 《수도자들의 규칙서》(Regula monachorum)를 썼다. 26장으로 구성된 이 규칙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1장으로, 수도회에 입회할 때에는 두 가지 선서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입회한 수도원에서 죽는 날까지 평생토록 머무르겠다(stabilitas loci)는 선서와 일체의 사유 재산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선서이다. 《은총에 관한 소논문》(Opus-culum de gratia)은 이단인 반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한 논박서이다. 《삼위 일체 신비론》(De mysterio S. Trinitatis)이란 저술에서는 그가 많은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즉 아우구스티노, 리에즈의 파우스토,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ius de Poitiers, 315?~367?)와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 그리고 루스페(Ruspe)의 주교 풀젠시오(Fulgentius, 468~533)의 저술들을 읽고 인용하였다. 그 외에도 《묵시록 주해서》(Expositio de Apocalypsi)와 《성 체사리오의 유언집》이 전해져 온다.
《고대 교회의 결정》(Statuta Ecclesiae Antiqua)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법 모음집은 신학자들에 의해 체사리오의 저술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툴롱의 치프리아노(Cyprianus de Toulon)가 몇몇 제자들과 함께 542~549년에 기술한 《체사리오의 전기》(Vita Caesarii)에 남아 있다. 체사리오는 542년 8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 라틴 교부 ; 펠라지우스주의)
※ 참고문헌 J.P. Migne, 《PL》 LXVII, 1041~1142 XXXIX, 1741ff./F.L Cross . E.A. Livingstone ed., 《ODCC》, pp. 261~262/ P.T. Camelot, 《LThK²》 II, pp. 964~965/ R. Nürnberg, 《LThK³》 II, pp. 878~879/ B. Altaner · A. Stuiber, Patrologie, Leben, Schriften und Lehre der Kirchenvater, Herder, 1993⁸, pp. 475~477/O. Bardenhewer, Geschichte der Altkirchlichen Literatur V, pp. 345~356/ H.G.J. Beck . W.E. Kingshirn, 《NCE》 2, 2003, pp. 848~849/ Der Kleine Pauly, Lexikon der Antike in fünf Bänden I, pp. 1006~1007/ G. Bardy, 《DSp》 II, pp. 420~429. 〔張仁山〕
체사리오, 아를의 Caesarius Arelatensis(469/470~542)
글자 크기
11권

아를의 체사리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