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칠리아 운동

運動

〔라〕Caecilanismmmus · 〔영〕Cecilia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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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음악의 부흥을 주장하는 독일 신자들에 의해 조직된 성 체칠리아 협회(Societas Sanctae Caeciliae)에 의해 제기된 가톨릭 교회 음악의 개혁 운동. 당시의 세속화된 교회 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전례적 심화를 의도한 운동으로, 교회 음악의 수호 성인인 성녀 체칠리아(Caecilia, ?~230?)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의미와 배경〕 전례 음악에는 늘 모순이 존재한다. 즉 한편으로는 전례 음악으로서 전례와 밀접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자들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기본적 사명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례 음악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서 끝없는 심미학적 발전을 향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 사명에만 치중하면 본능적 욕구가 지나치게 억제되고, 본능적 욕구에 이끌리다 보면 기본 사명에서 자꾸 멀어진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 음악 개혁은 심미적 욕구에 지나치게 기운 상태를 다시 전례적 사명으로 회귀시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역사상 첫 번째로 커다란 전례 음악 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꼽을 수 있다. 예전에 이미 교황 요한 22세(1316~1334)가 14세기의 '아르스 노바 (Ars Nova, 新藝術) 운동의 홍수 앞에서 전례 음악의 세속화를 막고 순수함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듯이, 트리엔트 공의회와 공의회에서 위임을 받은 추기경단은 1564~1565년에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의 경계를 확정하였다. 《주교 예절서》(Caeremoniale Episcoporum, 1600),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 1614), 교황 베네딕도 14세(1740~1758)의 전례 음악 칙서인 <안누스 귀>(Annus qui, 1749) 외에도 수많은 문서들이 이런 목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육성과 다성 음악의 순화를 강조한 것이었다.
그 후 바로크 시대와 빈 고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세속 음악의 발달, 특히 그중에서도 기악의 발달이 두드러졌고, 당시까지 교회가 쥐고 있던 음악 발전의 주도권이 차차 세속으로 넘어갔다. 이런 세속 음악은 다시 교회 음악에 영향을 끼쳤으며, 세속 음악적 기교들이 새로 창작되는 전례 음악 작품들 속에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다. 이에 교회 음악의 순수성과 전례성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체칠리아 운동' 이다.
[발 전] 체칠리아 협회는 독일어권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기원은 모호하다. 이미 18세기 초에 빈과 파사우에 이런 이름의 모임이 있었고, 뮌헨에서는 반주가 붙어 있는 교회 음악을 무반주 음악으로 정화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교회 음악의 비중을 무반주 음악이나 그레고리오 성가에 크게 두는 이들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 많아졌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각국에서 이들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였는데, 그들의 이상형은 팔레스트리나(G.P. da Palestrina, 1525~1594)였다. 여기에 때를 맞추어 게랑제(P.L.P. Gué-ranger, 1805~1875)가 수도원장으로 있던 프랑스의 솔렘(Solesmes)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그리하여 솔렘은 그레고리오 성가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1856년 조시옹(P. Jausion, 1834~1870), 1860년부터는 포티에(J. Pothier, 1835~1923) 등의 수도사들이 옛 수사본 전승을 기초로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구 · 발전시켰다.
이런 배경들이 서로 상승 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전례 운동이 일어나는데, 프랑스에서는 게랑제를 통하여, 그리고 독일에서는 레겐스부르크의 주교 자일러(J.M. Sailer, 1751~1832)와 쾰른 대교구장이었던 게셀(J. von Geissel, 1796~1864) 추기경, 브레슬라우(현 폴란드의 브로추아프)의 디펜브뢰크(M. von Diepenbrock, 1798~1853) 추기경 및 1848년에 개최된 밖르츠부르크 주교 회의를 통하여 추진되었다. 그리고 이런 개혁의 바람은 19세기 전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음악 개혁 운동은 작은 지방에서는 영향력이 없었고, 따라서 전반적인 개혁은 멀어 보였다. 이때 비트(F.X. Witt, 1839~1880)는 교회 음악 잡지인 《교회 음악의 비행 전단(飛行傳單)》(Fliegende Blätter,
1866)과 《성음악》(Musica sacra, 1868)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음악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868년 밤베르크에서 개최된 가톨릭의 날에 독일어권을 위한 '체칠리아 운동 총연합' (Allgemainen Cacilienvereins, ACV)을 만들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1870년 소칙서인 <물툼 앗 콤모벤도스 아니모스>(Multum ad commovendos animos)를 통해 이 기구를 공식적으로 인준하였다. 이 조직의 빠른 전파와 영향력은 독일 방방곡곡에 교회 음악 개혁 운동을 효과적으로 확산시켰으며, 새로운 정신에 따른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성공적 결과는 부정적인 영향도 수반하였는데, 무반주 다성 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만을 교회 음악의 이상으로 강조하고, 이와 같은 정신으로 작곡된 곡이면 무절제하게 홍보 명단에 올리는 등 경직성이 뒤따랐다. 이에 하버트(J.E. Habert, 1833~1896) 등은 오스트리아에서 '체칠리아 운동 총연합' 에 맞서 예술적 관대함을 주장하는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결국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고, 베네딕도 수도원의 마이어호퍼(Isidor Mayerhofer)와 키늘(Ambrosium Kienle)은 양극단 사이를 중재하면서 교회 음악의 '중용과 관대' (Maß und Milde)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주장들 사이에는 특히 모차르트(W.A. Mozart, 1756~1791)를 중심으로 하는 빈 고전주의 교회 음악에 대한 견해가 심하게 상반되었다.
이러한 내부 논쟁과 외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체칠리아 운동은 독일을 넘어 미국(J. Singenberger), 아일랜드(H. Bewerunge), 폴란드(Surzunski) , 네덜란드(M. Lans, W.A. Smit), 벨기에, 보헤미아, 헝가리,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협회나 회보 발간, 또는 음악 학교인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과 교육 기관들의 설립을 통해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솔렘 수도원의 노력으로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가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독일 체칠리아 협회의 하베른(F.X. Haberl, 1840~1910)이 새로운 그레고리오 성가책의 출판(Editio Medicaea)에 힘썼다. 이 책은 교황청의 인준도 받았다. 그러나 솔렘 수도원에서의 그레고리오 성가 연구가 바그너(P. Wagner)와 모크로(A. Mocquereau, 1849~1930)에 의해 계속되면서 하벌의 개정판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국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레치투디니>(Tra le sollecitudini, 1903. 11. 22)를 통해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토록 하였다. 그리고 바티칸판(Editio Vaticana, 1908)이 솔렘 악파의 참여로 완성되었다. 이와 함께 독일의 체칠리아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은 이 운동이 동시대의 음악 발전에 대해 매우 폐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브루크너(A. Bruckner, 1824~1896)나 라인베르거(J. Rheinberger, 1839~1901) 등 당대의 대가들 작품조차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자연히 내분이 뒤따랐고, 결국 체칠리아 운동은 자체의 엄격한 방향을 잃고 일반적인 교회 음악 운동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발표된 교황청의 교회 음악 규정들에 그 정신이 스며들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도 체칠리아 운동의 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평 가〕 체칠리아 운동은 17~18세기의 전례 음악 속에 무절제하게 섞여 있던 세속적 · 오락적 요소들을 걸러내어 순화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 이런 정신은 부단히 계승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 그레고리오 성가와 무반주 다성 음악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동시대의 음악적 흐름과 단절되었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례 음악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16~17세기의 로마 악파만을 전례 음악의 주류로 인정한, 로마 위주의 지나친 우익 성향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동시대에 악기군(樂器群)의 반주로 전례 음악을 연주하면서 로마 악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베네치아 악파의 전통도 소중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것에서 기본 정신을 배우면서 새것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를 수용한다면, 이 운동은 오늘날에도 교회 음악이 나아갈 방향에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 그레고리오 성가 ; 솔렘 ; 아 카펠라 ; 전례 운동 ; 전례 음악)
※ 참고문헌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Bärenreiter-Vlg/ 수원 가톨릭 대학 편, 《교회 음악》, 수원 가톨릭대학, 1987. [白南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