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국가. 공식 명칭은 체크 공화국(Česká republika) 동쪽으로 슬로바키아,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남서쪽과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78,866k㎡이며, 인구는 10.246,78명(2004)이다. 수도는 프라하(Praha)이고, 공용어는 체크어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체크인(81.2%)이며 이 외에도 모라비아인(13.2%), 슬로바키아인(3.1%), 폴란드인(0.6%), 독일인(0.5%) 등의 소수 민족이 있다.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39.2%, 프로테스탄트 4.6%, 동방 교회 3%, 기타 종교를 믿는 이들은 13.4%이며 무신론자가 39.8%이다.
체크는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보헤미아 · 모라비아 · 슬로바키아가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Republic of Czechoslovakia)으로 독립한 이후 국가 형태가 여러 차례 변하였다. 1939년에 나치독일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전역을 점령하고 독일의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슬로바키아는 명목상 자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다시 단일 국가가 되었지만, 소련의 지원을 받은 체크 공산당원들이 1948년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화되었고 이후 가장 견고한 전체주의 국가 형태를 띠게 되었다. 공산당의 개혁 정책 실패로 1968년 자유화 · 민주화를 추진하는 '프라의 봄' (Prague Spring)을 체험하지만, 소련의 주도하에 바르샤바 조약군이 침공해옴으로써 소련에 순응하는 체제로 돌아갔다. 1977년에는 '77 헌장' (Charter 77)이라는 인권 단체가 활동을 시작하여 체크인들에게 시민 사회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어 1989년 11월 이른바 '벨벳 혁명' (Velvet Revo-lution)으로 공산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급속한 자유화와 개방을 추진함으로써 탈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에 근접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시장 경제를 수용하였다. 1992년 6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체크(보헤미아, 모라비아)는 보수주의적 우익 세력이, 슬로바키아는 좌익 민족주의 세력이 각각 승리를 거두어 연방 해체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실 공산 정권 붕괴 이후의 경제 개혁에서 상대적 소외감을 느낀 슬로바키아에서 싹튼 민족주의가 체크와의 분리 및 독립에 대한 열망을 크게 만들었다. 계속되는 두 민족 간의 갈등 속에서 단일 국가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결국 1993년 1월 1일 체크와 슬로바키아로 공식 분리되었다. 체크는 분리 이후 더 빠른 속도로 사유화,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동유럽의 모범생으로 꼽히기도 한다. 지난 199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였으며, 2004년 5월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가톨릭의 전래〕 체크인은 슬라브족임에도 불구하고 고대사부터 동유럽보다는 서유럽과의 교류가 많았다. 그래서 특히 문화적으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 서유럽에 가깝다. 현재의 체크 지역에 체크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무렵이었다. 하지만 슬라브족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켈트족 · 게르만족 · 아바르족이 들어와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후 모라비아 강 근처에 정착한 슬라브족을 모라비아인이라고 불렀으며, 슬라브족의 일파인 슬로바키아인들이 정착한 지역에는 슬로바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웃 지역들과의 오랜 분쟁 끝에 모라비아는 보헤미아에 합병되었다. 반면 11세기에 헝가리의 영토가 된 슬로바키아는 1918년에 이르러서야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와 정치적 연방을 이루었다.
6세기경 이 지역에 이미 살고 있던 켈트인을 중심으로 슬라브인과 몇몇 독일인들이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는 가톨릭 신앙과 기존의 토착 신앙이 공존하였다. 체크에서 본격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당시 체크는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던 시기였으며 서쪽에 있던 프랑크 왕국의 세력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모라비아 왕국의 로스티슬라프(Rostislav, 846~870)는 862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842~867)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슬라브어를 할 줄 아는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포시우스(Photius, 801?~897) 총대주교는 863년 치릴로(Cyrilus, 826/827~869)와 메토디오(Methodius, 820/825?~885)를 모라비아 왕국으로 파견하였다. 치릴로는 선교를 위해 성서를 고대 슬라브어(고대 불가리아어)로 번역하였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또한 메토디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 등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전례서들을 번역하여 슬라브어로 전례를 거행하였다. 최초의 보헤미아 왕국 왕 보리보이(Boriwoj, +894)와 왕비 루드밀라(Ludmilla)가 메토디오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후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이 펼쳐졌다. 하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사이에 당파 싸움이 계속되었다. 또한 당시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독일인들과 독일 주교들은 슬라브 전례의 거행을 반대하면서 라틴 전례의 거행을 고집하였다. 메토디오가 슬라브 전례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교황들도 이를 인정하였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까지 쫓겨났고 이후 라틴 전례가 거행되었다. 이때 독일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보헤미아의 군주는 후에 순교하여 성인이 된 벤체슬라오(Wenceslaus, Václav I, 907~929)였다. 그 결과 프라하 교구가 체크에서는 최초로 973년에 설립되었고, 올로모츠(0lomouc) 주교좌가 1063년에 설립됨으로써 모라비아의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다. 프라하의 초대 주교인 아달베르토(Adalbertus Pragensis, 956~997)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과 베네딕도회를 보헤미아에 전하였다. 그리고 말다(Malda) 공주에 의해 여자 수도원이 971년 흐라드차니(Hradcany)에 설립되었다.
그레고리안 개혁(Reformatio Gregoriana)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전해진 것은 쿠트나호라(Kutná Hora, 1142)와 모라비아(1205)에 설립된 시토회에 의해서였다. 성직자 개혁은 1142년 프레몽트레회를 초청한 올로모츠의 주교 즈디크(H. Zdik, +1150)에 의해 구현되었다. 성녀 글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의 정신은 프라하에 처음으로 세워진 글라라회 수녀원 원장이자 오타카르 1세(Pre-mysl Otakar I, 1198~1230)의 딸인 성녀 아네스(St. Agnes of Bohemia)에 의해 전파되었다. 1306년 보헤미아를 다스린 프르세미슬(Přemysl) 왕조의 마지막 왕인 바츨라프 3세(1305~1306)가 세상을 떠나자, 시토회 아빠스들은 룩셈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의 왕권을 차지하는 것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355~1378)가 된 카를 4세가 1346년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1346~1378)이 되었을 때, 그는 프라하를 행정 중심지로 삼았으며 보헤미아는 황금 시기를 맞이하였다.
1344년에 프라하는 대주교좌가 되었으며, 1348년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렐 대학교(현 카를로바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5세기에 카렐 대학교의 교수이자 종교 개혁가인 후스(J. Hus, 1372/1373~1415)가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고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사제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대사 논쟁, 성직 매매 등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교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내용의 설교로 인해 파문되었고, 결국 1415년 화형당하였다. 후스의 처형을 계기로 체크에서 반가톨릭 운동이 전개되었고, 그것은 곧 체크인과 독일인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당시 독일 귀족들에게 억눌려 있었던 체크인 귀족들의 저항은 거셌다. 이들은 '양형 영성체 인정, 교회의 평등, 설교의 자유, 교회의 세속적인 부의 포기' 등을 주장하는 프라하 4개항을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교황과 가톨릭에 저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후스파와 가톨릭 측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후스파의 승리로 체크에서의 양형 영성체 공인, 체크어로 설교할 수 있는 자유, 로마에 대한 세금 지불 중지, 종교 선택의 자유 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교황이 합의된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크에서의 종교 자유는 확실한 보장 없이 16세기까지 이어졌다.
1526년 가톨릭을 믿는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이 체크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가톨릭 세력이 확대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1576~1612)와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2세(1619~1637)는 체크에서 가톨릭의 확대 를 위해 체크인 귀족들과 비가톨릭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결국 30년 전쟁(1618~1648)의 원인이 된 소위 '프라 하 창문 투척 사건' 을 계기로 체크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체크의 프로테스탄트와 합스부르크의 가톨릭이 대결한 종교전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15세기의 후스파 전쟁과는 달리 후스파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고, 귀족들과 농민들의 연대가 흔들리면서 체크 후스파 귀족들은 1620년 프라하 근교의 빌라 호라(Bilá Hora) 전투에서 가톨릭 연합군에 패배하였다. 결국 체크 프로테스탄트의 패배는 체크의 독립 상실로 이어졌고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로 선포되었다. 178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요제프 2세(1765~1790)가 종교적 관용을 선언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인정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1870년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직후 집권한 정치인들은, 가톨릭을 외래 종교로 여기고 후스파 교회의 재건을 장려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가톨릭 신자수는 절대적이어서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77%에 이르렀고 후 스파 교회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의 비율은 13.2%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공산 정권이 집권하면서 반종교 정책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체크에서의 종교적 열정과 신자 비율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공산화 이전인 1945년에는 체크인들 중에서 80%가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1969년에는 55%로 그리고 1980년에는 30%로 하락하였다. 공산 정권 시기 체크에서 가톨릭 교회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신자수가 가장 많았던 탓도 있었지만, 대외적으로 교황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외세에 의한 조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세력이 약한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 정책을 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통제 강화를 위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에 대한 봉급과 교회 재정을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켰다.
1983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 책임자가 교황청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였다. 이로 인한 만남은 공산화가 된 이후 교황과 체크 고위 책임자와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1973년 처음으로 주교 서품이 있었으며, 1988년 3명의 새 주교들의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1990년에는 공석 중인 주교좌에 주교들이 모두 임명되었으며, 교황청과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에 외교 관계가 다시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교황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였다.
현재 체크에서 가톨릭 교회의 신자는 전체 인구의 39%인 4,003,000명이며, 2002년 12월 현재 대교구 2, 교구 6, 동방 대목구 1, 본당 3,138개가 있고, 추기경 1, 대주교 2, 주교 13, 신부 1,930(교구 소속 1,335, 수도회 소속 595), 종신 부제 144, 수사 107, 수녀 2,246명이 있다. (→ 벤체슬라오 ; 슬로바키아 ; 아달베르토, 프라하의 ; 치릴로와 메토디오)
※ 참고문헌 임영상 · 황영삼 편, 《소련과 동유럽의 종교와 민족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pp. 222~246/ Milan Návrat, Religion in Czechoslovakia, Praha, Orbis, 1984/ Jan Pargau, Tradice V kulturnim a spoleuenskem vivots nymburské vesnice, Praha, Univerzita Karlova, 1988/ Pedro Ramet, Catholicism and National Culture in Poland, Czechoslovakia and Hungary, Pedro Ramet ed. Cross and Commissar The Politics ofReligion in Eastem Europe and the USSR, Bloomington, Indiana Univ. Press, 1987, pp. 55~79/ 一, Christianity and National Heritage among the Czechs and Slovaks, Pedro Ramet ed. Religion and Nationalism in Soviet and East European Politics, Durham . London, Duke Univ. Press, 1987, pp. 264~285/ Milan J. Reban, The Catholic Church in Czechoslovakia, Pedro Ramet ed., Catholicism and Politics in Communist Societies, Durham . London, Duke Univ. Press, 1990, pp. 142~155. 〔金信圭〕
체크
〔영〕Cz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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