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수스 Cel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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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를 논박한 그리스 이교도 철학자. 2세기 말에 활동하였다.
〔생 애〕 첼수스에 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 시대에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저술 활동은 175~18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리스도교를 반박하는 《진언》(眞言, 'Aληθής λὀγος)이라는 글을 쓴 것도 사실로 보인다. 2세기 무렵에는 첼수스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이교도 철학자인 첼수스는 사모사타(Samosata, 현 터키 삼사트) 출신의 풍자 작가인 루치아노스(Lucianos, 115/120?~200?)의 친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주장도 불확실한것이, 루치아노스의 친구는 에피쿠로스 학파였는데 첼수스는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로 밝혔기 때문이다.
첼수스는 로마 시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 친숙하고 이집트의 사상과 풍습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첼수스가 로마 시민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유대교와 이집트에 관한 첼수스의 지식이 여행이나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얻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첼수스의 명성은 그의 작품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246년 경제적 후원자이자 친구인 암브로시오가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에게 첼수스의 작품 사본을 보내어 그 내용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해 줄 것을 부탁한 데에서 기인하였다. 오리제네스는 암브로시오의 부탁에 망설이다 동의하였고, 그 결과 그의 가장 유명한 호교 작품인 《첼수스 반박》(Kατά Kέλσου)을 저술하게 되었다. 오리제네스는 첼수스의 글을 인용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 첼수스의 글을 재구성해 낼 수 있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 이전 최고의 호교론적 저서인 이 작품에서 오리제네스는 첼수스의 《진언》 내용의 10분의 9 그리고 문장의 10분의 7을 그대로 수록하였다. 하지만 첼수스의 책 원본은 소실된 상태여서 오리제네스의 작품에서 재구성한 것이 오늘날 남아 있을 뿐이다. 첼수스가 쓴 그 밖의 작품이나 글들은 오리제네스의 《필로칼라아》(Philocal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 품〕 첼수스의 《진언》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Porbyyios, 232/233~304/305) 이전에 그리스도교를 반대한 이방인 학자의 작품으로는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서론, 유대교 관점에서의 그리스도교 논박, 철학적 관점에서의 그리스도교 논박,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세부적 논박,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교를 믿으라는 호소 등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론인 1장에서 첼수스는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특성을 기술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강의 비판 계획을 미리 말하면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분리주의' 를 비난한다. 즉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서 설명하는 우주의 기원 등에 관한 주장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고, 또한 고대의 현자들이 이미 밝혀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이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고 사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에서 그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목수의 아내로 유대인 마을에서 살던 여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성모 마리아가 어떤 신적인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남편과 더불어 이집트로 도망가야만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논거를 들어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논증을 전개하였다. 첼수스는 예수가 공생활 중에 자신의 신성한 임무에 대하여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10명 또는 12명의 '명예롭지 못한 세리나 어부들' 을 제자로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하느님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첼수스는 유대인의 관점과 이교도의 관점을 모두 갖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가 행한 기적들 중 일부는 허구적인 설화들에 불과한 것이고, 혹 진짜라 해도 이집트인이나 마술에 능한 사람들이 행한 것에 비해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또한 '조상의 율법을 저버리고' 국가가 단죄한 자의 사기에 넘어가서 유대식 이름에서 그리스도교식 이름으로 개명한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Origen, Contra Celsum, Ⅱ). 그리고 예수는 메시아로 지켰어야 할 유대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선택한 제자들의 확신과 충성심도 확보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예수의 부활 사화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이미 자몰키스(Zamolxis), ,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2?~497/496), 람프시니트(Rhampsinit) 등과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면 왜 그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난 것인가? 자신을 박해한 자와 조롱한 자들에게는 왜 나타나지 않았는가?" 라고 첼수스는 묻고 있다.
3장에서는 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전반에 대하여 공격하고 있다. 첼수스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유대인은 이집트에 대항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에 저항한 것이었으며, 난동을 부린 것이 이 두 종교를 분리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단합되지 못한 모습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교파가 많고 또 주장하는 바가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공통점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첼수스도 그리스도인들이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을 배척하며, 무지하고 죄가 많은 사람들만 사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 자신의 힘으로는 사업을 완수할 수 없어 대신 완수하도록 그리스도를 지상에 파견한 것처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그가 하느님의 섭리와 동식물과는 다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사랑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세상은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우주적 계획의 완전과 완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첼수스는 주장하였다.
4장에서 첼수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세세히 따지면서 그것을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반박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참된 것은 모두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기원전 540?~480?),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469~399), ,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과 다른 그리스 사상가들의 교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첼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를 말해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믿으라고 요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조차 불신을 당한 권위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같은 논리로 그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도 플라톤의 주장을 훼손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은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것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토아 학파가 영이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가며 모든 것을 뒤덮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내세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도 그리스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것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몸의 부활에 대한 교리도 영혼의 윤회에 관한 오래된 사상에서 빌려 온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5장에서 첼수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포기하고 대중이 믿는 종교를 믿을 것"을 종용하였다(Origin, op. cit., VII, lxii sqq., VIII. 그는 우상 숭배, 주문으로 악마를 불러내는 일, 세속적인 축제를 즐기는 일 등을 옹호하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풍요를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처럼 자연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론부에서 첼수스는 그리스도교가 세계를 지배하기를 바라는 "헛된 꿈을 버릴 것"을 호소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을 초탈한 듯한 삶을 살지 말고 언행을 통해 제국의 안녕에 기여하는 사람들처럼 살라고 충고하였다. 후기에서 그는 책을 한 권 더 쓸 것을 약속하였으나, 실제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새 책에서 자신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기술할 것을 약속하였다.
〔비 판〕 첼수스가 이 책을 저술한 의도는 초기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교를 격한 논조로, 즉 저급한 언어를 동원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흔히 사용되는 무신론, 비윤리, '티에스티안 축제와 세디포딘의 모임'(Thyestian feasts and Cedipodean) 등의 비난은 삼가고 있다. 이러한 비난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고 가해진 것들이다.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인과 일반인들 간의 중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리주의를 버리고 제국의 공익을 위하여 이교도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만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삶에 관한 이교도적인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진심으로 바란 것이다. 오리제네스도 첼수스가 이교도적 철학의 단점을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특정한 우상 숭배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신화의 오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도우려 하였고, 또한 모든 사람을 이상적인 '하나의 종교 로 이끌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첼수스 역시 다른 이교도들처럼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교리에 대해 오해를 하였고,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첼수스는 많은 이교도들의 글을 읽었다. 나아가 '원시적인' 부족들의 종교 사상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첼수스의 지식은 책을 통하여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교사들과 깊은 교제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노시스파와도 교제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그노시스주의자들의 해석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의 글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며, 오리제네스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지적하였다. 첼수스는 구약성서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참고한 자료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책들, 복음서,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서간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오로 서간을 얼마나 접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첼수스는 사도 바오로의 사상을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복음서를 접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4복음서를 보았을 것이다.
첼수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통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과 이단의 교리를 구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편견도 갖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일파라는 당시 로마인들의 일반적인 사고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주의자들 : 의 해석과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예수가 행한 기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유령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속 사업(atonement)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당시 다른 학자들처럼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하려는 태도, 그리고 식자층과 권력층보다는 가난한 자, 죄인, 여자, 어린이, 노예 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비록 첼수스가 그리스도교 신자와 이교도 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글을 쓰기는 하였지만, 그 역시 당시의 다른 이교도 학자들처럼 자신의 반대자를 공격하기 위하여 모든 수사법을 동원하였다. 그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제국의 이익과 복리 증진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데에서 드러난다. 그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화 시이건 전쟁 시이건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을 섬기려 하지 않으며, 제국이 망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마술을 동원하여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려고 할 뿐이다."
첼수스는 현대의 합리주의자나 진화론자와 매우 유사한 관점에서 신약성서를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고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비판한다는 것이다. 2세기경에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첼수스가 인간의 기원을 하느님에게 두지 않고 동물과 다름없이 자연에 두며,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영혼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플라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첼수스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Plotinos, 204/205~270)보다 시대적으로 반세기 정도 앞서지만, 혼합주의(syncretism) 세대에 속한다. 그는 자체적인 종교 자료만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아시아 지역의 많은 종교들의 교리를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절충적인 영성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절충주의는 당시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은 유물론과 회의주의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첼수스도 플라톤의 철학뿐 아니라 플라톤을 빙자한 철학자들의 사상도 받아들였다. 플라톤의 서간집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0?~430),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등의 철학 사상과 이집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나아가 힌두교 등의 종교 사상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것은 플라톤주의였다.
첼수스는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이 알 수 없는 절대자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동시에 그 자신은 근원을 가지지 않은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하느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진리이자 세계 영(世界靈, World Soul)이며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은 다 영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 세계는 하느님이 창조한 신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의 근원에는 영원한 물질이 있다. 물질 안에 있는 힘은 선하든 악하든 모두 영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도 본래 신성한 것이었으나 원죄를 짓고 나서 육체의 구속을 당하게 된 것이다. 모든 생성과 소멸의 변화는 우연이나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지하며 무한히 선한 영의 계획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신에 관한 개념의 영고 성쇠(榮枯盛衰)와 여러 시대 종교들의 존재조차도 신적 존재의 계획의 일부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세계의 종교가 서로 다르다 해도 모두 최고의 신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신화적 개념들은 결국 동일한 권능을 의미한다. 다만 이 권능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권능이 농부들에게 풍요와 결실을 가져다주는 은총의 권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신성(deity)에 대한 존숭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의 선물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권능, 영혼 혹은 데몬(demon) 등은 하느님과 인간을 중개하는 존재이며 예언과 기적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평 가〕 첼수스는 철학자라기보다 헬레니즘의 옹호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중시한 진리(10gos)와 법(nomos)에 기초하여 역사 철학을 수립하였으며,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것이라며 배척하였다. 이러한 첼수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배척 사상은 후에 포르피리오스가 전수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 오리제네스)

※ 참고문헌  William Tumer, Celsus, The Platonist, (CE) 3, Kevin Knight, 2003/ M.R.P. McGuire, 《NCE》 3, 2003, pp. 329~330/ R. Kottje · B. Moeller, Oekumenische Kirchen Geschichte 1, Alte Kirche und Ostkirche, Kaiser Gruenewald, 1989/ Friedrich Wilhelm Bautz,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I, 1990/ J. Quasten, Patrology 2, Westminster, Md., 1950, pp. 52~57. 〔李種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