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崔京煥(1805~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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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프란치스코(김태 작) .

최경환 프란치스코(김태 작) .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본관은 경주(慶州). 보명은 영눌(榮訥), 일명 치운 혹은 영환(永煥).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남편이며,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부친. 1805년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최인주(崔仁柱)와 경주 이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조부 최한일(崔漢駝) 때였고, 서울에서 지금의 청양 땅으로 이주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시련을 겪은 부친 최인주가 모친을 모시고 낙향하면서부터였다. 최경환은 새터에서 성장하여 14세 때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조카밸 되는 이성례를 아내로 맞이한 후 1821년 장남 최양업을 얻었다.
1827년경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살다가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하였으며, 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하여 이곳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장남인 최양업은 1836년 초에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의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거처로 올라갔고, 그해 말에는 동료들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출발하였다. 그후 최경환은 모방 신부에 의해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특히 《칠극》(七克)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가 훗날에 기록한 부친의 신앙 생활과 신심 내용을 보면, 첫째 교리에 해박한 데다가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양에 힘썼으며, 둘째 이웃과의 나눔 운동과 극기의 실천에 뛰어났고, 셋째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 ·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하였으며, 넷째 회장으로서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 생활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평생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본분을 지키는 데 충실하였던 최경환은 일찍부터 순교 원의를 품고 있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인해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고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기 시작하였을 때, 최경환은 수리산 신자들과 함께 상경한 뒤 여러 명의 순교자 시신을 찾아 안장해 주었다. 그런 다음 수리산으로 내려와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음력 7월에 아내 이성례와 어린 자식들, 이 에메렌시아나(이순빈 베드로의 누이), 그리고 피신하지 않고 있던 교우촌 신자들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그들 일행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악담을 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하였지만, 최경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합시다"라고 하면서 일행들을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그들 일행은 우선 포도청의 옥에 투옥되어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최경환은 회장인 데다가 아들이 신학생으로 외국에 공부하러 갔다는 이유 때문에 더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으나, "천지 만물의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지켰다. 게다가 박해자들이 교회 서적을 가져와 읽어 보라고 하자,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지켜보던 외교인들조차 천주 신앙을 찬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처럼 40일 이상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110대나 되는 곤장을 맞은 최경환은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포도청에서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39년 9월 12일(음력 8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혹은 35세)였다.
<최우정(바시리오)의 이력서>에 의하면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중형 최영겸(崔榮謙) 부자에 의해 거두어져 지석(誌石) 대신 사용된 사발과 함께 노구산(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노구산)에 안장되었다가, 여러 해 뒤 영겸 부자에 의해 그 유해가 발굴되어 수리산 뒤뜸이 앞산으로 옮겨졌다. 이어 최경환은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25년 7월 5일 복자품에 올랐으며, 1930년 5월 6일에는 그의 유해가 수리산에서 발굴되어 명동 성당 지하 묘역으로 옮겨졌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의 성해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그의 여섯째 자식인 막내 스테파노는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아내 이성례는 형조로 이송되었다가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 기해박해 ; 수리산 ; 이성례 ; 최양업)
※ 참고문헌  배티 사적지 편, <최 양업 신부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최양업 신부의 서한-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 《기해일기》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 vol. 4, Notes pou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배티 사적지 편, ,<최우정(바시리오)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 최 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3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 활동의 배경>, 《교회사 연구》 14집, 1999/ 류한영 · 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 양업 신부》, 양업 교회사연구소, 2000.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