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홍 (1902~1954)

崔德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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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제6대 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요한. 1902년 6월 2일 대구 비산동에서 출생하여 해성재 서당과 성립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1914년 10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제1회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26년 5월 29일 졸업과 함께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인 5월 31일에 제주 홍로(현 서귀포) 본당의 보좌 신부로 사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27년 5월 홍로 본당의 7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명도회 · 소년회 · 남녀 친목회를 구성하고 야학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29년 5월부터 1936년 6월까지 제주(현 제주 중앙 주교좌) 본당 6대 주임을 맡아, 1930년 12월에 고딕식 적벽돌조의 성당을 신축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또한 1935년에는 한경면에 신창 공소(현 신창 본당)를 설립하였다.
그는 1936년 7월부터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당시 신학교 교장은 타케(E.J. Taquet, 嚴宅基) 신부가 맡고 있었으며, 최덕홍 신부를 포함한 5명의 교수 신부가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0년부터는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1942년 2월 16일 일본 총독부의 조치에 따라 신학교가 폐교되자 이 해 봄부터 전주 지목구의 관리국장 겸 상서국장으로 재직하였다. 1944년부터 1949년 2월까지 목포(현 산정동) 본당의 11대 주임을 맡았는데,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에 성당이 일본군 사령부로 징발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12월 교황청으로부터 그를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한다는 전문을 받았으며, 이에 1949년 1월 30일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계산동 성당에서 주교 서품 및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최덕홍 주교는 세 번째 한국인 주교이자 대구 대목구의 첫 번째 한국인 주교로서 대구 대목구를 이끌게 되었다. 1950년 10월 1일에는 <대구매일신문>(현 <매일신문>)을 인수하여 11월 주식 공모 등 제반 절차를 거쳐 대목구를 대주주로 하는 주식 회사로 전환하였으며, 12월 10일에 창립 총회를 통해 사장을 맡았다. 이후 신문의 지면을 늘리고, 1952년 2월부터는 <소년매일>을 발간하는 등 언론 사업을 확장시켰다. 또한 일제에 의해 폐간된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를 속간하기로 결정하여 1949년 4월 1일에 제74호부터 간행하였으며, 주교관 구내에 대건출판사를 설립하여 지면을 4면에서 6면으로 늘려 인쇄토록 하였다. 이로써 교구의 각종 문화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최덕홍 주교는 교육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재임 기간 동안에 각급 교육 기관이 계속 확충되었다. 1949년 2월 28일 경주 근화여자중학원, 5월 28일 마산 성지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고, 8월 16일 대건고급중학교, 8월 30일 효성여자고급중학교가 승격 인가를 받았다. 또한 1951년 2월 26일 성모여자중학교, 1952년 3월 14일 성의상업고등학교, 4월 15일 성지여자고등학교 등이 각각 설립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4월 10일에는 효성여자초급대학이 설립 인가를 받아, 1953년 5월 5일 4년제 효성여자대학으로 승격되어 개교하였다. 또한 1950년 5월 1일에는 해성의원, 1951년 10월 1일에는 부산 데레사 의원과 성 분도 의원 등을 개원하고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는 등 특히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의료 사업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재임 기간 동안 대구 대목구 내의 본당도 계속 신설되어 1949년 8월 창녕 본당, 1950년 4월 포항(현 죽도) 본당과 3월 성주 본당, 1951년 3월 범어동 본당과 5월 부산 초량 본당 및 9월 동래 본당, 1952년 8월 경산 본당 등 많은 본당들이 설립되었다.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1952년 7월 6일 왜관 감목 대리구를 설정한 것에 이어,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의 본당이 모두 23개에 달하자 교구 분할 계획을 수립하여 1954년 6월 18일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 감목 대리구(현 부산교구의 모체)를 설정하였다. 이와 같은 열성적인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1951년 이후 3년 동안에 연평균 6,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고, 그 결과 부임 초에 34,000명 가량이던 신자가 1954년에는 60,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하였다.
1953년에 군종 신부단 지도 주교를 역임한 최덕홍 주교는 안동 감목 대리구(현 안동교구) 설정 준비와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이 지역 본당을 순회하고 돌아온 뒤 1954년 11월 건강이 악화되어 해성병원에 입원하였지만 완쾌되지 못하고, 12월 14일 5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17일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최덕홍 주교의 흉상을 제작하여 2004년 4월 8일 계산동 주교좌 성당의 성모당 앞에 설치하였다. → <가톨릭신문> ; 대구대교구 ; 성 유스티노 신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62호(1949) · 72호(1955)/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천주교 부산교구, 1967/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빛》 17,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4/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교구사 연대표》,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4/ 대구대 교구 편, 《교구 총람》, 천주교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대구 본당 100년사》, 대건출판사, 1986/ 《광주대교구 50년사》, 천주교 광주대교구, 1990/ 윤광선,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영남교회사연구소 월보》 16~24, 1993/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편, 《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1. 〔崔先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