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924년 1월 27일 원산에서 3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937년 3월 20일 원산 해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소속 본당이던 원산 본당 주임인 담(F. Damm, 卓世榮) 신부의 권유로 1937년 4월 1일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학업이 어려웠고, 급기야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에게도 징집 영장이 날아와 1945년 5월 서울의 서빙고(西永庫)에 있는 '조선 제27 부대' 에 입영하였다가 해방이 된 뒤인 1945년 9월 15일에야 원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해방 후 덕원 신학교가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자 신학생들은 신학 공부를 위해 남하를 단행하여 1946년 4월 이남은 물론 이북 출신 신학생까지 포함한 26명이 대거 월남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공산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부제로서 사제 수업에 전념하며 지냈다. 당시 최명화 신부를 비롯하여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당시 부제),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당시 신학생) 등 이북 출신 신학생들은 신학교 폐쇄 직전까지 덕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1949년 5월 신학교가 몰수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투옥되는 등의 상황 속에서 여러 곳으로 피신하며 고초를 겪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0월 10일 국군이 원산에 입성한 뒤 미8군 소속 몰피 군종 신부의 주선으로 10월 말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최명화 신부는 남하한 지 한 달 뒤인 1950년 11월 21일 명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날 전쟁의 와중에서도 모두 9명의 신부가 탄생하였다. 서품 뒤 11월 30일에 용산 신학교 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는데, 이 자리에는 덕원 신학교 출신의 허창덕(許昌德, 치로) 신부를 비롯한 원산 출신 교우들도 모여 원산 출신 사제의 서품을 축하하며 첫 미사를 봉헌하는 감격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1951년 1 · 4 후퇴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하여 대청동의 중앙 성당에서 지내다가 1951년 말에 서울의 성신중고등학교(소신학교)가 경남 밀양으로 피난을 오자, 여기에서 교사 신부로 봉직하기 시작하였다. 밀양 본당의 부속 건물과 임시로 급조한 토벽 천막 교실과 가건물을 교사(校舍)로 사용한 피난 학교였지만, 세 차례의 졸업식과 두 차례의 입학식을 거행하는 등 살아 있는 교육의 장에서 헌신하였다. 1953년 전세가 호전되자 신학교는 11월 6일 서울로 복귀하였고, 최 신부는 1960년까지 봉직하면서 수많은 신학생을 길러냈다. 이와 더불어 덕원 신학교의 독일인 신부에게서 배운 독일어 실력으로 1954년부터 1960년까지는 가톨릭대학과 외국어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어 1960년 8월에 독일로 건너가 1962년까지 뮌헨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귀국한 후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대구대교구 소속 김천시 황금동 본당(당시 대구대교구 왜관 감목 대리구 소속)에서 사목 활동을 폈는데, 1964년 3월부터 1965년 2월까지는 주임 신부가 공석이던 화령 본당의 임시 주임을 겸하였고, 1964년에는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대구 성의중 · 상업고등학교(현 성의중 · 종합고등학교)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70년 1월부터 1975년까지는 광주의 대건신학대학(현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로서 전념하였다.
최명화 신부는 교수 생활에 전념하면서도 천부적인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틈틈이 성가 작곡에 몰두하였는데, 이미 어렸을 때부터 예능에 각별한 재질을 갖고 있었으며, 악기를 다루는 재주도 뛰어났었다. 원산 해성학교에 재학 중일 때에는 학예회에서 피리 독주를 하여 청중들을 놀라게 하였고, 덕원 신학교 시절에도 음악부에서 활동하면서 바이올린을 익히고 피아노, 클라리넷, 기타 등 모든 악기를 다를 수 있는 재주를 보였다. 또한 성악 실력도 뛰어났으며, 글짓기에도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여 한국 천주교회 전례 위원으로 전국 성음악 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성가를 작곡하였다. 현재 최명화 신부가 작곡한 성가 16곡이 《가톨릭 공동체 성가집》에 수록되어 널리 불려지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보이던 중 갑자기 심한 복통을 느껴 부산 분도 병원에 입원한 최 신부는 담석증 진단을 받았으나, 다시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서 정밀 진단 결과 1974년 10월 24일 대장암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대건신학대학에서 봉직하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1975년 광주로 내려갔다가 다시 병이 깊어져 3월에 대구 파티마 병원으로 옮겨 투병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5월 8일 병환 때문에 대구 성 베네딕도 수녀원 성당에서 미리 은경축(원래 11월 21일) 미사를 집전한 뒤, 6월 17일 파티마 병원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1975년 6월 19일 대구 남산동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거행한 뒤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투병 생활 중에도 집필에 몰두하여 신학 총서 제4권인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를 번역하여 선종하기 몇 달 전에 탈고하였는데, 이 책은 그가 선종한 지 넉 달 뒤인 1975년 10월 20일에 분도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 대구대교구 ; 덕원 신학교 ; 성신중고등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가톨릭신문>/ 《경향잡지》 <한국 교회의 증언자(50)- 최명화 신부>, 《교회와 역사》 122호(1985. 8),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원용 편저, 《崔命化 神父, 生前의 그 모습》, 가톨릭 원산· 덕원 신우회, 1985/ 一,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최명화 신부 유고집》, 가톨릭 원산 · 덕원 신우회, 1986. 〔崔先惠〕
최명화 (1924~1975)
崔命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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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소신학교 밀양 피난 시절의 최명화 신부(사진 오른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