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식 (1881~1952)

崔文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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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식 신부(가운데 앉은 이)와 해성학원 학생들( 1935년) .

최문식 신부(가운데 앉은 이)와 해성학원 학생들( 1935년) .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베드로. 1881년 5월 16일 충남 공주 서재에서 최제환(요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남 천원군 목천면 서덕리(서덕골)를 거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 쇄재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190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29세가 되던 해인 1910년 9월 24일 사제로 서품된 후, 곧 황량한 동만주 간도 지방인 간도성 연길현 팔도구(八道溝)의 조양하(朝陽河, 현 팔도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896년에서 1920년까지 서울 대목구에서 관할한 간도 지방에 한국인 신부가 파견된 것은 1908년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에 이어 최문식 신부가 두 번째였다.
당시 조양하 본당은 간도의 세 번째 본당으로서 교세는 신자수 총 2,100명 정도였다. 최 신부는 1910년 12월 임지에 도착하여 10년간 활동하였는데, 공소 건물로 사용하던 성당이 협소하여 1916년에 1,0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이듬해 벽돌 성당을 신축하고, '성모 성심' 을 주보로 삼았다. 이후 조양하 본당은 수북촌, 무봉촌, 횡도자, 서학동 등지의 관할 공소가 날로 발전하면서 간도의 천주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세 신장을 보였다. 최 신부는 특히 교육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지방 유지들의 찬조를 얻어 1918년 1월에 4년제 사립 초급학교인 조양학교(朝陽學校, 후에 해성학교로 바뀜)를 설립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하던 간도 지방 초등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마적들이 성당 문을 부수고 들어와 제대와 감실을 파괴하고 성작과 성광을 탈취한 후, 최문식 신부와 신자 10여 명 그리고 외교인 30여 명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적들은 성당에 총 400정이 있다는 헛소문을 듣고 그것을 탈취하려고 난입하였다가, 총을 발견하지 못하자 속량금을 갈취하기 위해 최 신부 등을 인질로 잡아간 것이다. 용정 본당(후에 용정 하시 본당으로 개칭)의 퀴를리에(J.J.L. Curlier, 南一良) 신부로부터 사건 경위를 보고받은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즉시 봉천 주재 프랑스 총영사와 조선 총독부 경무총감에게 최 신부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양하 본당 신자들도 최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갖은 어려움 끝에 최 신부는 마적에게 잡힌 지 205일 만에 풀려나 1920년 2월 조양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마적에게 억류되어 있는 동안 모진 고초를 겪어 이후에도 후유증으로 인한 심신의 고통을 겪었다.
간도의 관할 교구가 서울 대목구에서 원산 대목구로 바뀐 이듬해인 1921년 5월에 최문식 신부는 신설된 강원도 양양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강원도의 가장 북동쪽 지역인 양양군을 비롯한 10개 지역 공소의 691명에 달하는 신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관리들의 간섭과 신자들의 이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싸리재(현 속초시 도문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성당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은 추위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여 일반 사목과 선교에 불편이 많았다. 이에 발전 가능성이 있고 행정 중심지인 양양읍에 성당을 마련하기로 한 최 신부는 1921년 12월에 양양읍 거마리 공소 회장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서문리에 방치되어 있던 폐가옥을 부지와 함께 매입하여 거처를 이전하고 본당을 옮겼다(양양군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 그리고 1922년 3월부터 구입한 부지에 11월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그해 12월 22일 기와집 성당을 완공하고 주보를 '예수 성심' 으로 하였으며, 24일에 봉헌식을 거행하고 첫 미사를 드렸다.
1927년에 경기도 북부의 최초 본당인 연천군 남면의 신암리 본당(현 동두천 본당의 공소)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932년 9월에는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으로 전임되어 1952년 10월까지 20년간 봉직하였다. 해성학원을 통해 지역 아동들의 교육에도 열성을 기울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에 해성학원이 폐교되는 아픔을 겪은 최문식 신부는 1952년 10월 11일 향년 72세로 선종하여 미리내 성당 뒷산 무명 치명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 미리내 본당 ; 양양 본당 ; 연길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41호(1936. 10)/ 서상요, <한국 교회의 증언자(18)- 최문식 신부>, 《교회와 역사》 72 · 73호(1981. 9), 한국교회사연구소/ 조성희 편저, 오기선 신부 교열, 《용인 천주교회사》, 용인 천주교회사 편찬위원회, 1981/ 양양 본당 80년사 편찬위원회, 《양양 본당 80년사》, 천주교 춘천교구 양양 교회, 2001. [崔先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