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면속구 출신 신부. 세례명은 마티아. 1908년 출생.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여 초대 연길 대목구장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로부터 연길 소속 신학생으로 부제품을 받았다. 이어 1938년 4월 초에 사제 서품을 받고 원산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본래는 3월 21일에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김보용(金寶容, 루도비코) 신부가 서품될 때 최병권 신부도 함께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침 심한 폐병을 앓고 있던 최 신부가 그보다 조금 뒤에 따로 서품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원산 대목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덕원 신학교를 졸업하여 서품을 받은 3명의 사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함께 사제 서품을 받은 임신부와 김 신부는 각각 회령과 원산의 본당으로 발령을 받아 나갔지만, 최 신부는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본당으로 가지 않고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번역 활동을 통해 선교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 독일인 수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주일이면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도왔다.
그러다 1944년 11월부터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를 맡게 되었고,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갖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가운데에서도 강한 정신력을 보이며 수녀들에게 영신 지도는 물론 수덕론(Ascetica)까지 수시로 가르쳤다. 일제 말기에 침탈이 가중되는 시기와 해방 이후 공산 정권에 의한 종교 탄압으로 수녀회가 매우 어려운 때에 최 신부는 3년간 수녀원을 이끌어 갔다. 또한 당시 평양의 서포 본당은 1942년 6월 이래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가 관할하는 실정이었으므로, 1944년 11월부터 1947년 10월까지 서포 본당의 일도 맡아 보았다.
해방이 된 뒤 1947년 10월 덕원 수도원으로 귀원하였으나, 북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어려운 상황은 가중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종교 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한국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가하던 중 급기야 1949년 5월 9일 밤 수십 명의 정치 보위부원들이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쳤다. 그날 밤에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를 비롯한 신부 4명을 잡아 투옥한 것에 이어, 10일 밤에 다시 신학교 교장인 로머(A. Romer, 盧炳朝)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과 수사 22명, 그리고 최병권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신부 4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도 내몰고 신학교와 수도원을 몰수하여 22년을 이어오던 덕원 수도원은 폐쇄되고 말았다. 이날 체포된 최 신부는 평양 인민 교화소에 구금되었는데,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당시 평양 인민 교화소에는 외국인 선교사와 8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8월 무렵까지만 해도 최 신부가 수감되어 있던 것이 목격되었지만, 그 뒤에 한국인 신부들은 사망일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정도로 비밀리에 피살되었다고 한다.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덕원신학교 ; 서포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 양교구사》, 분도 출판사, 1981/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이정순 엮음, 《원산 수녀원사》,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崔先惠〕
최병권 (1908~1949?)
崔炳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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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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