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비르지타(혹은 가타리나).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崔海成, 요한)의 고모.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신유박해 때 남편이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이후 남편이 유배지에서 병들어 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줄 신자를 불러올 수가 없었으므로,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켜 남매처럼 살겠다' 고 결심한 뒤에 자신이 직접 대세를 주었다. 그리고 남편이 죽자 오라버니, 즉 최해성의 부친에게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카 최해성은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집으로 천주교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비르지타는 그 소식을 듣고는 어렵지 않게 조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는 관원들이 신분을 묻자 최해성의 어머니라고 말하였으며, 관원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배교를 강요하였을 때는 "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 말을 들은 관원은 그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아 받은 후 굶겨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옥에 갇히게 되었다.
비르지타는 이후 4개월 동안 옥중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4개월 후에도 그녀가 죽지 않자,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 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가 순교한 뒤, 한 옥리의 어머니가 옥에 갇혀 있던 한 신자를 찾아가 "비르지타의 목을 졸라 죽일 때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 기해박해 ; 최해성)
※ 참고문헌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정리), M.E.P. 소장/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시복 시성 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2003. 〔車基眞〕
최 비르지타 (1783~1839)
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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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