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관 (1804~1868)

崔士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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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세례명은 예로니모. 서울 황교(黃橋)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동촌(東村) 이 판서 집의 여종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교우 과부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기해박해 후에도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고, 페레올(J.J. Ferréol, 高) 주교가 입국한 후에는회장으로 임명되어, 친지인 김인협(야고보) 등을 전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56년에 입국한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 때에도 통내(統內)에 거주하며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공소였던 그의 집에는 많은 교우들이 왕래하였다. 그는 당시 교회의 핵심 인물인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등과 교류하였으며, 그들의 집에 머물러 있던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S. Bretenières, 白) 신부와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남대문 밖에 방을 빌려 피신하였으며, 순교한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왜고개〔瓦署〕에 매장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최사관은 1868년 2월(음)에 서울에서 체포되었고, 신앙을 증거하다가 65세의 나이로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참고문헌  《치명일기》 89번/ 《병인치명사적》 9권/ 《포도청등록》.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