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선발과 유학 생활] 1821년 3월 1일 홍주 다래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태어난 최양업은 어렸을 때부터 성가정의 신앙 안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증조부 최한일(崔漢馹) 때였고, 서울에서 지금의 청양 땅으로 이주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시련을 겪은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모친과 함께 낙향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부친 최경환은 1827년경에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해 살다가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하였으며, 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에 정착하여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최양업은 인천 부평에서 살고 있을 때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신학생으로 추천되었고,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거처에 도착하여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일에는 뒤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3일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 파치피코(본명 余恒德) 신부와 함께 교회 밀사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의 안내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신학생 일행은 12월 28일 중국의 책문(柵門, 봉황성 邊門)에 도착하여 조선 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중국 교회 밀사들의 안내를 받아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마카오 도착 이후 최양업은 동료들과 함께 대표부 안에 마련된 임시 조선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마카오의 대표는 르그레즈와(P.L. Legrégeois) 신부였고, 신학교 교장은 칼르리(J.M. Cal-lery) 신부였으며, 이후로 대표부에 거주하게 된 프랑스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신학생들에게 라틴어 · 프랑스어 · 교리 · 성가 · 철학 · 신학 등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해에 위열병으로 사망하였고,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에 한때 마닐라의 롤롬보이(Lolomby)로 피신해서 공부를 해야만 하였다. 롤롬보이에 있는 동안 최양업은 부친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는 밀사 조신철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었다. 조선 신학생들이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입문한 것은 1841년 11월경이었다.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통역 자격으로 자신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고 있던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Brulley de la Brunière, 寶)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의 중령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la Favorite)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이어 그들 일행은 9월 11일 상해에 도착하여 먼저 마카오를 떠난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J.A. Maistre, 李) 신부와 김대건 일행을 만났으며, 프랑스 함대와 헤어진 뒤로는 그들과 함께 요동의 태장하(太莊河 현 요녕성 장하시)를 거쳐 인근의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 탐색을 위해 떠나고,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양관(陽關, 현 요녕성 개주시 羅家店)을 거쳐 북상한 끝에 11월에는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J.J. Ferréol, 高) 주교가 머물고 있던 북만주의 소팔가자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어 1843년 3월 부모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양관에서 열린 페레올 주교의 축성식에 참석한 뒤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돌아와 그에게서 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844년 12월 10일경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이후 김대건 부제는 귀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1846년 초에 귀국을 위해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두만강 근처의 훈춘(琿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최양업은 소팔가자로 돌아온 뒤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다른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바로 그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동료 김대건 신부는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체포되어 9월 16일에 순교하였다. 본래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부제를 먼저 사제품에 올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교회법상의 나이 제한 때문에 사제품에 올리지 못하였고, 이미 귀국로 개척의 경험이 있는 김대건을 조선 입국의 동반자로 결정하면서 그를 먼저 사제품에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한 번 귀국로를 탐색하던 중 병오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조선 교회 밀사들의 만류에 따라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되어 있던 홍콩으로 출발하였다.
〔사제 서품과 사목 활동〕 1847년 초 홍콩 대표부에 도착한 최양업 부제는, 그해 7월 28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해군 라피에르(Lapiere) 함장이 지휘하는 글루아르(la Gloire)호를 타고 조선으로 갔으나 신치도(薪峙島) 뒷바다에서 좌초함으로써 8월 12일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회항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통역으로 프랑스 함대에 동승하였던 것 같다. 상해에 도착한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생활하다가 1848년에 설립된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신학 수업을 마친 뒤, 1849년 4월 15일 사백주일(卸白主日, 부활 제2 주일)에 예수회의 강남 대목구장 마레스카(F. Maresca, 趙方濟) 주교에 의해 신학원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5월에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해로를 통한 귀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약속한 백령도(白翎島)까지 갔으나 신자들이 타고 온 배를 만날 수 없었다. 이에 최 신부는 상해로 귀환하였다가 요동으로 가서 훗날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만주 대목구 선교사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의 보좌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한 것이다. 당시 베르뇌 주교와 최 신부가 사목하던 곳은 요동의 양관 성당과 차쿠(岔溝, 현 요녕성 장하시 蓉花山) 성당 일대였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1월 초 요동으로 온 메스트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다시 귀국을 시도한 끝에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나게 되었고, 12월 3일에는 밀사들의 권유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를 요동에 남겨 둔 채 단신으로 귀국하였다. 모두 여섯 차례의 탐색 여행 끝에, 그리고 신학생으로 서울을 출발한 지 13년 만에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최 신부는 훗날 제5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한덕골(현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로 가서 중백부 최영겸(崔榮謙)과 그곳에 살고 있던 넷째 아우 최신정(崔信鼎, 델레신포로)을 만났으며,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셋째 아우 최우정(崔禹鼎, 바실리오)이 살고 있던 동골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혹은 진천읍 문봉리)을 사목 거점으로 삼고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귀국 후 최양업 신부의 활동은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순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제로 최 신부는 1859년에 교리서와 기도서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다블뤼 보좌 주교가 그의 사목 구역 일부를 담당해 준 것을 제외하고는,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까지 11년 6개월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는 어려운 지역을 맡아 끊임없이 순회하였다. 그는 1852~1853년 무렵에 자신의 사목 중심지를 진천 배티(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로 이전하였다가 1855년 이후에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고, 1858년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처음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은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 좌 · 우도, 전라 좌 · 우도 등 5개도에 걸쳐 있었으며, 때로는 강원도 일부의 교우촌까지 순회해야만 하였다. 1851년경 그가 순방한 교우촌은 127개나 되었으나, 이들 교우촌의 이름은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최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자신이 맡은 교우촌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그의 서한에 보이는 교우촌의 이름으로는 충청도의 도앙골(부여) · 절골(진천) · 동골(진천) · 불무골(진천) · 멍에목(보은) · 진밧들(금산), 경상도의 오두재(상주) · 죽림(울주) · 간월(울주), 강원도의 만산(화천), 그리고 소리웃(미상) 등이다. 이후 다블뤼 주교가 내포(內浦) 지역을 중심으로한 충청도 일부를,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S. Féron, 權) 신부가 강원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를 담당하게 되면서 최양업 신부의 관할 구역은 경상도와 충청도 북부의 일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담당하고 있던 구역에 비하면 그의 사목 관할 구역은 여전히 넓은 편이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 순방에서 만난 신자수는 1850년에 3,815명, 1851년에 5,936명으로, 전국의 신자 중에서 약 34.7~52.1%에 해당하는 높은 비율이었다. 또 성인 영세자수도 1855년까지는 전국 영세자수의 46.5%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857년에는 그가 방문한 신자수가 전국 신자수의 26.8%를, 영세자수는 전국 영세자 수의 33%를 점유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수가 많아지고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로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을 틈타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주었으며, 이로 인해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성사 집전 상황을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61년 6월 15일로, 당시 최 신부의 나이는 40세였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성 요셉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J.A.C. Pourthié, 申妖案) 신부에 의해 11월 초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으며, 1942년 12월에는 제천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안치하였다.
〔순교 행적 조사와 교리 연구] 최양업 신부는 조선의 성직자 양성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54년 3월 마침내 이만돌(바울리노)과 김 요한, 임신생(任神生, 빈천시오) 등 3명의 조선 신학생들을 장수(F. Jansou, 楊) 신부가 타고 온 배편을 이용하여 말레이 반도서쪽 섬인 페낭(Penang)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최 신부는 신학생들에게 계속 서한을 보내어 관심을 표명하였고, 또 1858년에는 이만돌이 홍콩에서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킨 제주도 표착인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성사를 주기도 하였다.
아울러 최양업 신부는 사목 활동 틈틈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본격적으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 조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제 시절인 1847년 초 홍콩에 있으면서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프랑스어본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실제로 페레올 주교의 프랑스어본 행적에는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간략하거나 중요한 사실들이 빠져 있었고, 이는 최 신부로 하여금 '귀국 후에 이를 조사하여 보완하겠다' 는 결심을 하게 한 것 같다. 이 행적에 수록된 82명의 순교자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 73명의 행적은 그가,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의 행적은 메스트르 신부가 번역하였다. 이후 라틴어본 행적은 르그레즈와 신부의 손을 거쳐 교황청으로 보내졌으며, 1857년에는 82명 모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최 신부의 라틴어 번역본은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첫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최양업 신부는 사목 순방 중에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 친척 최해성(崔海成, 요한)의 순교 행적을 조사하여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3명 외에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완하지는 못하였는데,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기는 하였지만 필요한 증인이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조사 작업은 1856년부터 다블뤼 신부가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정식으로 순교자 행적 조사에 착수하면서 중지되었다.
다음으로 최양업 신부는 한글을 알지 못하는, 따라서 기초적인 기도문이나 교리조차 외우지 못하는 무지한 일반 신자들을 위한 교리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9년 베르뇌 주교가 한글본 서적들의 편찬 · 간행 계획을 수립하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와 《성교요리문답》(聖教要理問答)의 번역과 편찬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전자는 1862년에, 후자는 1864년에 각각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이와 함께 천주가사의 저작 유포도 최양업 신부의 교리 연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한글의 유용성에 관심을 갖고 이를 이용하여 무지한 신자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대중적으로 유포되던 가사를 이용할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마침내 한글본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에게 널리 전하였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박해 시대의 천주가사 중에서 사말(四末)을 노래한 〈선종가〉(善終歌), <사심판가〉(私審判歌) <공심판가>(公審判歌)와 <사향가>(思鄉歌) 등이 최양업 신부의 저작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중에서 <사향가>는 육화론적 영성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 영성을 추구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박해 시대의 대표적인 천주가사로 손꼽힌다. 이 가사는 천주교 교리서(catechism)의 문답 형식이나 천당영복(天堂永福) · 지옥영고(地獄永苦), 현세〔竄流所〕 · 천향〔本鄕〕, 삼구(三仇) · 칠도(七盜)와 칠극(七克) · 사추덕(四樞德) · 삼덕(三德)과 같은 대립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의 신자들이 외우고 배우던 주요 교리와 기도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여기에는 당위(當爲, 유교 윤리)와 존재(存在, 천주교 교리) 사이의 갈등이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천주가사는, 첫째로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영성을 담고 있는 교리서요 기도서였으며, 둘째로 인유론(引儒論)에 바탕을 두고 저술된 교리의 토착화 작업 과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한글본 천주가사를 통해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신심과 사상〕 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사람들은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였고, 다음으로 신학생 시절에는 스승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 신부는 스승들 중에서도 마카오의 대표였던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존하는 그의 서한 20통 가운데 15통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4통을 리브와(N.F. Libois) 신부에게, 그리고 1통을 둘의 공동 명의로 보낸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어 만주 선교사로 최양업 신부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브뤼니에르 신부, 1840년 이래 조선 신학생들을 지도하였고 1844년 이후 오랫동안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신학을 가르쳤던 메스트르 신부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베르뇌 주교가 설명한 것처럼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 훌륭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르뇌 주교는 언제나 최양업 신부와 같은 한국인 성직자 10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는 희망을 가져보곤 하였다. 최 신부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정신과 신심의 바탕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수난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리고 선교 활동을 위한 여정 속에서 언제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시고 지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자신과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다. 그가 말하는 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자신들의 안위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바로 이 거룩하신 뜻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귀한 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 구세주였다. 그러므로 최 신부는 '머리' 이신 구세주의 길을 따르는 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고, 구원 계획의 실현은 십자가의 생명력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마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이 응집되고, 수난받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곳이었다.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최양업 신부는 겸손과 순종, 인내의 덕행은 물론 예수 성심 신심, 마리아 신심, 성인 신심도 지니게 된다. 그는 성심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자주 고백하면서 예수 성심의 온유하고 겸손된 마음을 따라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곤 하였다. 아울러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성인들의 도움을 청하면서 온갖 난관을 극복해 나가려고 하였다. 신학생 시절에 '성모 성심회' (聖母聖心會)에 가입하여 마리아 공경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실도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 선교 활동 중에는 스승 신부들에게 묵주나 성인들의 성패와 상본들을 청하여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하고, 마리아 신심과 성인 신심을 장려하고 가르치는 데 힘썼다.
최양업 신부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굳은 신심과 덕행은 박해받는 조선 교회의 상황 아래서 그에게 강한 순교 영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비록 혈세(血洗)의 영광을 얻은 순교자는 아니지만, 박해의 와중에 있던 한국 천주교회의 방인 성직자로서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고 생활한 '백색(白色) 순교자' 였다. 십자가의 생명력을 굳게 믿었던 최 신부는 순교한 동포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여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순교자들의 유품인 보목(寶木)이나 성인들의 유해를 받아 간직하고 다녔으며, 조선 순교자들의 수난을 들을 때면 그들의 장렬한 전쟁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언제나 순교를 다짐하였고,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감동을 받아 그 행적을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천주가사 안에 담겨 있는 내세 지향적인 순교 영성도 백색 순교자로서의 최양업 신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와의 수난에 동참한 순교자들을 따르려는 의지를 품고 산 의인(義人)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교회관은 '그리스도의 양 우리' 로 표현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으로, '일치' 안에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거룩한 신전(神戰)을 치르는 교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순교 신심은 이 영신의 전쟁터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천주가사 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교회의 양들은 주 하느님의 자비와 전능 안에서 일치하여 마지막 전쟁터를 향해 나가는 용사로 이해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영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선교 영성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교에 대한 열망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중국에 머물러야만 하였을 때는 귀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귀국한 뒤에는 선교에 대한 열망을 교우촌 순방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여, 귀국하자마자 1850년 1월부터 9월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니면서 교우촌을 순방할 정도였다.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메스트르 신부도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선교 열정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신부는 자신이 많은 영향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나 성 베르나르도의 선교열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곤 하였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와 같았으니, 꾸준한 열성과 거룩한 땀을 바탕으로 복음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치다가 결국 과로로 선종한 이 땅의 사제였다.
물론 최양업 신부의 이러한 신심과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박해 시대의 성직자와 순교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신심과 영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서한을 통해서는 남다른 사상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우선 최양업 신부는 복음을 통한 민족의 구원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카오로 떠난 이후 귀국할 때까지 천주교 신앙을 통해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으며, 자신의 민족이 시온 성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을 조선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고, 여기에 동참하는 자신은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박해를 중단시키고 조국을 복음화의 길로 이끌어 나가는 데 앞장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조선이 프랑스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발달된 문명을 가진 강대국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종교 보호 정책을 앞세워 이권에 개입하는 서양 제국주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신앙의 자유를 앞세운 데에서 나온 우견(愚見)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최양업 신부는 억압당하는 민초(民草)들을 신앙으로 구제해야 한다는 위민(爲民) 사상도 지니고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억압받는 하층민과 신자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의 정치가와 양반 계층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페레올 주교가 양반 출신들만을 편애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최양업 신부는 철저하게 하층민 신자들을 위한 위민 사상에 입각하여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가사를 지어 배포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제애와 신덕(信德)이 없는 양반 중심의 민족을 구원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민초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믿은 선각자였고, 이를 위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선교 열정을 보여준 의인이요, 땀의 순교자였다. (⇦ <최 바시리오 우정 씨 이력서> ; → 김대건 ; <사향가> ; 이성례 ; 천주가사 ; 최경환)
※ 참고문헌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慶州崔氏族譜》 金玉姬, 《崔良業 神父와 敎友村》, 學文社, 1983/ 林忠信 · 崔奭祐 역주, 《崔良業 神父의 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류병 일, <천주가사를 통해 본 최양업 신부의 신앙>, <사목> 91호(1984. 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Cho Kyu-sik,

